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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 한국사상문화학회 2005 한국사상과 문화 Vol.31 No.-
Kim Han-cheol was the elite who spoke plainly to his lord, King Youngjo. Speaking plainly was his family tradition. For example, Kim Hong-uk, one of his forefather, had lost his life to outspoken advice to King Hyojong, and his father Kim Yong-kyung had lost his position many times because of speaking out. Most of Kim Han-cheol's speech was to advise King Youngjo to study hard and work diligently. About actual problems, most of his speech was general and theoretical. But in the political report written in 1757, he asked to search every ships at the strategic harbor throughly. It was connected with the West Coast defence. Kim Han-cheol was most energetic in the political party speech. He approved Noron party, and criticized the royalists who King Youngjo supported. He attacked Cho Deok-rin and Won Kyung-ha several times, the former was the member of the Namin party, the latter was that of the royalist. After his death, Nam you-yong and Kim Jae-chan set high value on his father's and his speech. It was because he and his father expressed their political opinion very strictly. 金漢喆은 영조 대에 국왕에게 直言을 하고 당대의 是非를 가리는 언론 활동을 벌였다. 그의 언론 활동은 가문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는데, 그의 고조부인 金弘郁은 언관가문의 전통을 확립했고, 부친 金龍慶도 강경한 언론을 전개했다. 김한철의 언론활동은 영조에게 권면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국왕에게 경연을 게을리 하지 말 것과 聖德을 연마할 것을 건의했다. 현실 문제에 있어서는 원론적인 건의가 많았는데, 1757년에 올린 시무책에서는 해안 경비를 위해 군사 거점에 있던 모든 선박을 검색할 것을 요구했다. 김한철은 黨人으로서의 언론에 가장 뚜렷한 행적을 보였다. 그는 영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탕평파 인물을 지원하는 것을 반대하고 노론계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는데, 남인계 趙德이나 탕평파 元景夏를 공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훗날 노론계 대신인 南有容과 金載瓚이 김한철 父子의 언론을 평가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김문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7 한국문화연구 Vol.12 No.-
This paper was written to research the characteristic data of Kukjo oryetongpyeon which remains the only book in Ehwa Womans University Library. Choson’s elite tried to perform national rituals perfectly to show off thatChos?n was the civilized country. Especially King Youngjo and King Jeongjoimproved the national rituals and made many ritual books like Kukjo sok-oryeui,Kukjo sok-oryeuibo, Kukjo sangrye bopyun, Chunkwan-ji, Kukjo orye tongpyeon,Chunkwan tonggo etc. Kukjo orye tongpyeon compiled during King Jeongjo’sreign is the ritual book which united every ritual data before then and becamethe basis of Chunkwan tonggo. Because Kukjo orye tongpyeon was finished in 1788 by Yu Eui-yang, we canknow easily the newly made rituals after 1757 in which Kukjo sangrye bopyeonwas published. Also we can get a view of the whole national rituals which madefrom 15th century until 18th century in Choson dynasty. In this paper, Iintroduced rituals connection with the eldest son of the Crown Price,Chingyeong and Chinjam, Kyeongmokung shrine and Hyunryungwon tomb. Wecan see well King Youngjo and King Jeongjo’s efforts to improve the nationalrituals in these rituals. Now the hand-written Kukjo orye tongpyeon was kept separately in EhwaWomans University Library, Seoul National University Kyujanggak Institute, theAcademy of Korean Studies Jangseogak. I propose to unite all the book locatedin three places and reproduce a perfect version. 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국가전례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조선이 유교식 예제를 제대로 실천하는 문화국가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특히 18세기의 국왕인 영조와 정조는 국가전례를 정비하고 그 결과를 국가전례서로남겼는데, 국조속오례의 · 국조속오례의보 · 국조상례보편·춘관지·국조오례통편·춘관통고 는 그 결과물이다. 현재 이화여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조오례통편 은 정조대에 편찬된 책으로, 기존의 국가전례서를종합하면서 춘관통고 가 편찬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국조오례통편 은 1788년에 유의양이 초고를 완성했기 때문에 국조상례보편이 편찬된 1757년 이후 새롭게 정비된 의례가 잘 나타나며, 15세기부터 18세기후반까지 정비된 국가전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한것이 특징이다. 본고에서는 국조오례통편 에 수록된 의례 가운데 왕세손(정조) 관련 의례, 친경·친잠 관련 의례, 경모궁·현륭원 관련 의례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는데, 이들은 모두 국가전례를 정비하던 영조와 정조의 노력이 잘 나타나는의례이다. 현재 국조오례통편 필사본은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 세 기관에 분산되어 있다. 필자는 이들자료를 수합하여 완질로 보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金文植 全南大學校 農漁村開發硏究所 1975 農業科學技術硏究 Vol.10 No.-
인구와 식량과의 문제에 관하여는 두 개의 엇갈린 주장이 오랫동안 맞서 왔다. 한편에는 인구증가율을 상회함으로서 25년마다 대전쟁이나 대재난에 의한 인구의 손실이 없이는 인구와 식량이 조화를 이루어나갈 수 없다는 비관론(T. Malthus)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가 식량보다 빠른 비율로 증가한다는 것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반박하고 지구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천연자원이 방치되어 있어 이것을 활용한다면 현재 살고 있는 10배 또는 100배의 인간이 부양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낙관론(F. List)을 펴 두 주장이 오랫동안 서로 팽팽히 맞서 왔다. 다만 인구밀도가 조밀한데 비해 부존식량자원이 빈약하고 농업기술이 정체해 있는 사회나 시대에 있어서는 식량이 부족하기 마련이었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식량이 남아 돌게 되는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세계적인 식량사정의 추이를 보더라도 경제경황이 파동치듯 부족기와 과잉기를 되풀이 하였고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식량부족을 겪다가 1953년부터 남아돌기 시작 1958년까지 식량과잉상태를 보였고 1959년부터 1966년까지는 다시 식량부족현상을 보여 일종의 주기성을 나타냈었다. 그 후 1959년부터 1966년의 식량부족은 1967년~1971년의 과잉으로 이어지고 1972년 이후로는 다시 식량파동을 겪게 되었다. 이같은 식량의 과부족의 주기적도래는 태양의 흑점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학설도 있기는 하나 그보다는 인구성장률이 주기성을 띄고 있다는 사실과 식량생산기위혁신이 일정한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나타난다는 사실에 크게 연유한 것이라고 하겠으며 다만 그 주기의 불규칙성은 천후조건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같이 식량의 과잉과 부족이 되풀이 되는 현상이 의미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아직은 지구상에 식량생산자원이 고갈되어진 상태에 도달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생산자원의 조건은 풍부하지 못한데다가 기술조건이 상위수준에 올라 있지도 못하고 인구밀도 또한 조밀함으로써 국민의 식량문제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