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학위유형
        • 주제분류
        • 수여기관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지도교수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띵구앙쉰(丁光訓)의 신학사상

        이경래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2 국내석사

        RANK : 249663

        自從1950年9月23日 中國基督敎發表了"三自宣言"以來,經過了所謂"文化大革命"的艱難的時代,中國基督敎會不僅屬于基督,也成爲屬于全中國的。解放以前,中國基督敎原有70多개宗派,各宗派間有了不團結甚至互相攻擊的現象,但是現在他們在信仰上實現相互尊重,聯合禮拜的敎會生活中進入了宗派后時期(post-denomination era)。 按中國基督敎三自愛國運動五十一周年總結, 過去五十多年大約可分爲三개階段。自1950-1966年是第一階段,主要任務是實現自治自養自傳。 1966-1978年因受"文化大革命"的庶擊, 敎會事工被迫頂頓。自1978-1998年爲第二階段,主要任務是按三自原則辦好敎會。 而自1998年年底開始是第三階段,主要工作是加强神學思想建設。這三개階段旣有區別,又有聯系,每一階段是前一階段的繼續和深化。在如此的影響下,中國基督徒認識到愛國여愛敎是不矛盾的,基督徒應該是旣愛國又愛敎。 丁光訓主敎(1915-)是中國基督敎的領袖,自1980年단任中國基督敎三自愛國運動委員會主席和中國基督敎協會會長起,肩負着中國敎會建設的重任,而且作爲一名神學家,他的神學思考一直服務于中國社會和中國敎會。在他的一生中,自始至今他卽是一位摯愛着中國敎會的中國思想家,同時又有一位深愛自己祖國的基督敎神學家。他通過文字著作,通過各충公開活動和參政,儀政,他始終在努力地推動着敎會여敎會以外的世界之間的對話。他盡管遭受到來自保守派敎會人士的批評和攻擊,但是,他在20世紀80,90年代在敎會重新對外開放以及中國敎會여普世敎會交流上的重大貢獻是受到엄泛公認的。 丁主敎一貫흔重視自傳和神學硏究。"神學是敎會在思考"。他認爲不思考不反省的敎會是死的。他所提成的神學思考是如何把基督敎的信仰和生活的實結合起來,成爲旣合乎理性又具有越能力的理論。他多次提到基督敎的普世性和地方性(特殊性)的相互關系。他主張中國敎會應該有自己的神學。他有選擇地參考和吸收某些西方現代神學的理論,加以發揮,爲中國所用。 從神學思想來看,丁主敎的神學思想主要受到四충思想的影響: ⅰ) 德日進(Teilhard de Chardin)的進化思想; ⅱ) 부特海的(Alfread North Whitehead)過程哲學; ⅲ) 解放神學的實踐(praxis)的認識論; ⅳ) 골公會神學的中道(via media)思想。 在神學上,丁主敎特別强調上帝是宇宙的愛者,而不强調上帝是嚴려的審判者,從而不刻意渲染人的罪。他認爲愛是三位一체中三개位格相互關系的特征。對于上帝創造者,他特別强調上帝是愛的上帝,愛是上帝神골的內在本質,同時對于上帝而言,他也需要人類,上帝是人類慈愛的父親,人類是上帝的孩子。 耶소基督是上帝之子,福音書記載他道成肉身來到世上幷宣揚倫理道德的人性一面; 又有基督是宇宙的基督,万有在他里面的一面,這一点充分表現了丁主敎愛的神學。 골靈是三位一체這一奧秘團契中的第三位。 골靈旣賜恩給敎會,給基督徒,골靈也啓示一切的受造物,帶領一切的受造物趨向于眞善美。 골父,골子,골靈同工同契,一起進行特續的創造之工,救贖之工和골化之工。作爲人類的我們就是要參與到這樣的골工之中,幷盡我們的所能作出貢獻。雖然人是上帝創造的不同程度的"半成品",但是愛的陶匠會把我們塑造成他的同工,讓我們參與他的創造與救贖奇功中,幷逐步走向完全。 在與社會對話時,丁主敎的根本出發点是肯定无神論者致力于個人和全社會的生活和生活改善以及積피評介非基督徒的各충各樣的美好行爲。 在論述有關宗敎在中國的社會作用時,他竭力反駁宗敎鴉片論,저認爲宗敎是鴉片的論点旣不符合實際又不符合馬克思主義。理解中國宗敎信仰自由的關鍵是理解宗敎여당的關系,其核心是"求同存이"的原則。丁主敎說,中國共産당對宗敎問題的態度是團結的原則,卽在統一戰線的原則解決宗敎問題。 我覺得丁主敎的神學思考在韓國基督敎界也造成4개方面的影響: ⅰ) 神學自主性的開發; ⅱ) 后宗派敎會的實現; ⅲ) 南北韓宣敎的坐標; ⅳ) 宣敎學的反省。 今天中國社會正處于改革開放的急劇變化過程中。中國敎會고的"處境化神學"不可能過早提出系統化的要求,所以他們是從中國社會和中國敎會的現實的處境出發,試圖把基督敎信仰和中國傳統文化以及民族特点給合起來。 這些中國敎會的神學思想建設過程中,丁主敎的神學思考可以成爲中國敎會흔好的路標。不過,我在他的神學思想還是感受不到濃郁的中國傳統文化的特色。我想這類現象將成爲我們的重要任務之一。我希望中國和韓國敎會能구成功地實現自己民族的特色和現代化之間的融合。

      • 신학생 해외현장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연구 : 토마스 그룸(ThomaGroome)의 '나눔의 프락시스'(Shared Praxis)이론을 통한 신학생 영성교육 모델에 관한 연구

        김현호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63

        본 연구논문은 신학교육에 있어서 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해외현장교육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연구된 논문이다. 본 논문의 서론에 언급되어 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첫째로 교회성장 이후기(after church growth)에 살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제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때론 낯설고 낯익기도 한 다양한 문화를 어떻게 맞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도전에 매우 서투른 대응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자화상은 신학교육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학교육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고 교회의 일꾼을 양성하는 교육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신학교육의 현실은 한국교회에 밀려오는 이러한 도전들에 대응하는데 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한계가 한국 신학교육의 현실이 너무 교파주의와 교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고 성서신학, 이론신학, 그리고 역사신학으로 대변되는 지적교육의 자기화(自己化)가 신학교육의 장(場)안에서 제대로 형성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즉 신학교육 안에서의 지적교육과 영성교육이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교회성장 이후기의 한국교회에 엄습하고 있는 도전들에 대한 대안적 신학교육 내용이 마련되고 있지 못한 점 역시 오늘의 신학교육이 가지는 문제이다. 따라서 본 연구논문에서는 지적교육과 영성교육이 조화를 꾀한다는 의미에서 토마스 그룸(Thomas H. Groome)의 '나눔의 프락시스'(shared Praxis) 교육방법 이론을 소개하고 대안적 신학교육의 내용으로 세계를 '장'(場)으로 하는 신학교육 - '신학생 해외현장교육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연구자의 '필리핀 해외현장교육' 경험사례를 분석하여 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해외현장교육의 필요성 및 타당성을 제시한다.

      • 현대 사회의 성사적 교회를 위한 한 연구 : 성찬례의 상징성을 통한 교회 이해를 중심으로

        김근상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9663

        이 연구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통로인 성사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현대 사회의 성사 이해, 성공회 성사 이해, 성사로서의 교회라는 주제들을 통하여 연구에 접근하였다. 먼저, 현대 사회와 현대인이 어떻게 성사를 이해해 왔으며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살펴보았다. 현대 사회는 세속화라는 커다란 흐름을 맞아 중세적 가치로 회귀하거나 아니면 세속적 가치로 돌변하는 양극화 현상을 보였으며, 현대인 또한 종교적 열광주의에 몰입하거나 반대로 세속주의로 대응하는 이분화된 양상을 보였다. 한국 교회의 경우에는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양적인 성장을 이룩하였으나 성장과정에서 내면적 가치를 채워 줄 상징 연어 즉 성사의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최근 개신교 신자들의 이탈율로 볼 때 성사의 회복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로마 천주교는 바티칸공의회를 통하여 매우 전향적인 성사신학의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개신교도 점차 성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새로운 논의를 쌓아가고 있다. 성공회의 성사 이해를 살펴보면 성공회 성사의 기초는 로마 가톨릭의 전승과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원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성서와 전통의 조화를 그 원리로 하고 있고 특별히 성공회의 성사신학의 기조는 성육신 신학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에큐메니칼 신학도 성사와 성찬례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BEM문서와 ARCIC문서 등을 통하여 성찬례의 상징성과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며 이를 통한 교회의 일치를 전망하는 입장을 정리해 나가고 있다. 성사로서의 교회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기존 교회의 의사소통 방식이 텍스트 위주의 위축된 방식이었음을 지적하였으며 그 대안으로 현재 실행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위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교회가 올바른 성사로 거들나기 위하여 얻게 된 결론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성사(Sacramentum)의 신비는 더 이상 세속적인 것과의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상의 사건을 세상의 사건으로,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일로 만들어 인간의 삶의 한 복판에서 하느님을 경험케 하는 상징으로, 에너지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아직 하늘에 있지 않고 이 땅위에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교회는 복음정신의 실현이라는 전망을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실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와 방식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의 정신을 담아내고 역사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서 제기되어왔던 교회의 사고 기제와 생활 방식의 성사는 다시금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 회복되어질 필요가 있다. 바로 이때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하여 복음을 구현하는 신비체가 되며, 현실 사회에 대한 대안이요, 하느님 나라의 선취가 된다. 둘째, 성찬례에 관한 성사적 이해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조금씩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성찬례를 통하여 추구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실제적 체험, 희생의 기념, 감사와 봉헌, 일치와 교제라는 내용들은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다. 성사는 더 이상 교리적인 설명에 묶이거나 교회 자체를 위한 종교적 수단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교회는 성사에 관하여 교파적인 교리를 주장하고 주입하는 것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구원 경험을 확인하고 소통하고 지도하는 일 자체로 관심을 깊게 가져야 한다. 셋째, 성사는 각 신자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늘 현존하는 하느님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성사는 하느님 체험을 단절하고 추출하여 교회의 특정한 예전 속에 제한하고 재현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성사는 성육신 사건을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일이다. 예배는 신을 달래는 컬트(의식)이 아니라 성육신의 체험이다.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과의 교제인 것이다. 그것은 순간의 황홀경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다. 다양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의 삶에서 경험한 하느님 체험을 함께 참여하는 성사를 통해 공동으로 확인하고 고백하고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의 체험에 갇히지 않고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서의 하느님 체험을 되살려 가도록 해주는 것이 성사의 역할이어야 한다. 넷째, 성사이해에 있어서 상징의 가치는 특별히 강조되어야 하고 상상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성사는 단순한 표지가 아니다. 단순한 표지라면 대체로 언어가 가진 상징성에 의해서 그 의미의 설명으로 쉽게 대치될 수 있을 것이고 대체로 개신교의 성사이해는 이 수준에 머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 성사의 본질은 상징으로서 미는 그 상징행위 자체가 그 자체로 성사와 분리할 수 없는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표지와 그 의미를 구별하려는 인식적인 노력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사 그 자체에 전적으로 동화되는 일이다. 성사의 집전자와 참여자 모두가 더욱 깊은 각성으로 성사에 참여해야 한다. 다섯째, 전통적으로 이어받은 성사의 질료(Materia)와 형상(Forma)에 대한 적절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공회 공동체의 성사는 부분이 아니라 성사 전체 과정을 통하여 그 성사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섣불리 현재 사용하는 질료나 형상 즉 언어나 물질 등을 자의적으로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굳어진 전승이 교과서로, 혹은 동방 정교회의 낡은 전례행위가 고전으로 떠받들어질 필요는 없다. 교회공동체의 치밀하고도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우리가 우리 현실 속에서 지켜갈 것과 변화시킬 것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모든 성사가 그렇듯 성찬례의 기본적 상징성은 구원의 표지에 있다. 성서가, 혹은 교리가 전해주지 못한 체험적 신앙을 나누고, 남기고, 전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신학적 성찰이 요구된다. 성공회 성사의 상징성에 대한 해석은 성직자의 신학적 사고에만 의존해서도 안 되지만 평신도의 경험과 감정에만 맡겨 두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를 조화롭게 만들어 가기 위한 신앙 훈련, 신학 훈련이 꼭 필요하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육신"의 신비가 이해되고 해석되는 여러 가지 시도 역시 놓치면 아니 될 것이다. 이 또한 지역사회, 혹은 개별 신앙공동체의 특성화를 위해서도 다양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여섯째, 성사적 교회의 전통과 성사적인 사목경험은 소중한 선교의 자원이요 교회일치의 매개가 된다. 성공회는 타계적인 천국을 감언과 위협으로 팔아먹는 종교꾼의 집합이 아니다. 모든 세상의 존재와 사건과 삶으로부터 거기 함께하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해내는 신앙의 눈(인식)을 훈련하는 것이다. 그 훈련은 텍스트를 따르는 분별력을 의미하지 많고 참여를 통한 공감과 이해를 의미한다. 말씀은 홀로 주장하기 쉬우나, 성사는 함께 참여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성사적인 태도는 각 교파의 입장을 반영한 교리의 강조를 넘어서서 모두가 함께 살아계신 하느님의 선교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준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조건없이 초대받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처럼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의 삶의 문제와 희노애락을 가지고 교제를 이를 수 있다. 새로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성사적이지 않으면 복음의 진리를 표현하기도 어렵고 주님의 사랑을 나누기도 힘들다. 소통으로서의 성사 안에 사랑과 진리는 그 본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E. S. 피오렌자, M. W. 두베, 한국여성신학의 성서해석, 프락시스, 대안적 공동체 비교연구

        정현진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21 국내박사

        RANK : 249647

        이 논문의 목적은 다른 문화권과 역사적 상황에서 출발하는 신학자들, 피오렌자(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두베(Musa W. Dube), 그리고 한국여성신학의 1)성서해석방법론 2)프락시스 3)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을 연구하고 비교하는 것이다. 본 논문을 통해 그들의 인종과 문화, 역사적 현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통’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을 찾으려한다. 연구자는 피오렌자, 두베, 한국여성신학 각각이 가지는 특수성과 아울러 그것을 넘어서는 공통점을 찾고, 그들의 공통점을 통해서 여성신학의 정체성, 나아가 21세기 포스트모던 신학의 방향성을 확립하려고 한다. 본 논문이 말하는 정체성이란 각 신학자들의 신학방법은 달랐지만 여성과 이 시대를 매개하기 위해 성서해석을 새롭게 요청했던 점, 실천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 대안적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 신학자들의 신학은 제일 먼저 성서의 경전성을 묻는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성서의 경전성을 묻는다는 것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성서의 의미와 중요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 논문에서 다룬 신학자들은 성서의 의미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성서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성서의 경전성을 새롭게 만들어나간다. 성서의 경전성은 전제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서 말해져야 한다. 즉, 성서가 현재 억울하고 눌린 사람들에게 생명이 될 때, 성서는 경전의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 성서의 정경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요청되는 해방과 생명의 기준에 따라 그 의미와 역할을 수정해 나가야 한다. 여성신학의 프락시스는 다양한 여성신학을 하나로 묶는 정체성의 한 요소이다. 여성신학은 말로 하는 신학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신학이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성적 억압과 차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여성신학이 출현하게 된 억압적 배경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프락시스는 다양한 여성신학을 넘어서는 ‘여성신학’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여성신학은 공동체적 관점에서 성서를 본다. 그것은 한 여성이라는 개인적인 개체성을 넘어선다. 필자는 여성신학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공동체적 성서해석이 우리시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사적 관점을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여성의 경험, 여성신학의 고뇌, 여성신학의 꿈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한국교회에, 또한 모든 동시대인들에게 함께 하기를 희망한다. 이 논문은 각 신학자들의 성서해석, 프락시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을 비교, 평가함으로서 이 세 가지가 여성신학에 있어서 여성신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구성요소임을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여성신학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미래를 탐색해 본다. 동시에 본 논문에서 주장한 성서 해석, 프락시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은 21세기의 새로운 신학을 위한 토대가 됨을 보여준다.

      • 정화-조명-일치에 따른 영성훈련 교재개발

        장철희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21 국내박사

        RANK : 249647

        본 연구 프로젝트는 속사람의 변화를 기하지 못하는 한국교회 영성훈련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현재 한국사회의 개신교 폄하 현상은 뚜렷하다. 이는 한국 개신교의 영적 윤리적 아노미 현상에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 지난 반세기 한국교회는 물량주의적 성공에 매달리며 이를 뒷받침하는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으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인간형을 내놓지 못했다. 교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영성훈련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배와 부흥사경회 위주로 신앙훈련이 이루어지던 한국교회에 제자훈련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사하였다. 일대일 혹은 소그룹관계망을 토대로 진행되는 훈련은 강한 결속력과 소속감을 제공하였다. 무엇보다 제자훈련에는 로드맵 구실을 하는 교재가 존재했다. 그래서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히 인식하며 실천할 수 있다는 장점이 뚜렷했다. 이는 이제까지 막연히 신앙이 성장하길 바라던 교회의 일반적인 신앙교육과는 확연히 달랐다. 초기에는 일반교회와 제자훈련그룹들 사이에 다소 거리감과 긴장이 있었다. 하지만 제자훈련 출신들이 대거 목회자가 되면서 제자훈련은 서서히 한국교회의 주류 신앙훈련으로 자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제자훈련의 강점인 교재는 동시에 한계이기도 했다. 성경공부라지만 본문을 깊이 묵상한다기보다는 교리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구절들을 확인하고 암송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교리 위주의 내용은 신앙인격의 성숙보다는 도그마에 치우친 신앙관을 주입하는 식이 된다. 실제로 제자훈련이 빚어낸 신앙인의 전형은 생활의 모든 면을 율법주의적으로 통제하는 다소 로봇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복잡한 삶의 변화에 봉착하여 영적 위기를 경험할 때면 더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젊을 때 이상적이다가도 중년이 넘어서면 욕망형 인간이 되는 게 보통이다. 제자훈련은 젊은이들과는 잘 어울리지만, 중년의 위기 이후 함께하기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비쳤다. 무엇보다 욕망형 인간으로 화한 신자들은 세상과 다르지 않은 코드로 살아가고 말게 되었다. 신앙인격의 심층적 변화보다는 학습 위주인 제자훈련은 또 다른 부작용도 낳았다. 이것저것 지적으로 많이 배우다 보니 제자훈련을 받는 사람들은 머리만 커졌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원리처럼 이들은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여느 회사에서 CEO가 되려는 욕망처럼 그저 리더로 올라서고 인정받기만을 원했다. 송인규 외, 「한국교회 제자훈련 미래전망 보고서」 (서울: Ivp, 2016), 176. 전통 영성훈련이 길러내고자 했던 겸손한 인간형을 고사하고 허영과 교만에 빠진 사람들을 양산해 낸 것이다. 에바그리우스가 정화해내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악한 생각들이 도리어 추구해야 할 미덕처럼 된 것이다. 본 연구 프로젝트는 제자훈련의 강점 중 소그룹관계망 중심 및 교재 중심이라는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고자 하였다. 목회자로서 이미 교회 현장에 체화된 특성을 살릴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내용의 재고가 필요했고 본 연구는 바로 그 산물이다.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제자훈련도 신앙인의 심층적 변화를 이끄는 영성훈련으로서는 한계를 노출했다고 본 까닭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기독교의 오랜 영성의 가르침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정화-조명-일치라는 영성신학의 오랜, 그러나 개신교 쪽에서는 단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르침을 다시 접목하고자 한 것이다. 본 프로젝트의 목적은 정화-조명-일치의 가르침을 토대로 교회 내 영성훈련 교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재를 임상적으로 적용했을 때 신자들의 심층적인 변화를 일구어내는지 보고자 했다. 그 평가는 본인 자신 소그룹 활동에 참여하면서 피드백도 듣고 관찰도 해 보는 넓은 의미의 참여 관찰을 통해서 하고자 했다. 이때 준거 틀은 정화-조명-일치 이론의 기원이라 해도 좋을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가르침이다. 다만 개신교 신자들의 가톨릭 진영에 대한 오랜 의구심을 다룰 필요는 있었다. 즉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기보다 인간 자신의 노력과 공로로 구원과 성화를 이루려 든다는 의구심 말이다. 사실 이러한 의구심과 혐의 때문에 개신교 진영은 수행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체계화하지 못했다. Simon Chan, 「영성신학」, 김병오 옮김 (서울: IVP, 2002), 23-24. 매우 산발적인 가르침들이 없지는 않으나 가톨릭 진영의 수덕신학처럼 체계화하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개신교 목회자로서 그러한 의구심 자체를 다룰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개신교 진영에서 통상적으로 가르쳐왔던 성화의 개념과 통합을 시도하였다. 다분히 원리를 재확인하는 정도이긴 하나 성령의 주권을 강조하는 성화를 강조함으로써 정화-조명-일치 이론의 개신교적 수용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제의 재배열도 일어났다. 본디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에서는 정화의 대상이 되는 악한 생각들에도 위계가 존재한다. 예컨대 초보자에게는 육체적 욕망인 탐식과 음욕이 주된 정화의 대상인 반면 좀 더 진보한 이에게는 슬픔과 분노 같은 정념적 내용이 대상이 된다. 사실 관상생활에 진입한 고급자도 허영과 교만 같은 존재적 욕망에 유혹을 받는다. 이러한 위계에서 교만은 나중에 다루는 게 맞다. 하지만 개신교는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이유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아가려는 자기중심적 교만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본 연구 프로젝트에서 산출한 교재에서는 매우 이른 시점에 교만을 정화의 대상으로서 다룬다. 이러한 주제의 재배열, 재구성도 개신교적 강조점에 따른 변용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교재 1권은 총 26과로 구성하였다. 내용은 그리스도인이 정화하고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마음들이다. 물론 그 근간에는 에바그리우스가 밝힌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이 있다.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마음을 세분화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탐식’이란 명칭보다는 조금 더 포괄적인 명칭의 ‘탐욕’이라 했고 정화의 치료법으로 금식기도와 묶어 제시하였다. ‘허영’도 개신교 교회에서 흔히 쓰는 ‘외식’이란 표현으로 제시하였다. 에바그리우스가 중시한 ‘아케디아’도 내용상 ‘안이함과 게으름’ 혹은 ‘영적 게으름’ 등의 여러 주제로 분산시켜 다뤘다.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회피함’을 다룬 이유도 개신교 어법에 따른 강조점의 이동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편 교재 2권은 총 15과로 구성하였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각각 한과씩 배열하였다. 전통적으로 진보자의 단계라 한 조명의 단계는 기본적으로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타나는 단계로 본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미덕을 통한 정화의 치료법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아홉 열매는 그 자체로 정화의 도구이기도 하다. 사실 초보 단계에서 정화가 일어나는 것도 성령의 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개신교적 강조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화 단계에서는 아직 인격에 나타난 새 중심이 옛 중심을 완전히 대체한 게 아니다. 따라서 분투가 더 돋보일 따름이다. 맞바람을 뚫고 노를 젓는 것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조명의 단계에서는 인격의 새 중심이 훨씬 수월하게 작동한다. 아직 노도 저어야 하지만 돛을 올려 바람의 힘을 얻기도 하는 단계인 것이다. 이때는 전 단계에서 도구처럼 작용했던 성령의 활동이 훨씬 두드러진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인격에 나타나는 단계라 본 것이다. 교재 3권은 일단 8과로 마무리하였다. 분량으로 보면 앞서 1단계의 3분지 1, 2단계의 절반에 불과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본인의 역량 한계와 아직 마감되지 못한 진행 상황 때문이다. 일종의 임상실험과 같은 본 연구 프로젝트에 있어 체계적인 평가과정 도입과 함께 앞으로 완성도를 높여야 할 과제로 남는다.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으로 끝남을 알 수 있다. 일치의 단계를 다루는 이 교재의 핵심주제는 ‘사랑’이다. 결국에 일치란 사랑이라고 본 것이다. 앞서 조명의 단계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인격으로 화하는 과정을 보인다 했다. 이제 일치의 단계에서는 성령의 주권적 작용이 더 깊어진 인격이 되는데 곧 사랑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인간형으로 말이다. ‘일치’라고 하면 신과 합일 같은 신비주의 색채가 강하다. 개신교 신자들에게 자칫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다. 개신교는 역사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메울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를 강조해왔다. 그런데 하나가 된다니 무슨 말인가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아 사랑형 인간이 된다고 하면 별 어려움이 없다. 내용상으로도 전통 영성신학의 가르침과 다른 게 아니다. 강조점을 조금 달리하면 굳이 부질없는 저항감을 살 필요가 없다. 그런데 가톨릭 영성신학에서 일치의 단계를 다룰 때면 대개 아빌라의 데레사나 십자가의 요한 같은 이들의 가르침이 등장한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들을 ‘교회의 박사’라 부른다. 신학이나 교리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이 가톨릭교회의 표준이라고 공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인은 일치의 단계 관상기도를 훈련하는 단계에서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에 기반을 두었다. 「영신수련」은 알다시피 성경 묵상을 근간으로 한다. 이 특성이 무척 개신교 친화적이다. 성경 중심 신앙을 강조하는 개신교인들이 별반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가 있다. 개혁주의 전통이 강한 한국 개신교회 내에서 이냐시오 영성이 유행처럼 널리 수용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3권은 사랑을 큰 주제로 이냐시오식 관상 기도법을 익히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런데 이냐시오의 관상은 에바그리우스나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관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관상 이전의 묵상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어찌 보면 묵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상으로 이끈다는 특성을 드러낸다. 성경을 소재로 묵상하다가 말이다. 게다가 이냐시오가 말하는 관상은 성경 본문의 장면에 깊이 몰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인들은 무정념의 아파테이아나 무념무상을 수상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이나 감정의 내용물이 전혀 없는 순수의식의 상태를 낯설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개신교 내에는 관상을 이단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다. ( ) 그런 상황을 고려할 때 개신교 목회자로서 이냐시오 로욜라의 관상 기도법은 개신교인들에게 별 거부감 없이 소개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본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산출한 「성화를 위한 3단계 영성훈련 교재」는 기도에 역점을 두었다. 이는 다분히 주지주의적으로 흐른 제자훈련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다. 기도보다는 성경공부에 역점을 둔 것이 그간의 제자훈련이다. 그것은 훈련이라기보다 학습에 가까웠다. 주지주의적 학습만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길러내기엔 한계가 있다. 한국교회 신앙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꾼 제자훈련은 거기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저 교회의 시스템으로, 양적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그치고 만 것이다.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는 데 그친 것이다(딤후 3:5). 이제 교리에 정통한 신자를 양성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간을 길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금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주제가 교회의 삶에 되돌아와야 할 때이다.

      • 대한성공회 성직자 복식에 관한 연구 : 대한성공회 성직자 복식의 토착화와 디자인 제안

        김대성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17 국내석사

        RANK : 249647

        본 논문은 유럽의 가톨릭교회와 영국성공회의 역사와 문화의 영향 아래 한국에 정착된 대한성공회의 전례 복식을 한국적 맥락 안에서 토착화 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례적인 교회에서 고려되는 많은 요소들 가운데 복식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례 공간과 전례 안에서 사용되는 많은 전례적 도구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외형적 디자인을 통하여 전달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전례의 복식 또한 이러한 기능을 지니는 바, 전례 안에서 또는 생활 속에서 성직자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성공회가 사용하고 있는 성직자의 복식은 서방교회의 영향 아래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비록 신학적인 의미는 갖추고 있을지라도 그 이면에는 서양문화의 색채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상황에 놓여 있는 대한성공회가 한국만의 지역적 신앙색채를 상징적으로 충분히 드러내기에는 현재 성직자의 복식이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대한성공회가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한 새로운 성직자 복식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서방교회의 복식의 흐름을 살피고, 이와 함께 한국의 전통복식, 특히 근대 이전 조선시대의 복식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틀 안에서 대한성공회는 서방교회의 전통과 한국의 전통적 요소를 결합한 새로운 성직자 복식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 성공회 프란시스칸 원칙을 통해 본 제자도 연구

        유용숙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2019 국내석사

        RANK : 249647

        한국 성공회는 일상에서 이웃과 창조된 세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제자의 길로 가르쳤다. 지역사회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지난 30여 년간 ‘나눔의 집’ 활동을 통해 선교적 노력도 하였다. 그런 노력에도 한국 성공회는 제자도 측면에서 커다란 선교적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 연구는 한국 성공회가 하느님나라를 위한 선교의 완성을 향해 참 제자의 삶을 실현하는 길에서 출발하였다. 특별히 프란시스칸 재속회가 2019년 2월에 첫 입회식을 갖는데 이들이 제자의 길에서 자신을 기쁘게 헌신하며 좀 더 깊은 신자의 생활로 나아가는 구체적 방안을 찾기 위해서다. 필자는 성공회의 ‘의도적(intentional)’ 제자도를 강조하는 신자생활을 성인 프란시스의 모본적인 삶과 프란시스칸 수도회의 원칙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연구 방법으로는 성공회 공동체가 강조하는 ‘의도적인 제자도’와 ‘프란시스칸 영성이 강조하는 제자도’의 특징을 각각 분석하고, 이 두 제자직의 특징 속에 발견된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였다. 그리고 프란시스칸 원칙에서 나타난 제자직의 표지 ‘겸손, 사랑, 기쁨’을 분석하여, 이를 구체적인 제자의 길로 제시해 보았다. 의도적인 제자직은 ‘선교 5대 지표’에서 완성하기를 요구하지만, 이 지표는 목표만이 천명되어 참으로 제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호한 점이 있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프란시스칸 원칙에서 제시하는 ‘생활의 세 가지 방법’을 제자직에 접목하여, 참된 제자의 길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제자도는 우리의 신앙을 전 생애를 걸쳐 겸손하게 표현하고 실천하는 노력이고, 그 길 위에서 사랑의 섬김과 기쁨으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프란시스칸 원칙에서 말하는 제자도이다. 핵심단어 ; 제자도, 성공회, 성 프란시스,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원칙, 제 3회, 세 가지 표지 The Korean Anglican Church teaches in its statements that the way of discipleship is to meet God through one’s neighbors and in the created world in everyday life. Over the last thirty years, in order to share the love of Christ, the Church has made a missionary effort at the local community level in the establishment of ‘Houses of Sharing’. Despite these social welfare activities, the Korean Anglican Church has not been very successful at disciple-making.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ut how the first Korean members of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gladly devote themselves to the path of discipleship and move toward a deeper Christian life. I have explored the intentional discipleship emphasized by the Anglican Church through St. Francis’s lifestyle and the Principles of the Franciscan Order. I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the intentional discipleship of the Anglican Communion and Franciscan discipleship, and then compare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found between these two. I have analyzed the Three Notes of Humility, Love and Joy in the Franciscan Principles and presented them as practical ways of discipleship. As a result, I have researched the Three Ways of Life in the Franciscan Principles, and have explored ways of putting them into practice. The Five Marks of Mission call for the building of intentional discipleship, but it is unclear as to how to live the life of a disciple, because these Marks are just mission slogans in the Anglican Communion. Discipleship is the effort we humbly express and practice in our faith throughout our lives, serving God with joy, which is the nature of discipleship according to the Franciscan Principles. Key Words: Discipleship, Anglican Church St. Francis, Principles of the Society of St. Francis, Third Order, Three Notes.

      • 출애굽과 바츠해방전쟁 게임 스토리텔링의 해방신학적 비교

        주원규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16 국내박사

        RANK : 249647

        초록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출애굽 해방 사건의 가치는 21세기를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애굽 땅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하비루(habiru, 사회적 하층민)의 탈출기로 알려진 출애굽 해방의 숨은 본질을 가나안 민중의 내재적 공분이 촉발된 해방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출애굽 해방을 해방신학적으로 보는 해석이다. 여기에 21세기 다중 사회와 신자유주의적 현실이 중첩된다. 21세기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시대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 수요의 급성장은 디지털 민주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현실 아래 공동체와 인간 존엄의 보편성 상실 또한 가속화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예외적인 하나의 사건이 21세기, 한국적 디지털 스토리텔링 상황에서 일어났다. 한국적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에서 발생한 리니지2 바츠해방전쟁이 그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해방신학적 접근으로 본 밑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의미를 갖는 출애굽의 신학적 의미가 21세기 디지털 스토리텔링에서 나타난 반제국주의 스토리텔링과 상호 융합할 수 있는지 살피는데 있다. 바츠해방전쟁 담론 연구가 해방신학적 관점으로 본 출애굽과 이야기 비교를 통해 보편적 가치의 재연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연구 주제는 첫 번째, 두 이야기 비교다. 역사적 실재에서 출발한 출애굽 해방과 픽션(fiction)에서 출발한 바츠해방은 출발점은 상이하지만 과정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출애굽 발생 동기가 민중의 해방인 것처럼 바츠해방전쟁 역시 해방 모티브가 나타난다. 독자와 작가 간 상호 융합의 특징을 가진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다중이 동시에 참여하는 다중상상력의 무대를 펼쳐놓는다. 바츠해방전쟁에 나타난 정치적 상상력의 동기가 해방 모티브에 있다는 측면에서 출애굽 해방과의 상호연대 가능성이 모색된다. 논문의 두 번째 연구 주제는 인간 해방이란 의미의 발견이다. 출애굽 해방의 독자는 교회 공동체다. 교회 공동체는 출애굽의 역사적 기념을 위한 전례와 의식을 존중한다. 바츠해방전쟁은 종교 공동체가 공유하는 종교적 감정을 전례의 형태로 나누지 않는다. 대신 해방을 열망하는 공동체에 대한 고찰을 지속한다. 바츠해방전쟁 참여자들은 21세기 신자유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신흥 하비루다. 그들은 파편화된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바츠해방전쟁은 해방 모티브란 새로운 가치로 경험된다. 결국 이 논문은 출애굽 해방의 신학적 의미가 과거의 사건만이 아닌 21세기 민중 해방의 현재진행형이란 사실과 창조적 미메시스(mimesis)로 알려진 바츠해방전쟁과 해방 모티브를 중심으로 발전적 상관성을 갖고 있음을 모색하는 것이다.

      • 평화를 위한 세계윤리 : 한스 큉(Hans Kung)의 『세계윤리구상』을 중심으로

        이한오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2002 국내석사

        RANK : 249647

        오늘날 세계는 이념적 문화, 윤리적 정치 그리고 현실적 경제 등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문화는 감각적·물질적인 대중산업처럼 되었고, 정치는 지도자들의 윤리적 타락과 해결능력의 부재, 힘을 앞세운 평화위협으로 치닫고 있으며, 경제는 세계거대금융자본의 독점적 횡포로 약자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비전의 부재, 가치의 상실이라는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개인들은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루하루를 힘겨운 노동경쟁으로 살아가고 있다. 무의미한 삶, 빠른 속도, 힘겨운 경쟁 속에서 하느님은 없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없는가? 한스 큉(Hans Kung)은 하나의 종교나 새로운 이데올로기 혹은 그 어떤 국제법적 장치도 현재의 위기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는 이 해결의 실마리를 세계윤리라는 매우 오래된 진리에서 찾는다. 그는 세계윤리가 필요한 이유를 크게 둘로 제시한다. 첫째 우리 시대의 문제가 기존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돌입했다는 것, 둘째 '후기현대'라는 시대가 근대의 지양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근본적인 윤리적 정향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세계윤리가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인류의 생존도 없다고 주장한다. 세계평화를 위한 길에서 한스 큉은 다른 세계종교와 휴머니즘의 활동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나름의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큉은 세계종교와 휴머니즘이 그리스도교에 중대한 도전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모종의 응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응답으로 나온 것이 바로『세계윤리구상』이다. 이 세계윤리는 인간의 가치와 척도 그리고 근본행동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윤리적 원리로서, 구속력 있는 가치이며, 뒤바꿀 수 없는 척도이며, 근본행동과 관련된 기본적 합의라고 주장한다. 세계윤리의 독특성은 철학적 합의가 아니라 모든 세계종교에 옛부터 있어 온 계율이라는 점에 있다. 세계윤리의 근본원리는 "모든 사람은 인간적으로 취급받아야 한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네 이웃에게 원하지 말며, 네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라"는 황금율이다. 그에 따르면 황금율은 철학적 합의와 달리 신적 절대성을 갖고서 사람들에게 구속력을 발휘한다. 그 안에는 바꿀 수 없는 네 가지 지침이 있다. 그것은 첫째 비폭력문화와 생명존중, 둘째 연대의 문화와 정당한 경제질서, 셋째 관용의 문화와 진실한 삶, 넷째 평등권의 문화와 남녀의 동반자 의식이다. 세계윤리의 목적은 세계평화에 있다. 즉,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모든 사람들이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며, 지구의 평화적 공동체를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큉은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종교간의 평화가 필수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세계종교는 오히려 지구의 평화를 위협했고, 또 종교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면 정치, 경제적인 불화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종교는 정치와 경제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답은 주지 못하지만, 현실문제에서 생긴 갈등을 극복할 정신적 힘을 줄 수 있고 인간의 윤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간의 평화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종교평화를 위해서는 종교간의 대화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이 대화는 학문적, 일상적, 실천적 만남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한스 큉이 제시하는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종교대화를 하더라도 자기 종교의 본질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 종교의 본질에 충실하면 동시에 다른 종교의 본질에도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종교에 충실하지 않을 때에는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표자들끼리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공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대화역량은 곧 평화역량으로 등식화된다. 또한 대화를 잘 하기 위해 신학적 연구가 필요하다. 한스 큉은 신학연구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에서 생긴 종교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와 종교 사이의 갈등 혹은 한 종교 내부(교파간)의 갈등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 즉, 모든 사고체계와 행동의 기준이 되는 패러다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배타적으로 대하고 심지어 이단이라고 몰아세운다. 따라서 종교는 자기종교와 다른 종교의 패러다임이 어떠한가를 연구해야 하며, 평화에 관심이 있는 자는 패러다임연구를 반드시 해야한다고 역설한다. 필자는 한스 큉의 세계윤리구상은 평화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향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에 주는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그의 세계윤리구상이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그리고 선교신학에서 새로운 접근을 요청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또한 그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제시할 것인데, 첫째 세계종교들과 휴머니즘의 도전에 대해 진지한 응답을 시도한 점을 들 것 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다른 세계종교와 휴머니즘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점과 보편성을 획득해야 하는 과제를 여전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가 평화를 위한 종교대화에서 내세운 원칙, 즉 내적 충실성과 외적 개방성이라는 원칙의 탁월성이다. 내적 충실성은 자기 근거를 확실히 하기 위한 입장고수이며, 외적 개방성은 모든 종교와 자매·형제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초로 제시된다. 셋째는 일치와 평화를 위한 그의 에큐메니칼 신학이다. 필자는 이 세계윤리가 모든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세계종교와 근본적으로 일치를 지향하는 이론적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끝으로 그리스도론이다. 한스 큉은 신학생 시절 이방인의 구원문제를 고민했을 때부터, 원숙한 학자가 된 이후에도 줄곧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신학이 카톨릭의 테두리를 넘고,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초월하여 세계종교를 아우러는 동안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일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했던 그가 로마카톨릭에서 심한 고초를 받았던 경력을 생각해 보면, 예수 정신은 제도교회에 갇혀있지 않다는 역설적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한스 큉은 이 역설적 진리의 길, 세계윤리라는 산으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