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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문화권 내 주변 제국(諸國)의 세계관-한반도의 제 왕조를 중심으로-

        이성시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한국학연구 Vol.0 No.36

        韓半島に興亡した前近代の諸王朝は、古代以来、中国文化圏における周辺国として、一貫して中国王朝との関係を重視した。中国皇帝の徳を慕って朝貢した中国周辺の諸民族(四夷)の中にあって、最も忠実な東夷の一国として、その世界認識もまた自らを中国皇帝の天下的世界観に積極的に位置づけたとみなされてきた。ただ、近世の朝鮮王朝は、明滅亡後の異民族王朝である清を正当な王朝と認めず、明王朝を継承する 「小中華」という独自の世界観を形成するに至っているが、いずれにしても、中国の世界観の中で、自己の世界観を構想し、その中で自己の世界像を定立しようとする発想においては一貫しているとみてよい。 要するに、巨視的に見れば、韓半島の王朝の国王は、古来、中国皇帝の天下的な世界観の下に、自らを臣下として自己を位置づけていたことになる。とりわけ高麗時代に至って科挙制度が導入され、中国的な教養が官僚選抜の基準になってからは、高麗、朝鮮王朝と時代が降るに従って、王朝の知識人たちは、中国的な世界観に自己を重ね合わせてゆき、次第に中国の皇帝を中心とする天下的な世界観を前提に、そこに包摂される一員として自己認識をするに至ったとみられる。 しかしながら、上述のような韓半島の諸王朝の世界観は、今日伝えられる韓半島の諸王朝の歴史書ですら、理解しがたい事実として、中華理念と齟齬する一面を伝えており、しかもそれらの史書は同時代の世界観を忠実に伝えているとは限らない。たとえば、高麗時代に編纂された 『三国史記』や、朝鮮時代に編纂された 『高麗史』は、周辺国の知識人として中国の世界観を内面化した価値観から編纂されているのだが、韓半島の過去の王朝の出来事に対して、自分たちの価値観と齟齬する諸事実に対して厳しく指弾したり、あるいは、中国の史書所載の外交記事を多用することによって、中国的な天下観から韓半島の過去の王朝の外交を記述したりしている。つまりは、これらの韓国の史書は、同時代の王朝に生きた支配層の人々の意識を必ずしも十全に史書の中に反映させているとは言いがたい面がある。 このような過去の王朝と、その後の王朝との世界観や意識のずれが明確に見られるのは、金石文や木簡などの同時代資料(出土文字資料)を通してであり、それらの諸史料からは官撰の史書には伝えられていない高麗以前の諸王朝に実在した独自の世界観や世界像をかいま見ることができる。高句麗、新羅、渤海、高麗など韓半島に興亡した諸王朝の世界観の全容は、いまだ十分に知るには至っていないが、本稿は、それらの出土文字資料や編纂史料から断片的にうかがえる諸王朝の自己を中心とする独自の世界観や、世界像の一端を、高句麗、新羅、高麗の事例を中心に取り上げることにする。 さらに、2009年に韓国学界において新羅の三国統一をめぐり繰り広げられた論争を手がかりに、現今の韓国における 「統一新羅」をめぐる論争は、新羅人の世界観、それに対して全く異なる評価を下す高麗王朝、朝鮮王朝の知識人の世界観、そのような世界観を壊した近代日本人と、それを主体的に継承したり、あるいは批判したりする現代韓国知識人の世界観(世界像)を、あぶり出しているという事実を論述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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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壤 貞柏洞364號墳출토 竹簡 『論語』에 대하여

        李成市,尹龍九,金慶浩 한국목간학회 2009 목간과 문자 Vol.4 No.-

        본고는 1990년대 초, 평양 락랑구역 통일거리건설장에서 발굴된 貞相洞364號墳출토 『論語』 竹簡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정백동364호분은 內外 2重槨안에 男性 1인을 묻은 單葬의 나무곽무덤(板槨墓)이며, 여기에서 출토된 「樂浪都初元四年縣別戶口簿」木牘으로 미루어 初元 4年(B.C. 45)에서 멀지 않은 시기에 조성된 樂浪群府 屬吏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논어」 죽간의 출토지를 비롯한 유구와 부장유물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는 없었다. 그러나 2001년 일본 東京소재 「高句麗會」會報(63號)에 수록된 『논어』 竹簡寫眞에 ‘貞柏364號古墳’ 출토라는 사진 설명을 통하여,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木牘과 함께 정백동364호 분에서 출토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백동364호분에서 출토된 『논어』는 통행본 『논어』의 先進·顔淵篇에 해당하는 章句가 적힌 죽간 120板 내외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39枚는 형태와 字句가 대체로 온전하나, 나머지 70여 枚는 殘簡 상태로 보인다. 정백동364호분에서 출토된 『논어』 죽간 가운데 내 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先進篇 33枚(19個 章句, 589字), 顔淵篇 11枚(9개 章句, 167字)로 출토된 죽간의 1/3이 조금 넘는 정도이다. 죽간의 크기와 背面 상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定州漢墓 출토 『논어』 죽간과 마찬가지로 三道編聯의 上下 10字내외로 기재하였고, 죽간 右側面에 上下, 中間에 契口가 만들어져 있다. 계구의 크기가 다양한 것으로 미루어 출토된 죽간 『논어』는 基主가 살아 있을 때에 장기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논어』 죽간에는 章句 시작을 알리는 圓點(ㆍ), 종결을 알려주는 餘白, 상하 10字를 기본으로 하는 (顔淵篇은 上下 9字)기재 방식, 1~2字의 字句는 자간을 좁혀 기재하거나, 의미전달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字句를 생략하는 用例가 확인된다. 缺字는 추후 字間사이에 細字로 追記하였고, 중복자인 경우 重文符號없이 연이어 같은 자를 적었다. 내용은 定州漢基 『논어』 죽간 및 通行本 『논어』와 大同小異하지만, 人名과 地名, 官名 표기에서의 차이, 而를 如로 대치하는 등 텍스트상의 『논어』 계통을 논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적지 않다. 한편 정백동364호분 죽간 『논어』의 출토 시기와 중국 하북성 定縣에서 출토된 『論語』 竹簡과의 시기 차가 최소 10년 정도의 차이라는 사실은 武帝代 儒家의 官學化와 五經博士가 설치된 이래, 宣帝·元帝시기 儒家의 서적과 사상이 변경 지역으로 확대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근래 한국 남동부에 위치한 金海와 중서부의 仁川 지역에서 출토된 論語 관련 木簡과의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본 자료의 출토는 『論語』라는 텍스트 연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文字나 思想의 전파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論語學’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물론 현재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이러한 논의가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을 가능성도 결코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 입수한 竹簡 사진 2매와 또 다른 관련 자료가 있다는 정보는 향후의 진전된 논의를 가능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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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에서의 낙랑 : 과제와 방법에 대한 시론

        李成市 한국고대사학회 2004 韓國古代史硏究 Vol.34 No.-

        It should be noted that certain political and academical inheritance from the' Japanese occupation era has indeed hindered scholars' on - going efforts of studying the Nakrang - gun unit for many years. In order to break free from such hindrance, certain attempts, including the development of new methods of research based upon a perspective critical of colonialism, collecting data tram various countries, and actual research based upon meticulous examination of such data, need to be launched. Through these efforts, a new basis for Nakrang - gun researches could be established. Researches of the Nakrang - gun unit would not only contribute to Korean historical studies, but also contribute to historical studies involving topics and issues generated throughout the history of the East - Asian region. It would give us a glimpse of how Chinese culture was established throughout East Asia, and how local cultures mirrored such influences. The results of such researches would also serve as historical samples which would in the end provide us with a historical model, regarding the relationship among cultures, traditions and civiliz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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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禰軍 묘지 연구

        李成市,정동준(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3 목간과 문자 Vol.10 No.-

        2011년에 王連龍이 소개한 ?軍墓誌에 따르면, ?軍은 백제 멸망 때에 唐에 투항한 백제 고관이고, 묘지에는 그의 일족의 유래나 백제에서의 역대 활약, 唐에서의 신하로서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묘지의 발견은 도굴에 의하기 때문에 상세한 출토 경위나 소재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묘지 자체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최신의 정보에 따르면, 묘지의 소재가 확인되었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공개이다. 그래서 이 글은 王連龍이 논문 속에 소개한 지석 및 탁본사진에 기초하여, 묘지에 기록된 전문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역주를 전제로, ?軍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묘지에 기록된 사적을 고증하였다. ?軍墓誌는 고전적을 구사하여 작성된 난삽한 문장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軍墓誌에 관한 연구는 자의적으로 묘지의 일부를 추려내어 논의하는 경향이 있어서, ?軍의 사적이나 시대배경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묘지 전문의 이해를 전제로 하면,『日本書紀』·『三國史記』등의 편찬사료에서 알려져 있었던 ?軍의 倭나 신라에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軍의 활동시기에 唐人의 동아시아 정세 인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동시대자료임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묘지에 기록된 ‘日本’이어서, 지금까지 일본 국호의 최초 사례로서 주목을 모아 왔다. 그러나 ‘日本’은 ?軍墓誌속에서 ‘扶桑’?‘風谷’?‘盤桃’ 등 동방을 의미하는 어구와 함께 사용되고 있어, 그 문맥상 ‘日本’이 백제를 지칭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일본은 동방을 지칭하는 어구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이고, 묘지에는 동시대에 사용된 국호는 하나도 사용되고 있지 않는 것에서 묘지가 제작된 678년에 ‘日本’이 국호로서 성립되지 않았음이 판명되었다. 종래, 일본 국호의 유래를 아마테라스라는 태양신을 조상신으로 제사하는 천황가와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였지만, 일본 국호는 그러한 고대 일본신화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고, 중국의 동방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7세기 말에 국호로 전화하였음이 밝혀졌다. 묘지 속에 기록된 ?軍의 활동시기에 唐人의 동아시아 인식으로서 중요한 것은 묘지 속에 ‘백제의 잔당은 倭에 의거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었지만, 고구려의 잔당은 신라를 거점으로 하여 막는 모습이 견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이것은『日本書紀』나『三國史記』등이 전하는 백제?고구려 멸망 후 각각의 왕족이 倭國이나 신라의 왕권에 의해 책봉된 사실과 부합하고 있어서, 말하자면 제3자인 唐側의 동시대인식이 묘지에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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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전달자』 수업: 아동청소년 과학소설과 미래 세계 그려보기

        강규한 한국영미문학교육학회 2019 영미문학교육 Vol.23 No.1

        This study is based on a course in English literature, in which Lowry Lois’s The Giver is read and discussed along with the topic of science fiction for children and young adults. In its first stage, a heavy emphasis was laid on close reading of the text under the belief that it is the most solid foundation for optimal English literature classes to read the given text as closely as possible. After closely reading the text, students had a detailed discussion to understand the future community depicted in the work. They made a major contribution to the discussion by providing their own answers to the given questions and sharing them with the whole class, and their views were elaborated by the instructor’s supplementary remarks. On the basis of their understanding, students participated in a project of creating a short video version of the future community. They uploaded their team’s files on the online-class site provided by the university, demonstrated their projects in class, and also evaluated other team’s products. Their discussion in the next stage of the course was centered around the narrative of The Giver. In particular, the narrative traits of children’s literature and science fiction were highlighted, and comparisons were also made between the original written text and its film version. After all the steps of the course were taken, a final questionnaire was distributed to check the extent to which students had enhanced their awareness on the significance of children’s literature and science fiction in comparison to the pre-questionnaire given before the development of the main body of the c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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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에서 본 한국 목간과 제사 유적-경산 소월리유적을 중심으로

        이성시 한국목간학회 2024 목간과 문자 Vol.- No.32

        이 글은 경산 소월리유적에서 출토된 신라 목간 및 공반 유물을 검토하여 그 제사유적으로서의 성격을검토한 것이다. 경산 소월리유적 수혈 107호에서 출토된 장대한 목간은 원래 소월리 부근에 둑을 만들어 논을 개발한지역의 畓(논)을 중심으로 경작지의 면적을 조사하였을 때의 기록 목간이었다. 그 목간을 논 개발에 관련된벽사 제사를 거행할 때 제구로 사용하는 비의 자루로 재이용한 것이었다. 6세기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외에도 수혈에서는 인면토기 및 도끼와 시루가 출토되었으며, 이들 역시 벽사 제사에서 제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인면토기는 중국 한나라 때의 화상석에 보이는 도상이나 일본의 인면묵서토기 등의 지견을 바탕으로 하면서 한국의 민속학적 검토를 통해 신라시대부터 확인되는 귀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목간에는 제구로 2차 이용되었을 때 ‘堤’·‘柱’·‘四’자가 습서처럼 가필었는데, 이들 모두 벽사의 제사 행위에 관련된 상징적인 문자이며, ‘堤’는 논 개발에 관련하여 제사 대상을 상징하는 문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柱’는 목간에 기록된 ‘堤’를 기점으로 ‘田’의 위, 아래의 위치 관계가 표시되어 있거나 ‘谷門’이라는 경계지역이 표시되어 있으므로 그 장소에서의 제사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四’에 대해서는 방위 내지는 제사공간을 표기한 것으로 추측하고 싶다. 경산 소월리유적 수혈 107호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제사 성격은 논 개발에 따른 벽사 제사로 보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울러 유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투각인면옹기형토기에 그려진 인면은 한반도에서 귀신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가장 오래된 유물자료로 주목해야 한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wooden documents and associated materials excavated from Gyeongsan Sowolri Site as ritual site. The Long wooden document excavated from Pit No. 107 of Sowolri Site was originally a investiga tion record of the area of cultivated land near Sowolri centered on the paddy fields which were devel oped by building emban㎞ents. It was reused as the shaft of a broom for the ritual to ward off evil relat ed to paddy field development. In addition to the wooden document of 6th-century Silla Dynasty, human face earthenmware, an axe and a steamer were excavated from the pit. They also presumed to be used as ritual equipments for the ritual to ward off evil. By examining the relief sculpture of Han Dynasty, ink-painted human face pots of Japan and folklore of Korea, it can be assumed that the human face earthenware symbolizes evil spirit(鬼神). When the wooden document was reused, the letters such as ‘堤’·‘柱’·‘四’ were added as writing prac tice. They are the symbolic letters related to the ritual to ward off evil. In particular, ‘堤’ shows that the ritual was for the paddy field development. ‘柱’ is thought to indicate the positional relationship of being above or below ‘田’ or to be related to the ritual in the border area called ‘谷門’. ‘四’ may indicate four di rections or ritual space. Based on the relics excavated from Pit No. 107 of Gyeongsan Sowilri Site, there is no doubt that the ritual was to ward off evil for paddy field develepment. The most notable thing among the relics it the human face earthenware, which is the oldest relics described evil spirit(鬼神) in Kore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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