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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儲慶宮의 성립과 의례적 변화 양상

        김윤정 서울역사편찬원 2023 서울과 역사 Vol.- No.113

        Currently, Jeokyung-Gung is one of the Seven-gungs and is located near the Blue House. Seven-gung has something in common as a shrine for the concubine who gave birth to the king, but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each Gung are very different. In particular, Inbin’s shrine was promoted to Jeokyung-Gung, and was included in the national memorial service after about 100 years of history from period of Injo to Yeongjo.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is Jeogyeonggung shows the status and ritual changes of King’s real mother, which were linked to the political upheaval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bin, who was the concubine of King Seonjo, became King’s real mother of King Wonjong. The fourth son, Uichang-gun, and his heirs succeeded to Inbin's ancestral rites but they were changed frequently because of the political upheaval in the King Suk-jong period. So Inbin’s shrine was also relocated to various parts of Seoul. King Yeongjo was interested in Inbin’s shrine, which is the standard for the ritual of King’s real mother and promoted the reconstruction of Inbin’s shrine and the hereditary succession of the status of heirs. However, when Yeocheon-gun, the heir, died due to his involvement in treason, King Yeongjo promoted Inbin’s shrine to Jeokyung-Gung instead of selecting heir and included it in the national memorial service. King Yeongjo tried to secure the ceremonial legitimacy of the The System of Gung and Won by expanding it of inbin. Unlike those organized by the heir, Jeokyung-Gung's rituals were defined as the king's duty. Therefore, the king, the crown prince, and officials participated, and the ritual space was expanded. On the other hand, King Jeongjo emphasized the principle of differentiating the increasing ceremonial status of the Gung while reorganizing The System of Gung and Won. In the Korean Empire, emperor titles and terms were used in ritual of Jeokyung-Gung. During the reign of King Sunjong, Jeokyung-Gung included in Uksang-Gung, an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Yi Wangjik was in charge of the ritual of the Seven-gungs, including jeokyung-Gung, according to political needs. 현재 저경궁은 칠궁의 하나로, 청와대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칠궁은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이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각 궁의 연혁과 성격은 매우 상이하다. 특히 저경궁은 인빈 사우에서 승격된 것으로, 100여 년의 역사를 거쳐 국가의 사전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저경궁의 성립 과정은 조선후기 중요한 정치적 사건과 연계되면서, 후궁 사친의 위상과 의례적 변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선조의 후궁이었던 인빈은 추숭왕 원종의 사친이 되었다. 4남 의창군과 그 자손이 인빈의 제사를 승계했지만, 숙종대 환국을 거치면서 봉사자의 罷養과 繼後가 반복되었고 인빈 사우 역시 여러차례 이건되었다. 영조는 후궁 사친 의례의 기준이 되는 인빈 사우에 관심을 갖고, 별묘의 중건과 봉사자의 지위 세습을 추진했다. 그러나 봉사자인 여천군이 역모에 연루되어 사망하자, 봉사자를 다시 선정하는 대신 인빈 사우를 국가의 사전으로 개편했다. 영조는 숙빈의 궁원제를 인빈에게 확대함으로써, 사친 궁원제의 의례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원종의 사저이자 인빈의 첫 번째 제향 공간이었던 송현궁에 저경궁을 조성했고, 육상궁의 제도와 동일하게 사당의 의물과 제사의 종류 등을 정비했다. 또한 인빈 사우의 제사를 봉사자가 주관했던 것과 달리, 저경궁의 제사는 왕의 친행과 섭행으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왕과 세자 그리고 문무백관 등이 참여하는 저경궁 의례에서 봉사자의 행례는 폐지되었고, 대문과 외신문 등이 새로운 의례 공간으로 확보되었다. 반면, 정조는 궁원제를 재정비하면서, 늘어나는 궁원의 의례적 위상을 차등화하는 원칙을 강조했다. 이에 祧遷한 신위인 저경궁의 의례를 축소하여, 시제를 2회로 줄이고 찬품과 헌관의 품계 등을 조정했다. 이후 고종대 <신미이정>에 따른 궁원제의 재정비가 이루어졌고, 대한제국 성립에 따라 축문의 칭호와 의례담당 관원 및 관련 용어 등이 개정되었다. 순종대 저경궁은 대빈궁・선희궁・경우궁・연호궁과 함께 육상궁에 합설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왕직이 저경궁을 포함한 칠궁의 제향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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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柿本人麻呂の「玉梓(タマヅサ)の使」考

        高龍煥(고용환) 동아시아일본학회 2008 일본문화연구 Vol.28 No.-

        히토마로 歌語의 표현을 言語의 本性에 따라 유추해보면 원래 漢詩文의 뜻에서 변화 발전하여 展開되어져 간 過程과 ?動의 意味를 문예사의 원류로써 세세하게 해부할 수 있다. 이러한 문예사고찰의 一環으로서 枕詞인「가래나무 활(梓弓)」로 수식되는「使者」의 意味를 고찰해 보았다. 먼저 히토마로 노래를 비롯한 초기万葉의 用例 대부분이 挽歌에 集約되어 있고 주로 가래나무 활을 가진 〈사자〉를 修飾하는 枕詞라는 점을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다. 또,「가래나무 활(梓弓)」은 狩?에서의 활을 나타내며, 특히 挽歌에 표현되어 있는「玉梓」와「梓弓」의 由?는 【漢書】[?光?] 例에서처럼 詩文에서의 지팡이「가래나무」의 이미지(?使의 표식으로 지팡이〈杖〉)에서 유래된 詩語이다. 즉, 이러한 詩文에 있어서 가래나무가 「葬儀」와 깊은 관련을 가지는 語彙로 「貴人의 葬儀에 종사하는 ?念과 情感」을 나타내는 의식과 동일한 개념의 종적을 만뇨의 「玉梓」의 歌語인 지팡이를 가진「사자」에서 發顯할 수 있다. 다음으로 마스라오(大夫)들이 지참한 「가래나무 활」은「가래나무 큰 칼」로 비유되듯 목숨까지도 불사한 勇猛스런 本性을 나타낸 象徵語로 대대로 천황을 섬기고자 公任을 다하려는 武將들의 용맹한 氣槪를 그려 낸 일종의 讚美歌로서, 천자에 대한 충신의 禮를 표현한 시문의 예와 동등하다. 이상과 같이 히토마로가 구사한「玉梓」의 표현을 文芸史的인 관점에서 시문의「梓」表記와 연계 고찰해본 결과, 作歌에서의「가래나무 활」은 中?漢代의 ?軍「周勃」의 傳記에서 보듯 장례식 때 활로써 奉仕한「材官」의 의미와도 부합됨을 알 수 있다. 고로, 동일한 관념의 詩想이 만뇨의 挽歌에서도 시문의「勅使」와 똑 같은「가래나무 활」을 가진 사자의 役割을「마스라오」가 행하고 있으므로 시와 우타에서 동질의 [가래나무] 抒情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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