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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玉所 權燮의 소장 화첩과 權信應의 회화

        윤진영(Youn Chin-yong)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장서각 Vol.0 No.20

        조선 18세기의 畵壇에는 문예부흥기라 할 만큼 많은 화가와 함께 鑑評과 收藏을 추구한 후원가들이 활동하여 다채로운 美術文化를 꽃 피웠다. 여기에 소개하는 權燮과 權信應도 매우 독특한 후원자와 화가의 관계이다. 권신응은 10대 중반에 그림에 입문한 청소년화가이며, 권섭은 권신응의 祖父로서 손자의 그림 세계를 후원하고 이끈 인물이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 권신응이 그림을 그리고 권섭이 소장 한 畵帖인 《暮景興寄帖》과 《寄懷帖》, 《翎毛鱗甲帖》을 발굴하여 권신응의 그림 세계와 學畵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화첩들은 권신응이 17세에서 24세에 이르는 시기에 그린 것으로 山水畵와 翎毛畵, 그리고 過去를 추억한 기념적인 장면들을 담고 있다. 이 그림에 대한 跋文과 관련 기록은 권섭의 遺稿인 『玉所稿』에 실려 있어 문헌 자료도 풍부하다. 권신응은 어린 시절부터 眞景山水畵의 대가인 鄭敾의 그림을 倣作하며 畵法을 익혔으며, 이를 통해 습득한 기량으로 실제 경치를 그린 實景山水畵를 많이 남겼다. 이 과정에서 권섭은 그가 선호한 정선의 화풍만을 최고의 그림으로 평가하여 이를 목표로 삼게 하였다. 권신응의 그림은 비록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筆法의 학습과정과 화가로서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선례를 찾을 수 없는 자료이다. 권섭은 권신응이 그린 그림의 수준을 논하기 보다 과장된 評語를 써서 격려하고 더욱 정진하게 한 사실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또한 권섭 자신도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권신응의 그림을 계기로 探勝과 그림 鍵評에 더욱 몰두하였다. 권신응이 17세때 그린 산수화는 거칠면서도 호방한 필치가 돋보였지만. 24세 때 그린 그림에는 畵譜風의 세련된 선묘와 채색을 사용하고 있어 倣作에서 畵譜의 학습을 거치는 등 화법의 변화와 수준이 향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권신응은 20세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지도 받을 스승을 만나거나 士大夫 화가들과의 교유를 갖지 못했으며, 조부의 훈도가 정선의 그림에만 집중된 결과 고립적인 환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신응은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유래가 드문 청소년기의 學畵 과정을 보여준 화가이며, 조부 권섭과 후원자와 화가로서의 관계, 그리고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추구하고 확산시킨 사례는 조선후기 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로 평가된다. In the painting circles of 18th Century Joseon, versatile fine art cultures flourished with many artists and sponsors who sought after appraisal and possession. It is not too much to say that the period was that of the Renaissance. Gwon Seop and Gwon Sin-ung were very peculiar artist-sponsor relations. Gwon Sin-ung was young artist who started painting in his mid-teens while Gwon Seop, being grandfather of Gwon Sin-ung, led and sponsored the realm of grandson's painting. This paper picked out 《Mo · gyeong · yeo · gi · cheop (暮景興寄帖)》, 《Gi · hoi · cheop (寄懷帖)》 and 《Ryeong · mo · in · gap · cheop (翎毛鱗甲帖)》, which are the picture albums drawn by Gwon Sin-ung and possessed by Gwon Seop, and examined the world of his painting and the process he had learned painting. Those pictures were drawn from 17 to 24 in his age and painted landscape, animals and his own past memories. The epilogues and related records of his pictures are given abundantly in 『Oak · so · go (玉所稿)』, posthumous works of Gwon Seop. Gwon Sin-ung had modeled after the works of Jeong Seon, the master of real landscape painting from his early stage of painting, With the technique acquired by such imitation, he left many actual landscape paintings. Gwon Seop had an effect on his grandson. He set a high value only on the style of Jeong Seon, his favorite artist, and made his grandson model after Jeong Seon. Though the works of Gwon Sin-ung are far from masterpiece, they are unique, without precedent, material in that they show the learning process and growth process of an artist. Several records said that Gwon Seop encouraged and stimulated his grandson's dashing forward painting by giving exaggerated praises rather than commenting objectively on his works. In addition, Gwon Seop, being motivated by Gwon Sin-ung's work, devoted himself more to sightseeing and picture appraisal in his senescence. Rough but open-hearted touch is the good point of the landscapes Gwon Sin-ung painted in his seventeen. However, the pictures drawn in his twenty four used sophisticated line drawing and colors that can be found in the conventional picture albums. It means that Gwon Seop's painting was advanced through studying picture albums. But Gwon Sin-ung had never received formal painting education, never kept company with noble class artists and only oriented to Jeong Seon style due to his grandfather, he could not deviate from isolated environment. Anyway, Gwon Sin-ung is the artist who showed us the studying picture process in adolescent period, uniquely in Joseon's painting history. Artist-sponsor relations with his grandfather and their effort to pursue and propagate Jeong Seon's real landscape painting may have significant meaning in the painting history of the late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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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19세기 후반 신기선(申箕善)의 현실 인식과 사상적 변화

        노대환 ( Dae Hwan Noh ) 동국사학회 2012 동국사학 Vol.53 No.-

        동도서기론은 개방론과 척사론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18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사상적 조류였다. 동도서기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인물은 申箕善이다. 본고에서는 1890년대 이후 신기선의 행적을 보충하여 신기선의 생애 전반을 재검토하면서 그의 사고가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살펴 보았다. 신기선은 산림 문하에서 수업을 받다가 1880년대 초반 동도서기론자로 전신하였다. 1880년대 초반 신기선의 동도서기론은 보수적 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제기된 것이엇다. 신기선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갑신정변에 연루되면서 삶에 큰 변화를 맞았다. 정변파에 친분이 깊었던 탓에 그는 유배에 처해졌으며 이를 계기를 점차 보수적인 면모를 띠게 되엇다. 1880년대 후반 그의 사상적 면모는 『儒學經緯』를 통해 확인되는데 1800년대 초반과는 달리 儒道의 가치를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목도하면서 그의 보수적 색채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개혁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개혁 내용이 급진적이라는 점 때문에 당시의 개혁에 비판적이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급진적인 문명 개화론자들로부터 유도를 보위하는 데 있었다. 그로 인해 신기선은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문명개화론 계열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신기선은 1900년대 후반에는 新·舊學折衷論을 제시하였다. 그의 신·구학절충론은 신학으로부터 구학을 보호하는 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기선의 주장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고 그 보수적셩격 때문에 신학 계열의 비판을 받았다. 대동학회 활동시 일본의 지원을 받은 탓에 만년에는 일본의 三忠奴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기까지하엿다. 신기선은 한때 진보 계열에 속해 전통 유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1890년대 중반 이후 문명개화 계열로부터 수구로 지목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신기선이 보여준 행보는 동도서기론의 시대적 추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The theory of Dongdoseogi (東道西器, Eastern Ways and Western Machines, shortened as Dongdoseogiron hereafter) was a new current of thought introduced in the early 1880s when a severe argument of the open-door theory and the doctrine of rejecting heterodoxy in defense of orthodoxy was is at its peak. Sin Gi-seon was the very person who suggested Dongdoseoginom for the first time.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traces of his life 1890s and review his entire career. It is anticipated that the periodical shifts of his thoughts would be revealed during saidprocess He used to study under the guidance of rustic literati(山林, sallim), however, in the early 1880s, he was fascinated to the idea of Dongdoseoginm. Ar that time, he suggested the new theory to convince conservative Confucian scholars. He also participated in the open-door movement, but, snce he got involved in Coup d`Etat of 1884, he had to experience a huge transition of life. Because he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revolutionaries, he was sent into exile and, ever since this point, he gradually became conservative. His new thoughts in the late 1880s can be found from Yubakgyeongui (儒學經緯, Warp and Woof [circumstances] of Confucianism) and it aimed, unlike his old ideas from the early 1880s, to re-secure the significance of Confucian teachings. Witnessing the Reforms of Gdoo (1894) and Eulmi(1895), made him even more conservative. He was critical abot the reform movements since he regarded the reform as dependent and radical. At this point his only interest was to protect Confucian ways from the radical reformists. Therefore, he had to face a severe criticism from the enlightenment parties represented by the Independence Club. In the late 1900s he suggested the compromising theory of the old and new studies. This suggestion was rnainly for the protection of old studies from newer academic trends. But his argument failed to evoke a significant response and, instead, he received a severe denumciation from groups of new academia. Sin Gi-seon once belonged to a progressive groip and , thus, was criticized by orthodox Confucian scholars. But after the middle of 1890s he was marked as a conservative by the reformist groups. Shifts of his thoughts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early 20th century also show the periodical transition of Dongdoseogi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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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유학인식의 변화에 대한 연구

        박정심 동양고전학회 2007 東洋古典硏究 Vol.26 No.-

        한국 근대사상은 이질적인 타자였던 서구문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였으며, 동시에 타자와 마주한 주체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논문은 유학이 서구근대문명에 대한 자기방어적 기제에서 벗어나 서기수용의 자기변형을 거쳐 해체와 재정립을 과정을 신기선 박은식 신채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신기선의 동도서기론적 유학은 ‘오도’의 정덕은 변화할 수 없는 측면이나 현실적 이용후생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하며 당시는 서기수용이 그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경위와 체용이란 용어로 해명하였다. 신기선의 유학사상은 서기를 이용후생이란 유학적 범주 안에서 포용하면서 유학의 도덕적 보편이념은 견지함으로써 유학을 해체하지 않으면서 서구근대와 만나려는 근대적 변형에 해당한다. 반면 박은식과 신채호는 리기 심성론으로 인간과 자연을 해명하지 않을뿐더러, 유학 전반에 걸친 자기반성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도덕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하면서 유학의 전근대적 요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유학을 전면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한국은 유교국가로서 유학이 근대국가에 맞는 이념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근대적 측면은 단호히 해체하되, 도덕적 자각과 실천 그리고 사 사로움에 매몰되지 않는 공덕 등 유학의 긍정적 측면을 근대사회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유학을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斥邪的 타자/주체인식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즉 근대 공간에서 유학은 자기방어적 기제에서 서기수용의 자기변형을 거쳐 해체와 재정립을 과정을 통해 나름대로 시대와 호흡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근대 공간에서 보여준 유학의 다양한 자기변화 양상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서구이념이 여전히 세계적 보편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오늘날, 지금 유학은 어떤 이념으로 거듭나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Korean Modern Thoutht hold communion with oneself how to understand and accept Western Culture which was heterogeneity. This paper analyze the process to reproduct of the Confucianism to self-enewal and self-modernize by the thoughts of Park Eun-sik(朴殷植), Sin Chae-ho(申采浩) and Shin Gi-seon(申箕善). Only with metaphysical logical confirmity, the expulsion of wickedness(衛正斥邪) is more complicated and fine, because of the movement to fulfill of the Confucianism. Therby, Shin Gi-seon(申箕善) refused the activity of the Li(理) but seeked actual method to keep right morality(正德). His this idea is recognized by the logic of the DogiSangbun(道器相分). The school of the expulsion of wickedness(衛正斥邪派) recognized Seogi(西器) as the human needs but Shin Gi Seon(申箕善) thought as the right of that time to do as a wealthy country and powerful army. So his thought of YuhagGeyongwi(儒學經緯) is recognized ad the self change to fit and seek the method of the eastern penetration by western. On the other hand Park Eun-sik(朴殷植) and Sin Chae-ho(申采浩) didn't examinate the human and nature with Li(理)-Gi(기(己) mentality of Sung Confucianism (性理學). They argued to change the modality by the ep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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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

        김진경 ( Jin Kyoung Kim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4 선도문화 Vol.16 No.-

        그간 고대 역사적 지명들의 위치가 잘못 추정되었다. 왜냐하면 중국 25사 지리지에 지명의 위치를 북쪽 또는 동북쪽 방향으로 변이시키는 위사들이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사(僞史)와 진사(眞史)를 분별하여 위사를 걷어내고 나니, 고대 역사적 지명들의 위치를 올바르게 추정할 수 있었다. 또 고대 지명의 위치를 올바르게 추정하고 나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환웅의 태백산 신시, 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의 도읍지 평양성과 아사달의 위치를 현재의 산서성 대동(大同)시에 위치한 태백산 주변 일대, 현재의 산동성 덕주(德州)시 동쪽 지역, 현재의 하북성 내구(內邱)현과 산구(山口)현 등으로 각각 추정할 수 있었다. 또 고조선의 건국년도가 서기전 2333년 보다 213년이 앞선 서기전 2546년으로 추론할 수 있었으며, ‘고조선(왕검조선)’이라는 국호가 원래 ‘조선(朝鮮)’이 아니고 ‘숙신(肅愼)’ 또는 ‘단국(檀國)’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For the time, the location of historical geographical names were incorrectly designated, because the fault historical facts were inserted in the Chinese historical books to distort the location of geographical names to the direction of north and east-north. But if the fault historical facts were scummed, we can seek the correct location of ancient historical geographical names. And on the base of the correct location of geographical names, can we reason the location of the Sin-si of the Mt. Tae-back of Hwan-Ung, the Castle Pyong-Yang and the A-Sa-Dal which were the Capital of tne Gojoseon of Dan-Gun according to the records of the Sam-Guk-Sa-Gi and the Sam-Guk-U-Sa. They could be assumed the area surrounding the Mt. Tae-back at the present Datong(大同) city of the Shanxi(山西) province, the eastern area of the present Dezhou(德州) city of the Shandong(山東) province, and the area of Nai-Qiu(內丘) hyeon and Shankou(山口) hyang of the Hebei(河北) province respectively. Besides can we pressum that the year of foundation of the Gojoseon was the B.C. 2546, 213 year earlier than B.C. 2333, and the name of Gojoseon(Wang-Gum-Jo-Seon) was not originally Joseon but was assumed a ‘Suk-sin(肅愼)’ or a ‘Dan-Guk(檀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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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玉所 權燮의 소장 화첩과 權信應의 회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장서각 Vol.0 No.20

        <P>조선 18세기의 畵壇에는 문예부흥기라 할 만큼 많은 화가와 함께 鑑評과 收藏을 추구한 후원가들이 활동하여 다채로운 美術文化를 꽃 피웠다. 여기에 소개하는 權燮과 權信應도 매우 독특한 후원자와 화가의 관계이다. 권신응은 10대 중반에 그림에 입문한 청소년화가이며, 권섭은 권신응의 祖父로서 손자의 그림 세계를 후원하고 이끈 인물이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 권신응이 그림을 그리고 권섭이 소장 한 畵帖인 《暮景興寄帖》과 《寄懷帖》, 《翎毛鱗甲帖》을 발굴하여 권신응의 그림 세계와 學畵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화첩들은 권신응이 17세에서 24세에 이르는 시기에 그린 것으로 山水畵와 翎毛畵, 그리고 過去를 추억한 기념적인 장면들을 담고 있다. 이 그림에 대한 跋文과 관련 기록은 권섭의 遺稿인 『玉所稿』에 실려 있어 문헌 자료도 풍부하다.</P><P> 권신응은 어린 시절부터 眞景山水畵의 대가인 鄭敾의 그림을 倣作하며 畵法을 익혔으며, 이를 통해 습득한 기량으로 실제 경치를 그린 實景山水畵를 많이 남겼다. 이 과정에서 권섭은 그가 선호한 정선의 화풍만을 최고의 그림으로 평가하여 이를 목표로 삼게 하였다. 권신응의 그림은 비록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筆法의 학습과정과 화가로서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선례를 찾을 수 없는 자료이다. 권섭은 권신응이 그린 그림의 수준을 논하기 보다 과장된 評語를 써서 격려하고 더욱 정진하게 한 사실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또한 권섭 자신도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권신응의 그림을 계기로 探勝과 그림 鍵評에 더욱 몰두하였다.</P><P> 권신응이 17세때 그린 산수화는 거칠면서도 호방한 필치가 돋보였지만. 24세 때 그린 그림에는 畵譜風의 세련된 선묘와 채색을 사용하고 있어 倣作에서 畵譜의 학습을 거치는 등 화법의 변화와 수준이 향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권신응은 20세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지도 받을 스승을 만나거나 士大夫 화가들과의 교유를 갖지 못했으며, 조부의 훈도가 정선의 그림에만 집중된 결과 고립적인 환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신응은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유래가 드문 청소년기의 學畵 과정을 보여준 화가이며, 조부 권섭과 후원자와 화가로서의 관계, 그리고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추구하고 확산시킨 사례는 조선후기 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로 평가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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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愼村) 황필수(黃泌秀)(1842~1914)의 사상적 행보

        노대환 ( Noh Dae-hwan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한국학연구 Vol.0 No.37

        황필수는 19세기 후반에 주로 활동했던 학자이다. 그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20대 시절 황필수의 관심은 斥邪에 있었다. 그는 천주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斥邪說』을 저술하여 천주교를 비판하였는데 『척사설』은 19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척사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젊은 시절 황필수는 전통적인 유학자의 길을 걸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동도서기적인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50대 이후에는 다양한 유학서의 출판 작업에 관여하는 한편 학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新舊學折衷을 주창하였다. 구학을 중심으로 하면서 신학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19세기 후반 당시에 황필수처럼 정통 유학에서 출발하여 동도서기론을 거쳐 신구학절충론으로 인식을 전환해갔던 지식인들이 당시에 적지 않았다. 만년에 교유하였던 陸用鼎, 그와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金允植, 안면은 없었지만 그를 높이 평가했던 申箕善이 모두 그러한 경우였다. 황필수를 비롯한 이들 지식들의 모습을 통해 19세기 후반 사상계의 한 흐름을 상정해 볼 수 있다. 황필수의 생애를 자세하게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정치하게 구성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황필수는 19세기 후반 사상계의 동향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앞으로 좀 더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 19세기 후반 사상사의 이해 기반이 확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Hwang Pil Su is a scholar from the late 19<sup>th</sup> century Joseon Korea. He lived a time of great tumult and he tried to carry out his responsibility as an intellectual of the society in his own way. In his 20s, Hwang concerned mainly about the expulsion of Catholicism. He wrote Cheoksaseol (斥邪說, An Account of the Expulsion of Wickedness) to criticize Catholicism and prevent its popularization. His writing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representative books with relevant themes at the time. He lived his early years as a conventional Confucian scholar, but in the later part of his life, he adopted Western ideas on the basis of Eastern thought. Since his 50s, he published various Confucian books while actively advocated the needs of compromising the old and new studies. He argued that the Western learning could be transplanted into soil of Eastern study. There were numbers of intellectuals who shared Hwang’s idea at the time. His friend in his latter years Yuk Yong Jeong, Kim Yun Sik who is assumed to be his acquaintance, and Sin Gi Seon who thought highly of Hwang are such scholars. By examining these intellects, one could elucidate the trend of the late 19<sup>th</sup> century realm of ideas. Even though the insufficient materials about Hwang prevent ones from gaining profound understandings of his life, it is still possible to say that he is a figure with an important historical significance. Future studies of various intellects from his time would widen our perspective of the intellectual history of the late 19<sup>th</sup>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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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 17세기 열녀 담론과 소설적 대응

        장경남 ( Kyung Nam Jang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11 민족문학사연구 Vol.47 No.-

        17세기에 조선사회를 관통했던 열녀 담론은 節死한 열녀이다. 국가-남성은 자신들의 지배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절사한 열녀를 양산해 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을 통해 열녀를 계몽하고자 했고, 그에 따라 烈女傳과 같은 문학작품에서는 이에 부응하는 열 녀의 행위를 입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實記도 이에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小說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척전』의 옥영, 『동선기』의 동선, 『한강한전』의 이씨는 전란의 참상을 겪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열녀담론에서 형성된 節死로 목숨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공통적으로 경험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들 소설의 여주인공은 죽지 않았다. 열녀담론이 무성한 현실에서 절사에 대한 회의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최척전』은 살생을 금하고 있는 불교적 입장을 끌어들임으로써 유교적 질서를 위해 죽음까지도 찬양해야 되는 당대의 열녀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다. 『동선기』의 주인공은 선계에서의 영생을 꿈꾸었던 바,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유교적 이데올로 기에 대한 거부가 도선적 삶의 지향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강한전』은 從死에 의한 열녀의 형상보다는 가문을 위한 여성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조상 제사와 자손 번성이라는 현실적 목적을 위해 죽음은 유예되었고, 대신 강하고 책임감 있는 여성 형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옥 영과 동선의 인물 형상을 통해서 경직된 이데올로기의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생명 존중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반면에 이씨의 인물 형상을 통해서는 유교적 이데올 로기에 복무하는 여성상을 만날 수 있다. Virtuous woman discourse during the 17th century in Joseon was about virtuous women who died with integrity. The society tried to enlighten virtuous women through 『Dong-guk-sin-soksam- gang-haeng-sil-do』, so literary works such as the biography of virtuous women as well as silgi(veritable records) often included action of virtuous women. However, fictions showed different aspects. Okyung on 『Choi-cheok-jeon』, Dongseon on 『Dong-seon-gi』 and Mrs. Lee on 『Hangang- han-jeon』 were supposed to give up their lives after their husbands` death but they did not. Skepticism on those wives` death of integrity in the society, where virtuous women discourse is dominant, brought sensation in each different direction. Bringing Buddhist perspective of forbidding taking lives, 『Choi-cheok-jeon』 faced an ideology of virtuous women that even death is allowed for the rules of Confucianism at that time. A main character of [Dong-seon-gi] dreams of eternal life in heavens, and the rejection of Confucian ideology that suppresses human life was expressed in the aim for Taoistic life. [Han-gang-han-jeon] described a form of women for the family rather than the form of virtuous women who died as following their husbands` death. Death was postponed for realistic goals such as ancestral rites and having offspring but instead the form of strong and responsible women was made. Along with critical consciousness on unquestioning acceptance of rigid ideology through forms of characters of Okyung and Dongseon, the consciousness of respect for life was shown. On the other hand, the form of character of Mrs. Lee showed an image of women who followed Confucian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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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후반 申箕善의 현실 인식과 사상적 변화

        노대환 동국사학회 2012 동국사학 Vol.53 No.-

        동도서기론은 개방론과 척사론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18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사상적 조류였다. 동도서기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인물은 申箕善이다. 본고에서는 1890년대 이후 신기선의 행적을 보충하여 신기선의 생애 전반을 재검토하면서 그의 사고가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신기선은 산림 문하에서 수업을 받다가 1880년대 초반 동도서기론자로 전신하였다. 1880년대 초반 신기선의 동도서기론은 보수적 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제기된 것이었다. 신기선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갑신정변에 연루되면서 삶에 큰 변화를 맞았다. 정변파와 친분이 깊었던 탓에 그는 유배에 처해졌으며 이를 계기로 점차 보수적인 면모를 띠게 되었다. 1880년대 후반 그의 사상적 면모는 ?儒學經緯?를 통해 확인되는데 1880년대 초반과는 달리 儒道의 가치를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목도하면서 그의 보수적 색채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개혁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개혁 내용이 급진적이라는점 때문에 당시의 개혁에 비판적이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급진적인 문명 개화론자들로부터 유도를 보위하는 데 있었다. 그로 인해 신기선은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문명개화론 계열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신기선은 1900년대 후반에는 新?舊學折衷論을 제시하였다. 그의 신?구학절충론은 신학으로부터 구학을 보호하는 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기선의 주장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고 그 보수적 성격 때문에 신학 계열의 비판을 받았다. 대동학회 활동시 일본의 지원을 받은 탓에 만년에는 일본의 三忠奴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기까지 하였다. 신기선은 한때 진보 계열에 속해 전통 유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1890년대 중반 이후 문명개화 계열로부터 수구로 지목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신기선이 보여준 행보는 동도서기론의 시대적 추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 KCI등재

        후기(後期) 한양영화사(漢陽映畵社) 연구

        김남석(Kim Nam seok)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15 인문사회과학연구 Vol.16 No.4

        한양영화사는 1934년에 창립되어 1937년에 1차 해산되었지만, 1938년에 다시 재기에 성공한 영화사이다. 그래서 1937년까지 한양영화사를 ‘전기’라고 할 수 있다면, 1938년부터 1940년대까지 활동한 한양영화사는 ‘후기 한양영화사’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후기 한양영화사에 대한 연구이다. 후기 한양영화사는 전기 한양영화사의 인맥을 연계하여 재결성되었고, 그 영화적 목표를 공유하려고 한 영화사이다. 하지만 사주의 변경과 제작 환경의 변화로 인해, 영화사 운영 방식이 변화되었고 이에 따라 영화 제작 활동 역시 큰 차질을 빚고 말았다. 현재 한국영화사(韓國映畵史)에서 이러한 사실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차이점 역시 명확하게 인지되지 못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를 바로 잡고, 한양영화사에 대한 올바른 학문적 정리와 위상 정립을 위해 고안되었다. ‘漢陽映畵社’は、1934年に創立され、1937年に第一次解体された。しかし、1938年に再び回復に成功した映畵社である。だから1937年までに漢陽映畵社を ‘前期’とすることができれば、1938年から1940年代まで活動した漢陽映畵社は、‘後期漢陽映畵社’とすることができる。本研究では、後期漢陽映畵社の研究である。後期漢陽映畵社は、‘前期漢陽映畵社’の人脈を連携して再結成され、その映画的目標を共有しようとした映画会社である。しかし、社長の変更と制作環境の変化のために、映畵製作社の運営方式が変化し、これに基づいて映画制作活動も大きな支障をきたしてしまった。現在韓国映画史で、これらの事実は、正しく整理されずにおり、その違いも明確に認知されていない。本研究では、これらの問題を正し、漢陽映畵社の正しい学術整理と位相定立のために考案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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