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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19세기 후반 신기선(申箕善)의 현실 인식과 사상적 변화

        노대환 ( Dae Hwan Noh ) 동국사학회 2012 동국사학 Vol.53 No.-

        동도서기론은 개방론과 척사론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18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사상적 조류였다. 동도서기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인물은 申箕善이다. 본고에서는 1890년대 이후 신기선의 행적을 보충하여 신기선의 생애 전반을 재검토하면서 그의 사고가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살펴 보았다. 신기선은 산림 문하에서 수업을 받다가 1880년대 초반 동도서기론자로 전신하였다. 1880년대 초반 신기선의 동도서기론은 보수적 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제기된 것이엇다. 신기선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갑신정변에 연루되면서 삶에 큰 변화를 맞았다. 정변파에 친분이 깊었던 탓에 그는 유배에 처해졌으며 이를 계기를 점차 보수적인 면모를 띠게 되엇다. 1880년대 후반 그의 사상적 면모는 『儒學經緯』를 통해 확인되는데 1800년대 초반과는 달리 儒道의 가치를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목도하면서 그의 보수적 색채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개혁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개혁 내용이 급진적이라는 점 때문에 당시의 개혁에 비판적이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급진적인 문명 개화론자들로부터 유도를 보위하는 데 있었다. 그로 인해 신기선은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문명개화론 계열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신기선은 1900년대 후반에는 新·舊學折衷論을 제시하였다. 그의 신·구학절충론은 신학으로부터 구학을 보호하는 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기선의 주장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고 그 보수적셩격 때문에 신학 계열의 비판을 받았다. 대동학회 활동시 일본의 지원을 받은 탓에 만년에는 일본의 三忠奴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기까지하엿다. 신기선은 한때 진보 계열에 속해 전통 유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1890년대 중반 이후 문명개화 계열로부터 수구로 지목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신기선이 보여준 행보는 동도서기론의 시대적 추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The theory of Dongdoseogi (東道西器, Eastern Ways and Western Machines, shortened as Dongdoseogiron hereafter) was a new current of thought introduced in the early 1880s when a severe argument of the open-door theory and the doctrine of rejecting heterodoxy in defense of orthodoxy was is at its peak. Sin Gi-seon was the very person who suggested Dongdoseoginom for the first time.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traces of his life 1890s and review his entire career. It is anticipated that the periodical shifts of his thoughts would be revealed during saidprocess He used to study under the guidance of rustic literati(山林, sallim), however, in the early 1880s, he was fascinated to the idea of Dongdoseoginm. Ar that time, he suggested the new theory to convince conservative Confucian scholars. He also participated in the open-door movement, but, snce he got involved in Coup d`Etat of 1884, he had to experience a huge transition of life. Because he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revolutionaries, he was sent into exile and, ever since this point, he gradually became conservative. His new thoughts in the late 1880s can be found from Yubakgyeongui (儒學經緯, Warp and Woof [circumstances] of Confucianism) and it aimed, unlike his old ideas from the early 1880s, to re-secure the significance of Confucian teachings. Witnessing the Reforms of Gdoo (1894) and Eulmi(1895), made him even more conservative. He was critical abot the reform movements since he regarded the reform as dependent and radical. At this point his only interest was to protect Confucian ways from the radical reformists. Therefore, he had to face a severe criticism from the enlightenment parties represented by the Independence Club. In the late 1900s he suggested the compromising theory of the old and new studies. This suggestion was rnainly for the protection of old studies from newer academic trends. But his argument failed to evoke a significant response and, instead, he received a severe denumciation from groups of new academia. Sin Gi-seon once belonged to a progressive groip and , thus, was criticized by orthodox Confucian scholars. But after the middle of 1890s he was marked as a conservative by the reformist groups. Shifts of his thoughts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early 20th century also show the periodical transition of Dongdoseogiron.

      • KCI등재

        19세기 후반 申箕善의 현실 인식과 사상적 변화

        노대환 동국사학회 2012 동국사학 Vol.53 No.-

        동도서기론은 개방론과 척사론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18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사상적 조류였다. 동도서기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인물은 申箕善이다. 본고에서는 1890년대 이후 신기선의 행적을 보충하여 신기선의 생애 전반을 재검토하면서 그의 사고가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신기선은 산림 문하에서 수업을 받다가 1880년대 초반 동도서기론자로 전신하였다. 1880년대 초반 신기선의 동도서기론은 보수적 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제기된 것이었다. 신기선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갑신정변에 연루되면서 삶에 큰 변화를 맞았다. 정변파와 친분이 깊었던 탓에 그는 유배에 처해졌으며 이를 계기로 점차 보수적인 면모를 띠게 되었다. 1880년대 후반 그의 사상적 면모는 ?儒學經緯?를 통해 확인되는데 1880년대 초반과는 달리 儒道의 가치를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목도하면서 그의 보수적 색채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개혁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개혁 내용이 급진적이라는점 때문에 당시의 개혁에 비판적이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급진적인 문명 개화론자들로부터 유도를 보위하는 데 있었다. 그로 인해 신기선은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문명개화론 계열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신기선은 1900년대 후반에는 新?舊學折衷論을 제시하였다. 그의 신?구학절충론은 신학으로부터 구학을 보호하는 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기선의 주장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고 그 보수적 성격 때문에 신학 계열의 비판을 받았다. 대동학회 활동시 일본의 지원을 받은 탓에 만년에는 일본의 三忠奴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기까지 하였다. 신기선은 한때 진보 계열에 속해 전통 유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1890년대 중반 이후 문명개화 계열로부터 수구로 지목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신기선이 보여준 행보는 동도서기론의 시대적 추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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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욱(金炳昱)(1808∼1885)의 글쓰기에 나타난 비판정신

        김용태 ( Yong Tai Kim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4 大東文化硏究 Vol.87 No.-

        김병욱이란 인물이 오늘날 학계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환곡제도 개혁론이나 대외인식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는 점은 김용섭, 송찬섭, 노대환 등의 역사 연구자들에 의해 소상히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연구 성과들이 널리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본고는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하여,김병욱의 비판적 글쓰기 태도를 검토함으로써 김병욱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그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김병욱의 글쓰기는 무엇보다 비판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어떤 대목은 「맹자(孟子)」의도도한 글쓰기가 연상될 정도로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비판의 대상이 김수근(金洙根) 등의안동김씨 세도가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김병욱이 실은 김수근의 문객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개진한 사회개혁론이나 대외세력에 대한 대처방안은 당대의 어떤 인물과 견주어도 독특하면서도 높은 현실적합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김병욱이 문경의 향반출신으로서 지방의 사정을 잘 아는 한편, 서울에서 세도가에서 기식하며 중앙에서세계정세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개화파’와는 달리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였던 점은 특히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편 그의 글쓰기는 맹자와 같은 강한 자부(自負)가 담겨 있는 동시에, ‘문객’이라고 하는 한계에서 기인할 수밖에 없는 자조(自嘲)가 나타나고 있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김병욱의 독특한 글쓰기는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높이 평가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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