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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길준의 인맥에 대한 연구(1907~1914)

        마스타니 유이치(Masutani Yuichi) 고려사학회 2017 한국사학보 Vol.- No.68

        유길준은 일본에서 동아청년회에 관여하였다. 동아청년회 및 일한동지회에 소속하는 일본인들은 일진회 및 대한협회에 반대하고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유길준의 인맥 또한 이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유길준이 유일하게 참여한 기존 자강운동 단체인 대동학회는 그가 귀국 전부터 교류하던 일한동지회가 관여한 단체였다. 유길준은 귀국 후 독자적으로 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흥사단 활동은 이미 활동하고 있던 교육 지도자들과 거리를 두고 전개한 활동이었다. 한성부민회 역시 유길준이 독자적으로 전개한 활동이었다. 1909년 1월 한성부민회에 대한협회 인사들이 참여하였는데, 결국 유길준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유길준의 인맥은 1910년 및 1912년의 일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자강운동 세력을 이끄는 윤효정,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과 같은 인물은 유길준의 주소록인 『지우록』과 『조문록』, 『유길준 일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유길준은 망명에서 귀국한 후 새롭게 등장한 젊은 운동가들에게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자강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산업계 인사들을 포섭해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Yu KilChun was involved in Tonga Ch’ŏngnyŏnhoe in Japan, Tonga Ch’ŏngnyŏnhoe and the Japanese affiliated with Ilhan Tongjihoe tried to start their independent movement and Yu KilChun’s personal connections show the same tendency as well. Daedonghakhoe, the only strenuous efforts movement organization which Yu KilChun participated was an organization involved with Ilhan Tongjihoe which he interacted before returning from abroad. After his return, he developed his own Enlightenment Movement. Heungsadan activities kept their distance from the existing leaders. Hansŏngbuminhoe also was Yu KilChun’s independent activity. January 1909, Personnel from Taehanhyŏp"oe participated in Hansŏngbuminhoe and they couldn’t get together. Those personal connections have been verified his 1910 and 1912 journal. The leaders of the Enlightenment Movement such as Yun Hyochŏng, Chang Chiyŏn, Sin Ch"aeho, Pak Ŭnsik didn’t show in Chiurok(Records of close acquaintances), Condolence book, and Yu Kilchun’s Journal. After his return from asylum, Yu KilChun tried to develop his independent Enlightenment Movement not joining new activists thus tried to construct network with industrial personnel.

      • KCI등재
      • KCI등재

        19세기 후반 申箕善의 현실 인식과 사상적 변화

        노대환 동국사학회 2012 동국사학 Vol.53 No.-

        동도서기론은 개방론과 척사론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18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사상적 조류였다. 동도서기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인물은 申箕善이다. 본고에서는 1890년대 이후 신기선의 행적을 보충하여 신기선의 생애 전반을 재검토하면서 그의 사고가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신기선은 산림 문하에서 수업을 받다가 1880년대 초반 동도서기론자로 전신하였다. 1880년대 초반 신기선의 동도서기론은 보수적 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제기된 것이었다. 신기선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갑신정변에 연루되면서 삶에 큰 변화를 맞았다. 정변파와 친분이 깊었던 탓에 그는 유배에 처해졌으며 이를 계기로 점차 보수적인 면모를 띠게 되었다. 1880년대 후반 그의 사상적 면모는 ?儒學經緯?를 통해 확인되는데 1880년대 초반과는 달리 儒道의 가치를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목도하면서 그의 보수적 색채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개혁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개혁 내용이 급진적이라는점 때문에 당시의 개혁에 비판적이었다. 이제 그의 관심은 급진적인 문명 개화론자들로부터 유도를 보위하는 데 있었다. 그로 인해 신기선은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문명개화론 계열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신기선은 1900년대 후반에는 新?舊學折衷論을 제시하였다. 그의 신?구학절충론은 신학으로부터 구학을 보호하는 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기선의 주장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고 그 보수적 성격 때문에 신학 계열의 비판을 받았다. 대동학회 활동시 일본의 지원을 받은 탓에 만년에는 일본의 三忠奴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기까지 하였다. 신기선은 한때 진보 계열에 속해 전통 유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1890년대 중반 이후 문명개화 계열로부터 수구로 지목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신기선이 보여준 행보는 동도서기론의 시대적 추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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