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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호계서원(虎溪書院)의 위상과 강학활동

        김자운 ( Kim Ja-woon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21 儒學硏究 Vol.55 No.-

        호계서원(虎溪書院)은 퇴계의 선향이자 퇴계가 어릴 적 독서하던 곳이라는 연고로 퇴계를 주향하기 위해 안동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으로, 17세기 이후 안동의 수원(首院)이자 예안의 도산서원, 경주의 옥산서원과 함께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같은 호계서원의 위상과 조선후기 병호시비의 근거지라는 점에 주목하여 그동안 정치사회사 분야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호계서원 강학에 대한 연구는 매우 소략한 형편으로 19세기의 「호계강록(虎溪講錄)」을 다룬 두 편의 연구 외에 본격적으로 시도된 바가 없다. 이는 강학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확인되는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관련 인물들의 문집 등에 수록된 시, 편지, 연보, 행장 등 관련 기록과 맥락을 최대한 검토, 추적하여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호계서원 강학의 전체적인 흐름과 변화상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2장에서는 퇴계 문인들에 의해 건립된 호계서원이 퇴계의 서원관과 도학론을 충실히 계승하는 한편, 당시까지 매우 부진했던 안동향교의 교육기능을 대신하여 관학에 버금가는 위상과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퇴계의 이산원규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입원 규정에서만큼은 과거 입격자를 우선으로 규정한 호계서원의 원규, 안동부 및 안동향교와의 긴밀한 협력관계 속에서 설립, 운영되었으며 호계서원의 주요 인물들이 16세기 안동향교의 운영까지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17세기까지의 강학이 과업(科業)을 목적으로 한 거접 중심으로 시행되었고, 완공된 건물의 규모가 관학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는 점 등을 통해 적어도 16세기의 호계서원은 관학에 버금가는 위상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3장에서는 16-17세기 강학의 전개상을 개략적으로 검토하였다. 권호문의 문집 기록을 통해 16세기 강학은 ‘알묘례-강학-수창시’의 순서로 이루어졌으며, 16세기 강학은 퇴계 저술의 교정 작업과 병행하여 시행되었고, 강학과 교정은 때로는 일회적으로, 때로는 며칠씩 서원에서 유숙하면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또 ‘누에 오르면 감발하는 효과가 있어 호연지기를 기르고 연비어략의 이치를 깨우치는 데 적합하다’고 하여 강당인 숭교당 외에 유식공간이었던 양호루가 강학 공간으로 자주 활용되었으며, 이는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을 아우르는 서원 강학의 목표와 의미를 드러내는 대목임을 지적하였다. 남치리의 원규에는 동몽 강학에 대한 규정이 없으나 배용길이 16세기 강회에 참여할 때마다 ‘소아(小兒)와 함께 동몽재에 우거하였’으며 동몽재의 규모가 15칸이나 되었다는 점, 또 18세기 김성탁이 15세의 나이로 호계서원 거접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을 토대로, 16세기부터 15세 이하 동몽들을 대상으로 동몽 강학이 시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17세기 후반 김성탁이 ‘전례대로 수일간 거접에 참여하여 과거문자를 익혔다’는 기록에 따르면 17세기까지 과업(科業)을 목적으로 한 거접이 지속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장에서는 18-19세기 강회의 변화상 및 심학적 성격과 실천적 학풍을 검토하였다. 18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알묘례-정읍례-상읍례-강독과 발문, 토론-강회 후 산수 유람-파재 시 수창시’의 순서로 강회의 절차와 방식이 체계화되었으며, 1765년 대산 이상정이 이끈 심경강회를 기점으로 강회 참여자의 명단과 강회의 전말, 문답 내용을 제명록, 차록, 강회록 등의 기록으로 남기는 관례가 정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 지방관의 흥학책과 그에 대한 적극적으로 대응으로 18-19세기 강회가 활성화되었으며, 18-19세기 호계서원 강회를 주도한 인물들의 사승관계 분석을 통해 호계서원 강회는 ‘퇴계로부터-학봉 김성일-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맥 형성에 핵심적인 매개체가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18-19세기에 가장 많이 활용된 강회의 주요 텍스트는 심경이었으며, 강회에서 공부한 내용을 더욱 궁구하여 체득하고 일상생활의 언어와 동작에서 실천하는 자만이 진정한 ‘강학인’이라 강조하고, 19세기 붕당의 폐해와 유림의 분열상을 극복하기 위한 해법을 서명(西銘)에서 찾고 일상에서 이일분수의 실천을 강조한 19세기 강회 등을 통해 이 시기 호계서원 강회의 특징과 경향성이 심학과 실천적 학풍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호계서원 강학의 전체적인 흐름과 변화상은 개괄적으로 추적하였으나, 강학의 가장 핵심에 해당하는 강회의 주요 내용과 문답 기록까지는 미처 분석하지 못하였다. 본고에서 수집한 자료 외에 향후 관련 자료를 좀 더 추적, 보완하여 본고에서 미처 수행하지 못한 강회의 주요 내용과 문답 기록에 대한 분석은 후속 연구를 통해 보완하고자 한다. Hogye-Seowon(虎溪書院) is the first Seowon established in Andong area to celebrate Toegye because it was a place where Toegye was reading when he was a child. After the 17th century, it has grown into a representative Seowon in the Yeongnam region along with Dosan-Seowon and Oksan-Seowon. Paying attention to the status of Hogye- Seowon, many studies have been conducted in the field of political history. However, there are only two thesis on education in the 19th century on the study of Hogye-seowon education. This is because there is little data on education of Hogye- Seowon. Therefore, I tried to trace the overall flow and changes of Hogye Seowon education from the 16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by investigating the data on Hogye-Seowon education as much as possible. In Chapter 2, I first analyzed the operating regulations of Hogye-Seowon, and then investigated the relationship between Andongbu(安東府) and Hogye-Seowon. In 1576, Nam, chi-ri(南致利) created the operating regulations of Hogye-Seowon, imitating Toegye's Isan-Seowon regulations. However, there are obvious differences between the two. In addition, Hogye-Seowon was established and operated in a very close cooperative relationship with Andongbu. Through the analysis of the relationship, Chapter 2 I confirmed that the 16th century Hogye-Seowon played the same status and role as the Andong-Hyanggyo. In Chapter 3, I reviewed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Hogye-Seowon from the 16th century to the 17th century. Through this, the operation status of children's education, the space used for education, the contents of education and the education method were confirmed. In Chapter 4, I reviewed the changes in the educational system of Hogye-Seowon, the changes in textbooks and educational philosophy, and the formation process of the school from the 18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Hogye-seowon's educational system began to change systematically starting with the Simkyung-Lecture(心經講會) led by Daesan(大山) Lee, Sang-jung(李象靖) in 1765. An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the book they studied hardest at Hogye-Seowon was Shimkyung(心經). In addition, the teachers at Hogye-Seowon put great emphasis on practicing what they learned in Seowon in their daily life. In other words, the characteristics of Hogye- Seowon education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can be found in the learning of the mind and practical academic practices. Through the education at Hogye-Seowon, the people who led the schooling were forming a academic network leading to “Toegye Lee Hwang(退溪李滉)-Kim, Seong-il(金誠一)-Lee, Hyun-il(李玄逸)-Lee, jae(李栽)-Lee, Sang-jeong(李象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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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 안동 虎溪書院의 건립과 위상

        우인수 한국서원학회 2022 한국서원학보 Vol.15 No.-

        퇴계 이황의 사후 그를 모시는 서원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히 그의 문인집단이 집중되어 있던 큰 고을인 안동에는 예안의 도산서원 건립과 비슷한 시기에 여강서원이 건립되었다. 여강서원은 추가로 안동 출신의 뛰어난 두제자인 류성룡과 김성일을 배향하였으며, 후일 호계서원으로 사액되었다. 호계서원은 일찍이 屛虎是非와 관련하여 연구자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 되었으 며, 근래에는 호계서원 자체를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루려는 일련의 시도가 나타나 주목된다. 그리고 최근에는 호계서원의 복원으로 세간의 이목이 쏠린 바있다. 본 논문은 호계서원의 건립 과정과 호계서원이 안동 또는 경상도에서 지닌 지위를 검토함으로써 서원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 한 걸음 더 다가서고자 하였 다. 경상도의 거점 지역인 안동에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으로서 안동 권역을 대표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 명성에 맞게 소유한 경제력도 안동 내 보통 서원의 수 배에서 수십 배에 달하는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원임록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호계서원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호계서원의 원임록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중엽에 걸쳐 약 60년 정도의 분량이 현전하고 있다. 이를 도산서원과 병산서원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호계서원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호계서원 원장으로 선임된 사람은 대부분 대과나 소과에 급제한 인물들이었는데, 그 비율이 두 서원의 경우보다 높았다. 그리고 호계서원장을 역임한 후 병산서원장에 선임된 경우가 22인, 도산서원장에 선임된 경우가 19인 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호계서원의 원장을 역임한 이들의 위상이 대단히 뛰어난 명망가였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호계서원이 안동 나아가 경상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KCI등재

        호계서원의 지식문화 인프라 : 서적의 생산과 보급

        김소희 한국서원학회 2022 한국서원학보 Vol.15 No.-

        이 글은 16~18세기에 虎溪書院(廬江書院)에서 이루어진 서적의 생산과 보급을 통해 이 서원만이 지니는 출판문화사적인 특징과 의의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 결과 16세기는 『理學通錄』과 『退溪集』이 간행되는 상황에서 여강서원이 특정 단계의 교정을 진행하거나 刊本 제작을 위한 臺本을 제공하는 등 퇴계저술의 확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여강서원목활자는 퇴계학맥을 계승한 문인들의 인적망을 기반으로 지역사회 지식의 생산과 보급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출판문화사 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7세기에는 鶴峯과 西厓의 문집이 간행・보급되었는데, 『학봉집』은 1647년 여강서원에서 初刊된 이래로 李栽와 李象靖에 이르러 年譜 (1726년)와 續集(1781년)이 續刊되었다. 1633년에는 합천에서 『서애집』이 초간 되었는데, 당시 여강서원은 합천초간본 제작을 위한 淨書本을 담당할 정도로 상당한 출판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18세기에 이재가 편찬한 『朱書講錄刊補』는 1743~1767년까지 장기간의 교정 끝에 1785년에 간행되어, 영남지역 가문을 중심으로 균형있게 보급되었다. 즉 호계서원은 16세기에는 퇴계의 저서를 중심으로 서적을 생산・보급하였고, 17세기 초에는 『서애집』간행을 위한 협업의 토대를 구축했다. 그러다가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이재-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봉 계열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선대의 업적을 추숭하고 사상을 보급하기 위한 목적에서 서적을 간행하고 보급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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