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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통해 본 신채호의 고구려사 연구방법과 인식에 대한 연구

        조선옥 ( Jo Seon-ok ) 단국사학회 2019 史學志 Vol.58 No.-

        본고는 『조선상고사』의 고구려사 서술과 인식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신채호의 역사연구 방법론과 역사 인식 체계를 살핀 것이다. 신채호는 망명 이전부터 활발한 역사 저술 활동을 펼쳐 왔는데, 국권피탈에 의해 폄훼된 민족정신의 회복이 역사저작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역사 인식은 중국 망명 이후 1924년 북경에 머무르면서 다양한 자료들과 양계초의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조선상고사』는 신채호가 북경에 머무르며 쓰인 고대사 연구서로서, 그의 역사인식 체계와 고대사 연구방법론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 연구방법론의 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상고사』 서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이 고구려와 중국 간의 전쟁사였다. 신채호는 고구려의 전쟁사를 투쟁사적 관점에서 인식하였는데 역사를‘我와 非我의 투쟁’이라고 인식한 것이 그 예시이다. 신채호의 고구려사 서술의 특징적 면모는 한국과 중국 정사에 기록된 고구려사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야사에 서술된 고구려사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채호가 한국 정사의 고구려사 기록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이유는, 고려-조선의 사가들이 고구려의 역사를 외세 의존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채호는 중국 정사에 기록된 한국의 고대사와 고구려사 기록들을 대부분 불신하거나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신채호의 관점이 한사군 재요동설로, 신채호가 외부 세력의 유입과 지배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에서 기인했다. 정사에 대한 신채호의 부정적 평가와 비판적 인식은 사료 찬자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했다. 『三國史記』와 김부식에 대한 인식과 평가, 『晋書』와 당태종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그것이다. 이러한 기존 사서와 사가들에 대한 불신은 야사를 사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신채호의 고구려사 서술의 또 다른 특징적 면모는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연개소문과 차대왕, 강이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연개소문과 차대왕은 『삼국사기』 등의 기존 문헌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강이식은 정사의 기록에서 전혀 언급된 바 없는 새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위 세 인물들을 중국과의 전쟁에서 고구려를 수호한 전쟁 영웅으로 묘사했으며, 이에 대비되는 인물로 당태종을 언급해 연개소문과의 대결구도로 기술한 점이 특징적이다. 신채호의 고구려사 서술의 마지막 특징적 면모는 고고학적 연구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근대 역사학 연구 방법론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는 것에 있다. 망명 초기였던 1910년대 초반 일제에 의해 비밀리에 행해지던 광개토왕릉비를 직접 답사하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라고 일컬어 질만 하다. 본고는 기존에 소홀히 여겨졌던 『조선상고사』의 고구려사 서술을 통해 신채호의 고구려사 인식과 역사 연구 방법론의 체계를 되짚어 보았다. 신채호가 백제와 신라에 비해 고구려의 역사를 비중 있게 다룬 이유는 6-7세기 강대한 제국이었던 수·당에 맞서 승리한 고구려의 역사가 외세의존적인 당시의 경향을 탈피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는 신채호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제시한 투쟁론이었으며 강한 열망의 표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paper aims at examining Shin Chaeho’s methodology of historical research and perception through his historical description and understanding of Goguryeo in Joseon Sanggosa. he'd shown an active writing about history books since before his exile. Because he thought that national spirit can be restored by writing history books that improve the national consciousness undermined by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And he was influenced by the doctrine of social evolution through Liang Qichao when he was in Beijing in 1924 after his exile to China. Since then, his view of history is different than in the past. Joseon Sanggosa was written by Shin Chaeho while he was staying in Beijing. Thus, this book can be understood as the overview suggesting his historical recognition system and the development process of ancient history methodology. The one of the features of his historical descriptions is that he had a doubt about records of the official historical books in Korea and China, and trusted other sources and materials in unofficial historical books. According to his opinion, these official historical books, written during the Koryo and Joseon Dynasties, were affected by historians having the perspective of dependence on foreign power. Besides, he distrusted the authors and disbelieved the records about ancient Korean history of the official historical books in China. Especially, this critical perception is shown through his historical estimations of the Busik Kim`s Samguksagi, Jin-shu and emperor Taizong of Tang. In addition, Han Sa Gun Yo-Dong theory, one of Shin Chaeho’s unique arguments, is from his perception that regards foreign influences and dominance as negative ones. After all, this distrust about existing research and old historians made him use unofficial history books as historical materials actively. Another distinctive aspect of his writing is an emphasis on the historical characters and events. He estimated highly Yeon Gaesomun, King Chadae and Kang Yisik. Yeon Gaesomun and King Chadae received a negative evaluation in existing literature, such as Samguksagi. Moreover, Kang Yisik was a historical figure who had not been mentioned in official historical books before. On the other hand, Shin Chaeho described these historical people as the war heroes who defended the Goguryeo and made a confrontational structure between Yeon Gaesomun and emperor Taizong of Tang. Lastly, He emphasized the necessity of research method on the modern history by presenting archaeological research methodology. For example, Surprisingly, he explored the Gwanggaeto Stele that was forbidden to the general public in the early 1910's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bove all, he consider Goguryo’s victories over Sui and Tang Dynasty, two strong empires in the 6-7th century, as the means to overcome the tendency of dependence on foreign power at that time. Therefore, he treated heavily the history of Goguryo among the three kingdom. In conclusion. all this is the struggles and strong desire to achieve the independence for his country.

      • KCI등재

        단재 신채호의 국권회복을 향한 사상과 행동

        정윤재(CHUNG YOON-JAE)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2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1 No.2

        지식인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말과 글, 그리고 담당하는 일에 의해 시작되거나 심화된다. 그런데 지식인이 지적 리더십(intellectual leadership)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영향을 받은 추종자들이 어떤 문제제기 및 그 해결과정에 함께 참여하면서 토론을 포함 한 각종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통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 지적작업을 진행하면서 주변 사람들과는 아무런 의미있는 인간적, 지적 교류가 없이 고립된 천재철학자의 생활을 지속했던 비트겐슈타인과 주변의 소피스트들이나 제자들, 그리고 일반인들과 아테네에서의 이상적인 삶에 대해 줄곧 논쟁하다가 결국은 아테네의 청년들을 ‘잘못 이끈’ 죄;로 독배를 마셨던 소크라테스는 서로 아주 대조적이다. 이 경우 지적리더 십을 발휘했던 사람은 물론 소크라테스다. 실제 삶의 세계속에서 비트겐스타인은 다른 사람들을 이끌었거나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이끌림을 당하는 경우가 없었지만, 소크라테스는 계속적인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서로 배우며 가르치는 지적 리더십 과정의 한복판에서 살았다. 우리가 “역사민족주의자” 혹은 “근대적 민족사관”의 개창자로 알고 있는 단재 신채호(丹齊 申采浩, 1880-1936)는 바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지적리더십을 발휘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당대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철저한 도전의식으로 일관하면서 국권상실기 대한제국과 일제강점하의 조선을 구하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치열한 글쓰기와 말하기,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에 매진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주변의 의식있는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민중계몽에 앞장서며 자신의 생각을 펼쳤으며, 존경받는 지식인 혹은 소문이 자자한 애국지사로서 그를 따르는 주변의 인물들 및 대중들과 공통목적의 성취를 위해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그는 또 여러 언론사에 초빙되어 수많은 논설을 쓰며 민족독립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폈다. 일제강점기동안 중국으로 망명하여 동지들과 함께 군사적 무장투쟁론을 주창하고 이를 실천하기에 전력으로 매진하였다. 또 그의 글이나 저작들은 당대 주요 신문들에 연재되어 많은 엘리트와 백성들을 고무하고 개명시켰다.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는 안재홍, 홍명희, 문일평, 이극로, 이윤재, 심훈, 정인보 등 살아 생전 그와 교분이 있던 많은 지식인들이 평가한 바 있으며, 그가 중국 땅 여순의 감옥에서 옥사하였을 때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당시의 유수 언론기관들이 적극 나서 장례비를 각출하여 그를 추모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신채호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각각 처했던 국가적 현실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행동, 즉, 지적 리더십의 성격이 달리 나타났다. 즉, 소크라테스는 조국 아테네의 자부심 넘치는 시민 중 한 사람으로 수많은 논쟁과 갈등속에서 거침없이 자유롭게 활동했지만, 신채호에게는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조국이 없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암약하거나 하시라도 잡혀갈 각오로 글을 써야 했다. 언론인, 역사가로서의 신채호는 언제나 목숨으로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에서 속박과 부자유의 삶을 살았다. 즉, 소크라테스는 조국이 있는 행복한 지식인이었지만, 신채호는 조국이 없는 불행한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양인은 적어도 다음 네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첫째, 신채호에 있어서 국권상실과 일제하 식민지의 불행한 현실은 그 자체로서 악(惡)이기 때문에, 그런 현실과 타협이란 있을 수 없었고 폭력을 포함하여 그것에 대항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선(善)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현실에서 관찰되는 부조리와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도 "악법도 법이다”라며 그 모든 것을 훌륭한 조국에 대한 자긍심으로 관용하고 타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폭력사용과 같은 비합리적인 행태는 언제나 회피와 비판의 대상이었다. 둘째, 신채호는 국권상실과 망국의 좌절이 지속되는 가운 처음에는 문제해결자로서 “영웅”을 기대하기도 하였고 마침내는 무정부주의사상에 경도되어 내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계하여 항일과 독립쟁취의 방도를 구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크라테스는 편안하고 여유있는 삶을 즐기는 가운데 보다 이상적인 민족국가형태와 선 혹은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에 대한 “절대정의” (episteme)를 추구하며 진지한 논쟁을 즐기면서 누구든지 개인이 절대화 혹은 영웅시되는 경향을 경계하였다. 셋째, 신채호는, 실제 자신의 삶속에서 공적인 임무수행과 관련한 주요한 결단의 시기마다 부인과 가족이라는 사적 차원의 ’장애물’을, 마치 계백장군이 그랬던 것처럼 포기해버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비록 자신의 유명한 악처 크산티페때문에 자신이 존경받는 남편으로서 단란한 가정에서의 행복을 덜 누렸을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선한 아테네 도시국가의 정의와 질서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소임을 다하기 위해 부인과 가정을 의도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넷째, 소크라테스는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욕망에 가득찬 진리추구자로서 사람들과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 하면서도 결국은 무지의 자각을 강조하며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열어놓은 것만으로도 족한 편안한 여유속에서 지냈지만. 신채호는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살길을 찾기위해 분투하는 문제해결자로서 언제나 구체적이고 명확한 행동차원의 처방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것을 소임으로 여겼다. 즉 소크라테스가 지혜와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실천가였다면, 신채호는 현실적 문제해결의 처방책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행동하면서 각자 지적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채호와 소크라테스는 조국의 없음과 있음에 따라 각각 다른 내용의 지적 리더십을 발휘했음을 확인하였다. 동시에 우리는 정치사회적 문제해결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지식인들이 추구하는 지식과 행동을 ‘보편적 진리탐구’라는 하나의 시각만으로 평가 할 수는 없음도 알게 되었다. 어느 지식인이 처해있는 정치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그리고 그가 스스로 주체하기 어렵다고 인식하는 양심의 명령에 따라 그(녀)가 추구하는 지식은 “진리” (theoria)를 최고기준으로 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또는 “좋은 행동” (praxis)을 최고기준으로 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조국이 없음에서 비롯되는 불행속에서 살았던 신채호의 지적작업과 행동은 조국이 회복된 상태에서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사는 가운데 있는 ‘보편적 진리탐구’에 경도되어있는 현대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평가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여전히 앞뒤가 꽉 막힌 “닫힌 민족주의자”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는 민족이 처한 불행에 대해 열정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개인차원의 고난을 감당하며 그 해결을 추구했던 떳떳한 민족주의 지식인이었다.

      • KCI등재

        신채호와 함석헌 : 역사 인식의 관련성 시고

        이만열(Yi, Mahn-yol) 한국사학사학회 2021 韓國史學史學報 Vol.- No.43

        신채호(1880-1936)와 함석헌(1901-1989)은 일제 강점기를 경험했던 동시 대의 지식인으로 한국사 연구를 시도했던 분들이다. 20년 차이를 두고 출생했 던 그들은 직접 접촉한 바가 없지만, 함석헌이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 사』(이하 『조선역사』)에는 동 시대의 역사가로 신채호의 이름을 유일하게 거론 하고, 역사 인식에서도 신채호와 비슷한 점이 보인다. 그 유사성을 밝혀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필자는 함석헌이 『조선역사』를 『성서조선』에 연재할 때(1934-1935), 신채 호의 저술 대부분이 이미 간행되어 식자들에게 열람이 가능했다는 점을 주시 했다. 함석헌은 고려 중기의 ‘묘청(妙淸)의 난’을 설명하면서 신채호가 이 사건 을 두고 ‘조선역사 1천년래(來) 제일대사건’이라고 한 점을 인용했다. 이 논문이 1929년에 출간된 『조선사연구초』라는 책에 실렸던 것으로 보아, 함석헌이 이 무렵 신채호의 이같은 글을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역사 서술은 주로 한국 고대사에 국한되어 있다. 함석헌의 『조선역 사』중 고대사 부분이 신채호와 겹치는 부분이 더러 보인다. 한국 고대사를 민족 이동설의 관점에서 본 것이나, 단군시대 ‘신지(神誌)’에 대한 인식, 단군 이후의 역사를 ‘열국시대’로 서술한 점 등은 신채호와 함석헌에게서 거의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다. 한사군의 인식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삼국시대를 고구려 중심으로 인식한다는 점이 일치한다. 이는 일제 강점하의 독립운동의 기반으로서 고구려 의 대외저항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채호는 역사의 삼대원소를 때·땅·사람이라고 했으나 함석헌은 지리적 결 정론에 유의하면서도 섭리사관을 강조했다. 그러나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일치한다. 신채호와 함석헌은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 사에서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서술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이것은 후일 의 과제다. Shin Chae-ho(1880-1936) and Ham Sok-hon(1901-1989) were contemporary intellectuals sharing the experience in the period of the forced occupation of Korea by the Japanese imperial regime(1910-1945). Born 20 years apart, they were not in direct contact with each other, yet Shin is the only historian mentioned in Ham s The History of Choseon from the Standpoint of the Sacred Scripture(Bible) and we find in Ham s view of history some similarities with Shin s. This article aims at elucidating those similarities. I noticed the fact that when Ham wrote in serial his The History of Choseon in the journal the Bible and Choseon the most of Shin s writings had already been published, available to intellectuals. In his exposition on the rebellion of Myocheong, Ham quotes Shin s reference to the incident as a prime event of Korean history since one thousand years before. In view of the fact that Shin s article is found in the book Excerpts from the Study of Korean History published in 1929, Ham then apparently read the book. Shin s writings on history is confined mostly to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The part of ancient era in Ham s Korean History is found here and there overlapping with Shin s description. For instance, what are closely common in two historians histories include: seeing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based on the theory of migration of the (Korean) nation; understanding about The Divine Chronicle (Shin-ji); describing the history since Tan-gun as the period of various kingdoms. There are disagreements in their views on Han-sagun. Yet they are in agreement in the perception of the three-kingdoms era with Koguryo at the center, perhaps because they highly rated the strength of Koguryo in resisting external powers, which was the foundation of independence movement against the colonialization by imperialist Japan. Shin regarded the period, the territory, and the people as three essential factors of history whereas Ham put emphasis on providence, also bearing in mind the theory of geographical conditions as decisive factors. Yet they are in concord in regarding people(minjung) as the protagonist of history. But Shin and Ham, unlike their arguments, don t seem to have succeeded in applying the view to their historiography of Korea. It remains a task to pursue further.

      • KCI등재

        이광수와 신채호의 만남, 그리고 영향

        김주현(Kim, Ju-hyeon) 한국현대문학회 2016 한국현대문학연구 Vol.0 No.48

        이광수는 신채호를 여러 차례 만났고, 또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광수가 신채호를 만난 것은 총 4차례 정도 확인된다. 1910년 정주에서, 1913년 상해에서, 1918년 북경에서, 그리고 1919년 상해에서이다. 물론 이광수는 신채호를 만나기 이전부터 신채호의 글을 읽었고, 그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광수가 『우리 영웅』을 썼을 때부터 이미 신채호의『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을 읽었을 것으로 보이는 징후들이 포착된다. 이후에도 신채호의 글을 적지 않게 읽었고, 특히 그의 역사관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의 『이순신』과 『사랑의 동명왕』등에서도 신채호의 영향이 엿보인다. 1918년경 북경에서 이광수와 신채호의 만남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만남에서 신채호는 이광수에게 제언 내지 충고를 한 것으로 보이며, 신채호의 혈전론이 이광수의 『청년독립단선언서』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919년 다시 상해에서 만난 신채호와 이광수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각자의 길을 간다. 그것은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대통령 추대와 독립 노선의 차이 등 복잡한 상황으로 말미암는다. 이로 인해 신채호는 북경으로 돌아가 『천고』 발간에 나서고, 이광수는 『독립신문』 주필을 그만두고 몰래 국내에 들어옴으로써 이들은 완전한 타인으로 살아간다. 대의와 절개를 강조했던 신채호와 사랑과 용서를 강조했던 이광수이었기에 일제의 야욕 앞에서 하나는 비타협의 감옥행을, 하나는 타협을 통한 훼절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Lee Gwangsu had met Shin Chaeho several times, who significantly influenced him. It has been verified that Lee Gwangsu had met Shin Chaeho about four times. They met in 1910 at Jeongju, in 1913 at Shanghai, in 1918 at Beijing, and again in 1919 at Shanghi. Before Lee Gwangsu met with Shin, Lee already knew of Shin through Shin’s works. It appears that Lee Gwangsu had read Shin Chaeho’s “Lee Sunsin, the First Hero of Navy” before he wrote “Our Hero”. It seems that Lee had read a considerable amount of Shin Chaeho’s works and been influenced much by Shin Chaeho’s perception of history. The Influence of Shin over Lee can also be found in Lee Gwangsu’s works, such as “Lee Sunsin” and Love of King Dong Myeong. A meeting between Lee Gwangsu and Shin Chaeho roughly around 1918 seems to have special implications. During their meeting, Shin Chaeho appeared to have given offers or advice to Lee Gwangsu. Shin Chaeho’s Bloody Battle theory tends to be traceable in Lee Gwangsu’s “the Declaration of Youth Independence Group”. In 1919, when Shin Chaeho and Lee Gwangsu met again in Shanghai, they concerted their efforts to build a provisional government only to go on their separate ways. The two’s separation was the result of the complex situation, including selecting Lee Seungman as the president and differing views on how to achieve independence of Korea, with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Their departure led Shin Chaeho to go back to Beijing and publish Tienku, and Lee Gwangsu to leave the chief editor position of Independent Newspaper and secretly come back to Korea. The growing gap between them left the two completely estranged. Since Shin Chaeho stressed integrity and cause whereas Lee Gwangsu emphasized love and forgiveness, one followed an uncompromised path to prison while the other chose to compromise and forgo his integrity under the Japanese oppression.

      • KCI등재

        北韓 소장 미공개 申采浩 遺稿의 현황과 성격

        박걸순 한국근현대사학회 2016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79 No.-

        Shin Chae-ho was a representative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of Korea. He left numerous articles in various fields, including history. His posthumous work is currently possessed by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DPRK). In the meantime, booklets of Shin Chae-ho has been published in Republic of Korea(ROK). However, the content of these booklets is limited to partial materials transferred via an unofficial route, because access to the posthumous work of Shin Chae-ho was strictly restricted by DPRK. In 2006, while the complete collection of Shin Chae-ho was under way for publication, the list and some photos of his posthumous works had been obtained during the contact process with DPRK. According to this information, it is confirmed that Shin Chae-ho’s posthumous works are at least 53 books with more than 4,979 pages. According to the list of his posthumous works, it is apparent that his publication was much more extensive than what was originally thought. In addition, it enables to properly understand his writing styles and his original form of his posthumous works can be recovered. His unpublished posthumous works suggests a new milestone of research regarding Shin Chae-ho. Shin Chae-ho and a German playwright, Bertolt Brecht have much in common in numerous ways. In the era of German division, Brecht’s complete collection had been led by both German – West and East by collecting Brecht’s individual work since 1983. In 1999, after 17 years of hard effort, the enormous complete collection was accomplished. In the meantime, both German became unified. Shin Chae-ho is an important figure as influential as Brecht in terms of his scholarly multidimensionality and modern intellectual history. In the era of Korean division, compiling his posthumous work by both Koreas (South [ROK] and North [DPRK]) is an important process mediated by scholarly effort. It is believed that when the division of data is overcome, the unification is possible too. 1928년 신채호가 일제에 피체되어 수감된 후, 그의 많은 유고는 천진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던 박용태에게 일시 맡겨졌다. 그런데 이후 신채호 유고는 해방 후 북경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북한으로 유입되어, 현재 평양 인민대학습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간 남한에서 신채호자료가 집성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이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신채호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전해진 일부 자료를 제외하고는 수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신채호 전집 발간을 추진하던 2006년, 신채호 유고 수집을 위한 북한과의 접촉과정에서 유고 목록과 일부 사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신채로 유고가 최소 53건 4,979쪽 이상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가 북한과의 접촉과정과 목록을 공개하는 것은 그 사실을 공론화함으로써 더 이상 북한이 민족의 자산인 신채호 유고를 감춰두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북한이 제시한 신채호 유고 목록만 가지고 그 구체적 내용과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목록만 가지고도 그의 저술 세계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대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글쓰기 방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저술 원형을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신채호의 미공개 유고는 그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이정을 제시해 준다. 신채호와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분단시대 독일은 1983년부터 동서독이 함께 브레히트의 저작을 모아 공동으로 전집을 편찬해 나갔다. 독일은 1999년, 17년의 대장정 끝에 31권에 달하는 방대한 전집 편찬의 결실을 맺었고, 그 도중에 통일을 맞이하였다. 신채호는 학문적 다변성과 근대 지성사에서 브레히트에 뒤지지 않는 인물이다. 분단시대 남북한이 그의 유고를 모아 공동으로 전집을 편찬해 내는 것은 학문적으로 통일의 물꼬를 여는 중요한 작업이다. 자료의 분단이 극복될 때 통일도 가능할 것이다.

      • 신채호의 문학의 기본특징

        한중모 ( Jung Mo Han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35 No.-

        광복 전 문학사에서 단재 신채호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학가의 한사람이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강점과 식민지통치로 조선민족이 식민지 노예의 비운을 겪고 있던 엄혹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진보적인 문필활동을 전개한 애국문화계몽 운동가이고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특이한 창작적 개성을 가진 작가였다. 조선에 있을 때 창작발표된 작품들과 해외 망명시기에 집필된 작품들을 두루 종합하여 분석연구해보면 신채호의 문학에서 두드러지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포착할 수 있다. 그의 문학작품에 관통되어있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분방하고 기발한 낭만주의적인 수법과 형상을 통하여 애국주의사상을 불처럼 뜨겁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의 문학에서 애국주의 사상은 망국에 대한 울분과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 조국광복에 대한 열망과 조국을 위한 희생정신, 일제침략세력과 매국역적배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 조국과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등 여러모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신채호는 시종일관 순수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반대배격하고 문학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적극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문학이 그 미학정서적 감화력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애국주의정신으로 교양하는데서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커다란 기능과 역할을 한다고 간주하였다. 신채호는 문학을 사상교양의 힘 있는 수단으로 보는 견해와 관점으로부터 인민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감화교양하는데 이바지하는 작품들의 출현을 촉구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애국주의 교양에 도움을 주는 작품창작에 주력하였다. 신채호는 인민들 속에 애국심을 키워주는데서 자기 나라 역사를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로부터 문학활동에서 역사물 창작에 깊은 관심을 돌리었다. 나라의 존엄과 민족의 운명을 지키고 빛내는데서 애국자, 영웅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자기의 역사전기소설들에서 조선의 애국명장들인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의 활동과 투쟁에 대하여 묘사하였다. 독특한 낭만주의적인 수법과 형상을 통하여 애국주의 사상을 강렬하게 표현한 신채호의 문학 특징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미완성 중편소설 꿈하늘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주인공 한놈이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면서 엄청나게 큰 무궁화꽃송이에 앉아서 고구려 군사들이 수나라의 수 백 만 대군을 몰살시킨 살수 싸움의 승리도 목격하고 을지문덕 장군과 무궁화 꽃송이가 주고받는 화답시에 담긴 우국심에 눈물도 흘리는 등 특이한 형상을 통하여 악독한 일제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조국광복을 이룩한 데 대한 사상을 예술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조국의 광복을 성취하고 민족의 융성번영을 이룩한 데 대한 강렬한 지향은 신채호의 시에서도 세차게 굽이쳐 흐르고 있다. 한나라 생각, 너의 것등의 작품에서 조국을 위한 투쟁에서의 헌신성과 자기희생 정신에 대한 시적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신채호의 문학에서 반일 애국사상과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 그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지향은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민족자주의식과 결부되어 표현되고 있다. 꿈하늘에서는 한놈이 님나라에서 본 옛날 성현과 영웅들에 대하여 서술한 대목에 이르기까지 조선민족의 기개와 용맹, 슬기와 재능에 대하여 긍지높이 형상화하고 있다. 1928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에 창작된 것으로 인정되는 단편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창작활동의 말기에 신채호의 문학은 무산민중혁명의 승리를 형상적으로 천명하는 데로 나아갔다.신채호의 문학은 일정한 사상예술적 제한성을 가지고 있지만 일제 식민통치의 암담한 시기 특이한 낭만주의적 수법과 형상으로 애국주의사상을 강렬하게 표현한 것으로 하여 조선의 근대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Danjae Sin Chae-Ho is a literary man who secures a particular position from a literary history before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He is a ideologist of enlightenment who does progressive literary pursuits in severe social environment where Joseon's nation had the misfortune owing to occupation of Japan and a colonial policy. Sin Chae-Ho is also a prominent historian and writer who has individuality of particular creation. The best fundamental figure of Sin Chae-Ho's literature is to have free and uncommon romanticism in a gloomy times of Japan's colonial policy and to express intensely patrio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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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 소설의 "민중" 연구

        김희주 ( Heejoo Kim ) 민족어문학회 2016 어문논집 Vol.- No.76

        신채호 소설에서 민중은 그가 지향하는 당대 현실의 극복에 중요한 의미로 등 장한다. 신채호에게 있어 ``국민``과 ``민중``은 다른 맥락으로 존재한다. 이 두 집단은 외형적으로는 민족의 일원이지만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다르다. 그의 소 설과 정론을 통찰하면 ``국민``은 언제나 교화의 대상으로 존재하며 ``민중``은 깨달 음으로 운집된, 신채호의 지향인 무력투쟁으로 나아가는 대상으로 형상된다. 여기 서 신채호의 ``아``의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는 그의 사상의 근간을 형성 하는 개념이다. 신채호는 국민 개개인이 모두 대아적 자세로 나아가 국가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대아적 자세로 나아가지 못하는 국민 각자에 게 국난위기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10년 이전 신채호는 역사전기소설을 써 영 웅을 기다리며 영웅만이 세계와 교섭하고 세계와 분투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 다고 주장하였다. 신채호의 민족의 영웅, 국민의 영웅에 대한 이해는 곧 인민주권 의 민족주의사관, 무정부주의 사관으로까지 확대된다. 아나키즘은 거대한 권력구 조의 폭력성에 대한 저항과 함께 국민이 의식적인 민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 능성을 제시하였다. 의식적인 민중항쟁의 목적은 신채호가 지향하는 국민이 주체 가 되는 국가이다. 이미 1920년대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주창한 신채호는 민중 항쟁을 토대로 소설을 집필한다. 이 소설이 지어진 시기는 1920년대 후반이다. 신채호의 소설은 당시 주를 이루던 사회주의 소설의 경향과 다른 행보를 걷는다. 1920년 이전 그의 소설들은 개인의 삶이 국가와 연계되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된 다. 소설에서 보이는 개별인물들의 각성 또한 민족통합, 국가위기의 극복과 연계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민중의 각성 또한 절대 권력에 저항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와 연계된다. ``아``의 각성은 민중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점 을 시사한다. ``아``라는 민족구성원이 대아로 변화될 때 항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는 신채호의 신념은 그대로 문학적 형상화로 이어진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단순 히 근대 초기의 근대양식으로 논평되기보다 그의 사상의 형상화로써 이해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제공한다. The people`` in Shin`s fiction appears as a significant implication of overcoming contemporary reality. In Shin`s thought, Public and the people are different concepts. These two groups are being as a part of the nation member, but the implication of each different. Through his fictions and political discourse, the public are being as an object of edification but the people as an armed struggle. The concept of ``I``(ego) is an important signification that kind of forms the basis of his thought. He emphasized the change and innovation of the nation and urged that all the nation members proceeded one`s true and higher self at crisis of nation. Before 1910, Shin wrote some fictional biographies of historical person and carried his point which only heroes could negotiate and win our independence. Shin`s understanding about the heroes of the nation and the people was extended to the view of the people`s sovereignty and anarchism. In the late 1920s, he wrote a fiction about the movement which showed the power of the people. Shin stressed self-awareness of the people in that fiction. The people`s resistance against the unjustifiable and imperialistic power begins from the self-consciousness of the people. Shin tried to urge the awakening of each nation members through his fictions. Therefore, the self-awareness of ``I(ego)`` at the national crisis implied a crucial point as a connection of possibility of the people`s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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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된 근대 주체와 민족 - 신채호의 "아(我)"와 "아(我)의 확장" 재인식

        송병삼 ( Byeong Sam Song ) 아시아문화학술원 2016 인문사회 21 Vol.7 No.3

        이 연구는 신채호의 ‘아(我)’를 근대적 개인 주체 개념으로 보거나 그의 민족 개념을 서구적 민족주의의 그것으로 인식(번역)하는 기존의 관점들에 대해서 재이해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신채호는 ‘아’의 개념을 소아와 대아로 구별하고, 소아를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존재로, 대아는 영혼적이자 정신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개인의 사회적 존재와 윤리적 실천에 입각해서, 소와 대, 체와 혼으로 구분하는 방식은 유학적 세계관의 지식인들이 갖는 개념체계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맹자의 대체와 소체의 구별 방식에서 비롯한다. 신채호의 소아와 대아의 구분은 박은식의 가아(假我)와 진아(眞我)의 구분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신채호의 대아는 진아의 양지(良知), 곧 마음은 대아의 정신성이며 그 현실화-실천의식인 것이다. 식민치하에서의 국권회복의 절대적 현실 과제에서 양명학적 지행합일의 실천성은 신채호의 대아로서의 자각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민족회복이라는 도덕 실천의 정신적인 능동적 자각을 강조하는 것이 신채호에게서는 ‘아의 확장’ 또는 ‘대아’론의 핵심인 것이다. 신채호의 대아는 기존의 연구들에서 민족으로, 그리고 근대적 주체로서 번역되어 다루어짐으로써 파시즘이나 제국주의에서 표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신채호의 아의 확장으로서의 민족이란 개념은 근대 국민국가건설과정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미디어의 효과에 따른 상상의 공동체에 기반한 자기동일성에 머물러서 타자를 폭력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서구적 민족주의와는 차이를 갖는다. 개인적 자아에 대한 도덕적 원리의 출발의 기본으로서 대아로서의 아를 깨닫는 내용이 바로 신채호의 민족 개념이고, 현존재적 정체성을 깨우치는 것이 다른 현실적인 대응 방법에 선행하여 절대적이고 필수적으로 선결되어야 할 문제로 제기된 것이었다. 신채호의 역사 서사물들은 ‘큰 나’를 지향하는 ‘작은 나’들의 깨달음을 위해서 역사적 영웅들을 불러낸다. 역사적 상상 속에서 영웅들은 대아적인 성품을 발휘하는 모범으로서 재현된다. 1910년 이전까지의 영웅전기체 서사에서부터 1916년 「꿈하늘」에 이르기까지 민족구성원으로서 여러 명의 소아(小我)에 불과한 ‘한 놈’들이 대아(大我)의 모습을 역사적 영웅을 통해서 찾고 확인하고 자각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의 글들과 서사들에서 신채호가 아나키즘 사상을 보여주었을 때에도 대아(大我)가 되는 기준을 민족단위에서 피식민이나 피지배 민족들의 입장과 그들과의 연대의 세계성에까지 ‘아의 확장’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Shin chae-ho distinguished the concept of ‘I(self)’ to ‘So-A’(Small-self)and ‘Dae-A’(Large-Self). He conceptualized Small-Self as physical presence, and Large-Self as spiritual presence. By the way, thus the concept approach is distinguished conventions for Confucian intellectuals who have emphasized the ethical practice of individual as social existence and assorted Small-Self and Large-Self, Physical body and Spirit. And this logic originated with the Works of Mencius that distinguished between human personality Small body and Large body, also as False-Self and True-Self. Shin chae-ho’s Small-Large-Self conception was in thiscontext, his Large-Self was spirit of True-Self and ethical practice consciousness on real under colonial ruled by imperialism of Japan. Independence of modern Chosunethnos was what ethical practice end, this active awareness of conscious was that of core of Large-Self and ‘Extension of Self’ theory. Shin chae-ho``s Small-Self oriented identity consciousness toward Large-Self. Hishistorical hero was represented as example of the nature of Large-Self. Hishistorical hero biographies in 1910 from the previous, to Ggum-ha-nul(Dream Sky)in 1916, he narrated awareness courses of han-nom(ones) as ethnicity membership which had become ethical criterion of Large-Self. Furthermore, In 1920s, when Shinchae-ho was working as an anarchist, ‘Extension of Self’ to anarchist was based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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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기록’과 영웅 ‘출현’의 관계: 신채호의 《을지문덕》 저술을 중심으로

        김수자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2020 동방학 Vol.0 No.42

        역사가의 ‘역사적 상상력’에 의해 과거의 사실이 ‘새롭게’ 재구성되고 역사 글쓰기의 목적의식적 성격이 한국에서 강하게 드러나던 때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후 시기이다. 대표적 인물로 ‘영광스러운 민족사’, ‘영웅의 역사’ 책을 저술한 신채호를 꼽을 수 있다. 신채호는 역사상에 실재했던 국난의 위기를 극복해낸 영웅의 면모를 ‘극대화’시키는 저술 활동을 통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 회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역사 영웅을 드러냄으로써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신채호의 첫 영웅전 저술로는 1908년에 발간된 『을지문덕』이다. 『을지문덕』 저술시 신채호는 ‘역사적 상상력’만이 아니라 실제로 국내 역사서들뿐 아니라 중국의사서들도 섭렵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채호의 『을지문덕』의 저술 동기가 영웅의 출현이라는 기대감뿐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채호는 『을지문덕』을 저술하며기존에 영웅의 역사 ‘기록’의 소략함이 영웅의 부재로 이어졌다며 영웅에 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을지문덕관련 ‘기록’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꼼꼼하게 정리, 비교 분석하였으며 이것을 책의한 장으로 구성하였다. 신채호가 『을지문덕』을 저술하기 위해 참고하였던 대표적인자료들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사강목(東史綱目)』,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여지승람(輿地勝覺)』, 『성호사설(星湖僿說)』 외에도 중국의 역사서인 『수사(隋史)』 등이 있다. 신채호는 이 책들을 섭렵하며 고려시대 김부식에서부터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고구려사와 을지문덕에 대한 인식을 수용 및 비판하는 자세를 보였다. 신채호는 현재 한국의 힘이 약해진 것은 ‘승리의 역사’의 부재 때문이고 이것은영웅 역사의 부재 때문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영웅이 부족한 것은 한국역사 속 영웅에 대한 기록의 소력함과 영웅들의 기록을 중심하지 않았던 후손들의태도 때문이라며 기록의 수집 및 보존을 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을지문덕』은 발간 이후 지속적으로 신문에 판매 광고가 실렸으며 주요 도시의책방에서 판매,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이것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후에는 조선총독부가 금서로 분류하여 압수와 수색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대립의 극심한 혼란과 신생 독립국가 수립의 염원을 담은 『을지문덕전』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구한말 신채호가 저술한 『을지문덕』을 저본으로하고 있으며 달라진 시대적 상황의 혼란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있다. 이와같이 해방 이후에도 을지문덕에 대한 재현물에 기초가 된 것은 신채호의 『을지문덕』이었다. The historical facts were newly reconstructed by the historian's 'historical imagination' and the 'purpose consciousness’ was revealed strongly. The representative figure is Shin Chaeho, who describes “glorious national history” and the history of heroes. Shin Chaeho wrote the book to "maximize" the behavior of a hero who overcame the crisis of the national crisis, which had existed in history for the purpose of restoring the identity of the nation and nation. This is intimately connected with the historical situation in which the heroes of the nation were sought to defend national sovereignty by revealing historical heroes. The Great Figures mentioned by Shin Chaeho as history heroes include Euljimundeok, Kwanggaedo Great King, Yeongaesomun, Kang Gamchan, Choi Young, and Yi Sunshin. Shin Chaeho published Euljimundeok in 1908 to reveal his heroic history. However, when writing Euljimundeok, Shin Chaeho was not only interested in ` historical imagination,' but in fact not only domestic historical data but also Chinese resources. This means that the motive of Shin Chaeho's Euljimundeok was not only the expectation of the hero appearance. Shin Chaeho said that the lack of the historical record on the hero has led to the absence of the hero, and that he would do his best to collect and organize the record of the hero. Representative sources that Shin Chaeho referred to for writing Euljimundeok include Samguksagi(三國史記), Dongkuktonggam(東國通鑑), Dongsagangmok(東史綱目), Haedongmyeongjangjeon(海東名將傳), Yeojiseungram(輿地勝覺) and there was Chinese history books, Suesa(隋史). Shin Chaeho said that the current weakness of Korea is due to the absence of ‘history of victory’, which is due to the absence of the history of heroes. And the lack of heroes in Korea was due to lack of records of heroes in Korean history. Since its publication, Euljimundeok has been distributed nationwide so that it can be sold and purchased at bookstores in major cities. This shows that the reader of this book was wide. Even after falling into Japanese colony, it was classified as a book promoting independence, and seizure and search of Japanese colonial proceeded. Even after the liberation, there were intellectuals who published books with extreme confusion of left-right conflict and the hope of establishing a new independent nation, as Shin Chaeho wrote a book in forthcoming of a hero who would save the nation. In addition, Shin Chaeho's writings, Euljimundeok, later played a role in forming the basic framework of Euljimundeok 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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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계몽기 신채호의 민족론에 나타난 ‘아(我)’의 의미

        윤영실 ( Youn Young-shil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한국학연구 Vol.0 No.24

        본고는 근대계몽기 신채호의 글쓰기를 중심으로 ‘민족’이 상상되는 구체적 양상을 서사적 분석을 통해 살피고자 했다. 신채호의 『독사신론』은 한국에서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규정한 최초의 텍스트였다. 그러나 ‘민족적 아’를 규정하는 ‘토대’가 무엇이며, 민족적 자타의 ‘경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질적 기획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텍스트의 표면에서‘민족’을 규정하는 ‘토대’로 ‘영토’와 ‘종족’이라는 두 요소가 길항하고 있었는데, ‘동국(민족)’과 ‘부여족’이라는 두 고유명은 각기 ‘영토 민족주의’와 ‘종족적 민족주의’를 표상한다. 신채호는 영토 민족론을 통해 만주를 민족사의 경역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단군후예’인 ‘부여족’을 ‘주족’으로 설정하여 민족의 순수한 종족적 경계를 보장하고자 했다(2절). 그러나 ‘종족’및 그 상위범주로서의 ‘인종’이란 임의적인 분류체계에 불과해서, ‘민족’경계를 한없이 확장할 수도 축소할 수도 있었다. 양계초의 사론에서는 한족(종족)-민족-황종(인종)이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이룬 채 혼용되고 있는데, 이는 한족 중심의 황인종이 하나의 ‘민족’으로 ‘합종’하여 백인종에 맞서야 한다는 ‘대민족주의’의 소산이었다. 반면 신채호는 양계초 사론의 ‘번역’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인종’을 ‘민족’으로 대체한다. 이러한 번역상의‘차이’는 대한제국이라는 현실 국가의 경계를 유지하면서 그 체질을 근대적 민족=국민국가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신채호가 일체의 ‘동양주의’(대민족주의)를 비판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3절). 결국 신채호의 초기 민족론에서 ‘민족’을 ‘토대’짓는 최종심급은 현실‘국가’였던 셈인데, 그런 점에서 신채호의 초기 민족론은 ‘영토-민족’과‘종족-민족’에 앞서 ‘국가-민족’론이었다. 신채호의 ‘국가-민족’론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기획된 것이지만, 약소국 스스로가 ‘제국’이 되어 ‘제국’에 맞설 것(‘동등적 모방’)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당대의 지배사상인 사회진화론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채호의 ‘민족=제국’론은 식민지의 저항 민족주의가 빠지기 쉬운 ‘원한’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식민지 민족과 제국을 선악의 구도로 파악하는 후대 연구자들의 한계를 넘어선다. 나아가 선악과 시비가 없이 힘들만이 충돌하는 세계에서 ‘아의 정립’(주인-되기)을 도모했던 신채호의 초기 문제의식은 단순히 사회진화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일종의 화두로 남아, 이후 신채호 사상의 역동적 심화를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5절). Sin Ch’aeho’s Doksasillon(『讀史新論』) is the first historiography that regarded ‘minjok’(nation, 民族) as the subject of ‘history’. However, the text includes conflicting ideas of how to set ‘the foundation’ of nation and how to draw ‘a line’ between nations. On the surface of the text, ‘territory’ and ‘clan’ are competing for founding ‘nation’. Sin used two proper names of nation, ‘Dongguk’(東國) and ‘Puyǒ(夫餘)’. The former is the name for representing ‘terrotorial nation’ while the latter ‘ethnic nation’. Sin incorporated Machuria into national territory by basing on the notion of ‘territorial nation’ and intended to set the distictive boundaries of nation by d escribing ‘Puyǒ’ as the ethnic core. The problem is that ‘racial ethicity’ is just a product of arbitrary classification systems and, thus, the scale of ‘ethnic nation’ can be both enlarged and reduced infinitely. In Liang Qi-chao’s texts, the notions of clan(漢族), nation, and race(the yellow race) are mixed. Such a fusion of notions resulted from Liang’s ‘Pan-nationalism’ idea that the enlarged nation(the union of the yellow race) should confront the white race. On the contrary, Sin, translating Liang’s texts, replaced ‘race’ with ‘nation’ because he wanted to keep the boundary of Korea as an independent country and opposed to any idea of pan-nationalism. This reveals that ‘state’, not ‘territory’ nor ‘race’, is the most important factor to found ‘nation’ in Sin’s early nationalism. Although Sin’s ‘state nationalism’ is a project of resisting imperialism, he, under the influence of social darwinism, insisted that Korea should become a strong empire to resist other imperial countries(“imitation for equality”). Sin’s idea of nationalism=imperialism, despite its faults, stands above ‘resentment’, a trap in which colonial nationalism is apt to be caught by setting a binary opposition of ‘good colonial nationalism vs evil imperialism’. Sin regards the world as a battle field of ‘forces’ where there is no ‘right and wrong’ nor ‘good and evil’. His consistent question is how to become the ‘real self(眞我)’, that is, how to become ‘a master’ in this world. This ultimate question is a driving force which changes and deepens his thoughts from social darwinism to anarchism, from ‘imitation for equality’(Hegelian way of becoming a master; ‘struggle for recognition’) to ‘violence’(Nietzsche’s way of becoming a master’; ‘divine vio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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