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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菊地酉治의 아편마약 문제에 대한 인식과 구제활동

        박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0

        Yuchi Kikuchi was a Japanese expert on opium in 1920s and 30s. Unlike most researchers he was a distinctive figure in that he himself was an onetime addict, and that he was involved in drug trafficking while he was in China. His experiences had an influence on his understanding and activities of opium problem. Researches on Japanese policy on drugs have been concentrated on the necessity and the goal of the policy in the colonies. But now, it is necessary to have an approach to the Japanese opium problem from the perspectives of political history and institutional history. Understanding of Japanese opium expert and his activities in the period of Japan’s promotion of opium in its colonies will contribute to enrich our perspective on Japanese opium policy. Examining this matter from a Japanese civil viewpoint, and also from an addict and drug dealer’s viewpoint will contribute to a new and better understanding of Japan’s opium policy. For the purpose of researching Yuchi Kikuchi’s understanding and relief activities of opium problem, above all things his life and relief activities for opium addicts were scanned on this paper. And then through Yuchi Kikuchi’s talks and contributions, at one time he was opium addict and dealer, it was revealed what he thought about Japan’s opium policy. finally the distinction and limit of Yuchi Kikuchi’s thinking were pointed out. This paper on Yuchi Kikuchi’s understanding and relief activities of opium problem is significant in that it focuses on the opium policy in the civil level. Previous research mostly viewed the problem in the level of policy makers. Yuchi Kikuchi’s critical position with regard to Japanese colonies reveals the reality of Japan’s opium policy. He specifically points out the problems of Japan’s opium policy. His understanding of the opium problem and relief activities were distinct from those of government and policy makers. 이 논문은 기쿠치 유지(菊地酉治)라는 일본의 아편마약 문제 전문가의 인식과 구제활동을 살펴보았다. 러일전쟁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기쿠치 유지는 중국에 거주하면서 아편중독에 빠지고 모르핀을 판매한 경력도 있어 누구보다 아편과 마약의 해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인의 아편마약 판매가 일본의 대중국 관계에도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예방과 치료의 절실함을 깨닫고 日本基督敎聯盟과 외무성 산하의 國際聯盟協會와 연계하여 연구와 구제활동에 노력하였지만 변화하는 일본의 대외관계 속에서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기쿠치는 일본의 식민지 등에 대한 아편마약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대만의 경우 30년 동안 점금주의 아편 전매제도를 시행했으면서도 성과가 의심되며 관동주의 경우 오히려 안전한 아편 흡연지로서 인식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지역 모두 아편전매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누려왔음을 지적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경우 아편이나 마약 모두 밀매가 성행하고 있지만 마약문제에 대해서는 단속법규와 노력이 부족하여 심각한 상황을 야기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일본의 상인들은 식민지 외에 중국 각지에서도 아편과 마약을 밀매하였는데 근본 원인에 대해 일본정부(외무성과 내무성)의 단속 불이행과 일본의 경제인 및 아편 상인들의 이윤추구에 기인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기쿠치는 일본의 아편마약 정책에 대해 동시대 일본인에 비해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중요 지위에 있는 인사들 대부분이 아편마약 문제와 관련하여 국가 이익을 우선시한 데 비해 그는 오히려 사회적ㆍ인도적 문제를 강조하여 중독자의 구제대상을 일본 내 중독자는 물론 중국을 포함한 일본의 전 식민지의 중독자를 포함시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인도적인 차원은 물론 현실적으로도 일본에게 매우 중요하였다. 당시 아편마약 문제의 폐해는 중국이나 일본 식민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이동으로 인해 일본 내부에도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인들의 중국 내 아편마약 판매는 중국인들의 극심한 반일감정을 야기시켜 중일관계의 악화는 물론 군사적 충돌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한편 중독자 구제를 위한 해결방법에 있어서도 그는 민과의 연계는 물론 식민지 각지에도 민간단체를 조직케 하여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기쿠치 유지의 아편마약 문제에 대한 인식과 구제활동에 대한 본 연구는 일본의 아편마약 정책의 실상과 문제점들이 기존에 정책 추진자의 시각 중심이었다는 것에 반해 민간 차원의 시각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기쿠치 유지의 일본 식민지 등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일본 아편마약 정책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그의 남다른 인식은 일본 아편마약 정책의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일부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쿠치 유지의 인식과 구제활동은 정책 추진자들의 시각과의 차별성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당시 민간 차원의 시각에서도 독보적인 면을 보유하고 있었다.

      • KCI등재

        1930년대 조선총독부 모르핀 대책의 실상

        박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9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100

        일본의 조선 강점기 동안 조선에는 모르핀이 만연되어 심각한 사회문제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일본의 조선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모르핀 대책과 관련하여 아직까지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지만 모르핀 확산문제와 관련하여 대체로 실효성 있는 모르핀 대책이 부족하였다고 보고 있다. 1920년대의 경우 별다른 실효성 있는 대책이 없었으며 모르핀의 확산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였다는 주장이 많다. 1930년대의 경우 아편․마약과 관련된 국제회의 등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모르핀의 해독에 대한 인식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는데 이 시기에도 조선총독부의 모르핀 대책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일까? 본 논문은 1930년대 조선총독부 모르핀 대책의 실상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모르핀 대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체 식민지 및 점령지의 아편․마약 수급 관계 속에서 그 진의를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은 모르핀 문제로 인해 심각한 사회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것은 1914년에 반포된 조선총독부의 아편단속 강화방침과 관련이 있었다. 아편단속 강화방침으로 아편 흡연자는 감소되었지만 그 반작용으로 모르핀 등 마약 사용자가 증가하였던 것이다. 곧이어 1차 대전기에 유럽으로부터 수입하던 의료용 마약의 수입이 곤란해지자 조선총독부는 1919년 ‘조선아편취체령’을 공포하여 조선에서 대량의 아편을 생산하고자 하였다. 즉 일본과 조선에서 생산된 아편을 이용하여 모르핀 등 마약을 제조, 이를 수출하여 수익을 창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일찍 종식되어 다시 값싼 유럽산 모르핀이 수입되면서 당초 계획에 차질이 빗어졌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에서 생산된 모르핀의 수출이 어려워졌다. 판로를 찾지 못한 모르핀이 오히려 조선에서 소비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사회문제는 전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야기시킨 것이었다. 1914년 아편단속의 강화로 모르핀 등 마약 사용자가 증가한 상황에 대한 조치가 없었고 또한 1차 대전의 종식으로 조선에서의 모르핀 밀매 및 남용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르핀 등 마약의 처벌규정을 강화하지 않은 조선총독부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조선에 모르핀 문제가 심각해져 국내외적으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1930년에 세계 최초로 마약전매를 실시하였다. 당국에 의한 마약전매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처벌규정의 강화가 전제되어야 했다. 이 시기의 마약전매는 마약 처벌규정이 강화되지 않으면서 내실 준비가 미흡하였다. 그 결과 당국의 마약전매가 오히려 마약환자의 증가를 조장하는 격이 되었다. 한편으로 기존 밀매업자들의 밀매 이익을 당국이 탈취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도 비춰졌다. 시기적으로 많이 늦었지만 5년 뒤인 1935년에 가서 강화된 처벌규정이 포함된 ‘조선마약취체령’이 공포되었다. 이로써 마약문제가 해결되는 양상을 보였으나 곧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은 1차대전기 마약의 공급지로 주목받았듯이 다시 일본 세력권 내 아편의 주요 공급지로서 그 역할이 강제되었다. 1935년 ‘조선마약취체령’의 공포로 조선총독부 당국이 조선의 마약문제 해결에 적극 나선 것이 결과적으로 일본 세력권 내 부족한 아편의 공급문제 해결 방안과도 연계되었다고 하겠다. 요 ... During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morphine became prevalent in Joseon, causing serious social problems. How did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respond to these social problems? Research on morphine measures by Japan's Government-General of Korea during its colonial rule of Korea is still lacking in professional research.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s countermeasures against the spread of morphine were not considered effective. In the 1920s, there were no effective measures. Many claim that morphine spread was almost neglected. In the 1930s, awareness of morphine detoxification was already well known at home and abroad through international conferences on opium and drugs. Was there any change in the Government-General's morphine countermeasure at this time? This paper attempted to clarify the reality of countermeasures against morphine of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 the 1930s. This paper attempted to clarify the reality of countermeasures against morphine of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 the 1930s. In addition to the contents of morphine countermeasures, this study attempted to grasp the truth through opium drug supply and demand in all colonies and occupied regions of Japan. In short, the morphine countermeasures of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 the 1930s seemed to have been implemented to solve the serious social problems of Joseon, but behind this, it was promoted in connection with the opium drug policy on Japan's entire colony and occupied territory. During World War I, when imports of European morphine were difficult, Japan produced a large amount of opium in the Joseon Dynasty to manufacture morphine. It caused serious social problems in Joseon, but Japan had a purpose in pursuing profit.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did not properly deal with the serious drug problem in Joseon. It was not until 1935 that th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had tightened the drug punishment regulations. This resulted in a crackdown, but solving Joseon's social problems was not a priority either. The Joseon's morphine measures was devised in the context of solving the shortage of opium in the Japanese territory before and after the Sin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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