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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신라 패강진전(浿江鎭典)의 정비와 한주(漢州) 서북경(西北境)의 군현(郡縣) 설치

        박남수 ( Nam Soo Park ) 동국사학회 2013 동국사학 Vol.54 No.-

        신라 패강진전은 패강진을 관장하기 위한 관사이다. 최근에 필자는,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을 계기로 신라가 대동강 이남과 황해도 서해 연안 지역에 수자리를 설치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본고에서는 그 때에 미처 다루지 못한 패강진의 위치와 관할구역, 그리고 예성강 하구와 황해도 내륙개발 과정 등을 검토하였다. 이에 고려 개국세력의 기반이 된 浿江道·浿西道는 신라의 그것을 승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곧 패강도는 고려 성종 때의 서해도로서 황해도 패강 이남과 서해 연안에 걸친 지역을, 패서도는 서경(평양)이 관할하는 패강(대동강) 이서 지역을 지칭하고, 관내도는 신라의 漢州 관내를 일컬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패강진은 처음에『신당서』에서 신라 서북단의 군진으로 서술된 長口鎭을 중심으로 한 14개의 진으로 구성되었으나, 헌덕왕대에 군현을 정비하면서 12개의 진으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라 내륙 서북 국경 지역의 개발은 성덕왕 31년(732) 발해의 등주 공격을 계기로 패강 및 황해도 서해 연안에 長口鎭을 중심으로 수자리를 설치하여 국경을 획정(735~736)한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이후로, ``예성강·임진강 하구 개발(748,14군현 설치)→예성강 이북 내륙 지역 개발(762,6성 축조)→패강 이남 지역 군현 정비(826, 패강장성축조)``의 과정을 거쳐 패강 지역에 대한 통치 체제를 정비해 나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예성강 하구의 확보와 내륙 지역의 개발은 당나라와의 새로운 교역항의 개발뿐만 아니라 농상의 증대를 기하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8세기 중반에 서북 국경의 새로운 위협으로 대두된 안사의 난과 해적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The office of Paegangjin was established for managing the area of Paegangjin by Silla. Recently, the author has discovered the fact that Silla established the guarding frontier in the western costal area of Hwanghaedo and the southern area of Daedong river, with Balhae`s attack on Dengzhou in 732. In this article, I tried to clarify the location of Paegangjin and its jurisdiction, and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estuary of Yeseong river and inlands of Hwanghaedo which was not dealt with in the other day. The result of the research shows that Paegaing-jin can be regarded as Paegang-do/Paeseo-do which was the basis for the political power groups of Koryeo. That is, Paegang-do was corresponded to Seohae-do, ranging from the southern area of Pae riverin Hwanghae-do towestern costal area, in reign of King Seongjon in Koryeo. Paeseo-do can fall under the western area of Pae river(Daedong river) under Seogyeong(Pyeongyang). And Gwannae-do referred to Hanju in Silla territory. In addition, Paegang-jin consisted of 14 Jins in and around Paegang-jin which was described as a military region in Sindangseo(新唐書) but it was reduced to 12 Jins when it was reorganized in the King Heonduk. The development of the northwestern border line in inland by Silla started when the border line was fixed by establishing the guarding frontier in the area of Pae river and costal area of Hwanghae-do, especially centering Janggu-jin. It is assumed that Silla organized the ruling svstem on the area of Pae river through securing the estuary of Yeseong river(748, establishing 14 Jin), the inland development around the area(762, building 6 Seong) and lastly, organizing Gun-Hyun in the southern area of Pae river(826, building Paegangseong). The securing the estuary of Yeseong river and the development of inland resulted in not only improving agriculture and commerce but also opening a newport for trading with Tang. On the other hand, it was a strategy to protect Silla itself from pirates and the influence of An Lushan Rebellion which emerged as a new threat in northwestern border in the middle of 8th century.

      • KCI등재후보

        패션영재 판별을 위한 기초연구

        정미경 대구교육대학교 초등교육연구소 2016 초등교육연구논총 Vol.32 No.2

        본 연구는 패션영재판별을 위한 기초 연구로서 패션영재 및 패션영재성의 개념, 패션영재 판별에 대한 이론적 탐색을 통해 패션영재교육을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데 연구의 목적 을 두고 수행되었다. 연구방법은 이론적 고찰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패션영재란 ‘패션분야에 관련한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자신과 사회에 기여하기 위하여 타고난 잠재력 계발을 위한 특별교육이 필요한 자’로 정의될 수 있으며, 패션 영재의 영재성은 일반 능력과 패션 감각 능력, 창의성, 과제집착력의 세요소가 전체 학생의 15% 이 면서, 적어도 패션 감각이 전체 학생의 2%이내 해당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둘째, 패션영재의 판별도구는 학업성적, 지능, 창의성, 일반 영재 행동특성, 창의적 문제해 결, 적성의 표준화된 검사들과 패션 감각 측정도구, 패션영재 면담 및 관찰, 포트폴리오 및 활동결과 산출물을 들 수 있으며, 패션영재 판별방법으로는 표준화 검사, 교사판별, 학부모 추천 학생의 자기 추천과 함께 패션전문가의 면담이나 캠프활동에서의 관찰을 통한 판별이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통해 패션영재의 교육이 시급히 요구되며, 패션영재의 특수 능력을 판 별할 수 있는 도구 개발이 요구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패션영재의 특수 능 력을 판별할 수 있는 측정 도구, 패션영재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을 후속과제로 제안하였다.

      • KCI등재

        마작(麻雀)의 기원(起源) 및 박혁(博弈)에 대한 문헌연구 및 고찰

        성시훈(Sung, Si-hoon)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21 아시아문화연구 Vol.57 No.-

        마작패(麻雀牌)는 명대에 유행한 마조(馬弔牌)라는 놀이에서 변화 발전했다. 마조패(馬吊牌)에서 묵화패(黙和牌)로 묵화패(黙和牌)에서 다시 팽화패(碰和牌)로 발전한다. 청대에 이르러 동남서북을 나타내는 자패(字牌)가 추가되면 현재의 마작패(麻雀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공자와 맹자에서 언급된 박희(博戏)라는 놀이가 어떤 것이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마작패(麻雀牌)가 나오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 놀이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고 어떤 놀이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개량하면서 다양한 놀이로 변화 발전하게 된다. 마작이 나오기까지의 여러 가지 놀이방법을 통해 서로 간에 놀이방법이나 놀이재료에서도 영향을 끼친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마작패(麻雀牌)의 기원설은 아직도 여러 의견이 많다. 각자의 기원설에서 취할 부분도 있고 어느 면에서 의미 있는 부분도 있다. 특히 곡식 창고를 지키려는 참새를 잡는 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마작 용어 중 대부분이 참새를 잡는 것과 관련된 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만병초 창시설, 수호전 기원설, 정화의 대항해설, 진어문 창시설은 마작이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아 민간이나. 역사 등 여러 방면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로등에서 나오는 수호패는 마작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었다는 발견도 의미가 있었다. 어떤 놀이는 중간에 없어지기도 하고 많은 놀이가 변화 발전 소실되는 과정을 겪는다. 저포 라는 놀이는 한국의 윷놀이와 비슷한 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놀이 문화로 즐기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사라진 놀이이다. 특히 쌍륙은 여러 가지 변화된 형태로 지금 전세계에서 환영받는 놀이라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기로등에서 나오는 탑천구 놀이는 주사위 두 개가 붙혀진 형태의 놀이다. 중국 놀이 중 독립적으로 발전된 형태로 현재 도미노의 형태라고 보면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놀이문화의 생명력이 길다는 점을 알게된 새로운 계기였다. 마작 또한 많은 변화 과정을 지내면서 지금의 놀이로 정착하였다. 중국에서 전래된 마작은 한국과 일본에서도 각기 다른 놀이법으로 발전하고 있다. 각국의 문화와 환경에 따라 놀이법도 변하고 있다. 중국사람들이 즐기는 마작을 통해 중국놀이 문화를 살펴보는 것도 문화의 영역을 넓히는 좋은 방법이다. Majiangpai has been originated from the Madiao game of the Ming Dynasty. Majiangpai has been developed to Mohupai, and then again developed to Penghupai. Adding character tiles which indicated four directions of north, south, east, and west to Penghupai in the era of Qing Dynasty, the current form of Majiangpai was finally completed. This study investigated what the Boxi game mentioned in the books of Confucius and Mencius consisted of and how it had been developed to Majiangpai. The origin theories of Wanbingtiao, Shuihuzuhan, and Chenyumen, and the Great Voyage Theory of Zhenghe are the evidence that Maque was not created at an instant time, but has been influenced by cultures in various fields such as civil culture and historical areas. The discovery that Shuihupai from Qiludeng was the another name for Maque was also significant. Among the origin theories of Majiangpai, the most dominant one is that it was originated from the game tiles to hunt the sparrows in order to protect a rice warehouse. It is pursuasive because most terms of Maque were related to hunting sparrow. Some games became extinct in the process. Many games had gone through the process of change, development, or extinction. Maque also has gone through a lot of changing processes and settled as a current game. Originated from China, Maque has been developed in a different form in Korea and Japan, respectively. How to play a game is changing depending on the cultures and environments of each country. It is a good way to expand the area of culture by studying Chinese game culture through Maque which Chinese enjoy to play.

      • KCI등재

        패션영상에 나타난 지속가능성에 관한 연구

        조윤수 한국기초조형학회 2023 기초조형학연구 Vol.24 No.3

        패션계의 지속가능성을 표현하는 패션영상이 늘고 있다. 지속가능성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개념이자 이슈이며 변화를 거듭하는 패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데 의미가 있다. 본 연구는 패션영상의 개념 및 발달과정을 살펴보고 지속가능성이 표현된 패션영상 사례를 분석하여 그 유형별 특성을 정립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 대상은 패션영상에 표현된 지속가능성의 사례이다. 연구방법 및 내용은 첫째, 패션영상의 개념 및 발달과정을 문헌과 사례연구를 통해 추출한다. 둘째, 지속가능성의 개념 및 지속가능한 패션의 범주를 선행연구 분석으로 정립한다. 셋째, 지속가능성이 표현된 패션영상을 사례 분석하여 유형별 특징을 정립한다. 패션영상의 사례는 패션전문채널과 패션플랫폼을 통해 분석한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패션영상은 패션에 대한 생각과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패션그래픽에 움직임, 텍스트, 사운드를 더한 창작물이며, 패션관련 동영상, 영화, 애니메이션, 광고, 사진 등을 포함한다. 둘째, 지속가능성은 미래를 위해 인류의 존재 방식을 구축하는 새로운 비전이며, 지속가능한 패션의 범주는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측면이 있다. 셋째, 패션영상에 표현된 지속가능성의 유형은 환경적 실천가치, 사회적 문화창출, 경제적 경영관리, 윤리적 소비지향형으로 나눌 수 있다. 환경적 실천가치형은 리사이클링 실천을 강조하며 광고·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사회적 문화창출형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연극·쇼트필름 형식이 많았다. 넷째, 경제적 경영관리형은 지속가능한 소재를 테마로 한 쇼트필름·다큐멘터리 형식이다. 윤리적 소비지향형은 기업윤리를 강조하며, 캠페인·다큐멘터리 형식이 다수이다. 본 연구는 패션영상에 나타난 지속가능성에 대한 구체적 연구 선례로서 패션영상에 표현된 지속가능성의 유형별 특성을 정립하고 표현방식을 분석한 데 의의가 있다. 앞으로도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패션영상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다양한 디자인이 계획되기를 기대한다.

      • KCI등재

        신라 浿江鎭典의 정비와 漢州 西北境의 郡縣 설치

        朴南守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3 동국사학 Vol.54 No.-

        신라 패강진전은 패강진을 관장하기 위한 관사이다. 최근에 필자는,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을 계기로 신라가 대동강 이남과 황해도 서해 연안지역에 수자리를 설치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본고에서는 그 때에 미처 다루지 못한 패강진의 위치와 관할구역, 그리고 예성강 하구와 황해도 내륙개발 과정 등을 검토하였다. 이에 고려 개국세력의 기반이 된 浿江道?浿西道는 신라의 그것을 승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곧 패강도는 고려성종 때의 서해도로서 황해도 패강 이남과 서해 연안에 걸친 지역을, 패서도는 서경(평양)이 관할하는 패강(대동강) 이서 지역을 지칭하고, 관내도는 신라의 漢州관내를 일컬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패강진은 처음에 ⌈신당서⌋에서 신라 서북단의 군진으로 서술된 長口鎭을 중심으로 한 14개의 진으로 구성되었으나, 헌덕왕대에 군현을 정비하면서 12개의 진으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라 내륙 서북 국경 지역의 개발은 성덕왕 31년(732) 발해의 등주 공격을 계기로 패강 및 황해도 서해 연안에 長口鎭을 중심으로 수자리를 설치하여 국경을 획정(735~736)한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이후로, ‘예성강?임진강 하구 개발(748, 14군현 설치) → 예성강 이북내륙 지역 개발(762, 6성 축조) → 패강 이남 지역 군현 정비(826, 패강장성축조)’의 과정을 거쳐 패강 지역에 대한 통치 체제를 정비해 나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예성강 하구의 확보와 내륙 지역의 개발은 당나라와의 새로운 교역항의 개발뿐만 아니라 농상의 증대를 기하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8세기 중반에 서북 국경의 새로운 위협으로 대두된 안사의 난과 해적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 굴 패각 분말을 충전재로 활용한 폴리머 콘크리트의 강도 및 내구 특성

        성찬용 ( Chan-yong Sung ),김영익 ( Young-ik Kim ),김태호 ( Tae-ho Kim ),이승훈 ( Seong-hoon Lee ) 한국농공학회 2010 한국농공학회 학술대회초록집 Vol.2010 No.-

        연평균 36만여 톤에 달하는 패각 발생량 중 패화석 비료(16만여 톤)와 채묘기(14만여 톤), 매립(3만여 톤)등을 제외한 나머지 3만여 톤이 미처리되어 주변 연안에 야적되는 실정으로, 미관상 뿐만 아니라 부착된 육질의 영향으로 악취 원인균인 S.aureus및 P.Vulgaris 등이 번식할 가능성이 크며, 이러한 미생물들은 염분 등을 분해시켜 NH<sub>3</sub>, H<sub>2</sub>S, Amine과 같은 냄새를 유발시키기 때문에 방치되는 패각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가 요구되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매립되거나 방치됨으로써 해양 환경 오염의 주원인이 되는 패각을 효율적으로 처리하여 친환경 건설재료로 활용하기 위한 연구로서, 폴리머 콘크리트의 충전재로 활용하기 위하여 미세하게 분쇄된 굴 패각 분말과 고분자 재료인 불포화 폴리에스터 수지 및 골재를 활용한 폴리머 콘크리트를 개발하여 단위결합재량 및 패분의 혼입에 따른 폴리머 콘크리트의 작업성, 유동성, 강도 및 내구성 등의 물리· 역학적 특성을 구명함으로서 굴 패각의 건설재료료의 활용 가능성에 대한 기초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굴 패각 분말을 혼입한 폴리머 콘크리트 제조를 위한 결합재는 올소 타입의 불포화 폴리에스터 수지를 사용하였으며, 개시제는 메틸에틸케톤 프록사이드가 55% 함유된 DMP 용액을 사용하였다. 굵은골재로는 5~10mm 및 5~25mm의 쇄석을 사용하였으며, 잔골재로는 4.75mm 이하의 천연모래를 사용하였다. 굴 패각은 분쇄기를 사용하여 0.15mm 이하로 분쇄하여 충전재로 사용하였으며, 또한 비교 평가를 위하여 탄산칼슘을 충전재로 사용하였다. 굴 패각을 활용한 폴리머 콘크리트의 배합은 패각 분말의 혼입에 따른 특성을 평가하기 위하여 단위결합재량을 10, 12 및 14%의 3종류로 하였다. 경화 전 폴리머 콘크리트의 특성을 평가하기 위하여 가사시간 및 슬럼프 시험을 실시하였으며, 경화 후 압축강도, 휨강도 및 내약품성 시험을 병행하였다. 실험결과 단위결합재량이 증가함에 따라 충전재의 종류에 관계없이 슬럼프가 증가하는 경향을 나타내었으며, 패각 분말을 혼입한 배합이 탄산칼슘을 사용한 배합에 비하여 슬럼프가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또한, 가사시간은 충전재에 관계없이 공시체 제작을 위한 소요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위결합재량이 증가할수록 패각 분말 및 탄산칼슘을 혼입한 배합의 압축강도가 거의 유사한 경향을 나타내었으며, 황산 침적에 대한 내약품성은 충전재의 종류에 관계없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 KCI등재

        조선 지성사에서의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담론

        김홍백 ( Kim Hong-baek ) 한국고전문학회 2021 古典文學硏究 Vol.60 No.-

        본고는 조선에서의 王覇 담론에 대한 통시적 연구이다. 王道와 覇道의 문제는 사상적으로는 맹자와 순자, 주희와 진량의 왕패 담론을 일정하게 계승한 것이면서 역사적으로는 여말선초(원명교체)와 임병양란(명청교체), 구한말(서세동점)의 전환기마다 첨예화된 이상 정치와 현실 정치 간의 긴장 관계가 반복 변주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맹자가 개념화한 왕도와 패도는 동아시아 유가문명권에서 ‘덕에 의거한 윤리의 실천(以德行仁)’과 ‘힘에 의거한 윤리의 가장(以力假仁)’이라는 공존 불가능한 적대적 상극의 관계로서 항시 호명되고 소환되었지만, 일각에서는 이러한 이원화된 구도 안에서 왕도와 패도, 윤리와 현실의 관계를 상극만이 아닌 ‘상생’, 대립만이 아닌 ‘상보’로도 인식하고자 했던 흐름 또한 존재하였다. 본고에서는 왕도와 패도 양방을 기왕의 통념적 대립의 구도를 넘어 공히 가치중립적으로 승인하거나 패도를 상대화하여 그 현실적 의미를 왕도와의 관계에서 새로이 재인식하고자 했던 다양한 담론들에 주목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조선에서의 일반적인 ‘패도 비판 양상’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말과 조선 중기, 18세기의 시공간에서 현실 정치의 권력주체인 王이 유가적 이상 정치의 이념주체인 士와의 긴장 속에서 어떻게 왕도 정치의 비현실성을 의심하고 ‘윤리와 현실’ㆍ‘이념과 실재’ 간의 역사적 아이러니에 의문을 품었는지 검토하였다. 아울러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을 중심으로 왕도와 패도의 관계가 ‘은혜와 은덕’을 통한 교화라는 윤리적ㆍ가치적 이념과 ‘위엄과 형벌’을 통한 강제라는 현실적ㆍ제도적 장치 간의 상보적 균형성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나아가 유가적 이상 정치를 그 반대편의 비윤리적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경유하여 천천히 도달해야 할 일종의 ‘잠정적 유토피아(Provisional utopia)’로서 사유되고 있음을 조명하였다. 곧 ‘인의의 부재’(暴政) ⇨ ‘인의의 가장’(覇道) ⇨ ‘인의의 실행’(王道)의 삼단과정에서 ‘인의의 가장’이 왕도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매개적 경유지로 상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왕도 정치에의 윤리적 이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패도 정치라는 실재의 현실을 승인하면서 점진적ㆍ잠정적 이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현실적 이상주의자’ 내지 ‘유가적 리얼리스트’로서의 세계 태도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왕패의 상보적 병용’ 내지 ‘패도의 잠정적 승인’으로서의 왕패 인식은 조선 후기 지성사에서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계승되었다. 하나가 ‘王道=義 VS 覇道=利’의 상극적 구도에서 후자인 ‘利’에 대한 유가적 승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王道=道 VS 覇道=器’의 위계적 구도에서 전자인 ‘道’ 내지 후자인 ‘器’에의 극단적 편향에 대한 동시 지양이다. 이는 공히 왕도와 패도, 의리와 이익, 목적과 수단 사이의 균형적 인식을 드러낸다. 아울러 이러한 왕패 담론이 서세동점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中華와 夷狄, 王道와 覇道의 구분이 불가능해졌다는 시대 인식 위에서 ‘夷狄/覇道’의 것이라도 지금 조선에 도움이 된다면 배워야 한다는 利用厚生으로서의 ‘北學’의 논리가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西學’의 논리로 확장 계승되었음을 조망하였다. 이른바 ‘패도의 재인식’이라는 차원에서 여말 이래 조선 중후기를 거쳐 전개되어온 일련의 새로운 왕패 담론이 華夷論과 연계되어 19세기 말의 전환기에까지 연속적으로 심화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n this thesis, I explore the discourse of the wang dao(王道, the way of the true king) and the ba dao(覇道, the way of the hegemon) in the Middle and the Late Chosŏn Dynasty. The problem of the wang dao(王道) and the ba dao(覇道) is that, ideologically, the discourses of Mencius(孟子) and Xunzi(荀子), Chu Hsi(朱熹) and Chin Liang(陳亮) have been consistently inherited. In addition, historically, the tension between ideal politics and real politics, which has been sharpened at each transition period, between the close of the Korea Dynasty & the beginning of Chosŏn Dynasty(麗末鮮初),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the Manchu war(壬丙兩亂), the eastern penetration of western powers(西勢東漸) has been repeated and varied. In this thesis, I focused on various discourses that attempted to recognize both the wang dao(王道) and the ba dao(覇道), relativizing both sides of the wang dao(王道) and the ba dao(覇道) in a relationship with the wang dao(王道), beyond the conventional confrontational structure. To this end, I first review the general 'criticism of the ba dao(覇道)' in the Chosŏn Dynasty, and based on this, the tension between the king, who is the subject of power in real politics, and the ideological subject of Confucian ideal politics, in the time and space of the end of the Korea Dynasty, the middle of the Chosŏn Dynasty, and the 18th century. It examines how the historical irony between 'ethics and reality' was questioned. In addition, Lee Ik(李瀷), a Sirhak(Practical Learning) scholar in the late Chosŏn Dynasty, understood wang dao(王道) and the ba dao(覇道) as a balanced relationship between the ethics and system of 'grace and punishment'. It shed light on thinking as a kind of 'provisional utopia'. This can be said to be the attitude of the world as a 'Confucian realist'. Furthermore, this recognition of the wang dao(王道) and the ba dao(覇道) was inherited in two major streams in intellectual history of Late Chosŏn period. If one is a Confucian approval of the latter, 'profit(利)' in the mutual oppositive structure of 'the wang dao(王道) = righteousness(義) VS the ba dao(覇道) = profit(利)', the other is a simultaneous avoidance of the extreme bias toward the former, 'truth(道)', or the latter, 'vessel(器)' in the hierarchical structure of 'the wang dao(王道) = truth(道) VS the ba dao(覇道) = the vessel(器). This reveals a balanced perception between wang dao(王道) and the ba dao(覇道), righteousness(義) and profit(利), and end and means. In addition, in the Chosŏn Dynasty of the late 19th century, the logic of 'Bukhak(北學, Northern Learning)' that even the things of 'barbarian(夷狄)/ba dao(覇道)' should be learned if they are helpful to Chosŏn was gradually extended and inherited into the logic of 'Seohak(西學, western Learning)'. In the so-called ‘recognition of ba dao(覇道)’, it can be seen that the new discourse on the wang dao(王道) and the ba dao(覇道) is continuously intensifying until the turning point of the end of the 19th century in connection with the theory of civilization and barbarism(華夷論).

      • 조선시대의 ‘패수(浿水)’ 논쟁과 그 의미

        신운용 국학연구소 2016 국학연구 Vol.20 No.-

        조선정부는 『세종실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전기 관찬사서에서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았다. 이는 조선 전기에는 패수 압록강설이 통 설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전기 조선 정부의 통설은 영조대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에 패수가 요동의 어니 하임을 밝힘으로써 조선정부의 패수에 대한 공식입장은 어니하로 바뀌 었다. 이는 『문헌비고』에서 보듯이 조선후기와 대한제국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관찬사서의 인식의 변화는 한국고대사에 대한 강역의 인식과 확대를 가져왔고, 본질적으로 유교사관의 균열을 초래하여 새로운 방 향을 모색하는 기반이 되었다. 사찬사서의 패수인식은 두 가지의 상반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나 는 패수 국내설이고, 다른 하나는 패수 요동설이다. 전자는 압록강설· 청천강설·대동강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압록강설은 『동국여지승람』의 영향을 받으로 윤두수·오운·유형원·이세구·이익·이만운·이긍익 등이 패수 압록강설을 주장하였다. 청천강설은 한백겸이 주장하였다. 대동강 설은 박상·유희령·유득공·한진서·정약용·홍경모·윤정기·이유원 등이 주 장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패수 요동설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런데 특히 패수 대동강설은 위만이 패수를 건너 왕험성을 점령하 였으므로 당연히 왕험성(평양)은 대동강 아래 있어야 한다는 『사기』와 『한서』의 기록과 모순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득공은 왕 험성이 대동강 건너 토성리에 있었다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안정복은 평양(王險)이 한양이라고 하였다. 이는 역사현실과 거리가 먼 주장이 다. 결국 대동강설은 역사기록과 부합되지 않은 설에 지니지 않는다. 한편, 후자인 패수 요동설은 홍여하가 팔주 땅 요하 지류설을, 신경 준·김정호가 (어)니하설을, 김경선의 난수(하)설을, 성해응의 소요수(혼 하, 심하)설을 주장하는 등 요동설도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되었다. 하 지만 패수 요동설을 주장한 조선의 학자들도 김경선 이외에 국내설과 낙랑의 평양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관찬 사찬 할 것 없이 패수 대동강설은 패수 요동설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한사군에 대한 인식에서 한계를 드러낸 유교사관을 대체 할 새로운 사관이 출현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한제국기와 대일전쟁기 단군중심의 사관과 영토 의식 확장의 배경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패수에 대한 여러 이설들이 조선시대 논의 되었지만 고조선의 강역은 한강이북에서 요동에 이르렀다는 점은 공통된 인식이 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한사군 연구의 많은 시사점을 준다. The Chosun government viewed The Paesu(浿水) as the Yalugang" in the books such as 『Sejongsillok(世宗實錄)』 and 『Donggukryujiseungam(東國輿地勝覽)』 published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is means that the common view that the Amnokgang was The Paesu However, the official position on the Paesu of the Chosun government was changed to Erniha(淤泥河) in the latter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 government. This change has brought about the recognition and expansion of the Korean archaic history, and in essence it has led to the cracking of the Confucianism and has become the basis for searching for a new direction. The recognition of the Non-governmental historian had two contrasting aspects. One is the hypothesis that Paesu had located in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other had was in the far east in china the former included the hypothesis of the Amnokgang, Chongchongang, Taedonggang. Yoon Doo-su · Oh Won · Yu hyeong-won · Lee Se-gu · Lee ik · Lee Man-woon · Lee Geon-ik and so on supported The hypothesis of the Amnokgang. Han Baeg -gyeom supported The hypothesis of The Chongchongang had been supported by Han Baeg-gyeom. Park Sang·Yu Hee-seong·Haeng-won·Han Jin-seo·Uu deug-gong·An jeong-bog·Jung gak-yong·Hong Kyung-mo·Yun Jeong-Ki·Lee yu-won and so on supported The hypothesis of the Daedonggang. Especially the hypothesis that Paesu was in the far east in china was criticized by Jung gak-yong. However, the the hypothesis of Daedong Gang is contradictory to the records of 『Sagi(史記)』 and 『Hanseo(漢書)』 that the Wang hyeong seong (Pyongyang) should be under the Daedong River, because Whiman(衛滿) went across The Paesu. In order to solve this problem, Uu deug-gong claimed that the Pyongyang was located in Tosongri across the Daedonggang, and evenAn jeong-bog claimed that the Han River and Pyongyang was Hanyang. This is an argument that is far from historical reality. In the end, The hypothesis of Daedong is incompatible with historical records. On the other hand, Hong yu-ha·Shin gyeong-jun·Kim jeong-ho·Kim gyeong-seon ·seong hae-eung the latter the hypothesis of Paesu claimed that the Paesu was located in in the far east in china. However, the Joseon scholars who advocated the territory of the Whiman-Joseon Dynasty was located from Hangang to the far east in china However, here several arguments on the Paesu were discussed during the Chosun Dynasty, but the fact that the Joseon scholars who advocated the territory of the Whiman-Joseon Dynasty was located from Hangang to the far east in china gives many implications for today' s the Paesu research.

      • KCI등재후보

        史記와 고지도의 융합적 관점에서 본 위만 시기 浿水 위치에 대한 재검토

        이찬구 바른역사학술원 2021 역사와융합 Vol.- No.8

        이 글은 그동안 발표된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한 여러 학설을 재검토하여 새로운 위치를 찾는 것이 목적이다. 어느 시대에 패수(浿水)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하였다. 필자는 위만 시기의 패수의 위치를 찾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구된 위만 시기의 패수(浿水)의 위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평양의 대동강이 곧 패수(浿水)라고 하는 학설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요서(遼西)의 난하(灤河)가 곧 패수(浿水)라고 하는 학설이 있다. 이에 필자는 『사기』(「조선열전」)의 주석에서 말한 3수(水)에 근거하여 열수(洌 水)를 패수로 해석해 보았다. 열수(洌水)는 곧 지금의 당하(唐河)이다. 당하(唐河)는 하북성 보정(保定) 부근에서 천진(天津)으로 흐르는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패수의 위치는 시대마다 달랐다고 본다. 이렇게 시대마다 다른 패수의 위치를 찾음으로써 고조선의 강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KCI등재

        국내산 굴 패각의 광물학적 화학적 특성

        하수현,김영규,차민경,김강주,김석휘 한국광물학회 2017 광물과 암석 (J.Miner.Soc.Korea) Vol.30 No.4

        We investigated the mineralogical and chemical characteristics of oyster shell as thepossible substitute for the limestone used as an absorbent of SO2 gas. The oyster shells from Taeanand Tongyeong were used for the comparison with limestone and those from Boyreong and Yeosuwere additionally investigated. XRD results show that all shells are composed of calcite with theexception of the myostracum layer attached to adductor muscle and ligament, which is composed of aragonite. The marine sediments as impurities exist on the surface of shells or as inclusions in theshells. Calcite is the main mineral composition of the shell of barnacle which is also one of theimpurities. The oyster shell is composed of three main layers; prismatic, foliated, and chalk. The oystershell from Tongyeong with the largest shell size, has the smallest thickness of prismatic and foliatedlayers which contain protein called conchiolin, whereas that from Taean with the smallest shell sizehas the largest prismatic and foliated layers. The sizes of those two layers of the shells from Boryeongand Yeosu are larger than that from Tongyeong but smaller than Taean. Those differences aresupposed to be due to the different growth environments because the oysters from Tongyeong arecultured under the sea while those from Taean are in the tidal zone. The oyster shells generally showhigher amount of sulfur and phosphorus than limestone, mainly due to the composition of protein. Some elements such as Mg show significant variations in different layers. As for trace elements, Lishows much higher amount in oyster shells than limestone, suggesting the influence of the compositionof the sea water on the formation of the oyster shells. SO2 가스 반응제로 사용되는 석회석의 대체 가능 물질로서 굴 패각의 광물학적 화학적 특성을알아보았다. 생장환경에 따른 굴 패각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태안지역 및 통영지역의 굴 패각을석회석과 비교하였고 추가로 보령 및 여수 지역의 굴 패각을 연구하였다. XRD 분석 결과 굴 패각은아라고나이트로 구성되어 있는 폐각근 접합 부분 및 인대(ligament) 접합부분을 제외하고 방해석으로구성되어 있으며 불순물로서 나타나는 해양 퇴적물이 패각 내 표면에 존재하거나 일부 패각 내 포유물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불순물 중 하나인 패각 표면의 따개비의 경우도 방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소성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미경 관찰을 통하여 굴 패각의 미세구조를 파악할수 있었다. 패각은 크게 각주층, 진주층, 초크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패각이 가장 큰 통영 굴 패각은콘키올린(conchiolin)이라 불리는 단백질을 일부 함유하는 각주층과 진주층의 두께가 가장 작았으며작은 크기의 태안 굴 패각의 경우 각주층과 진주층 두께가 가장 두꺼운 것으로 나타났다. 중간 크기의패각 크기를 갖는 보령과 여수 굴 패각은 그 층들이 두 패각의 중간정도의 두께를 보여주었다. 이는계속 바닷물 속에서 양식하는 통영과 조간대에서 공기와 바닷물 속에서 양식하는 태안의 생장 환경차이로 판단된다. 굴 패각들은 석회석과 달리 상대적으로 높은 인과 황 함량을 보여주는데 이는 패각내의 단백질에 의한 것이며 패각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층은 Mg 함량을 포함하여 일부 상이한 화학성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미량성분의 경우 패각의 경우 석회석 보다 Li의 함량이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이는 바닷물 성분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각 산지별 패각에서는 Zn의 함량 변화가가장 커서 Zn의 함량은 생성환경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미량원소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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