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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石文과 村落文書를 통해서 본 新羅의 村制

        姜鳳龍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2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Vol.23 No.-

        신라는 小國 단위를 郡으로, 소국을 구성하던 邑落 단위를 村으로 편제하면서, 中古期의 村制를 정비하였다. 신라 국가는 在地勢力을 군의 대표자로 공인해준 村主와 중앙에서 파견한 道使를 통해서 村制를 운영하였다. 먼저 촌주란 군 단위를 구성한 여러 촌들 중에서 제1,2촌의 首長層 두 사람에게 국가가 내린 공식 職號였다. 그리고 도사는 6세기 전반까지는 郡內의 제1촌에만 파견되어 군 단위의 지방 행정을 관할하는 임무를 수행한 지방관이었는데, 6세기 중반 이후에는 군내의 모든 촌에 도사가 파견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 명칭도 도사 이외에 邏頭나 幢主 등으로 分稱하게 되었으니, 이들을 ‘道使類’라 총칭하기로 했다. 이렇듯 촌의 성격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칭해지던 도사류는 7세기에 들어 다시 도사로만 통칭되는 획일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으니, 이는 곧 村制가 縣制로 개편되어 가는 지방제의 획일화 과정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기왕의 행정촌의 이름은 縣의 이름으로 개칭되었고, 중고기의 자연촌은 일정한 재편의 과정을 거쳐 縣制 下의 새로운 행정촌(‘통일기 행정촌’)으로 정비되었다. 村落文書에 나오는 촌이 바로 ‘통일기 행정촌’이다. Shlla has formed its 'village organization' in ancient and mid era by making small nations into 'counties', and small villages into 'communities'. Communities that has been reorganized from 'counties' are known as 'Ancient and Mid Era Administration Community', the smallest rural organization unit. It is known to be very important and was even known as 'Eup Reuk' in Yang dynasty. But there were more than just 'administrative communities' in 'Ancient and Mid Era'. There were also 'natural communities'. But given the epigraphs about government needs, a small amount of 'natural communities' alone were described, whereas was mostly about the 'administrative communities'. Shilla controlled the power of settlers by selecting a 'Chonju', a leader from the area, and dispatched a 'Dosa', an officer from the capital, to run the village. 'Chonju' is an national title from the government, given to the heads of the first and second villages out of all the villages around. So when you are chosen as 'Chonju', it means that you are representing your hometown and the county unit at the same time. The leaders who didn't ger the title of 'Chonju' were called as 'Sang-in', meaning the elderly person, was authorized from the nation to have administrative power over their village. Next, 'Dosa' was dispatched to the first rural areas of the country and looked over at the administration system of rural districts until the beginning of the 6 A.D. This did not only apply to Shilla, but also for Koguryo and Baekjae. But during the middle of the 6 A.D, Shilla has dispatched a 'Dosa' in every villages, and the title varied in different villages as 'Nadu', and 'Dangju' and more. And they were called as the 'Dosa-types' altogether. Especially, 'Nadu' is the person who is dispatched on the first areas of the county, and 'Dangju' is dispatched at the army based areas. Therefore 'Dosa system' for Shilla administered their operations with 'Dosa-types' from everywhere with 'Nadu' on their base. So the village operation for Shilla was operated individually and unified, more over both. The 'Dosa-types' which was named in many different ways was called back to 'Dosa' in 7 A.D. This tendency is to be related with the unifying process of making villages into district. With this, the name of the 'administrative village' was called 'Hyun'(district), and 'natural village' formed into a new kind of administrative village under the district system(Unified Administrative Village) with the reorganization of the system. The village that comes out in the village document is this 'unified administrative village'. Shilla has gathered some of this 'unified administrative village' and gave control to a 'Chonju'. If this gathering of villages were called a 'Yunhap village'(a union of villages), than the village organization of unified villages will operate under the 'administrative villages' and 'union villages'. But according to Kyuhungsa bell, there were three 'Chonjus' in one district, and in village documents says that there was one 'Chonju' for three 'administrative villages'. So there was about 10 'administrative villages' when Korea was unified as one.

      • KCI등재

        고구려사에서의 촌

        김현숙(Kim Hyun-sook) 한국고대사학회 2007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48

        3세기 후반, 4세기 이후 고구려에는 村이 존재했다. 촌이라는 용어는 3세기 중엽 이후 중국으로부터 고구려로 도입된 것 같다. 하지만 촌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이전에도 고구려에는 이미 촌과 같은 성격의 지역이 존재했다는 것을「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라에서 촌제가 부체제 단계에 시행된 것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도 那部體制期 후반기에 국가가 파악하는 지역단위인 촌이 존재했다. 이 지역단위는 3세기 중엽 이후 용어가 도입된 村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므로 ‘擬似村’이라고 가칭할 수 있겠다. 신라든 고구려든 부체제 시기에 촌, 혹은 ‘의사촌’이 존재했다는 것은 중앙정부에서 부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는 기준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촌은 행정촌이 아닌 자연촌이었다. 그러나 自然聚落은 아니었다. 복수의 자연취락을 일정한 기준 아래 묶어 편제한 것이었다. 행정단위는 복수의 촌이 소속된 곡과 성이었다. 고구려에서는 곡-촌, 성-촌으로 지역을 편제하여 통치하였다. 촌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지방관은 城·谷 級에만 파견되었다. 지방관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촌에 村舍를 두고 지역 토착세력을 村主 혹은 村長으로 삼아 조세수취와 역역동원 등을 담당토록 했다. 이처럼 촌에 촌사를 두고 지방관의 지역지배를 돕게 한 것은 3세기 말 이후 전국을 一元的, 直接的으로 통치하게 된 이후의 일이었다. 촌은 후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In the second half of the third century and since the fourth century, a village unit called ch'on(村), existed in Koguryo. The term, ch'on, seems to be introduced from China to Koguryo after the middle of the third century. But, even before they used the term, in Koguryo, there existed an area with the same characteristics as that of ch'on. This fact is confirmed in the Kogury Annals in Samguk sagi. As in Silla, ch'on system was operated in the level of bu system, in Koguryo, after the establishment of nabu system(那部體制), there was an area unit which bound several natural villages according to a certain criterion. Since this area unit had a similar characteristics to that of ch'on, which is the term introduced after the middle of the third century, it can be tentatively called 'quasi-ch'on.'(擬似村) Whether it was in Silla or in Koguryo, the fact that ch'on or ‘quasi-ch'on’ existed in the stage of bu system indicates that the central government arranged a certain criterion to control the inside conditions within bu. Ch'on in Koguryo was not an administrative village but natural one. However, it was not the natural settlement. Several natural villages were bound under a certain basis and it formed one ch'on. An administrative unit was called kok(谷) and song(城) where several ch'on belonged. Koguryo controlled the territory by organizing each region into kok-ch'on, songch'on system. A local official was not dispatched to ch'on, but to the level of song and kok, they sent a local official. In order to control an assigned region, an official set up a local office ch'onsa(村舍) at ch'on, and took aborigines to a village master ch'onju(村主) or a village chief ch'onjang(村長) and made them take in charge of collecting a tax and mobilizing drafted labor. Like this, they appointed ch'onsa at ch'on, and let them help a local official control the region. This condition would have begun after Koguryo became to control the territory unitarily and directly after the end of the third century. Ch'on appeared to have existed until the late period of Koguryo.

      • KCI등재

        新羅 中古期 행정촌 · 자연촌 문제의 검토

        李銖勳(Lee Su-hun) 한국고대사학회 2007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48

        城山山城 木簡의 △△村과「冷水里碑」의 珍而麻村을 검토해 본 결과, △△村 가운데 자연촌이 존재하였다는 결정적인 단서는 찾지 못하였다. 성산산성 목간에서 행정촌·자연촌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쟁점이 되는 墨書인「仇利伐上?者村」을 행정촌+자연촌으로 볼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성산산성 목간에서는 해당 인물의 출신지를 郡名+행정촌 또는 행정촌의 형태로 표기하였다. 목간의 인명표기에 △△村으로 표기된 촌락은 자연촌이 아니라 행정촌이었다. 인명표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행정촌이었으므로, 郡名은 생략할 수 있으나 행정촌은 반드시 기재하였다.「冷水里碑」에 기재된 촌락은 珍而麻村이 유일하였다. 이 비문에 보이는 耽須가 촌락의 명칭이 아니라 人名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耽須를 中心村으로 보고 耽須와 珍而麻村을 중심촌과 자연촌의 관계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이 珍而麻村에 外位를 가진 村主가 존재한 것을 고려한다면, 珍而麻村은 당해 지역을 지배하는 거점으로서 행정촌의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여겨진다. 아울러「冷水里碑」당시의 道使는 아직 州郡制가 시행되기 이전 단계이므로 지방에 常駐하는 지방관이 아니라 수시로 행정사무가 발생할 때마다 중앙에서 해당 지방에 파견된「巡廻道使」로 판단된다. It was difficult to find out decisive proofs that some natural villages had been in existence in △△village, after making investigation into △△village of Sungsan Mountain Fortress Wooden Tablets and Jin-E-Ma-Chon of Nangsu-ri Stela. The native place of a villager in Sungsan Mountain Fortress Wooden Tablets was written by the name of Kun+district village or only the district village. The village name on the Wooden Tablets was not a natural village but district village. As the district village was used for a villager's native place, the name of kun could be omitted. Jin-E-Ma-Chon is the only village written on the Nangsu-ri Stela. As Tamsu on this Stela was not the name of a villege but a person, we should not recognize Tamsu as the central village and Jin-E-Ma-Chon as a natural village. For a village chief having some systemic status was in this Jin-E-Ma-Chon, Jin-E-Ma-Chon was a base to control the surroundings and a district village to consummate administrative function.

      • KCI등재

        6세기 신라 지방지배 방식의 변화와 ‘村’

        홍기승(Hong Ki Seung) 한국고대사학회 2009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5

        이 논문은 6세기 신라에서 村이 지방지배의 기본단위였음을 밝히고, 이를 활용한 지배방식의 변화 양상과 그 배경을 검토했다. 6세기 중반 제작된 咸安 城山山城 木簡에 따르면 지방관이 파견된 行政村만이 아니라 그 예하의 村 또한 주변의 自然聚落을 관할하면서 각종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6세기 신라에서 村은 지방지배의 기본단위였던 것이다. 하지만 村에 예속된 자연취락은 촌락사회의 통제와 파악이 村의 유력자에 의존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당시 역역동원은 재지유력층 중심의 徒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시기 村을 매개로 한국가의 지방지배는 공동체적 질서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고 할 수 있다.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직접지배를 지향하면서 이러한 지배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6세기 말 세워진 南山新城碑 第9碑는 역역집단을 행정촌 대신 그 예하의 村을 단위로 기록했다. 이는 제9비의 역역동원이 村을 단위로 이루어지고 지방관이 이를 주도하면서 생긴 차이로 추정된다. 제9비의 양상은 6세기 말 지방지배에서 村이 기층단위로 부각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행정촌 예하 村들이 지방관의 직접 통제를 받는 모습이 통일신라시대 縣의 지배방식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신라 지방지배 방식의 연속성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중심취락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던 소규모 자연취락들이 성장하여 새로운 村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村의 유력자들에게도 外位가 수여되었다. 그 결과 종래 재지세력의 위상은 크게 저하되었다. 한편 6세기 중반 이후 신라는 장기적인 전쟁을 겪게 되면서 民의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내 전쟁에 동원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기존의 공동체적 유대에 의존한 군사력 동원이 어려워지게 되면서 신라는 변경지역을 중심으로 촌락 내부를 村으로 재편, 파악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This study aims to clear that Chon was the primary unit of local governance in 6th century Silla, and to examine evolutionary aspects and the background of the ruling method. Analyzing wooden tablets from the Seongsan Sanseong Fortress (咸安城山山城木簡) in mid 6th century, we can realize that not only Administrative Chon (行政村), but Chon subordinated to Administrative Chon also achieved administrative services, governing the Natural Village (自然聚落). Therefore Chon was the primary unit of local control in 6th century Silla. However, existence of assigned Natural Villages suggests that Silla also depended on local influential persons to control village. And at that time unit of labor service imposition was Do (徒) which the influential person managed operations with autonomously. This shows that the local ruling system of Silla based on Chon still had to depend mostly on autonomous control of classes with local influence. This limitation was overcome gradually with improvement of local ruling systems. When analyzed the 9th Namsansinseong-bi (南山新城碑) we can see that members of group C who had taken charge of construction were classified by Chon. It shows that Chon was used as the primary unit of labor imposition, and local administrative officials had taken charge of initiative role of working group organization. This aspect of the 9th Namsansinseong-bi means that in end of 6th century Chon was established as a substratum unit in local governance. In particular, the way local administrative official ruled Chon directly was very similar with the governing method of Hyeon (縣). One of Factors that had caused the change was a development of agricultural productivity. That contributed to reorganization of small villages into Chon which had depended on the central village. Moreover outer-ranks were awarded to influential persons of new Chon. As a result Chon simply implied a dwelling district, and the authority of the class with local influence was gone. In the meantime Silla had to suffer frequent attacks by Goguryeo and Baekje since the mid of the 6th century. To overcome these circumstances Silla had to mobilize people and undergo warfare continuously. Therefore the project to reorganize villages into Chon was propelled more actively.

      • KCI등재

        중국의 반(反)농촌적인 농촌우대(惠農) 정책: “대학생 촌관(村官)”정책을 중심으로

        유은하 ( Eun Ha Yoo ) 아시아.유럽미래학회 2012 유라시아연구 Vol.9 No.1

        1990년대 중반 일부 지방에서 비교적 젊은 대학 졸업자들(취업자, 미취업자 포함)을 공개모집하여 농촌 마을의 촌관(村官)으로 임명하는 제도가 자체적으로 시도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점점 가중되는 대졸자 취업난 속에서 대졸 구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고학력자투입을 통해 노령화된 농촌에 활력을 불어 넣으면서 신지식을 전파할 수 있는 참신한 정책으로 여겨지면서 주변 지역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 당 중앙과 중앙정부는 이 ‘대학생촌관’ 제도를 당 중앙 차원에서 지원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제도 시행에 관련된 기본 규정을 마련하였으며, 이에 필요한 재정적·정책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당 중앙은 개혁개방 이후 심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중국 농촌이 현재 전통적인 모습에서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에 현대적 안목을 가진 젊은 대학생들을 농촌의 촌관에 임용하는 것은 중국 농촌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에 대한 대다수의 기존연구는 본 제도의 기본 취지와 의의 등에서는 긍정적 측면이 인정 됨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가 실제 시행되는데 있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농촌문제 전문가들은 통칭 농촌우대(惠農) 정책이라고 알려져 있는 당 중앙의 대학생촌관 정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강하다. 전공과 경력, 출신지 등은 불문하고 ‘정치사상적 소양이 양호하고’, ‘당원’인 대학생들을 주로 선발하여 농촌 간부로 임명하는 현재의 대학생촌관 제도는 우선 농촌 거버넌스에 관한 현행 기본 법률인 <촌민위원회조직법>에서 촌의 간부는 반드시 촌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는 규정과 상충된다. 그리고 촌관으로 임용되는 대학생들이 대부분 농촌과 관련 없는 전공자들로 농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농촌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촌 간부들보다 훨씬 많은 급여와 각종 혜택을 받으면서 한시적으로 머물다 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생촌관들은 2-3년 촌에서 일을 하고 나면 이후에 공무원 시험이나 대학원 진학시에 가산점을 얻을 수 있고, 일을 하는 기간에도 정부에서 여러 가지 지원과 배려를 해주기 때문에 대학생들에게는 ‘괜찮은 임시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농촌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동기보다 이후 자신의 진로에 도움을 받고자 대학생촌관에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대학생촌관은 농촌의 실질적 발전에는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상당수이며, 심지어는 오히려 농촌 발전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그러면, 이러한 부정적 평가와 함께 여러 문제점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 중앙이 계속적인 정책 추진을 도모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기존연구들은 대부분 대학생촌관 제도의 의의를 부각시키거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하는데 치중되어 있어 제도시행의 근본 배경에 대한 탐구는 매우 미흡한 편이다. 하여 본 논문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이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정치사회적 배경을 지목하였다. 하나는 2000년대 초반 이후 심화되고 있는 대졸자 취업난이다. 대졸자 실업률의 증가는 중국이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현상으로 대졸자 계층이 중국 전체 실업자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크다고 할 수 없으나 중국 역사상 고학력 실업자가 가장 많이 양산되면서 최근 중국 실업자군에서 핵심 계층으로 지목되고 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인구 대국이고 경제 체제 전환과 경제 구조 조정이 가속화 되면서 대량 실업의 발생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대졸자 실업률의 증가는 다른 계층의 실업보다 정치사회적 파장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혈기가 왕성하고 전문지식을 갖춘 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외부 트렌드에 대한 반응성과 개방도가 높으며 정보력을 바탕으로 한 조직적 행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부나 사회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다면 사회의 불안정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외부에서도 대졸자 실업문제를 중국의 초미지급한 사안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중국의 ‘조화사회’ 실현은 어려울 것이라 지적하였다. 이러한 우려 속에 당 중앙과 정부는 대졸자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여기에 대학생촌관 제도가 한 방편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다른 하나는 당의 기층조직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중국 사회 전체가 커다란 변혁을 겪어 온 가운데 사회주의 정치 체제는 근본적 변화 없이 고수되고 있지만 당 안팎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약화되고 당은 이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위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농촌 등 기층 사회의 당 조직은, 청년층의 이농(離農) 현상과 맞물려, 간부의 노령화와 함께 활동성과 조직력이 약화되고 지위를 이용하여 집체자원을 유용하는 등의 부패 현상도 적지 않아 대중들의 지지가 감소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특히 촌 간부의 노령화와 전반적으로 낮은 교육수준으로 인한 자질 문제가 신농촌건설운동의 진전과 농촌 발전을 제약하는 주요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당 중앙은 기존 간부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동시에 기층 조직에 이른바 젊은 피를 수혈하여 당 조직 에 활력을 불어넣고 조직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한편으로는 대학생들에 대한 정치사상 교육을 보다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상적으로 무장된 젊은 고학력 인력을 대학생 촌관이라는 제도를 통해 기층조직에 투입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물론 당 중앙이 u45824 .학생촌관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는 이 두 가지 배경 이외에 다른 측면에서 여러 배경이 있을 것이지만, 본 논문에서는 정책 시행과 관련된 당 중앙의 중요 문건을 토대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정치사회적 배경을 지목하였다. 요컨대 농촌우대(惠農)정책으로 홍보되는 대학생촌관 정책이 농촌의 발전에 오히려 불리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당 중앙은 향후 일정 기간 동안에는 대학생촌관 제도를 계속 추진한다는 계획을 표명하고 있는데, 이는 농촌의 발전을 위한 것이 최우선 목표가 아니라, 한시적이지만 대졸자 취업난을 조금이라도 완화해 보려는 것과 농촌의 기층조직을 강화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목적으로 설정되고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생촌관의 선발대상이나 기본 조건이 농촌에서 필요로 하는 내용이 아니라 이러한 당의 의도를 실현하는데 유용한 기준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 대학생촌관 제도가 농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앞으로도 대학생촌관 정책은 진정한 농촌우대 정책이 될 수 없을 것이며, 결국 또 하나의 농촌 희생 사례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In the mid-1990s the institution that recruited young college-graduates publicly and appointed them as village official had been initiated in some local places. This institution was evaluated positively because that it offered jobs to college-graduate in the one hand and that enliven village full of old man with young people having new knowledge in the other hand, so it had spread gradually through other regions until Chinese Communist Party Central Committee(CCPCC) took it as strategic policy of CCPCC at the national level in 2005. Since then CCPCC has offered a variety of support including financial one needed, but now the ``college-graduate as village official`` policy is not welcomed by villager any more. The majority of college-graduate as village official had no knowledge or career of agriculture and village work that is the most needed one in village, and they work as village official during 2-3 years at most then leave to look for their own jobs(mostly they apply for government officials which is the most popular job among college students nowadays), so they do not or can not contribute to development of rural economy and even give a negative effect on the rural governance on the contrary. Nevertheless CCPCC is still pushing on with the ``college-graduate as village official`` policy nationwide. Then why? With regard to the reason why CCPCC adhere to this rural policy which is opposed by rural people, surprisingly existing research have given little attention to. To answer the question this study suggests the two important political-social background about this policy choice of CCPCC. First, the increase of unemployment rate of college-graduate since the 2000s : Because the productivity was pretty much low in the period fo planned economy, it is natural in some senses that there have been many workers who were laid off after the reform in China. But the increase of unemployment of highly educated people-college students- since the 2000s is an experience China undergo for the first time. A portion of college graduate in the whole unemployment is not very high yet, they are pointed as one of key classes within unemployment. What is worse it is said that the high level of unemployment of college-graduate is more threatening to a society because college-graduate is intelligent, energetic, sensitive to political issues, accessible to variety of information and able to organize. So, CCPCC and Chinese government are especially concerned about unemployment of college-graduate, in this context the ``college-graduate as village official`` institution is used to offer job opportunity to college-graduate although it``s only a 2-3 years long job. Second, the weakening of grass root organization : After the reform and opening up, it is broadly observed that socialist ideology has been weakened throughout the whole society in China and so did CCP grass root organizations with ageing of village cadres because of rush to the city of young villagers from the countryside. Older village cadres are blamed occasionally for rent-seeking and corruption using their position. That is it was pointed as the crucial factor constraining the construction of new rural community and the development of countryside that the low quality of village cadres with ageing and low level of education. For CCP grass root organizations especially in countryside are very important because by them CCP has managed over 700 million peasants and CCP also need to get support from villagers continuously. In this context CCPCC try to input young college-graduate who are well equipped with political ideology into grass root organizations in rural area through the ``college-graduate as village official`` institution to strengthen the grass root organization and to maintain the stable governance in countryside. To sum up, the prime goals of the ``college-graduate as village official`` policy what is called rural preferential policy, from an angle of CCPCC, are those political and social ones such as alleviation of employment difficulty for college-graduate and consolidation of party grass root organization in countryside, not those rural-oriented ones, therefore the ``college-graduate as village official`` policy is likely to force countryside to sacrifice for city again. As we know Chinese government and CCP have shown an city-oriented policy inclination since the establishment of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1949, national society was divided to urban-rural area and this dual system was shaped firmly in every aspect, rural areas has made a sacrifice for cities so that citizens could enjoy a variety of benefit, the nation could accumulate capital for industrialization. Now China became a wealthy country due to the reform and opening, but rural-urban dual system is still maintained, rural areas are still in weak position, villages are likely to be victims once again because of ``college-graduate as village official`` plan what is called rural preferential policy.

      • KCI등재

        접경 속의 접경 -戰後 臺灣의 眷村 형성과 관리-

        손준식(Son Junsik) 중앙대학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2020 다문화콘텐츠연구 Vol.0 No.35

        본 논문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만을 접수하기 위해 또는 1949년 전후 국민당정부를 따라 대만에 온 外省人의 집단거주지 중 하나인 권촌의 형성과 변천과정 및 그 관리와 규모를 종합 정리한 연구이다. 대만으로 철수한 국민당정부는 함께 온 외성인 특히 핵심 통치역량인 군대의 사기를 안정시키기 위해 군인가족이 머물 공간과 생활지원이 급선무였다. 이에 일본이 남겨놓은 시설을 개조하거나 군부대 인근 또는 도시나 향촌 외곽지역에 간이건물을 지어 이들을 집중 수용함으로써 권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0년 이전 세워진 권촌은 크게 일본이 남긴 官舍나 基地, 군 당국이 지은 克難 주택, 婦聯會가 기금을 모아 세운 단지 등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임시거처로 애초 허름하게 지어졌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노후화가 심해지고 증개축과 수해 등으로 안전에도 문제가 생겼다. 뿐만 아니라 도시미관을 해치고 개발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와 함께 2, 3세대의 유출로 공동화와 노령화가 진행됨으로써 재건축이 추진되어 현재는 거의 모두 철거된 상태이다. 권촌에서는 군에 의한 집중 관리가 행해졌다. 우선 관련 법규가 제정되고 관리기구가 지정되어 군인가족에 대한 조사, 권촌 건설과 분배, 생활과 교육 지원 등을 집행하였다. 한편 군의 통제를 받는 자치위원회를 두어 제반 행정업무를 수행토록 하였고 婦女工作隊가 활동한 권촌도 있었다. 부련회가 권촌 부녀에게 제공한 부업과 봉사는 주민의 생활개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 국민당 黨部가 조직되어 선거에 주민을 동원하기도 했다. 부대시설로 진료소와 매점 등이 있었으며 일용품을 배급하기도 居住身分證을 발급해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권촌은 대부분 소규모로 대도시와 그 주위에 집중되어있었다. 권촌의 수는 육군, 공군, 聯勤, 해군 소속 순으로 많았으며 병종의 성격 상 지역별 분포에 차이를 보였다. 권촌은 병종의 특성, 건설비 기부단체, 인물, 原 駐屯地, 소재지, 주민들의 의지 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름 지어졌다. 대부분의 권촌은 협소한 공간, 위계적 분배, 폐쇄적 취락이라는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었고 건물 배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촌내에 큰 길 양옆으로 좁은 골목을 사이로 連棟式 건물이 이어져 있고 광장과 방공호, 공동 화장실, 탁아소, 유치원, 농구장 등이 있으며 공용우물 또는 수도가 설치되어있었다. 또한 집집마다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외곽은 담이나 넓은 도로로 외부와 구분되어있었다. 권촌은 대규모의 강요된 정치적 인구이동이란 특수한 시대배경 하에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낫선 땅에서 외부와 격리된 독립공간으로 존재했던 권촌은 국민당정부의 지원과 관리를 받으며 그 통치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권촌 1세대는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서로 도우며 생활하면서 자연스레 우리는 하나라는 공동체의식을 갖게 된다. 하지만 本省人 여성들이 권촌에 시집오고 2, 3세대가 성장하여 외부세계와 교류하면서 그 폐쇄적인 성격은 점차 희석되어 대만 현지문화와 융합하게 된다. 이어 경제성장과 도시개발로 재건축이 진행되면서 노후 권촌은 마침내 소멸되고 그 주민들은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처럼 권촌은 접경 공간에서의 조우와 교류, 융합과 공존이라는 진행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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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세기 「봉평리비」의 奴人村과 村使人

        최경선(Choi, Kyung-Sun) 한국고대사학회 2019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93

        「봉평리비」(524)의 노인에 대한 신라의 지배방식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봉평리비」에 보이는 여러 촌 중 노인촌과 일반 촌을 분별해 보았다. 처벌대상자의 범위와 別敎令의 내용 등을 고려하였을 때, 남미지촌만이 노인촌이었다고 판단된다. 즉, 524년 시점에 동해안 지역에는 도사가 파견된 중심촌 예하의 일부 촌이 노인촌으로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失火로 인한 사태로 주된 책임이 있는 남미지촌에는 별교령으로 처분이 내려지고, 아대혜촌과 갈시조촌의 사인이 남미지촌사인과 함께 처벌을 받았다. 이로 보아 당시 남미지촌 주민은 노인으로서 일반 촌의 주민과 함께 ‘[尓]耶界城’에 동원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일반 촌이든 노인촌이든 주민을 동원하는 데 있어서 ‘使人’이 주된 역할을 하였음이 주목된다. 그런데 촌사인을 매개로 노인촌을 지배하는 방식은 노인촌이 촌으로 편제된 이후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520년 율령 반포 때에 노인의 처지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노인집단을 촌으로 편제하고 촌사인을 둠으로써 ‘도사-중심촌의 유력자-촌사인’으로 이어지는 행정체계 속에 편입시켰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다만 노인은 ‘賤人’을 의미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특정 주체와 상하관계를 맺고 예속된 처지를 뜻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노인촌의 주민은 일반 촌의 주민과는 차별되었을 것이다. 국역의 내용이나 성격의 차이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라의 노인은 일반 민과 천인 사이의 존재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attempts to understand Silla’s ruling system over the Noin(奴人) written on Bongpyeongnibi(鳳坪里碑), which was erected in 524. As a groundwork, this article first distinguished Noinchon(奴人村) and general Chon(村) from various Chons shown in Bongpyeongnibi. Considering the list of punishment and Beolgyoryeong(別敎令, the additional decree), only Nammijichon(男弥只村) can be judged as Noinchon. In 524, some of Chons under the command of central Chon where Dosa(道使) was dispatched, existed as Noinchon in the East Sea region. Nammijichon, which was primarily responsible for the situation caused by fire, was given Beolgyoryeong, and Sa-in(使人) of Adaehyechon(阿大兮村) and Galsijochon(葛尸條村) were punished with Nammijichonsa-in(男弥只村使人). Based on this, it can be figured out that Nammijichon residents at that time were mobilized to “Iyagyeseong([尓]耶界城)” as a Noin with the residents of general Chon. It is also noteworthy that the “Sa-in” played a major role in mobilizing residents, whether they are from general Chon or Noinchon. The Chonsa-in(村使人)s of Bongpyeongnibi were a local people who did not have Waewi(外位, provincial rank), or had a low one. Therefore, they were supposed to carry out the orders of Dosa sent to the central Chon as an administrative practitioner. However, the way of ruling the Noinchon through the Chonsa-in would have been possible only after the Noin group became Chon. Noin’s position remained in 520 when the Yullyeong was promulgated(前時王大敎法), but there would have been a significant change. At this time, it is possible to consider the possibility of incorporating the Noin group into the administrative system that leads from Dosa to influential person of central village and Chonsa-in by organizing the group into Chon and having a Chonsa-in. Even if the Noin does not mean “Cheonin(賤人)”, at least it seems to mean that they established hierarchical relationship with a specific subject and were subordinated to them. Therefore, the residents of the Noinchon would be differentiated from those of the general Chon. In this sense, the Noin of Silla can be judged as being between common people and Cheo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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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走馬樓 吳簡을 통해 본 六朝時代 ‘村’의 기원에 대한 연구

        신성곤(辛圣,坤)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9 역사문화연구 Vol.34 No.-

        六朝시대에 등장한 자연촌락으로서의 村의 기원을 기존 문헌자료만이 아니라 최근 長沙 走馬樓에서 출토된 吳簡에 대한 연구 분야 중 ‘丘’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그 성격을 분명히 하고, 村과의 유사성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그 결과 丘는 규모가 里와 비슷하거나 약간 컸을 가능성이 있지만 鄕보다는 작은 자연취락이었고, 도시에서 떨어진 田野 특히 丘陵지대에 두어진 농경지를 포함한 民戶의 거주지이기도 하였다. 丘는 村은 이처럼 규모, 田地와 거주지가 포함된 기능, 자연촌락적 성격에서 매우 유사하다. 다만 村의 분포는 거의 전국적이지만 丘는 현재까지는 孫吳 통치시기 長沙郡 臨湘縣 부근에서만 발견된다. 丘는 방어설비를 갖추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村은 자위적인 방어기능이 포함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었던 것 같다. 丘는 또한 聚 또는 塢壁과 비슷하지만 군사적인 방어적 성격의 강약이나 규모면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塢壁도 분포가 지역적 한계가 있었던 반해 村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西晉 이후 군사적인 수요가 강했던 華北지역에서는 豪强이나 兵士가 주력을 이루는 塢壁이 활발하게 세워졌고,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는 家族이나 鄕里의 인사들이 중심이 된 塢壁이 주로 성립되었다. 이 두 유형의 塢壁은 규모면에서나 군사적 기능의 수요에서 차이가 있었고, 후자 유형의 塢壁은 방어시설이 빈약한 丘나 聚의 형태와 많이 닮았다.결국 後漢 이래 鄕里共同體의 약화와 전란의 피해에 따라 농민들은 都市를 벗어나 田野로 나아가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集落을 형성하였는데, 지역적인 차이 와 군사적 수요에 따라 그 규모나 성격에 차이가 있었지만 다양한 자연 집락이 형태와 지역적 성격에 따라 聚, 邨, 村塢, 村堡, 廬舍 등으로 불렸다. 이들 자연촌락이 국가의 말단 행정조직에 편입되면서 통일적인 용어를 필요로 하게 될 때 대표 호칭으로 사용된 것이 “村”이었다. 丘는 이런 다양한 자연촌락 중의 하나였다. 最近在长沙走马楼出土三国吴简以来, 一些学者对其中关於‘里’与‘丘’的资料进行了多角的探索,取得一定进展, 而且深入了对于‘里’与‘丘’的职能争论. 本文从走马楼吴简概略地检讨了围绕‘里’与‘丘’的争论的关键所在, 继而仔细分析了‘里’与‘丘’、‘乡里’与‘乡丘’之類似点和差别点. 然後进行了比较丘与六朝时期村的形态和职能, 发现了几个值得思考的一些问题.首先需要指出的是丘与里的规模竝无太大区别, 互不统属, 竝从属於乡. 然丘为各种赋税徵收的单位, 里为登录户口(傅籍)的单位, 所以兩者是不同系统的职能单位.竝且里为人为行政区划, 丘为离都市自然聚落, 包括耕作地丘陵上造成的居住聚落.因此丘似乎六朝时期的自然村落-村. 但是村分布了华北和江南, 丘至今只发现了孙吴统治下的长沙郡臨湘县一带. 还有村大体保有了各种自卫的防御设备, 丘不能證明有没有防御设备, 所以丘与村可能一些有差.其次丘似乎聚和坞壁以自然的农民聚落, 可是聚和坞壁的规模和分布范围不一定,竝不具备行政职能. 但为家族、乡里中心的坞壁是比较的小规模, 而且不太建设了防御设备, 由此可见, 这样的坞壁与丘职能、规模上没有什么差别.总之, 从东汉中叶以後因不断的战乱乡里共同体遭受严重破坏, 农民离开都市在田野形成聚落, 集团的居住. 六朝时期的自然村落比如丘、聚、村、村坞、村堡、庐舍出现了, 但自然村落编成最下层行政单位时, 以‘村’为代表称号. 所以丘也可能包括六朝时期村的职能和范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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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国村民自治制度研究

        鄭二根(정이근) 한국비교공법학회 2006 公法學硏究 Vol.7 No.5

        중국의 지방자치제도를 논하는 경우 대개 특별행정구제도, 민족구역자치제도 및 일반자치제도로 구분하며, 이 가운데 일반자치제도는 촌의 촌민자치와 도시에서 실시하는 거민자치로 구분된다. 촌민자치 또는 거민자치는 기층의 군중성 자치조직으로서 촌민위원회와 거민위원회로 대표된다. 이들 기층의 군중성 자치조직은 농촌이나 도시의 촌민이나 거민을 바탕으로 일정한 지역 범위 내에서 스스로 관리하고 스스로 교육하고 스스로 봉사하는 사회조직으로 이해된다. 본 논문에서는 기층의 군중성 자치조직 가운데 특히 촌민위원회를 중심으로 각 촌급조직 상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한다. 촌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스스로 관리하고, 스스로 교육하고 스스로 봉사하는 촌민자치의 실현을 위하여 실시하는 촌민자치는 그러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특히 촌당지부의 포괄적인 지배와 관리를 받기 때문에 진정한 자치를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본 논문의 핵심적인 요지 이기도 하다. 기층조직인 촌의 조직은 우선 세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촌민자치조직계통이다. 촌민자치조직으로는 촌민회의 또는 촌민대표회의가 있고, 그 집행기관으로서 촌민위원회가 있으며, 촌민위원회는 필요에 따라 촌민소조 또는 각 전문위원회를 설치하여 운용한다. 둘째, 당 조직계통이다. 촌급의 당 조직으로는 당원대회 또는 당원대표대회가 있고, 그 집행기관으로서 당지부가 있으며, 당지부는 하부조직으로서 촌부녀대표대회 또는 공산당청년단을 관리하고 있다. 셋째는 집체경제조직계통이다. 촌의 집체경제조직계통은 촌의 농업생산합작사 또는 촌의 경제합작사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공장이나 기업 등이 포함된다. 촌민자치에서 그 중 핵심적인 조직은 촌민자치조직계통이라 할 수 있다. 촌민자치조직계통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촌민위원회의 주된 임무는 촌의 공공사무 처리와 공익사업의 수행, 민간 조정을 통한 분쟁의 처리, 사회 치안의 유지에 협조하고, 인민정부에 대하여 촌민의 의견을 반영토록 건의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농촌의 경제발전을 추진하고 농촌 생산건설을 촉진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농촌의 집체소유에 속하는 토지와 기타 재산을 관리한다. 촌민위원회는 주임, 부주임, 위원 등 3명에서 7명의 인원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촌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3년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촌민위원회는 촌민자치의 실현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촌민소조를 설치할 수 있고 인민화해위원회, 치안보위위원회 및 공공위생 등의 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다. 촌민자치제도의 핵심적인 조직인 촌민위원회와 기타 촌급조직 사이의 관계에서, 우선 촌민위원회 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지방정부인 향?진 인민정부와 촌민위원회의 관계는 지도와 피지도의 관계에 있다. 논문의 핵심이 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촌급 조직인 당지부와의 관계에서 당지부는 영도적 지위에 있고 촌민위원회는 당지부의 영도를 받는다. 영도는 포괄적 지배관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당지부의 촌민위원회에 대한 포괄적 지배와 관리는 불가피하다. 당지부와의 관계에서 촌민위원회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중국의 촌민자치제도에서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당지부의 촌민자치조직에 대한 영도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진정한 자치를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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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중고기 道使의 운영과 성격 변화

        김재홍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한국학논총 Vol.44 No.-

        Examined in this article are references to the Dosa figures who were local prefects dispatched from the central to individual local towns during the Middle-Ancient period of Silla, in order to determine their nature, as well as identify changes that occurred in their functions. Alterations in the nature of these Dosa figures are analyzed in chronological order, with an emphasis placed upon their functions and their roles. In the Middle-Ancient period of Silla, the Dosa figures were local administrators sent to local administrative units, the Chon towns, from the central capital, but in fact they were not so at least from the very beginning. It was only around C.E.505, when the Chon administration became a norm in local governing, that those Dosa figures were sent to Chon towns. At first, they were sent to local regions such as Nasodokji(according to the Jungseong-ri stele) or Tamsu(according to the Naengsu-ri stele), and collected taxes. Originally they were no administrative representatives of the central, but their early roles like this enabled them to serve mainly as tax collectors in the future. With the launch of the Chon administration in C.E.505, Dosa figures were sent to regional centers, and other Chon towns received Sa’in(使人) figures, who were originally from those towns. Through this Dosa/Sa’in structure, the Silla government continued to collect taxes and mobilize human resources. With the new ‘Gun’ units established in the mid-6th century, Nadu(邏頭) figures were sent to regional centers, while Dosa figures were sent to the rest of them. Finally, all Chon units came to receive Dosa figures as local administrators. During the reign of king Jinpyeong-wang, Silla’s territory was expanded, and the Dosa figures were granted with a new role to lead the war in local Chon towns along the border. We can see the Dosa figures’ role was expanding from mainly an economic(tax collection) one to a fairly military one. This caused the Dosa administration itself to change, and as we can see from historical records of later days, they were documented as Hyeon-ryeong figures, dispatched to the Hyeon units. 이 글은 신라 중고기 촌에 파견된 지방관인 도사의 용례를 분석하여 도사의 성격과 그 변화를 추적한 논문이다. 도사와 지역단위인 촌을 분리하여 도사의 기능과 업무에 초점을 맞추어 시간적인 변화에 따른 도사의 성격 변화를 검토하였다. 신라 중고기에 도사는 행정단위인 촌에 파견된 지방관이지만 처음부터 촌에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도사가 촌과 결합된 것은 전국적으로 촌제가 실시된 지증왕 6년(505) 이후이다. 처음 도사는 관도를 따라 파견되어 나소독지(중성리비)나 탐수(냉수리비) 등의 지역(道)에 파견되어 수취 업무를 수행하였다. 도사는 촌에 파견된 지방관은 아니었지만, 이후 도사가 조세 수취를 주요한 업무로 하게 되는 근원이 되었다. 지증왕 6년(505) 촌제가 실시되면서 도사는 중심촌에 파견되고 다른 촌에는 현지인인 使人이 임명되었다. 신라는 도사-사인을 통해 지방의 촌을 단위로 조세 및 力役의 수취를 행하였으며,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촌주가 촌을 자율적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6세기 중엽에 군이 설정되면서 중심촌에는 邏頭가, 나머지 촌에는 도사가 파견되었다. 이제 모든 촌에 도사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진평왕대 이후에 신라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변경의 성(촌)에서 도사는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도사의 업무가 조세 수취에서 군사적인 측면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도사 업무의 확대는 도사제에 변화를 초래하였으므로 후대 사료에는 현에 파견된 현령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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