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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論文) : 서적(書籍)을 통해 본 뱅상 레브 신부의 선교활동 -『익세보(益世報)』 에 전재(轉載)된 天主敎 서적(書籍)을 중심으로-

        신태갑 중국사학회 2015 中國史硏究 Vol.99 No.-

        雷鳴遠神父於1915年在天津創刊了『益世報』, 幷在第二年開設的“宗敎叢談”中刊載了有關天主敎的各種新聞. 如果說創辦『益世報』的目的是爲了改良中國社會ㆍ增進文明, 那마開設“宗敎叢談”則是爲了實現中國的“福音化”. “宗敎叢談”的內容可以分爲三類:專欄ㆍ問答類ㆍ書籍類. 本論文是對這三類中的書籍類所進行的分析. 卽針對在『益世報』“宗敎叢談”中所轉載的有關天主敎書籍的種類及其內容的分析. 這些書籍大致分爲敎理書ㆍ護敎書ㆍ歷史書ㆍ文集ㆍ傳記等. 通過具體的分析考察, 得知了如下的事實. 第壹, 在欄目中介紹最多的就是護敎書籍, 這說明『益世報』“宗敎叢談”的負責人最關心的是“護敎”問題. 護敎書在數量以及刊載天數方面都遠遠多於其他書籍, 其次則是敎理書. 所謂“護敎”, 就是針對拒絶天主敎的人所提出的反駁和疑問而進行辯護. 卽然開設“宗敎叢談”的目的是爲了中國的福音化, 那重視護敎書和敎理書便是理所應當的. 第二, 歷史書僅次於護敎書和敎理書, 在轉載數量上占第三位. 此欄目也重視介紹歷史書, 因爲把“天主敎是具有較强歷史意識的宗敎”和“中華民族是非常重視歷史的民族”這兩個共同點巧妙地結合在壹起, 幷有效地向中國傳播福音. 尤其在歷史書中有『高麗致命事略』這本書. 這書是處於義和團事件困境中的傳敎士爲了鼓勵中國天主敎信徒們能學習朝鮮天主敎信徒克服危機幷將信仰維護到最後而發行的. 這些事實說明, 無論是當時出版這本書的中國, 還是『益世報』“宗敎叢談”的負責人都認爲朝鮮是收容ㆍ傳播天主敎的典範. 第三, 在『益世報』“宗敎叢談”所介紹的書籍中連載時間最長的就是黃伯祿所著的『集說詮眞』. 這本書是從1925年6月4日至次年11月24日爲止, 總共連載了474天. 相比其他43種書籍的平均連載天數82天, 『集說詮眞』的連載天數比其5倍還多. 這本書是反迷信的著作, 其目的是爲傳播幷建立正確的天主敎信仰. 由此可見,『益世報』“宗敎叢談”的負責人認爲展開正確的傳敎事業, 打破迷信也是重要的任務之壹. 第四, 在『益世報』“宗敎叢談”中所介紹的書籍當中, 外國人的著作爲20種, 中國人的著作爲22種, 還有1種爲作者未詳. 外國人當中利瑪竇和艾儒略的著作各爲4種. 中國人當中李체和陳垣的著作各爲5種, 黃伯祿的爲3種. 通過這些內容, 我們可知當時“宗敎叢談”的負責人關註了나壹些中國天主敎書籍的作者, 而且這些著名作者也被『益世報』的讀者銘記於心. 第五, 『益世報』“宗敎叢談”介紹的個人文集以及傳記, 給讀者留下了深刻的印象. 其中, 作爲外國人的利瑪竇是最有名的. 而中國人中, 有被稱爲“三大柱石”的徐光啓ㆍ李之藻ㆍ楊延筠, 以及作爲神父和畵家聞名於世的吳歷(1632-1718). 最後, 在『益世報』開設“宗敎叢談”最重要的目的是中國福音化. 不過, 爲了實現中國福音化, 必須說淸天主敎與儒道佛敎及民間信仰有何不同之處, 從而用比競爭對象更有說服力的邏輯接近中國人, 幷조住中國人的心. 爲了實現這個目標,『益世報』“宗敎叢談”的負責人要具體實踐的就是繼承利瑪竇以來傳敎士們所采取的針對中國的傳敎策略, 幷將其廣泛普及. 其策略爲:首先將儒敎分爲兩個階段, 對秦漢以前的儒家予以稱贊, 而對宋明理學予以貶低; 其次, 對於除了儒敎以外的佛道和民間信仰, 采取壹貫地反駁與排斥的原則.『益世報』“宗敎叢談”負責人的這些努力, 提高了中國知識分子對天主敎的認識, 也促進了天主敎的中國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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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Middle Kingdom (中國總論)에 나타난 사무엘 윌리암스의 중국관(中國觀) -청조(淸朝)의 쇄국정책, 사회상의 내용을 중심으로-

        로재식 중국사학회 2019 中國史硏究 Vol.0 No.120

        衛三畏(1812-1884)是早期來華美國新敎傳敎士,從1883年10月抵達廣州,直到1876年返美,凡43年,是當時在華時日最長的西方人. 衛三畏在華期間,不僅努力從事文化傳敎,而且積極參與美國遠東外交活動,長期擔任美國駐華使團飜譯,曾9次代理美國駐華公使,同時他一生致力與硏究和介紹中國傳統文化,寫作了不少漢學著作. 其中,『中國總論, The middle Kingdom』 成爲他作爲美國漢學第一的地位. 『中國總論』包括中國地理、言語、文學、社會、宗敎、歷史、文化以及對外關係等諸方面內容,其對美國漢學的發展影響很大. 本論文主要探討在『中國總論』的內容中,衛三畏對淸朝實行閉關政策原因和一些社會狀的看法. 衛三畏認爲, 淸朝實行閉關狀態, 阻碍了基督敎福音的傳播, 是與上帝的意旨相違背的. 他堅信, 中國最終將走向開方. 在他看來,一方面,開方本身對中國是有益的,中國人通過開放可以獲得更高的目標、更多的知識和希望. 衛三畏將中國人的生活狀態看成是停滯的. 在他看來,中國就是落後、停滯的代名詞,而西方國家則代表着先進與進步. 中國發展的最終目標就是西方的現在. 他對當時中國社會的一些列現象-如科學技術的落後、女性的居纏足、住環境的不衛生以及人性的墮落等問題-作出了客觀的論述. 他作了深刻的分析,而且其論述有一定的價値. 不過它以基督敎敎義判斷中國社會現象,中國貧困的原因歸結與不信基督敎信仰,這一點是難勉片面的看法.作爲傳敎士,衛三畏的思想可以理解的,但一些論述過與强調了基督敎的作用. 總之,衛三畏在《中國總論》中對中國文化進行了比較系統的分析,雖然其中不免帶有片面性和西方傳敎士對中國固有的偏見,但對中國文明持肯定態度,譽其爲“最文明的異敎國家”. 他的漢學著作成爲美國中國學的釐正碑,還他對東學西漸的貢獻不可忽視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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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합민족국가(複合民族國家)의 파탄 : 만주국의 붕괴와 만주국인(滿洲國人)의 충돌,수난

        윤휘탁 중국사학회 2012 中國史硏究 Vol.78 No.-

        被標榜爲``複合民主國家``的滿洲國隨著日本的敗北開始崩潰, 滿洲國內各民族間的矛盾開始爆發. 雖然在``滿洲國``內一直都在高喊``民主協和``, 但是在``滿洲國人``裏去조不到``民主協和``的半點痕跡. 조回主人意識的中國人的不滿, 憤怒, 憎惡的箭頭都指向了日本人和日本人的幇手朝鮮人. 日本人和朝鮮人在中國人的報複下, 束手無策受盡苦難. 在蘇聯軍的進攻面前, 關東軍的防禦線開始向南撤退, 흔多日本人(包括軍人)被蘇聯軍逮捕倂押送到蘇聯開始囚禁生活. 特別是日本人開拓團因中國人和蘇聯軍受到了極大的損失. 蘇聯軍在對蘇, 滿邊境地區的日本人開拓村進行鎭壓的過程中, 對日本人施行了强奸, 殺害, 財産掠奪等野蠻的行徑. 雪上加霜, 已經조回滿洲土地主人意識的中國人對日本開拓村進行攻擊的情況也越來越多. 日本人開拓者中흔多人因爲堅持抵抗到底而死亡, 整個村子集體自殺的情況也흔多. 흔多生存下來的日本人則被蘇聯軍送到收容所開始了收容生活. 在這些災難面前一些日本女性絶望之餘選擇了和中國人結婚而留在了中國. 也有흔多失去父母的日本孤兒被中國家庭收養. 령一方面滿洲社會陷入了無政府狀態, 各地的土匪、國民黨系列的各種武裝部隊、一些中國人對朝鮮人壓抑已久的各種不滿憤怒和憎惡也開始爆發. 一些朝鮮人的村子因中國人的襲擊而全部毁滅. 一些朝鮮人冒著生死危險開始返回故鄕, 但是在朝鮮家鄕的土地上已經沒有任何根系, 沒有人會歡迎身無分文的他們. 這些人中흔多人因爲强烈的挫折感, 又重新選擇了返回已經成爲第二故鄕的滿洲土地. 흔多人加入了沒有差別政策, 實行土地分配的共産黨軍隊和國民黨軍隊展開了鬪爭. 他們依고分配到的土地, 開始了在滿洲的安居生活. 隨著日本的敗北, 滿洲社會瞬間成爲了民族對立沖突的舞台, 意味著日本殖民主義者空想的``複合民族國家``等同於滿洲國的妄想的破滅. 這也意味著日本殖民主義者妄想的``滿洲國人``在滿洲國裏實際上也是不存在的. 滿洲國不是獨立國家, 也不是``複合民族國家``. 東亞各民族爲了生存而流亡到滿洲, 受到日本殖民主義權利壓迫形成了各種民族矛盾, 這些矛盾隨著殖民權力的崩潰而爆發, 滿洲國就是在爆發中消失的一種海市蜃樓般的``假象共同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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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근(孫家勤)의 중서사의화여사실화(中西寫意畵與寫實畵)

        김서윤 중국사학회 2011 中國史硏究 Vol.72 No.-

        中國改革開放以後, 人們對大陸繪畵的理解逐漸加深, 相對來說對台灣畵壇的關注逐漸減少. 本論文硏究了中國近現代畵壇大師張大千的弟子、繼承和變革了張大千的畵風和繪畵精神的台灣現代畵家孫家勤的畵作, 對最近去世的張大千最後壹名弟子孫家勤作品中中西美術的交融進行了硏究, 希望能展現出在其作品中學識和繪畵可在傳統和現代中共存藝術的極致. 張大千的關門弟子畵家孫家勤于2010年夏天台灣暑假期間出國, 9月回到台灣, 但因罹患退役軍人病在台灣的三軍醫療院接受了壹個多月的治療, 但最終沒能전愈, 于10月27日離世, 享年81歲, 2010年11月計劃在台北中正紀念堂擧行的畵展也因此而取消, 畵家傳記般的壹生也由此落幕. 孫家勤爲我們留下了本時代難得的作品, 應該長久保存. 中國文化自淸日戰爭和1911年辛亥革命以後, 在曲折的現代史發展過程中, 受到了兩種文化勢力的影響. 縱觀辛亥革命以後從大陸(中國)赴台的著名藝術家的繪畵活動, 可以了解到大陸(中國)和台灣繪畵的不同點. 現實主義和傳統文人畵之間的矛盾以及對寫實和寫意的爭論接連不斷, 以民族性爲基礎誕生的傳統繪畵進行了帶有西方或者東方前衛性格的改革, 所有的學術文化都受到了西方文明的巨大影響. 中國畵方面, 原來台灣的中國畵傳統受到日本殖民地政府的壓迫變得非常脆弱, 在這種逆境下, 溥心여、黃君壁和大部分時間在國外度過, 因爲偶爾赴台而最後在台灣安家、對台灣的中國畵産生巨大影響的張大千, 這三名從大陸和外國回來的渡海三家重新奠定了台灣的傳統中國畵的基礎. 後輩畵家孫家勤于1949年18歲從大陸來到台灣居住, 和渡海三家結下了繪畵的緣分. 1949年孫家勤從大陸來到台灣, 進入台灣師範大學美術系學習, 畢業後繼續留在台灣擔任了師範大學的美術敎授. 孫家勤在渡海三家溥心여、黃君壁和張大千門下學習繪畵, 其中受張大千的影響最大. 孫家勤在巴西大風堂門下學習的3年時間裏, 正好간上了張大千盡量避免旅行的那段時間, 所以有了和張大千朝夕相處的機會, 深深地習染了張大千卓越的風采. 張大千爲讓孫家勤深刻理解了古人的繪畵風格、探索讓筆力成熟的秘訣、結合明淸以後多個名家的風格幷追求自己的世界, 傳授了他古畵名作的技法. 在張大千的關門弟子中, 孫家勤是唯壹眞正地理解張大千藝術理念幷實踐的人. 在這壹時期, 孫家勤廣泛接觸了多種畵法, 臨摹佛像和敦煌壁畵也是從這個時期開始的. 山水畵受到了張大千的潑墨影響, 寫意花卉達到了精煉和粗광的境界, 孫家勤到達了明確分析中西繪畵觀點的階段. 西方繪畵重視光線, 所以他將金箔壹張壹張粘貼起來後, 繪制了將金箔作爲底畵的鮮明華麗的潑墨潑彩山水畵, 實現了中西美術的融合和協調, 讓外國人可以更容易地接受中國繪畵. 在中國繪畵中寫實畵也叫做工筆畵, 但寫實畵和工筆畵相比, 包含在寫意畵的裏面, 具有根據畵家的意圖表現精神世界的高層次的含義. 比較中西造型文化可以了解到中國追求主體世界的善, 而西方則偏重于獲取客體的眞理. 中國將倫理的修養和審美的自由作爲最高境界, 흔難將審美和倫理學分開. 可以這樣理解, 西方文化是科學型和宗敎型, 而中國文化是倫理型和審美型. 我們應該擺脫西方和東方這壹槪念的局限和區分, 理解寫實畵和寫意畵可以融合爲壹體的自由和藝術的眞實, 確認繪畵中所包含的畵家的內在精神. 張大千和孫家勤成就的潑墨是東方和西方融合的藝術世界, 實現了東方的精神基礎和西方技法的結合. 中國的藝術評論家袁德星評價說, 張大千的潑墨在精神層面源自于中國的自然主義, 形式上升華了西方的抽象系列技法, 在畵面上實現了二者的協調, 排除極端的審美觀點和保守壹邊倒的陳腐性, 這才是所謂的中庸之美, 這種中庸之美追求的美的範圍廣闊, 作爲自由的世界和最廣闊的空間領域, 在東方美術史中占有最重要的地位. 最近臺北報道, 張大千畵作明年合璧展出、兩岸《富春山居圖》的合璧帶來風潮, 四川省內江, 明年四川內江的張大千博物館落成時, 將擧辦一場張大千、畢잡索作品聯展, 屆時兩岸的張大千畵作, 將有機會共聚一堂展出. 如廣義的敍說, 在中國的融合是一個文化的特徵所以整個中國文化也就在融合中有所發展、中國文化不僅把固有的儒、佛、道合爲一?, 幷且把外來文化之中. 中華民族不但是一個包容一切的民族更進一步把타吸收、消化、改善而達成協調. 所以文化的象徵美術、包涵在融合之中也是必然的. 張大千說, 客觀臨摹畵家所看到的景物的方式是寫實, 是形式含義;而將畵家的內心和眼前的現象結合起來臨摹的方式是寫意, 是精神的內在的美. 由此可以了解到張大千提出了本時代新的槪念, 從西方和東方的區別中跳出來, 追求更深層的新的東西, 將中西繪畵融合成壹體的事實. 孫家勤從中國人對光線和陰影的特別關注中, 卽繪畵的造型觀點出發, 利用金箔紙來光線和陰影共存的槪念表現了東西繪畵的融合. 從前面所述的張大千的最後壹個弟子孫家勤的業績中, 我們可以對中國美術的學習方法和曆史發展窺見壹斑, 本人作品中也包含了希望繼承故人足迹的願望. 偉大的藝術是不分國籍的, 作品的卓越性和畵家的風格絶對是不能用國籍和作家傾向區分的. 張大千的成功不是因爲具備中國傾向, 畢加索的成功也不是因爲他是西班牙人, 同樣孫家勤的成功也不是因爲他是中國山東人. 東方畵中希望將自己國家的特色和民族特征單獨分類, 主張具有自己特色的東西. 而西方繪畵只將繪畵分類爲油畵和水彩畵, 用國家來分類時可分爲德國畵、法國畵和美國畵. 主張本國的特色和民族特征, 卽主張自己特色的方式, 會讓繪畵帶有因爲畵家個人意識作用而産生的公式化傾向, 是흔難創作優秀的作品的. 所以筆者認爲, 在評價偉大的藝術時, 絶對不要將作品性和畵家的風格按國籍或者傾向區分. 畵家的成功絶對不是個人的成功, 畵家對曆史文化和社會敎育的發展也做出了巨大的貢獻. 張大千和孫家勤作品中包含著作家長期刻苦努力的心血和繼承藝術的堅定的藝術意志. 我們欣賞藝術的理念是理解畵家的成果, 進壹步發展下去, 要開發自己的理解和欣賞能力, 培養對藝術的愛和素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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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학사(中國史學史) 국제학술대회國際學術大會) 특집논문(特輯論文) : 고도(古都) 업성(업城) 연구 -중세 동아시아 도성제도 검토-

        우윤진 중국사학회 2014 中國史硏究 Vol.93 No.-

        본 연구의 요지는 전세계 도시(都市) 연구사에서 ‘화하형(華夏型)’ 도시의 기원을 탐구하며, 또한 중세 동아시아 도성(都城) 제도의 계통적인 원류를 밝히고자 함에 있다. 이 ‘화하형’ 도시의 구조는 상당히 규칙적이고, 또한 도시의 설계는 ‘천인(天人)’ 사상을 그 기본 틀로 하였는데, ‘북두(北斗)’를 북단(北端)으로 하여 남북으로 중심선 하나를 그어 전체 도시가 이 중심선을 에워싸고 좌우 대칭이 되도록 건축 설계를 하였다. 그래서 주요 건축물들은 이 중심선의 북쪽 부분에 위치하고 있고, 거리의 구조는 바둑판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으며, 외부 성곽(城郭)은 궁궐(宮闕)과 서로 동일한 형태를 그리고 있고, 또한 사방 성문(城門)의 명칭은 사시(四時)에서 따왔다. 그러면 이러한 도성 제도와 특징이 동아시아 각국의 고대 도성에 나타나는 것이 언제쯤이나 형성이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최근 백여 년 이래로 중국과 외국 학자들이 대체로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 시기에 나타난 업성(업城)에 점점 더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업성은 이미 장하(장河)의 충적에 의해 지하에 1400여 년이나 매몰되어 있고, 또한 문헌에 보이는 그에 대한 자료도 매우 적고 산재되어 있으며, 더욱이 고고학적 발굴도 현재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이 업성에 대한 연구는 마치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오랜 시간 동안 중국과 외국의 학술계를 난처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1984년부터 이 업성의 연구에 매진하여 30여 년 동안 이 업성과 관련된 문헌과 문물 자료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면서 다섯 차례나 이 업성 유적지를 탐방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한국에서 1년간 국제 협력 연구를 수행하면서 여섯 번이나 본서의 원고를 고쳤고, 또한 끊임없이 교정하고 보충하여 이제서야 초보적인 본 연구 성과물을 완성하게 되었다. 본 연구 성과는 업성에 관련된 사료(史料)를 거의 총망라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업성 연구 성과까지 대체로 누락됨이 없이 모두 포괄하였으므로, 최근 몇 십년 이래로 업성 연구에 있어서는 가히 하나의 단계적인 합 연구 성과물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리고 본서는 모두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론과 본론 5장, 결론 및 업성 석각(石刻) 자료를 집록(輯錄)한 부록(附錄) 부분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서론인 ‘업성(업城): 중국, 아시아, 세계 도시 연구사 중에서 하나의 수수께끼’에서는 업성과 ‘화하형(華夏型)’ 도시의 기원, 그리고 중국과 외국 학자들의 업성에 대한 고금의 기록 및 기존의 연구 등에 대해 서술하면서, 이 ‘수수께끼’ 연구 주제를 제기하고 또한 이미 소실된 업성의 형태도 복원하여 보았다. 그리고 본론 제1장에서는 진한(秦漢) 시대의 업성을 서술하면서 사료를 조사하여 동한(東漢) 시대 업성의 대체적인 윤곽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본론 제2장에서는 조위(曹魏) 시대와 서진(西晉) 시대의 업성을 서술하면서 업성의 도성 위치, 업성의 창건, 업성의 도성 제도와 공간 구도, 건축물 배치, 성곽, 궁궐, 성벽과 성문, 삼대(三臺) 및 주요 궁전 등의 건축물과 그 위치상의 방위 등의 내용을 통해 위진(魏晉) 시대 업성의 총체적인 면모를 추정해 보았다. 그러면서 업성의 서북쪽에 있는 삼대(三臺)의 배열이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약간 경사가 져 있다는 사실을 통해 명청(明淸) 시대 이래로 보이는 전통 문헌의 기록을 반박하였다. 그리고 본론 제3장에서는 16국 시대의 업성의 부흥과 쇠퇴를 서술하면서 중점적으로 후조(後趙)의 업성 중건과 도성 제도 건축물 및 유명 건축물 등을 논증하였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성벽, 성문, 삼대 등의 공사의 재건과 대조(大朝), 내조(內朝), 후궁(後宮), 태자궁 등의 건축물의 새로운 배치와 궁중의 기타 고귀한 건축물들을 소개하였고, 또한 관아, 여항 거리, 성곽 외곽 건축물 등도 함께 살펴 보았다. 그러면서 후조 시대 업성의 모습을 재현하여 업성 도성 제도가 보여주고 있는 천인(天人) 관념과 옛 선인들의 치밀한 구상, 지혜, 정교한 건축 예술 등도 함께 살펴 보았다. 그리고 본론 제4장에서는 북조(北朝) 시대의 업성을 서술하면서 이 업성이 염위(염魏)의 정국 혼난으로 인해 파괴되어 북위(北魏) 시대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에 걸친 쇠락 과정을 살펴 보았다. 북제(北齊)의 고환(高歡)은 업성으로 천도를 하여 업북성(업北城)을 복원하면서 업남성(업南城)까지 확장 창건하며 남북의 성곽이 서로 이어지게 하였는데, 특히 업북성의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여 남쪽으로 뻗어 나가 궁궐과 업남성의 성곽을 배치하였다. 그래서 업성의 기본 구조는 좌우 대칭적이고, 가지런하고 획일적이며, 궁궐과 성곽이 안팍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고, 도로와 블럭은 종횡으로 서로 교차되어 바둑판의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한위(漢魏) 시대의 업북성에서 비롯하여 동위(東魏) 시대와 북제(北齊) 시대의 업남성에 이르면서, 중국 중고(中古) 시대의 도성 제도는 그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고, 또한 점차 성숙 발전하면서 수당(隋唐) 시대 도성 제도의 큰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써 3세기에서 6세기 걸쳐 중국의 고대 도성 건축 예술은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본론 제5장에서는 업성과 중세기 동아시아 도성 제도의 체계를 서술하면서 이 업성이 수당(隋唐), 송원(宋元), 명청(明淸) 시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중국 고대 도성 제도의 기본 체계를 형성하였음을 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대 한국과 일본이 중국과의 내왕이나 교류를 통해서 중국의 천인(天人) 관념과 도성 건축 제도를 본따 자국의 전통에 적합한 도성 제도 체계를 나름대로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중국, 한국, 일본의 고대 도성 제도 체계는 다시 중세기 동아시아 도성 제도의 기본 체계로 구축되게 되었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이 업성의 역사적 변천을 서술하면서 당송(唐宋) 시대에서 명청(明淸)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사료를 정리하고, 이 업성이 점차로 소실되어 가는 변화의 과정을 고증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록 부분에서는 이 업성과 관련된 석각(石刻) 자료들을 집록(輯錄)하였는데, 동한(東漢) 시대에서 원대(元代)에 이르기까지의 업성과 관련된 각종 비각(碑刻)과 묘지명(墓誌銘) 등을 모두 수록하였다. 그리고 본 연구는 ‘화하형(華夏型)’ 도시 연구의 그 첫 번째 단계적 성과물로써, 앞으로 이어질 후속 연구를 위해 탄탄한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질 후속 연구에서는 이번 연구 성과의 기초 위에 업성과 중세기 동아시아 도성 제도의 체계를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여, 장차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의 고대 도성 제도에 대해 전반적인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또한 그와 더불어 남아시아, 서아시아 및 유럽과 미주의 고대 도성 제도와 상호 비교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이 ‘화하형’ 도시의 원류와 특징을 밝혀 내고, 또한 현대적 도시 건설에도 참고적인 견해를 제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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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학사(中國史學史) 국제학술대회國際學術大會) 특집논문(特輯論文) : 판원란(範文瀾)의 경학(經學)과 사학(史學)

        저우원지우 ( Wen Jiu Zhou ) 중국사학회 2014 中國史硏究 Vol.93 No.-

        판원란(范文瀾)은 중국에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사학가 중의 하나이다. 중국 항일전쟁 시기 그는 옌안(延安) 사학계의 대표적 학자였으며, 중공 지도급 인물들이 범문란을 대단히 존중하여 그를 "판라오(范老)"라고 지칭했다. 연안 시기 그는 저술한 『중국통사간편(中국通史簡編)』은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쓴 중국통사로, 마오쩌뚱(毛澤東)으로부터 중시되고 높이 평가되었다. 판원란은 베이징대학 국학문(국學問) 출신으로 고문경학(古文經學)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비록 그는 구 학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 학습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운용하여 중국 역사를 연구 저술하였으나 경학이 그의 학술에 미친 영향은 여전히 분명하게 보인다. 판원란의 경학 성취 및 그의 사학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비단 판원란의 학술 전반에 대해 이해하고 판원란 사학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통 학술이 중국 마르크스주의 사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판원란은 중국 학술이 구학문으로부터 신학문으로 바뀌던 처음 시기의 학자이다. 그는 어려서 유가 경서를 읽었고, 소년기에는 신식 학당에 입학하였으며, 중국에 세워진 고등학부인 대학에 진학하였다. 베이징대학 시기 그는 황간(黃侃), 유사배(劉師培), 진한장(陳漢章) 등 고문경학 스승에게서 배우면서 고문경학을 따랐다. 그의 초기 저작인 『문심조룡강소(文心雕龍講疏)』, 『문심조룡주(文心雕龍注)』, 『군경개론(群經槪論)』 등은 그의 이러한 학술 경향을 보여준다. 『문심조룡강소』와 『문심조룡주』는 모두 황간의 『문심조룡찰기(文心雕龍札記)』의 기초 위에서 완성된 것으로, 황간의 학술 계승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며, 『문심조룡』 연구 방면에서의 탁월한 성취는 그에게 "범조룡(范雕龍)"이란 명예를 얻게 했다. 『군경개론』은 판원란이 경학 전판을 논술한 저작인데, 이 책의 내용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중의 "심삼경(十三經)", 즉 『주역(周易)』, 『상서(尙書)』, 『시(詩)』, 『주례(周禮)』, 『악(樂)』, 『의례(儀禮)』, 『예기(禮記)』, 『춘추(春秋)』 및 3전(傳), 『논어(論語)』, 『효경(孝經)』, 『이아(爾雅)』, 『맹자(孟子)』 등이다. 『군경개론』은 폭넓은 자료 인용이 특징인데, 판원란이 경학사와 제가의 관점을 숙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판원란은 이전 사람들의 관점을 널리 인용하면서도 자신과 다른 관점을 비교할 때는 자신의 견해도 표명하였으므로 "술이유작(述而有作)"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적지 않은 절(節)에서 직접 자기 스승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경학파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6개 절에서는 직접 유사배의 문장을 인용하고 아래에 유신숙(劉申叔) 선생의 이름을 적었고, 2개 절에서는 직접 진한장(陳漢章)의 문장을 인용하고 아래에 진백도(陳伯도) 선생이라 이름을 적었다. 책에서 여러 곳에서 "진선생왈(陳先生曰)"이라 하고 있는데 이 진선생은 진한장을 가리킨다. 때로는 "진사백도(陳師伯도)"라고도 썼다. 1개 절에서는 황간의 문장을 인용하였는데, 곧 제9장의 제24절 "삼전평의(三傳平議)"로, 아래에 황계강(黃季剛) 선생이라 이름을 썼다. 책에서 "황선생왈(黃先生曰)"이라 한 황선생은 바로 황간을 가리키며, 때로는 "황사계강(黃師季剛)"이라고도 썼다. 1개 절에서는 전적으로 장태염(章太炎)의 저술을 소개하였는데, 곧 제9장 제24절로, 제목은 "장태염춘추좌전독서록후서(章太炎春秋左傳讀敍록后序)"이다. 이 절을 둔 것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판원란이 보기에 경학에서 중요한 문제였음을 말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판원란이 스승의 주장에 찬성하여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스승의 이름을 쓰지 않은 장절은 모두 판원란 자기 나름의 저술이다. 고문·금문 양가 논쟁에서 판원란은 대부분 고문가의 관점을 스스로 견지하고 있다. 당연히 그는 금문가적 관점에 대해 한결 같이 배척하는 것은 아니고, 피석서(皮錫瑞)의 경학 성과에 대해서 대단히 중시하고 존중하고 있으며, 때로는 피석서의 관점을 전면 소개 하기도 하였다. 피석서의 합리적 관점에 대해서 그 역시 긍정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금·고문의 대립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고문경학을 지지하였다. 그는 고문경학 진영의 일원이었다. 그는 뒤에 "나는 당시 학문이란 그저 ``호고(好古)``1가 뿐이며 다른 부문은 없다고 깊이 믿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일찍이 고문경학가들과 기치를 같이 하면서 "선학요얼(選學妖蘖)"을 외쳤다. 그의 『군경개론』을 보면 판원란의 이러한 회고가 진실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판원란은 옌안에 도착한 후 유물사관을 배워 적용하였고, 경학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1940년 그는 옌안신철학년회(延安新哲學年會)의 초청을 받아 「중국경학사의 연변(中국經學史的演變)」을 강연했다. 이 원고에서는 중국 경학 연변의 맥락을 거침없이 정리하였는데,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경학의 기본 문제에 대해 서술하였다. 『군경개론』과 비교해 보면 이 강연은 완전히 다른 풍격의 경학사 저작이었다. 『중국경학사의 연변』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1.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이용하여 경학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판원란은 서론에서 경(經)의 본질과 경의 형성, 경학 발전의 규율성 등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이용하여 설명해보겠다고 했다. 2. 비판적 각도에서의 논의이다. 판원란의 이 강연은 마오쩌뚱이 발표한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의 후속편이다. 「신민주주의론」은 신민주주의 문화에 관한 논술로, 전통문화적 방법론 원칙에 대해 "고대 문화적 발전 과정을 청산하고, 그 봉건적 잔재를 제거하고 그 민주성이란 정화(精華)를 흡수해야 한다"고 했다. 마오쩌뚱은 팡원란에게 보낸 서신에서 판원란이 근대적 경학가들(이미 고문경학가이면서 금문경학가이기도 함)에 대해 비판해 주길 희망했다. 이러한 배경은 판원란의 논지 출발점을 "타파(破)"에 두게 하였고, 특히 서언이나 근대경학사 및 총결 부분에서 비판적 색채를 상대적으로 문명하게 했다. 3. 심오한 내용을 알기쉽게 설명하고, 빼어난 문장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경학사 일반 차원에서 말하자면 무미건조한 면이 있지만 그의 이 강연은 오히려 매우 생동적인 것이었다. 4. 체계를 정비하고 계통을 명료히 했다. 5. 상세함과 간략함이 적절하고, 간략하면서도 상세함이 있다. 판원란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이용하여 경학 연변 과정에 대해 정리한 것은 지극히 치밀하고, 금·고학파의 협애한 관념을 벗어나 실사구시의 정신을 체현하고 있으며, 경학 연구의 역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강연은 항일전쟁시기의 옌안에서의 저작이기에 시대적 특징을 선명하게 보이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한계를 피하기 어려운 측면도 갖고 있다. 주요 표현은 비판적 각도에서 논의하고 있으면서도 경학이 중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거침없이 밝히고 있다. 근대 경학가에 대해서는 학술적 비평 대신 정치적 비판을 통해 그들의 부족함을 강조하였다. 1963년, 판원란은 『홍기(紅旗)』 등 단위에서 재차 경학을 강의하였고, 『경학강연록(經學講演록)』을 완성했다. 이 글 역시 심오한 내용을 알기 쉽게 표현하려는 문장의 풍격을 유지하고 있다. 옌안 시기의 『중국경학사의 연변』과 비교해 볼 때, 이 글의 경학에 대한 서술은 그 분위기가 비교적 평온하며, 일부분에서만 심화되고 있다. 주로 1. 작자가 비판적 사고를 벗어나서 이성적 자세로 힘써 경학을 논술하였다. 2. 정치, 경제, 학술 등 종합적 요소에 중점을 두면서 시기별 경학의 특징과 형성 원인을 논술하여 작자의 시야가 개방되고 지식이 넓어졌음을 보여주었다. 3. 이 글은 비교법을 대거 활용하였다. 4. 변증법을 이용하여 경학을 해석하는 변화를 뚜렷이 보였다. 5. 금·고문가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근대 경학가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판원란은 경학 방면에서 아주 깊은 소양과 공력을 갖추었으나 주·객관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폭넓은 경학사 저술을 온전히 내어 놓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중국학술사의 반전과정에서 말하자면 아주 큰 유감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판원란은 중국통사 저술을 자기 필생의 학술적 추구로 삼았던 명실상부하게 "통사가풍(通史家風)" 사학가였다. 판원란 초년기의 국학 훈련과 경학 영역에서의 정진은 그의 사학 활동과 통사 찬술에서도 흔적을 남기게 되었고, 그의 사학에서도 선명한 학술적 개성을 보이게 하였다. 첫째, 경학 소양은 그를 민족적 특징과 마르크스주의와의 결합이란 면에서 두터운 근거를 갖추게 하였다. 둘째, 유가 경서에서의 엄격한 화이 구분은 그로 하여금 역사 서술에서 민족적 기질을 더욱 강조하게 했다. 셋째, 경학가로서의 경향이 경학 서술과 사료관에서 분명히 반영되고 있다. 넷째, 경학 사승 관계는 그의 학풍, 문풍에서 깊은 영향을 미쳤다. 판원란의 중국통사 저술은 옌안판은 물론 신중국 성립 이후의 수정본까지 모두 그의 심오한 경사(經史) 배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판원란의 학술 방면의 개성을 뚜렷이 갖고 있는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화사 부분은 작자의 국학 스승의 성과를 아주 잘 반영하고 있다. 판원란의 중국통사 방면에서의 성취는 중국 전통 학술이 현대 사학에 대해서도 적극적 의의와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는 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Fan Wenlan, a Marxist historian, was quite knowledgeable at Confucianism Classics. He received an education in Sinology Department of Peking University and was greatly influenced by the Old Text Confucianism masters at that time. His early writings -Wen Xin Diao Long Jiang Shu, Wen Xin Diao Long Zhu, Qun Jing Gai Lun-- clearly indicated that he stood in the line of the Old Text Confucianism. He studied and narrated the history of Confucianism Classics by viewpoints of Marxism systematically for two times, which were important milestones in Confucianism Classics history research, trying to get rid of the prejudice against the New Text Confucianism or in favor of the Old Text Confucianism. The first time was in 1940s when he lived in Yanan and the second time was after the establishment of PRC. Writing a perfect general history of China was Fan``s life goal. His work, Concise Edition of General History of China, remained close relationship with his attainments of Confucianism Classics and the training of Old Text Confucianism in his early years, which can be reflected in many aspects, such as ethnic thoughts, historical material thoughts, research characteristics, styles of writing, and so forth. That proves that there being connections between Marxism Historical-research School of China and Confucianism Classics , its coming into being and development did not separate from the body of Chinese traditional cul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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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世紀) 말(末) 영국(英國) 선교사(宣敎師) 리처드 티머시(Timothy Richard)의 중국(中國) 종교(宗敎) 문화관(文化觀)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에 대한 인식(認識)을 중심(中心)으로-

        노재식 중국사학회 2018 中國史硏究 Vol.112 No.-

        李提摩太(Timothy Richard, 1845-1919)英國浸禮敎傳敎士, 1870年(同治九年)來華. 初在山東, 山西等省傳敎, 積極參與山東和山西的賑災工作. 1890年到天津任"時報"主筆. 1891年後主持了廣學會(外國人最早在華創立的出版機構)工作20多年, 出版介紹西學的書籍,宣傳鼓勵維新變法. 義和團失敗後, 利用庚子賠款在晉創瓣山西大學. 政治上主張維新, 反對革命. 1916年回英國, 1919年在倫敦去世. 作爲一個傳敎士, 李提摩太來中國的任務主要是傳播基督敎, 但是在他展示自己使命的時候, 他自覺不自覺地扮演了中西文化交流的使者. 他對中國文化擁有包容態度, 幷中國宗敎持有肯定的立場. 本論文主要探討李提摩太對中國儒敎和佛敎的態度和其意義. 李提摩太把基督敎中的上帝與中國古代的聖仁合爲一體.他講中國的"仁"與聖經中的"愛人如己"同出一源. 中國最重五常,與西敎之愛人如己同出一源. 同時,李提摩太是中國佛敎菜取正面評價的傳敎士之一,他對晩淸中國"耶佛對話"作出重要貢獻. 他曾多次拜謁中國佛敎聖地, 親自考察寺院和佛敎儀式. 除此之外, 他對中國佛敎經典進行了一系列的硏究和飜譯. 他飜譯了『佛敎起信入門』, 『大乘起信論』, 『西遊記』等佛敎著作. 他認爲大乘佛敎與基督敎有?多地方不謨而合, 有許多共同的眞理是人共知的事實. 李提摩太雖然學習中國經典,尊重中國文化,但是他沒有忘記有家傳統的非基督敎性質, 儒家學說妨碍基督敎的傳播的事實. 李提摩太硏究中國佛敎, 承認佛敎積極的一面, 但是他始終堅持基督敎信仰絶對的優越性, 而將佛敎視爲基督敎在亞州的表現形式. 李提摩太等傳敎士寬容地對待儒家文化及中國宗敎文化最終目的是爲了緩和中西文化衝突, 減少基督敎在中國傳播的壓力, 使中國早日"福音化". 盡管如此,他對中國儒敎和在佛敎采取的容寬態度以及中西文化交流上作出貢獻是絶不忽視的.

      • 논문(論文) : 국공내전시기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의 독자성 모색

        손승희 한국중국근현대사학회(구 중국근현대사학회) 2010 중국현대사연구 Vol.48 No.-

        改革開放之后, 中國在經濟方面的改革及其取得的成果要求對政治方面也進行相應的改革。中國政府主張要强化共産黨領導下的民主黨派的作用。但是, 民主黨派爲了較好的發揮對執政黨牽制與監督的作用, 保證其政治上的地位與作用, 至少要確保其獨特性。在此, 有必要探索作爲中國一個民主黨派-民主同盟的起源, 井從現在中國多黨合作制的曆史持續性側面對其進行把握。本文將從19世紀40年代民主同盟的獨自性確立方面對其作用及意義進行探討。民主同盟最爲重視的是民主與和平。他們制定憲法與召開國民大會的過程都體現了其對民主秩序的要求。在國共分裂與內戰的情況下, 他們所主張的依然是和平。民主同盟將自身定位爲民主與和平的守護者。因爲他們所追求的是, 在任何情況下都要以和平爲前提用政治協商的放式來解決問題, 其程序與過程都應當是民主的, 井且也要用這樣的方式來建立國家。民主同盟將自身定義爲`非武裝政黨`。他們通過輿論活動, 用呼우群衆理性的方式來制約國共的武裝力量。他們的原則是徹底的民主與和平。他們希望通過民主的程序與操作方式來組建國共兩黨與少數民主黨派共同組建的聯合政府。倂且, 他們將實現中國的民主化看作是民主同盟的作用與曆史任務。爲此, 首先就要阻止國共的武力沖突, 民主同盟的作用依然隨之逐漸凸顯出來。民主同盟흔樂於站在中立的立場上對國共兩黨進行調和。爲此就需要維持民主同盟的獨立性與中立性。在當時有可能爆發國共內戰的情況下, 民主同盟積極促成了國共政治協商會議, 爲了和平建國采取了五項決議。但是對於反對這些決議的國民黨, 民主同盟力求實現反對內戰、改造政府、召開國民大會等解決方案。此外, 民主同盟還往來於國民黨、共産黨及美國特使馬歇爾之間, 努力調和國共沖突與內戰。但是最終內戰還是爆發, 調和國共阿黨的努力還是失敗了。在二中全會上, 民主同盟也不得不承認調和國共兩黨這一任務的失敗。但是民主同盟仍然沒有放棄對於解決國共沖突這一問題的期望。爲了應對國共兩黨厭倦內戰重新協商談判情況的出現, 民主同盟不斷强化其組織能力, 最大化集聚人民的力量。但是民主同盟也開始認識到, 自身應該從爲調和國共兩黨而存在的黨派聯合體的位置中脫離出來, 開始准備成爲獨立的政治團體或者是政黨的組織與力量。民主同盟確信, 到了那個時候, 自己不僅要發揮國共兩黨之間調和者的作用, 同時也要發揮出將中國引領到和平民主之路的決定性作用。爲了應對"那一天", 可以흔好地實現國共兩黨間的調和作用, 民主同盟認爲關鍵是要維持在國民黨與共産黨之間的獨立性。民主同盟不參加國民大會也是`爲了維持其獨立的立場與調和者的身빈`。因爲只有站在超然而獨立的第三者的立場上, 才能對國共兩黨之間的政治斗爭進行調和。民主同盟顯示出了持接以合法公開的方式來爲民主與和平斗爭的意志。但是由於國民黨政府持續的獨裁政治與對民主人士的鎭壓, 民主同盟成爲非法化的組織, 總部也被解散。民主同盟在成立之時, 倂沒有准備關於國家建設的長期大策。伴隨調和國共兩黨的失敗, 民主同盟開始了更爲長期的和組織化的准備。民主同盟不同於爲了獲得政權實現自己政治理想的一般政黨。民主同盟在國共兩黨之間對其進行調和, 爲了建立新的國家, 有着過渡時期的特征。民主同盟雖然在調和國共兩黨的過程中可以維持其獨立的平衡作用, 但是當國共兩黨投入內戰井拒絶政治協商之時, 民主同盟的作用也開始被弱化。通過維持在國共兩黨間的獨特性與中立性來用和平與民主的方式實現中國統一的民主同盟的目標與意圖, 最后以失敗告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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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원배의 북경대학 개혁 ( 1 ) : ' 겸용병포 (兼容倂包) ' 와 신구논전 (新舊論戰) 을 중심으로

        김정화 중국사학회 2000 中國史硏究 Vol.8 No.-

        蔡元培相信了敎育眞正的價値. 他在敎育救國立場上答應了腐朽的北大校長. 當時中國, 企圖强化國權啓發民智. 使人民具備淸雅品德. 這就是通過敎育能到達. 從開始高等敎育. 國外只小規模辦的留法勤工儉學無法救廣大中國. 通過大學培養人才能改革中國, 再派這些人到全中國去要敎育人民. 蔡元培在北大就職談話中, 向學生提出 “抱定宗旨”. “砥礪德行”. “敬愛師友”盡力給學生提供學術環境. 最首先課題是必須招聘有學問的敎授. 他認爲所謂大學, 應組成所有的思想和學派 “낭括大典, 網羅衆家.” 因而. 選拔敎員采取了兼容幷包方針. 這樣原則上. 陳獨秀·李大釗·魯迅·胡適·錢玄同·劉半農·高一涵·沈尹默等被招爲敎員, 他們都是『新靑年』主編. 因此, 北大自然被成爲新文化運動搖籃. 與此同時. 蔡元培招納有高學問而思想方面上堅持保守的一些人. 就是高鴻銘·劉師培·黃侃. 以垂下변髮支持復벽的高鴻銘與發起籌安會的劉師培爲領袖形成了北大保守派. 蔡元培認爲講話有道理, 主張有理致. 可以展開自己思想, 還使學生可以自由選擇. 根據兼容幷包與思想自由, 北大從蔡元培之後日益組成新學術環境, 激烈地論戰主義主張. 活潑了學生思想. 蔡元培采取民主和自由學風不但使新文化運動發展起來, 還大力强化『新靑年』編輯力量以後其作用也大幅提高了. 這明確地說明北大成爲新文化運動中心. 那是與蔡元培提唱新文化運動有密接地關系. 北大改革當中, 特別新文學者和舊文學者大擧被聘文科. 以文科新知識人爲中心提唱文學革命. 其結果使新文化運動得到有力地位. 以『新靑年』爲團結更多的新知識人, 擴大了改革範圍向學生吸收新思潮和政治活動機會. 可是. 北大從此激烈地遇到舊派挑戰. 以林서爲領袖舊勢力고賴軍閥政府卦崇拜孔子的牌子打擊了蔡元培和新知識人. 蔡元培表示贊同新知識人又參加了他們的論戰. 他基本上不反對舊文化和舊文學. 他明確表示這樣的立場. 然而, 林서不是代表個人, 而是代言了對新文化運動的舊勢力的嫌惡. 由于以蔡元培支持新文化運動, 北大雖被衆矢之的, 反而其結果是使新文化運動得到更快發展. 北大改革是在五四運動史上産生深刻的意義. 他采取兼容幷包方針在主觀上反映折衷主義以及中庸的道理. 可是在客觀上能看得見新文化運動之中做出了極大的作用. 蔡元培的立場與陳獨秀和新文化運動那些人不同. 他反對儒家派只是中國因兩天多年堅持孔子學術, 而産生在政治和文化及敎育上造成흔大弊病. 文學革命仍是那樣, 革命目的是要改革文學形式和內容. 蔡元培認爲中國文言文相近拉丁文字, 拉丁語已成爲過去的東西. 他主張白話最主要是在實用方面. 他認爲目前隨着科學發展需要其他學問, 文字也要求普遍化. 學問逐漸多樣化和文化範圍亦擴大了, 那能有餘閑學舊文字?而此將舊文字즘樣表達現代人的思想和言語?他提出以白話代替文言文, 這是必然的趨勢. 他支持白話, 而不是全面地排斥文言文, 主張在美術文和一些學術方面上要使用文言文. 蔡元培認爲不矛盾中國傳統文化與西方文化. 他總是以西方自由·平等 ·博愛當作中國仁·誓·義的同樣內容. 蔡元培從小有系統地學過經學, 他在思想方面影響到深刻的儒家學術. 外國留學時期, 他雖學了西方文化 , 却是自覺地堅持立場擁護中國文化. 他在深淵依然有着對中國傳統文化的驕傲. 這是他一生當中一向不變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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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과 동남아시아 — 중일전쟁 시기 중국-태국 관계를 중심으로, 1937-1945 —

        이도집 중국근현대사학회 2018 중국근현대사연구 Vol.80 No.-

        本文探討了1936-1945年中國對泰國政策,以理解同時期中國與東南亞關係。此時期中國對泰外交關係,係承接戰前「條約無用論」,到戰後雙方建立正式外關係的過渡階段。戰前時期,中國政府對暹政策逐漸明朗,以「外交關係從緩,人民關係親善」爲其基本政策方針。在抗日戰爭期間,中國對泰外交工作,最初是因關注日本南進的動作,及泰國國族主義對華僑的壓迫日益強烈,而引起中國有關當局的囑目.但它仍依循著戰前確立下來的「親善」方針試圖改善中泰外交關係,但隨著戰爭壓力的迫近及激進派華僑參與了外交政策的制定體系,使得對泰政策也逐漸趨於強硬及朝向戰爭的方向轉變。戰爭後期東南亞戰區的成立,將泰國劃出中國戰區,對中國政府的對泰政策打擊甚大,因爲中國對東南亞戰後國際局勢的安排,幾乎喪失了話語權。總之,中國對東南亞的外交立場或態度,都殘存在著歷史記憶中天朝上國的盲點而不自知,在與泰國交往時尤其明顯。最後,抗戰時期對泰政策的形成,尤其是太平洋戰爭爆發後中國對泰的立場與態度,其動機與出發點都圍繞著中國重返東南亞舞台的目標,泰國尤其扮演著中國影響力踏出國境的第一步,故當東南亞戰區成立,泰越被分割出中國戰區,對中國重返東南亞的企圖,可說是一記沈重的打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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