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强昱 서강대학교 비교사상연구원 2004 신학과 철학 Vol.- No.6
박세당은 18세기 전기에 살았으므로 선배학자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각적으로 이전 노장학의 사상적 성과와 토대를 계승하여 자신의 노장학 사상체계를 세웠다. “사상적 연원”이란 여기서 두 방면의 내용을 가리킨다. 첫째, 문헌학으로 말하자만 학술사상 방면에 치중하였다. 둘째, 철학적 인식으로 말하자면 그가 이전 노장학을 계승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문헌학 방면에서 보면, 박세당의 노장학은 모두 명대 초횡의 《노자익》과 《장자익》을 기본으로 하였으므로 이것이 그가 노장학을 연구한 직접적 근거이다. 박세당은 《도덕경주해》에서 집주 체제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완전히 자기의 주해로 하여 자신의 《도덕경》에 대한 이해를 밝혔다. 하지만 《남화경산보》에서는 명대 초횡의 《장자익》의 집주 형식을 취하면서 자신의 창작을 더하여 자신의 노장학 체계의 맥락을 세웠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의 주석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끊임없이 비평을 가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견해의 특징을 제출한 것이 박세당의 《남화경산보》에 잘 나타나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론 창작의 현실적 동기에서 보면,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남송의 임희일과 명대 진심의 주해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 두 학자의 글은 노장의 정신세계와 멀다고 생각하였다. 이 혼란스런 경향을 겨냥하여, 당시인들이 노장학의 정신을 더 잘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이 두 권의 중요한 저작을 쓰게 된 것이다. 《남화경산보》는 《도덕경주해》이후에 완성되었으므로 《남화경산보》가운데에는 여러 차례 《도덕경주해》의 연구 성과가 운용되었으며, 《남화경산보》저술에는 매우 긴 시간이 걸려서 아마도 박세당 일생의 심혈을 소비하였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당시 조선과 중국의 학술 교류 상황, 특히 노장학의 전래 상황을 고찰한다면, 박세당이 지적한 현상은 하나의 깊이 연구해야 할 측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