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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ㆍ일 역사 갈등의 뿌리를 찾아서

        현명철(玄明喆) 한일관계사학회 2011 한일관계사연구 Vol.40 No.-

        본고는 한ㆍ일간의 역사 갈등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기유약조를 통해 형성되었던 조선후기 대등-교린의 한일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게 되는 일본의 정치적 변화를, ‘정한론’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과 국제정치학의 영향을 받아 합리화되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근대 일본에서 역사관 만국대치의 국제법정 싸움을 위한 선전과 근거자료의 확보였다. 따라서 역사왜곡이 발생하게 됨은 피할 수 없었다. 근대 일본은 독자적 국체를 강조하여 국민을 맹신에 빠뜨리고 타국을 무시한 독선주의와 편협한 우월사상을 확대 재생산 하였다. 총독부 간행의 조선사 교재 즉,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제』와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제 교수참고서』의 기술은 이러한 왜곡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따라서 총독부 간행의 교과서를 분석하는 것은 현재 나타나는 역사 갈등의 뿌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으며, 또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앞으로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부분을 제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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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유약조체제의 붕괴 과정에 대하여

        현명철(玄明喆) 한일관계사학회 2016 한일관계사연구 Vol.54 No.-

        기유약조 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조선의 외교 능력과 동래부의 교섭 태도에 대한 철저한 멸시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메이지 일본이 우호를 요청하였으나 쇄국을 고집하는 조선이 사소한 자구를 문제삼아 거절을 반복’하였다는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모든 외교적 갈등을 조선의 책임으로 돌렸다. 본고에서는 동래부에 시점을 두고 출입국 선박에 대한 문정과 동래부의 보고를 토대로 연표를 작성하여 기유약조 체제의 붕괴 과정을 복원해 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대수대차사 서계의 수리 하나만을 둘러싸고 공방이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며 일본 내부의 변화에 따라 대마주의 태도가 변하였으며 외교적 쟁점도 변화하였다. 둘째, 대수대차사의 서계는 즉시 조정에 보고되었으며 1개월 만에 조정의 지시에 따라 거부된다. 따라서 훈도가 문정 시에 바로 거부하였다거나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셋째, 그 후 대마주에서 신인(新印)을 사용한 서계와 노인을 지참한 선박을 도항시켰을 때, 동래부는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이에 대마주는 비선을 통해 관례에 따른 수정된 서계와 노인을 가지고 옴으로써 20일 만에 해결된다. 넷째, 판적봉환 이후 태정관 지령으로 세견선과 문인 발급권을 다시 확보하게 된 대마주는 ‘좌근위소장 평조신 의달’의 명칭을 고집하여 다시 문제를 일으킨다. 이 문제 역시 4개월 여 만에 해결되며 ‘좌근위소장’은 인정, ‘조신’의 사용은 불인정으로 타협을 보게 된다. 이때 조선은 막부의 멸망을 인정하여 諱字를 논의하고 있음은 주목된다. 다섯째, 외무성 관리들이 20여 일 간 왜관에 머물고 침한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막부 말기 이래의 침한론의 연장이며, 조선이 거절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이 절교하려는 뜻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침한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조선이 병인양요 이후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기 때문임은 강조되어야 한다. 여섯째, 일본 외무성의 외교 일원화 정책이 가시화됨에 따라 왜관의 대관소를 중심으로 저항이 있었다. 이 때 동래부는 대마주를 통한 무역·외교를 희망하는 서한을 외무성에 발송하는 등 대마주를 지원하였다. 일곱째, 일본은 폐번치현 후, 前대마도주 종의달을 외무대승에 임명하여 서계를 보내었고 동래부는 즉시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때 관수와 차사가 난출을 하였고, 훈도는 이 수문장과 설문장에게 명하여 문을 열어주어 직접 교섭의 실마리를 열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관소의 상인들과 동래부의 상고들의 저항으로 결국 동래부사는 서두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면접을 하지 않았다. 여덟째, 외무성 관원들이 돌아가고 왜관에 대마도인들만 남게 된 상황에서 동래부사는 왜관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였으며, 왜관에서는 앞으로 3년간은 대마 상인을 통한 무역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합의가 성립되었다. 마지막으로 아홉째, 외무대승 하나부사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래부사와 대등한 지위임을 과시하면서 입항하였고, 대관소를 철수시켰으며 기유약조의 붕괴를 가시화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역의 유지와 외교의 유지를 언명하고 표류민을 송환하였으며 조선이 준 도서를 사용한 노인(입항증명서)을 지참시킨 선박을 왕래시킴으로 조선의 국법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기유약조 붕괴 이후에도 물밑 교섭을 가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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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기 일본 역사교과서 서술의 검토

        현명철(Hyun Myung-Cheol) 한일관계사학회 2008 한일관계사연구 Vol.30 No.-

        교과서는 특성상 통설이나 정설로 인정된 학설을 기반으로 기술된다. 따라서 교과서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한일간에 존재하는 역사인식의 차이에 대한 지적이며, 또한 통설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포한다. 따라서 본고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을 통해 한일관계사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 앞으로의 연구를 제안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게 되었다. 1. ?정한론?이 메이지 정부의 국교 수립 요청을 조선 측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생겼다는 교과서 기술은 오류이다. 정한의 여론은 메이지 정부 수립 당시 일본의 외교 인식이었으며, 일본이 보낸 서계는 조선의 거절을 유도하여 정한의 명분을 얻기 위해 보낸 것이었음이 명백하다. 2. 조일수호조규로 조선이 개국을 하였다는 기술이 있으나, 조선은 원래 일본에 대해 쇄국을 하고 있지 않았고, 부산의 초량 왜관에서는 꾸준한 대화와 표류민 송환 등의 외교 업무가 지속되고 있었다. 조일수호조규는 일본의 압력에 의해, 기존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선 측의 양보였으므로, 지나친 평가는 검토를 필요로 한다. 3. 조일수호조규의 제1관의 자주국 규정은, 일본이 조선을 전근대 외교관계(종주국?속국)에서 벗어나게 하여 완전한 독립국으로 국제사회에 등장하도록 이끄는 내용이 아니었다. 이 규정은, 유사시 즉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 청나라의 자동 개입을 막기 위한 외교적 압박의 성격을 갖는다. 이를 ‘근대적 조약’,혹은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조약’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본의 침략성을 감추고 미화하는 서술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일본 외교의 본심은 조선을 개항시켜 세계사 속에 편입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이권을 얻어낼 것인가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연구가 교과서에 반영되기를 기대한다. 4. 갑오 농민운동 시 일본군의 출병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청과의 전쟁 준비를 끝낸 일본이 청일전쟁을 전제로 출병한 것이었으므로 침략행위였다. 이는 국제법상 근거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天津조약을 근거로’,‘청나라의 출병에 대항하기 위해’ 등으로 기술하는 것은, 일본의 전쟁 도발 책임을 호도하는 기술이다. 또한 일본군이 조선 왕궁을 점령한 사실을 기술한 교과서는 2개 교과서뿐이다. 5. 러일전쟁 이후 한국강점에 이르기까지의 기술에서는 모든 교과서가 무력강점과 한국민의 저항을 기술하고 있어서 훨씬 성숙된 기술이 되고 있다. Because of the nature of textbooks, descriptions of history textbooks tend to stand on the basis of common notion. Analysis of them, therefore, means make clear the difference over the perception of history between Korea and Japan, and offer a critical view about common notion. This study is critical investigation about the descriptions of Korea and Japan history textbooks and about common notions which those textbooks are based. As results, I could suggest follows ; 1. A description, which ‘Appeal of aggression Chosun to arms(征韓論)’ had been arisen because of Chosun’s refusal about Japanese ask for diplomatic relations, is not true. Because there wer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osun-Japan, and a ‘Appeal of aggression Chosun to arms’ is existed before Japan send the letter. The truth is that the letter was written for incite refusal and make a excuse for aggression. 2. A description, which assert ‘A treaty of amity between Chosun and Japan in 1876’ made Chosun open port to foreign trade, is not true. Chosun had opened a port in “Cho-Ryang”, which is called ‘Waekwan(倭館)’, for Japan since 1678. At the port there were diplomatic services, such as castaways’ repatriation. Also, Chosun did not open port to other countries from that treaty. Chosun had signed that treaty just for maintain preexistence friendship. 3. So called ‘a provision of sovereign in Chosun-Japan treaty of amity’ did not aim for Chosun’s joining the family of nations as a sovereign. This provision aim for exclusion of China who is time tested confederacy of Chosun when a war occur between Chosun and Japan. At that time, Japan did not want Chosun joining the family of nations but exclusive possession of diplomacy with Chosun. 4. When peasants upraised in 1894, Japan sent a military expedition to fight against China. The goal of the action was to gain a controlling interest about Chosun. So it was an act of aggression which is not based international law. But we can not find this fact as aggression in history text books of Japan.

      • 반복성 혈뇨(IgA 신병증 및 non-IgA 신병증)와 알레르기성 자반증 신염의 면역지표의 변동에 관하여

        현명철,고철우,구자훈 慶北大學校 醫科大學 1991 慶北醫大誌 Vol.32 No.1

        A prospective study was conducted to see the changes of immune system in recurrent gross hematuria(IgA nephropathy and non-IgA nephropathy) and HSP nephritis in children. Study patients consisted of 60 children with recurrent gross hematuria and Henoch-Scho¨nlein purpura nephritis (8 IgA nephropathy, 24 non-IgA nephropathy and 28 HSP nephritis). The cellular immune indices(total T, T4, T8 cells and T4/T8 ratio) and humoral immune indices (IgG, A, M and E) were measured during the hematuric and non-hematuric period. Following results were obtained. The proportion of T4 cells of peripheral blood during the hematuric period of patients with IgA nephropathy rose to 35.4±14.9% from the non-hematuric value of 20.0±9.1%. The T4/T8 ratio during hematuric period of patients with IgA nephropathy rose to 1.51±0.77 from non-hematuric value of 0.73±0.33. The values of serum IgA and IgE during hematuric period of patients with IgA nephropathy rose to 237±106 ㎎/dl, 231±226 IU/dl from non-hematuric values of 140±10, 28±23, respectively. These changes of cellular and humoral immune indices showed statistically significant differences(p<0.05). However, these changes were not found in patients with non-IgA nephropathy nor HSP nephritis. In conclusion, it can be said that the immune mechanism involved in IgA nephropathy is different from that of HSP nephri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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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초기 송환 표류민 사례 연구

        현명철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8 한국학논총 Vol.50 No.-

        In this paper, I analyzed the 40 cases about 252 castaway who repatriated from Japan to Korea from 1869 to 1873. As a result, We can highlight the following points. First, to introducing the steadily repatriated castaway eve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Meiji regime, will be a basis for properly criticizing the myth that diplomatic disconnection was in progress. Second, till September 1872, when the Meiji government collapsed the existing diplomatic system between Korea and Japan, the repatriating castaway was carried out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practice by officer who return drifter[漂民領來差倭] with Rental vessel[駕船=借倭船]. Third, after the collapse of the traditional Korean - Japanese diplomatic system, repatriation through Flying boat[飛船] without by officer who return drifter[漂民領來差倭] takes place. Fourth, I introduced the flow chart of drifting through the castaways' statement. And the average number of being repatriated people is estimated to be about 8vessel, 50 people per year. And 19 cases of Jeju Province, 9 cases of Jeolla Province, and 10 cases of Gyeongsang Province. In addition, it can introduce that large ship was mainly engaged in marine rental business or commercial. For further research, it is necessary to translate the drifting statements into a database. Through this, we can understand the acquisition of information through drifting, contents of ship rent and commerce, and course. I think that it can reveal the trend of the price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one side of marine commerce. 본고는 메이지 초기 한일관계사를 재조명하려는 작업의 일환으로 메이지 초기 표류민 송환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변화하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 소개하고 표류의 여러 모습을 복원함을 목적으로 한다. 2장에서는 1869년에서 1873년에 이르기까지 5년간 송환된 표류민 40건 252명의 사례를 소개하였다. 이 소개를 통해 대수대차사 서계가 거절되는 상황에서도 세견선과 표류민선이 꾸준히 입항하고 있음을 실증하고 서계 수리의 거부로 말미암아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기존의 단순한 이해가 잘못된 것임을 부각하였다. 3장에서는 다음 사항을 부각시켰다고 생각한다. 메이지 정부가 대마주의 외교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기존의 한일외교시스템을 붕괴시키는 1872년 9월까지의 표류민 송환은 전통적 관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 이후에는 비선 노인(路引-입항증명서)을 소지한 선박을 통해 표류민이 송환되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이는 ‘왜관접수’혹은 ‘왜관침탈’로 알려진 기존 한일외교 시스템 붕괴 이후에도 외교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동래부 역시 접대를 중지하였을 뿐 외교 단절을 표명하지 않았으며 왜관의 시설을 수리해 주고 입항 선박에 대한 문정과 출항 선박에 대한 노문(路文-출항증명서)발급에는 변화가 없었다. 4장은 해양학에 첫발을 내딛은 필자의 새로운 시도이다. 우선 송환된 표류민의 진술을 토대로 표류의 흐름도를 소개하였다. 표착지를 중심으로 히젠 오도열도, 대마도, 동해 연안의 초슈와 시마네현, 그리고 큐슈 남부의 사쓰마와 오스미[大隅]에 이르는 표류민이 어디서 표류를 시작하였는지 소개한다. 다음으로는 표류민 선박이 수리되어 송환되는 경우를 선박의 종류에 따라 소개하고, 표류민의 지역적 분포를 소개하였다. 또한 선박의 크기와 표류민의 생업의 관계도 살펴보았다. 표류민은 한・일간의 정치적 변화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송환되고 있었으며, 큰 배(2파 삼선 이상)의 경우는 주로 선박대여업이나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표착지에서 수리를 거쳐서 귀환하는 비율이 높았다는 당연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서 표민 문정 기록을 수집・번역하여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할 필요를 제기하였다. 이를 통하여 표류의 참상과 표류를 통한 정보의 획득, 선박의 임대료와 상업의 내용 그리고 항로 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조선 후기 물가의 동향과 해상 상업의 일면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많은 연구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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