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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류도(風流道), 한국음악의 철학과 뿌리

        한흥섭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人文硏究 Vol.- No.49

        Poong-ryu-do, a philosophy and root of Korean Music 풍류도는 고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했던 철학이자 신앙의 바탕이라 할 때, 한국음악의 철학과 뿌리 역시 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논자의 가설이다. 그리고 이를 풍류, 향가, 무교, 금도 등과의 연관관계를 통해 입증해 보았다. 먼저 풍류에서는, 풍류도는 철학사에서는 사라졌지만 그와 별개로 풍류라는 용어가 한국음악계에서는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풍류도와 한국전통음악이 매우 밀접하다는 추정을 이끌어 내었다. 다음으로 향가에서는, 신라음악문화의 꽃인 향가의 주된 담당층이 화랑들이었는데, 바로 그들의 정신적교육적 이념이 풍류도이며, 또한 향가의 사상적 배경으로 풍류도가 거론되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풍류도와 한국음악과의 친연성 역시 자연스럽게 입증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무교에서는, 한국문화 또는 한국음악의 뿌리가 무교(샤머니즘)라는 것과, 특히 신라사회에서 무교의 존속시기와 풍류도의 존속시기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을 토대로 해서, 풍류도와 무교의 본질적 성격 가운데 공유 되는 부분이 있음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춤과 노래를 통한 현세에서의 공동체의 삶의 가치를 긍정하는 태도’라고 보았다. 이를 통해 풍류도와 한국음악과의 밀접성 역시 입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금도에서는, 금도를 옥보고 이후의 풍류도 혹은 그 유풍으로 보고, 이 금도가 통일신라의 궁중에서 중시되고 나중에는 그것이 보편화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풍류도와 한국음악의 연관성 역시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논자는 이상의 논증과 추정을 통해 풍류도는 적어도 거의 천여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신라인의 노래와 춤과 음악의 배경의식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풍류도는 한국음악의 철학이자 뿌리였던 것이다.

      • KCI등재

        아악고(雅樂考)

        한흥섭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7 民族文化硏究 Vol.46 No.-

        아악은 한국전통음악의 중요 장르이자 개념이다. 그런데 아악이 우리 음악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를 1116년 고려 예종(睿宗) 때 송나라에서 들여온 "대성악(大晟樂)"을 그 시초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는 그 이전에는 아악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논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를 아악의 정의와 유래를 통해 입증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논자는 한국아악을 "한국의 궁중음악 가운데 속악을 제외한 제사활동이나 조회의례에서 사용하는 의례성이 강한 악가무일체로서의 악에 대한 일반적인 지칭"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한국아악의 최초의 등장은 기록상 신라 유리왕(24-57)때다. 둘째, 신라에는 "회악", "신열악", "돌아악", "지아악", "사내악", "미지악"과, 원래의 "내지", "백실", "덕사내", "석남사내", "사중" 등의 아악이 있었다. 그리고 가야국의 우륵이 제작한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등 열 두 악도 아악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개인이 창작한 악 가운데 "사내기물악"이 제사활동이나 조회의례에 사용되었다면 아악일 수 있다. 셋째, 현재로서는 이들 아악이 모두 중국아악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한국 고유의 아악"인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아악을 고려 예종시대에 와서야 존재하는 중국의 음악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악은 중국만의 음악이나 장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아악사는 새롭게 쓰여야 한다. 그 역사는 신라 유리왕부터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아악의 명칭도 분명히 기록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한국아악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한국음악(문화)사를 주체적으로, 그리고 문사철(文史哲)이라는 인문학적 전통과 맥락에서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논자는 생각한다. Aak is important concept of music to understand and to know Korean Traditional music properly. Dae Sung Ak, from Song Country which had delivered in 1116 of Korea at Ye Jong King's time is now regarded as an origin of Aak in a Korean music history. Then, we can doubt about an existence of Aak as a Korean music before that time. I say, Aak was existed before the time and it is a purpose of this thesis to prove the existence through its definition and origin. Aak that was used by Royal Family in many ways such as sacrificial rites and morning meeting ceremony was formal court music except Sokak, was one of parts of Aak. From the idea, I now have three conclusions for Aak. Firstly, the origin of Korean Aak was at the time of Shilla when Yoori King ruled over (24-57). Secondly, we can see Korean Aak from Shila's "Hweak", "Shinyoulak", "Dolaak", "Jiaak", "Sanaeak", and "Mijiak", was also from "Naeji", "Baeksil", "Ducksanae", "Seoknamsanae" and "Sajung" which were a district's music. At last, we cannot prove affirmation about the point whether Aak was Korean own style of music or was affected by China's one. Little is known about it as yet and we have thought Aak was the music of China and it was delivered to Korea of Ye jong King's time. However, we have to write a history of Korean Aak again since Aak was not only a music style of China as I mentioned above. We need to know the history of Korean Aak that played from Shila and Aak's name must be recorded clearly. When we understand our music independently with three concepts, Literature, History and Philosophy, we can move one step closely to realize the Korean Music history.

      • KCI등재후보

        ????고려사?????에 나타난 팔관회의 음악양상 및 그 사상적 배경에 관한 고찰

        한흥섭 고려대학교세종캠퍼스 한국학연구소 2006 한국학연구 Vol.24 No.-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study a music aspect and thought background of the Palgwan-hwae Ceremony on the Koryosa. A-ak(Chinese music of the royal court religious ceremonies), Dang-ak(Chinese music of royal court party ceremonies), and Sok-ak(Korean popular music)had been performed at the Palgwan-hwae Ceremony. Among them, A-ak had been played for showing the strict manner at a place and impressive ornamentation of salutation in accordance with Yae-ak Sasang. Various music performance of neighboring nations, which expressed a view of Koryeo-centralism would be an important repertory with 'Baekhee' public performance at that day. Dang-ak and Sok-ak also had been performed at a regular party of the palace. They can be distinguished by their contents of performance. Dang-ak was thick Taoistic disposition and Sok-ak was dense to Confucian disposition. However there is no historical evidence what exact title of Dang-ak and Sok-ak had been played at the regular party, we can say that three of Dang-ak, 'Dang-ak Jungjae' had been palyed at a concert as it had been represented Taoism very much. As I mentioned above, lots of Koyreo's music(and the music of neighboring nations) had been performed at Palgwan-hwae Ceremony. By contents or thought, various of culture had been represented at Palgwan-hwae Ceremony, like Confucianism ceremonies which was from Yae-ak Sasang, Taoism, Buddhism, and 'Backhee' plays, showing a faithful of local gods at Palgwan-hwae Ceremony. Therefore, Palgwan-hwae Ceremony was symbol as a national ceremony that had expressed diversity of Koryoe's culture. 이 논문에서는 고려사에 나타난 팔관회의 음악양상과 그 사상적 배경을 탐구하였다. 팔관회의 의례절차를 분석한 결과 아악, 당악, 속악이 연주되었음은 물론, 고려중심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여러 주변국의 음악과, 토속신에 복을 비는 백희가무가 이날 행사의 매우 중요한 하이라이트였음을 확인하였다. 아악은 예악사상에 따라 왕을 중심으로 한 예의 엄격한 절차와 장엄한 수식을 위해 주악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아악 가운데 고려 태조 원년(981) 이후 송에서 ‘대성아악’이 들어오기 전에는, 삼국(사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궁중에서의 제사활동이나 조회의례에서 사용하는 음악”이라는 의미의 아악이 사용되었다. 또한 고려중심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여러 주변국의 음악이 매우 중요한 의례절차로 주악되었으며, 신라유풍인 백희공연에서 가무를 통해 토속신에 복을 기원하는 의례절차 역시 팔관회의 본질적 의식임도 확인하였다.그리고 본격적인 연회에서는 당악과 속악이 연주되었는데, 내용상 당악은 도교적 성향이, 속악은 유교적 성향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곡들이 주악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단언할 수는 없으나, 당시 궁중의 도교 취향 이외에도, 신선이나 장생불사(長生不死)와 같은 도교사상의 색채와 궁궐의 성대한 연회를 노래한 내용을 감안하면, 당악은 도교 취향의 ‘당악정재’ 가운데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가 공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악곡이 연주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속악 가운데서는 속악정재인 ‘무고’, ‘동동’, ‘무애’가 공연되었으며, 노래는 ‘풍입송’이 연회 끝 무렵에 연주되었고, 삼국속악은 거의 불리지 않았다. 이처럼 팔관회 행사 때에는 고려시대의 아악, 당악, 속악은 물론 여러 주변국의 음악이 주악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예악사상에 따른 유교적 의례, 도교적 신선 취향, 사찰 방문이라는 불교적 행사, 그리고 백희가무 공연에서의 토속신에 대한 신앙 등이 총체적으로 연출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팔관회는 고려국의 드높은 위상과 고려문화의 다양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국가제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고구려 문화전통과 거문고

        한흥섭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人文硏究 Vol.- No.48

        Koguryeo cultural tradition and Geomun-go 본 논문의 목적은 고구려의 문화전통 가운데 거문고 음악문화를 통해 한민족의 문화전통과 정체성을 입증하고, 이로써 고구려의 음악문화가 한국의 문화전통에 속해 있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거문고 악기의 유래와 개량 형태 및 그 명칭,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금도(琴道)에 관해서, 기존의 자료와 그에 관한 연구 성과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비교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우선 삼국사기 악지의 거문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였다.먼저 형태론에서는 거문고의 개량모델이 된 중국의 칠현금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그림, 그리고 현존하는 거문고를 비교하여 그 특색을 밝혔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괘()의 존재 또는 괘와 현주의 혼합배치이며, 연주법에서는 반드시 앉은 자세로 한쪽 무릎에 비스듬히 걸쳐놓고 술대를 사용하여 연주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명칭론에서는 거문고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불렸는지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거문고는 처음에는 한자식으로 ‘현학금’이라 불렸다가 그 다음에는 ‘현금’,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말식 표현인 고구려의 고 또는 검은 고, 신성한 고 등등의 의미를 지닌 ‘고’라고 불렸다고 추정하였다.이처럼 중국 칠현금과 우리나라 거문고의 이러한 형태와 연주법 그리고 명칭에서의 차이는 바로, 중국의 음악문화와는 다른 고구려 음악문화의 ‘창조적 변이’를 의미하며, 거문고라는 악기는 바로 그러한 창의성의 상징체임을 보다 분명히 하였다. 즉 고구려는 그들 특유의 음악문화를 확립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문화전통은 이후 통일신라시대의 금도(琴道)를 통해 계승되고 보편화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고려, 조선에까지 이어졌음을 거문고의 형태, 명칭, 정신세계(금도) 등을 통해 논증하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고구려의 문화전통을 유지하고 계승 발전시켰음을 확인하였고, 따라서 고구려의 역사는 적어도 음악문화전통의 측면에서는 중국이 아닌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거문고 음악문화를 통해 밝혀냈다.

      • KCI등재

        세종(世宗)의 "신악(新樂)"은 한국(韓國)의 아악(雅樂)인가?

        한흥섭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8 民族文化硏究 Vol.49 No.-

        논자는 지금까지 통설(지배학설)과 달리 세종이 창제한 신악이 한국의 아악이라는 대담한 신설을 제기하여 이를 두 단계로 나누어 입증해 보았다. 먼저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창제한 신악의 정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는데, 이 과정에서 신악이 음악문화의 자주성과 주체성에 기반한 한국의 아악임을 확인하였다. 다음은 신악이 어째서 한국의 아악이며 그런 규정은 정당한지를 통설과 신설의 아악 개념의 정의 및 그 근거를 통해 논증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처음 단계에서 (1) 신악 창제의 궁극 동기는 중국계 아악인 '신제아악' 과 달리 쉽게 알아듣고 공감할 수 있는 한글 가사와 향악선율 그리고 향악기로 구성된 향악을 중심으로 국가의례를 거행하려는 '음악문화의 자주성과 주체성'임을 확인하였다. (2) 세종 29년 6월 무렵부터 잠시나마 신악은 아악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아악의 정의에 따르면 '신악의 아악화' 즉 '한국아악의 등장'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다음 단계에서는 신악을 정말 한국의 아악이라 규정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 것으로, (1) 통설은 아악이 원래 중국의 의식음악이라고 규정하는데, 그런 규정의 근거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전반적으로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이들 사료는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史觀이 충실히 반영된 만큼, 통설의 정의는 중국을 천자국으로 조선을 제후국 혹은 소중화로 받아들인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뿌리 깊은 사대주의적 아악관을(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2) 한편 세조시대에 세종이 창제한 신악이 각종 국가의례에 두루 사용됨으로 해서, 한국의 아악이 공식적으로 등장했음을 확인했다. 이처럼 조선조 전 역사에서 보면 지극히 짧은 기간이지만, '공식적인 한국아악'이 등장함으로 해서 그 후 한국아악의 확립과 존속이 현재까지도 지속·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논자는 세조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3) 논자가 주장하는 신설은 그 근거를 "궁중에서의 제사활동이나 조회의례 등에서 사용하는 악에 대한 일반적인 지칭"이 아악이라는 정의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명제의 수용에 두었다. 따라서 신설은 현대의 아악관이자 주체적 아악관의 표출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우리가 조선조 성리학자의 사대주의적 아악관을 이 시대에도 무비판적으로 묵수·고집하는 건, 맹목적 문화사대주의자가 아니라면 시대착오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A writer proposes a new daring theory of which King Se-Jong made Korean Aak that is different from what we generally think and accept until now and demonstrates the theory with two steps in this thesis. The contents of the first step is that the writer checks Sin-ak, which was created in King Se-Jong's later years, on its all aspects, then proves Sin-ak is a Korean Aak, based on independence and subjective of a Korea music culture. In the next step, through Aak's concepts and definitions of a general opinion and the new theory, which are distinguished because of difference in the way of thinking of Aak, they found out why we can now say Sin-ak is the Korean Aak. The writer discusses the first step in details as below. 1. Although it is said Sin-ak was made to support insufficient of expressing for 'difficulty of establishment Cho-sun and celebrating Kings who deserved successful contribution to the country' with existing music, those contents were able to be represented by several established Aak and Chinese letter without any problems. Hence the reasons above are not proper purpose of Sin-ak. Therefore the creation of Sin-ak's original purpose was not reforming of Sin-je-Aak newly, its real intention was creative our own style of music to understand well with using mainly Korean lyric, melody of Hyang-ak(Korean music) and musical instrument of Hyang-ak to perform national ceremonies. We now say, Sin-ak definitely shows independence and subjective of own our music culture. Above facts are also proved by comparing forms of music between Sinje-Aak and Sin-ak and founded in historical document as well. 2. In Se-Jong's 29 years(June), Sin-ak used for the same purpose of Aak for some time, it means 'Sin-ak becomes Aak' or 'First stage of Korean Aak'. Next stage, the writer demonstrates whether we can certainly say that Sin-ak is Korean Aak. 1. The general theory defines Aak is a musical ceremony of anceint China. The facts are founded in historical documents like 『Ko-ryu-sa』 and 『Cho-sun-whang-jo-sil-rok』. However those documents were basically reflected in historical views of Sung-ri-hak-ja who were Cho-sun's representative scholars and they thought China was greater than Cho-sun. Therefore, the general theory is acceptance of China's culture and music without critical thinking as Sung-ri-hak-ja admired and received those. 2. The writer found out that Korean Aak officially appeared as 'Aak became Hyang-ak' or 'Hyang-ak became Aak' since 'Jung-dae-up' and 'Bo-tae-pyung' which were Sin-ak and King Se-Jong created were used in Se-Jo's period for a little while. Even if it had been only short period of appearance of Korean Aak officially, after that time Korean-Aak(<종묘제례악>) has been established and maintained. So the writer highly valued Se-Jo's contribution of it. 3. The new theory that the writer demonstrates is based on Aak's definitions, 'General meaning of Aak that was used for religious and national ceremonies' and acceptance a thesis, 'Every history is contemporary history.' So, the new theory expresses present and independent view of Aak. At this point, if we keep the past view of Aak which is view of Sung-ri-hak-ja, it is anachronism. Furthermore, it is essential to re-analysis and re-format if we know we need to define right history of Korean music or Aak subjectively and future-oriented. Therefore, the writer is confident that the new theory will be a foundation for new point of view for Korean Aak and helps understand it independen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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