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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守仁의 中和說 연구

        한정길(韓正吉) 한국양명학회 2007 陽明學 Vol.0 No.18

        이 글은 陽明 王守仁이 중화문제를 처리하는데 나타난 그 특성과 사상사적 의의를 밝힌 것이다. 양명은 감정의 未發과 已發을 마음 작용의 前後ㆍ內外의 서로 다른 상태나 단계로 이해하는 기존의 견해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유행하는 마음의 본체와 그 작용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미발과 이발을 마음의 본체인 未發之中과 그 작용인 中節之和, 즉 ‘中和’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양명에게서 마음의 본체는 바로 良知이다. 따라서 ‘중화’문제는 곧 양지의 본체와 작용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 中和가 마음의 全體大用이 되는 것이 바로 大本과 達道이다. 양명은 미발이발과 중화를 양지의 체용으로 바꾸어 논의함으로써, 주자학에서와 같은 靜養動察의 공부가 필요 없이 오직 마음이 유행하는데 나아가 사욕을 제거하고 그 본체를 실현하는 ‘心上工夫’만으로도 致中和가 가능한 이론체계를 갖추게 된다. 양명은 계신공구와 신독을 모두 사욕을 제거하고 본체를 실현하는 공부로 통일시키고, 그것을 다시 致中和와 致良知의 공부로 요약한다. 中和를 하나로 파악하는 양명은 戒愼恐懼를 致中공부로, 愼獨을 致和공부로 이해하는 주자학적 관점을 비판하고, 그것들을 모두 致良知의 공부로 통일시킨다. 치양지는 양지본체가 유행하는 과정에서 자사와 물욕 등에 의해 가려진 것을 제거하여 본래의 밝은 상태를 회복하는 공부이다. 뿐만 아니라 그 것은 天性을 실현하는 공부이기도 하다.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을 밝게 드러내고 있는 양지에 따라 행위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본 성실현의 문제가 완전히 致良知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양명은 치중화를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지점인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생육되는 경지에 대한 풀이에서도 심학적 특징을 드러낸다. 그는 ‘天地位’와 ‘萬物育’을 하나의 일로 파악하고 그것들을 모두 내 마음 가운데의 일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마음의 본체인 양지의 감응으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일체가 된다고 보는 그의 철학적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중화 의 실현은 곧 본성실현이다. 양명은 본성실현을 통하여 열리는 성인의 경계를 자기완성과 타자완성이 이루어지는 경계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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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陽明의 ‘未發’觀과 良知體用論

        한정길(韓正吉) 한국양명학회 2009 陽明學 Vol.0 No.23

        이 글에서는 송명리학의 주요 논제인 ‘未發’ 문제에 대한 王陽明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왕양명이 ‘주자의 미발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주자가 미발 탐구를 통하여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왕양명의 미발관의 특징은 무엇인지’, ‘미발 문제에 대한 왕양명의 해결 방식이 지닌 의의는 무엇인지’ 등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주자의 미발설에 대한 왕양명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思慮未萌?知覺不昧’의 미발상태를 ‘자기 중심성이 탈락한 순일한 의식의 상태’인 ‘未發之中’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미발상태는 자기중심적으로 흐를 수 있는 氣가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에 불과할 뿐, 사욕이 없는 순수한 도덕본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발시의 존양공부를 통해서는 已發之和를 확보하기 어렵다. 또 하나는 ‘미발시에 지각자는 있지만 지각되는 것은 없다’고 봄으로써 미발시의 본체체인이나 성찰공부를 근본적으로 막아버렸다는 점이다. 미발시에 도덕본체에 대한 체인이나 성찰공부가 없다면 도덕실천 역량이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주자의 미발설은 도덕본체[본성]를 실현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되기에는 문제가 있다. 주자학의 미발규정과 미발시의 존양공부에 대한 양명의 비판이 가능한 것은 그가 미발을 주자학에서와는 전혀 달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명은 ‘미발’과 ‘이발’을 주자학에서와 같이 마음의 어떤 상태나 국면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마음의 본체[心體]’와 ‘마음의 작용[心用]’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양명은 끊임없이 활동하면서 만물을 창생하고 주재하는 本性[理]을 ‘마음의 본체[心體]’로 삼고, 그것을 ‘未發之中’으로 규정한다. 心體는 私欲이 없는 순수한 천리[心卽理]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의지함이 없는 ‘未發之中’ 일 수 있다. 그 心體[未發之中]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일반인들은 私欲이 심체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미발지중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욕을 제거하는 공부가 요구된다. 이 공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心體가 스스로 자신을 체인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양명은 心體가 이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 능력이 바로 良知이다. 양명은 天性이 스스로를 환하게 드러내는 밝은 능력[明覺]을 ‘良知’로 규정한다. 양지는 바로 ‘天性과 明覺’의 통일체이다. 이것은 심체 자체가 스스로를 환하게 드러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 것으로서, 良知를 心體로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良知가 未發之中으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마음의 본체인 양지가 미발지중으로 규정됨으로 해서 양명은 양지 체용일원의 틀로 미발이발에 관한 기존의 다양한 언급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본성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그 이론적 토대를 良知論을 통해서 마련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① 사려 발생의 시간적 선후를 의미하는 未發?已發의 개념과 心體로서의 未發=未發之中=良知의 맥락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 ② 未發之中이 본체 곧 양지로서 의미되는 맥락과 수행의 결과로서 도달되는 심의 경계로서 의미되는 맥락을 구분해 주었다는 점, ③ 心體와 心의 動靜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드러내주었다는 점, ④ 未發之中과 已發之和의 관계를 양지의 체용 관계로 설명한다는 점, ⑤ 中和를 실현하는 공부를 致良知 공부로 통일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 등의 이론사적 의의를 지닌다. 왕양명의 미발론이나 중화론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드문 이유도, 왕양명철학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양지론으로 전환되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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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격조사는 핵이 아니다

        한정한(韓政翰) 형태론 2010 형태론 Vol.12 No.2

        이 글은 지난 2008년 형태론 10권 3호에 실린 『다시 격조사는 핵이다』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쓰인 글이다. 필자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정한(2003)에 실린 『격조사는 핵이 아니다』에서 이미 밝혔지만, 임동훈(2008)에서 새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답함으로써 격조사에 대한 그간의 진전된 연구 성과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임동훈(2008)에서 새로 제기한 문제들은 세 가지였다. 차례대로 논의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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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명학에서 윤리주체의 건립과 그 실현의 문제

        한정길(韓正吉) 한국양명학회 2001 陽明學 Vol.- No.5

        송명유학은 우주원리와 상통하는 인간의 본성실현을 통하여 인륜세계를 건립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특정적이다. 그럼에도 그 내부에는 본성실현의 방법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주자와 양명의 견해이다. 주자는 본성실현을 위해서 사물의 이치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라고 본 반면에 양명은 마음에서의 공부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본다. 양명은 용장에서 심체가 우주와 인생의 대본임을 체득한다. 그 마음은 하나의 도덕적 자각능력으로서의 양지이다. 양지는 도덕정감과 도덕의식의 통일체이며, 천리와 명각의 통일체이다. 그것은 사물에 감통하여 그에 적합한 행위양식을 창출해낸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자사와 물욕을 지니고 있으며, 양지는 이들 사욕에 의하여 가리워질 수 있다. 따라서 내 마음의 양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해야 한다. 양명은 치양지를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방법으로 제출한다. 양명은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을 모두 치양지 공부로 통일시키며, 의념이 연관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물에서 내 마음의 양지를 실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곧 자기의 본성실현과 구체사물의 특수성에 맞는 행위양식이 실현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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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國寺无垢淨光塔重修記〉와 小倉컬렉션傳 경주 남산출토 사리장엄구

        한정호(韓政鎬) 한국미술연구소 2008 美術史論壇 Vol.- No.27

        The pieces of papers founded into Sukga Pagoda at Bulguk temple in 1966 was recorded stone pagoda repair in the 15th year of Hyunjong's reign (1024) and in the fourth year of Jungjong's reign (1038) at the Goryeo. One of these, the record of Mugujunggwang pagoda repair at Bulguk temple (佛國寺无垢淨光塔重修記, after Bulgllksamugujunggwangtopjoongsugi) reported stone pagoda repair in the 15th year of Hyunjong's reign (1024) at the Goryeo has engendered a lot of controversy as compared with Sarita Reliquries into Sukga Pagoda at Bulguk temple. We can confirm the record of Dabo Pagoda repair at Bulguk temple through sarita reliquries and stone pagoda materials etc recorded on it. Bulguksamllgujunggwangtopjoongsugi was recorded to be enshrined Sarira Reliquries at mugujunggwang pagoda in Unified Silla and to be enshrined additonally Sarita Reliquries at it in Goryeo, that time of Dabo pagoda repair in 1024. This record furnish information for us to search for Sarita Reliqures into Dabo pagoda missed after being repaired it by Japanese in 1925. Ogura's collection of sarita reliquries known to be founded into some pagoda at Mt. Namsan of Gyeongju in South Korea (after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were compared with them into Sukga pagoda. We infered that they founded into Dabo pagoda because of only style. But Gayamoto Dojin (榧本杜人) studied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in 1958. the list of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on his paper furnished dearly that they enshrined into Dabo pagoda as compare with record on Bulguksamugujunggwangtopjoongsugi. First, on pagoda repair, brass bowl with a lid plated copper with gold made in Unified Silla put 99 pieces of Ra?mivimalavi?uddhaprabh?n?ma-dh?ra?i-sutra (无垢淨光陀羅尼經) in it. this record can compare with gilt bronze round brass bowl with a lid carved 99 pagodas out of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Second, Pure-gold bottle made in Unified Silla was only recored on Bulguks amugujunggwangtopjoongsugi and be gone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now. but This pure-gold bottle was written the list of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on Gayamoto Dojin's paper. This fact turn out that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founded at Dabo pagoda. Third, We presume that Ra?mivimalavi?uddhaprabh?n?ma-dh?ra?i-sutra put in the case plated copper with gold recorded on Bulguksamugujunggwangtopjoongsugi. The Gilt bronze case 31.2㎝ long is present in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quries too. Fourth, there are the relics of being additionally enshrined in Goryeo recorded on pagoda repair out of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The fact make sure that Ogura 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founded into Dabo pagoda. Especially, bronze brass bowl with a lid in Ogura's collection of sarira reliquries was written as 'Donghamja (銅含子)' out of additional ones in Goryeo on record. The same bronze brass bowl with a lid founded into octanonal nine stone pagoda at Woljeong temple made in 11th century, this time is same it of being repaired Dabo pagoda. Finally. Ogura's collection of pagoda-shaped silver sarira reliqury and glass-shaped silver sarira reliqury have compared with silver sarira reliquried into Sukga pagoda, not record. This be caused by the time of being made them. According to research recently, silver sarita reliqures into Sukga pagoda made the time of Sukga pagoda repair in 1038, after earthquake in 1036. This fact, We can infer that Ogura's collection of silver sarita reliquries also made after 1036. Therefore, Ogura's collection of silver sarira reliquries are suggestive that Dabo pagoda was repaired twice because of earthquake before Sukga pagoda repair in 1038. Under these circumstances, we presume that Bulguksamugujunggwangtopjoongsugi enshrined into Dabo pagoda in 1024, took out it because of earthquake and was rewritten after this enshrined into Sukga pagoda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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