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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화엄종華嚴宗과 용수사龍壽寺

        한기문 한국국학진흥원 2017 국학연구 Vol.0 No.34

        고려전기 화엄종은 의천이 종파를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의천 사후 오히려 분파되었다. 의천의 화엄학 문도들 중 한 갈래는 계응을 중심으로 태백산으로 퇴거 각화사를 창건하고 법해용문을 형성하여 화엄교단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법해용문의 확장 방법으로 문도 차원에서 용두산 용수사를 개창한다. 문도 확심이 명종의 명을 받아 사원재정을 확정하고 이를 공증하는 일면에서 「용수사개창비」를 건립하였다. 탁본첩으로 전해 오는 개창비문은 18세기 초 유자가 전문을 판독한 『용산지龍山志』고적조 최선비문과 대교하여 보완하였다. 이에 따르면 개창된 용수사의 구조는 인근 의상계 부석사와 차이가 확인된다. 부석사는 보처불과 영탑이 없는 일승사상을 강조한 전통이 원융국사가 주석한 시기까지 이어졌다. 개창한 용수사는 관음보살상과 청석탑이 조성된 구조였다. 주지한 확심廓心의 『원종문류집해』 권중의 내용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용수사의 종풍은 대체로 의천이 원효를 중시한 화엄사상을 계승한다. 13세기 중반 최우집권기에도 용수사의 종풍이 지속되었음은 용수사 비구 현규玄揆가 주장이 되어 『대방광불화엄경소』를 출판한데서 알 수 있다. 이 화엄경소는 의천 화엄사상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의천이 비판한 균여계열의 사상을 이은 체원의 저술을 14세기 각화사 주지 성지性之가 교감하는 활동을 볼 때 태백산계열의 법해용문의 사상경향이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On Hwaeomjong in early Goryeo Euicheon did Sects-Integrating movement, After his death the sect divided. Gyeoeung-based branch among the pupils of Euicheon’s Hwaeom Ideas builds Gwakhwasa in Taebek Mt.. They developed Hwaeom Association through the founding of Beophaeyongmun. To do this the students establish Yongsusa in Yongdu Mt.. On Myeongjong’s decree Euicheon’s disciple Hwaksim insured the temple’s finance and made 「Yongsusagechangbi」 to secure this. This rubbed-copy epitaph I completed with Confucianist’s comprehended Choiseonbimun of 『Yongsanji』-Gojeokjo in early 18C.. On head-monk Hwaksim 『Weonjongmunryujibhe』 Yongsusa’s ethos largely inherits Weonhyo’s Hwaeom thinking that Euicheon emphasized. On Hyeongyu’s pressed 『Debanggwangbulhwaeumgyeongso』 the ethos was kept also in Choi U’s reign in the middle of 13C.. This book implicates enough Euicheon’s Hwaeom Ideology. On Gwakhwasa head-monk Seongji’s correcting Chewon’s writings that succeeded Gyunyeo-line opinion which Euicheon criticized, the thought flow of Taebeksan-faction Beobhweyongmun was changed.

      • KCI등재

        고려 혜목산 高達寺의 소속종단 변천과 배경

        한기문 한국불교연구원 2022 불교연구 Vol.57 No.-

        I examine this thesis on grand masters` inscription and Godalsa`s site excavation result. From 860s to 890s Godalsa kept Hyeoimogsan school`s base. In Kyeongmyeong King Simheui moved its base to Kimhai Bonglimsa. In Goryeo Chanyu rebuilt Godal Temple. Also Gwangjong decided this temple as Bonglimsan school`s base. It had the traits of Zen temple`s structure with Sangwon. When Euicheon`s establishing Cheontaijong, Godalsa became one of 5 Cheontai schools. Because Chanyu`s Cheontai thinking was succeeded by his pupils. When making 6 Cheontaidarma`s factions after Euicheon`s death, Godalsa was its group. In this time its force was the best. When Guktong Jeongo reassociated 6 Cheontai mountains on the base of Gukcheongsa in Chungsuk King, Godalsa kept Cheontaijong`s ethos. 신라말에서 고려말까지 혜목산 高達寺의 소속종단 변화와 그 배경을 고승비문과 고달사지 발굴결과를 통해 고찰하였다. 860년대 경문왕이 玄昱의 하산소로 지정한 때를 기점으로 혜목산문[고달사 종풍]은 고달사를 본거로 890년대까지 계승자 심희(審希, 855~923)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후 경명왕대 심희가 국사례를 받고 하산한 김해 봉림사로[봉림산문] 본거를 옮겼다. 고려에서 고달사 재건은 심희의 계승자이자 이 절에서 출가한 璨幽에 의해 이루어졌다. 찬유의 교선일치 사상경향이 광종의 국왕권 강화와 연결되자 고달사는 찬유의 하산소로 되고 봉림산문[혜목산문]의 본거도 되었다. 고달사지는 법당, 승탑, 비, 影堂 등으로 이루어진 上院을 통하여 선종사원 구조의 특성을 보였다. 고려중기 義天이 숙종의 국왕권을 강화하는 배경으로 천태종을 창립할 때 고달사는 천태 五門[5개 소 사원]의 일원으로 합류하였다. 고달사를 재건한 찬유의 천태사상경향이 문도에게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고달사는 국내 산파 계열로 보아 봉림산문[혜목산문]으로서 천태종에 합류하였다. 의천 사후 九山門계열에서 直投한 翼宗계열이 주도한 남숭산문[선봉사]이 으뜸이 된 ‘天台六法眷’ 형성시에도 고달사는 그 일원이었다. 건물 유적과 고급청자 유물로 볼 때 寺勢가 절정이었다. 원간섭기 충렬왕이 기존 불교계를 재편하기 위해 천태종을 지원하였다. 충숙왕대 국통이 된 丁午가 승정권을 가지고 國淸寺를 ‘六山根本’으로 재건하고 ‘天台六山’을 다시 결집하였다. 그 일원으로서 고달사는 14세기 후반에도 천태종 소속과 종풍을 유지하였다.

      • KCI등재

        朝鮮時代 尙州 邑城의 位相과 構造

        한기문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4 민족문화논총 Vol.57 No.-

        상주 읍성 관련 자료를 종합 검토하여 그 연혁과 지방제도상 위상, 그리고 읍성 내 제 公署의 내력과 배치를 정리하여 조선시기 상주의 도시 위상과 그 기능을 고찰하였다. 상주 읍성은 1380년 왜구 침입 후 1381년에 쌓기 시작하여 1385년에 완성하였다. 이 이후 읍성이 임난 직전인 1591년에 왜적에 대한 대비로 증축되었으며 壕塹시설도 하였다. 1912년 일제의 도시화 계획으로 철거되었다. 조선전기 경상도에 축성된 읍성은 29개처가 있었는데, 둘레로 보아 그 중 상주 읍성이 좌도 영성, 우도 영성, 慶州 읍성, 晉州 읍성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이는 경상도에서 경주, 진주, 상주가 고려이래 계수관급인 대읍의 위상을 가진 것을 보여 준다. 지방제도의 연변에 따른 邑格의 변화에 따라 보면, 태종 8년부터 尙州가 경상감사의 本營이 된 것으로 정리된다. 상주가 본영의 지위를 상실한 것은 선조 26년 성주로 감영이 이동하면서이다. 그러나 고려이래 조선 초부터 세조 때까지 계수관이라는 대읍의 위상을 유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읍성의 사대문은 사방에서 상주 읍성에 이르는 관문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남문과 북문은 통행량이 많아 守門廳과 守廳이 있었다. 정상우 제작 「상주주성도」에는 남문과 서문, 북문과 서문 사이에 각각 문루 없는 문이 있는데, 이는 四大門을 보완한 통행문으로 추측된다. 읍성내의 시설은 公署 시설이 중심이었다. 상주 읍성이 대읍임을 보여 주는 시설은 전패를 모신 객사, 주창, 대동창 등의 창고와 풍영루, 응신루, 진남루 등 각종 樓臺이다. 조선전기 객사는 감사의 延命禮, 望闕禮, 望賀禮, 望哭禮, 誕日箋文禮 등 의례가 행하여진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각종 창고는 계수관 또는 행영으로서 賑恤, 進上品 등의 보관을 위한 것으로 중요하였다. 각 종 누 역시 매월하는 朔膳 進上 監封을 위시한 다양한 進上 監封 장소였고, 대내외적 使臣을 접빈하는 곳으로서 상주 위상에 맞는 기능을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감사의 유영 기능은 없어졌지만, 진상품 집결지로서, 대내외 사신관이 到界하여 머무는 곳으로서 의미는 유지하였기에 여러 시설이 갖추어졌고 城內圖도 작성되었다. We explore the change and status and structure of Sangju Town-wall on data. The town-wall was built because of Japanese pirate in 1381. It was destructured for urban plan in 1912 of Japan reign. From late Koryo Sangju was big town Kaesugwan(界首官). Between Taejong 8 to Seonjo 26 it had been Kyongsanggamyeong(慶尙監營). In the wall are Kaeksa(客舍) for Yeonmyongryae(延命禮) of province governor ritual, storehouses of Juchang(州倉), Daedongchang(大同倉) for relief and offer-upping goods, and Pungyeongroo(風詠樓), Eungsinroo(凝神樓), Jinnamroo(鎭南樓) as floorstand(樓臺) for welcoming. These show the prestige as grand town of Sangju. In late Choseon Sangju kept goods-collecting and guest-welcoming. On Sanjujuseongdo(尙州州城圖), Sangjueupseongdo(尙州邑城圖), Yeojidoseo(輿地圖書), 1923 picture are Sangju’s official buildings and town-wall sketch in Ch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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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태조대 ‘대구 달성’지역 불교계의 동향

        한기문 한국중세사학회 2018 한국중세사연구 Vol.0 No.52

        Goryeo Taejo had many relations with virtuosos associated with provincial power. It was in alliance with Shila in 924. It was connected to Zen monks of Yeongcheon, Jaeam, Kimhae, Wonju and Yeocheon in 930. After the Unification, there were not only Zen monks but also Hwaeum priests. Around Taejo, monks of Sininjong and Cheontaehak try. Specifically Taejo does not has the network with Beopsangjong virtuosos. In Daegu Dalseong Yijae independent since 898 built Deungru in 908. On Choi Chi-Won’s writings he as ruler believes Mireug Buddha and has the companionship with Donghwasa and Heungryunsa of Beopsangjong. The local power was on the base of not Seonjong but Mireug Belief of Beopsangjong. In Gongsan Battle with Gieonhwueon Taejo defeats for no support of Donghwasa. This temple was founded by prince Simji of King Heondeok in Kim-line. Gieonhwueon replaced Shila’s Park-line King Gyeongae with Kim-line King Gyeongsun. Taejo in alliance with Park-line Kings has not correlated with Donghwasa. So Yijae group in Daegu did not aid Tae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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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화엄종<SUP>華嚴宗</SUP>과 용수사<SUP>龍壽寺</SUP>

        한기문(韓基汶) 한국국학진흥원 2017 국학연구 Vol.0 No.34

        고려전기 화엄종은 의천이 종파를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의천 사후 오히려 분파되었다. 의천의 화엄학 문도들 중 한 갈래는 계응을 중심으로 태백산으로 퇴거 각화사를 창건하고 법해용문을 형성하여 화엄교단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법해용문의 확장 방법으로 문도 차원에서 용두산 용수사를 개창한다. 문도 확심이 명종의 명을 받아 사원재정을 확정하고 이를 공증하는 일면에서 「용수사개창비」를 건립하였다. 탁본첩으로 전해 오는 개창비문은 18세기 초 유자가 전문을 판독한 『용산지龍山志』 고적조 최선비문과 대교하여 보완하였다. 이에 따르면 개창된 용수사의 구조는 인근 의상계 부석사와 차이가 확인된다. 부석사는 보처불과 영탑이 없는 일승사상을 강조한 전통이 원융국사가 주석한 시기까지 이어졌다. 개창한 용수사는 관음보살상과 청석탑이 조성된 구조였다. 주지한 확심廓心의 『원종문류집해』 권중의 내용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용수사의 종풍은 대체로 의천이 원효를 중시한 화엄사상을 계승한다. 13세기 중반 최우집권기에도 용수사의 종풍이 지속되었음은 용수사 비구 현규玄揆가 주장이 되어 『대방광불화엄경소』를 출판한데서 알 수 있다. 이 화엄경소는 의천 화엄사상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의천이 비판한 균여계열의 사상을 이은 체원의 저술을 14세기 각화사 주지 성지性之가 교감하는 활동을 볼 때 태백산계열의 법해용문의 사상 경향이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On Hwaeomjong in early Goryeo Euicheon did Sects-Integrating movement, After his death the sect divided. Gyeoeung-based branch among the pupils of Euicheon’s Hwaeom Ideas builds Gwakhwasa in Taebek Mt.. They developed Hwaeom Association through the founding of Beophaeyongmun. To do this the students establish Yongsusa in Yongdu Mt.. On Myeongjong’s decree Euicheon’s disciple Hwaksim insured the temple’s finance and made 「Yongsusagechangbi」 to secure this. This rubbed-copy epitaph I completed with Confucianist’s comprehended Choiseonbimun of 『Yongsanji』-Gojeokjo in early 18C.. On head-monk Hwaksim 『Weonjongmunryujibhe』 Yongsusa’s ethos largely inherits Weonhyo’s Hwaeom thinking that Euicheon emphasized. On Hyeongyu’s pressed 『Debanggwangbulhwaeumgyeongso』 the ethos was kept also in Choi U’s reign in the middle of 13C.. This book implicates enough Euicheon’s Hwaeom Ideology. On Gwakhwasa head-monk Seongji’s correcting Chewon’s writings that succeeded Gyunyeo-line opinion which Euicheon criticized, the thought flow of Taebeksan-faction Beobhweyongmun was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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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지 조사와 고려 사원 연구

        한기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22 영남학 Vol.- No.82

        To understand Goryeoan temples systematically I reviewed the significance of temple-site data with the literature. Temples in Shilla and Goryeo remained as many sites in quantity for especially the reduction by the official redemption of temple-farms in early Choseun among many factors. The site-data were written in part on 「Gojeok」 item in 『Sinjeongdongkugyeujiseungram』. But they began to explore logically in the modern era. To find the sites` name and position and duration is the clue to restore temple-history. To know their names can be through the roof-tile-inscription and the place-name data. In the absent presence of the reasonable records and the existent temples in Goryeo, the site-data can be the new alternative 1) to study its sectal and patternal structure and the periodical character itself, 2) to find their distribution and organization Gaigyeong-areal temples and local Jaboksa, 3) to define their structural traits and roles on transportation, 4) to reflect their military characteristic, 5) to see the religious fields of the grand masters` performance and pilgrim and their thou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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