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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해방 후의 일본번역극에 대한 고찰: 1980년대까지를 중심으로

        이홍이 ( 李洪伊 ) 한국공연문화학회(구 한국고전희곡학회) 2012 공연문화연구 Vol.0 No.25

        이 조사는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공연된 일본번역극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서구연극의 번역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일본연극은 2000년대 이후에 서야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강점기 이후 정책적으로 일본문화를 차 단시켜 일본연극을 접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최초로 원작명과 원작자의 이름이 밝혀진 상태로 번역·공연된 일본작품은 <고독한 영웅>(1969)이다. 이후 1982년에 이노우에 히사시 작의 <어미―화장―>이 오태 석의 연출로 무대에 올랐고, 85년에는 아베 고보의 <친구들>, 쓰카 고헤이의 <뜨거운 바 다> 등이 소개되었다. 이 세 작품은 모두 재연이 되었는데, 특히 쓰카 고헤이의 작품은 본인의 연출에 의한 재연뿐 아니라, 한국연출가들에 의해 재해석되어 최근까지 재연이 이루어진 사례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문화개방 이전에 번안·각색된 일본연극이 많이 소개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연 극의 ``번역``으로, 그들의 다른 문화와 다른 연극 만들기 방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의의 있는 체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해방 전 절대적인 영향관계에 놓여있었던 한일 연극이 동등한 타자로서의 관계를 성립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양 작품이 대부분인 번역극 중에서, 이들 작품은 한국의 제작 측과 관객으로부터 어떠한 기대를 받 았을까? 번역된 작품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같은 시기 일본극단의 내 한공연을 함께 살펴보면 재일교포의 이야기를 하거나 재일교포 작가의 작품이 다수 발견 된다. 그러나 그 공연들이 곧 재일교포 문제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일본극 단의 공연이 자막조차 제공하지 않은 채 진행된 경우가 많아 텍스트에 대한 비중이 상대 적으로 낮았다는 점도 그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번역극의 경우에서조차 텍스트 분석과 고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일본연극을 통해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 어떤 일본작품이 우리에게 소개되었는지, 그 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소개되었는지 검토하는 일은, 서구번역극과 차별되는 일본번역극 을 통해 궁극적으로 당시 한국연극이 추구하던 방향을 되돌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 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本論文は戰後から一九八○年代までを硏究對象とし、韓國における日本演劇の飜譯作品を調査したものである。これまで韓國では西歐演劇の飜譯に關する硏究は多く行われてきたが、日本作品の飜譯劇に關しては二○○○年代になってから言及され始めた。その理由として考えられるのは、韓國では日本文化に接する機會が根本的に少なかったことが擧げられる。戰後の韓國において、日本の原作名と原作者が公表された狀態で最初に飜譯·上演された作品の飜譯劇は、一九六九年の<孤獨な英雄(原作:解ってたまるか!)>である。以後、一九八二年に井上ひさし作の<母□化粧□>がオ·テソクの演出で上演され、一九八五年には安部工房の<友達>、つかこうへいの<熱い海(原作:熱海殺人事件)>などが上演された。この三つの作品はすべて後に再演されるが、そのなかでも、つかこうへいの場合は本人による再演だけではなく韓國の演出家たちにより再解釋され、最近まで再演が行われている。韓國側の「日本の大衆文化に對する文化解放」の以前にも暗默的に飜案·脚色された日本作品が數多く紹介されたが、日本演劇が「飜譯」された例は決して多くない。飜譯という過程を通して異文化として、異なる演劇作りの方法を見比べることができたのは、有意義な體驗だと思われる。これは、韓國演劇が日本演劇に對し、他者としての關係を成立させたことを意味するからである。それでは、當時の韓國の觀客に日本作品はどのように期待をされていただろうか。當時、飜譯された作品から共通点を探すことは難しいが、同時期、韓國公演を行った日本劇團の作品までを視野に入れてみると、在日コリアンというキ□ワ□ドが浮かぶ。とはいえ、その作品が、在日コリアンの問題に對する談論には繫がらない。日本劇團の來韓公演の場合は字幕が十分に提供できなかった事情があり、飜譯劇の場合にも十分なテキストの分析が行われていなかったからであろう。それでは、韓國の觀客は日本演劇に何を求めたのだろうか。結局、西歐飜譯劇とは異なる日本の飜譯劇を通じて、どのような日本作品が紹介されたか、どのように紹介されたかを檢討することは、當時の韓國演劇が追求した方向を論ずる一つの方法になると思う。

      • Firm's Competitive Situations and Compatible Top Executive Styles

        이홍 光云大學校 1992 인문사회과학논문집 Vol.21 No.-

        기업조직의 경영행태와 기업의 성과는 그 기업의 최고경영자의 관리 스타일에 따라서 크게 영향 받는다. 특히 기업의 소유자가 경영자가 되거나 적어도 기업의 초기에 있어서 기술공급의 원천이 최고경영자 자신인 중소기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는 최고경영자의 생각이나 행동이 기업경영의 구석구석에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정기업의 최고경영자의 관리 스타일이 어떠한가, 그리고 그들의 경영이념이 무엇인가에 따라 기업의 경영행태가 결정되고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사활이 영향받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기업조직의 이해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로든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관찰하지 아니하고서는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의 주요목적은 최고경영자를 통하여 기업의 경영행태를 이해하는데 있다. 주요연구의문은 다음과 같다. 1. 기업의 최고경영자의 관리스타일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으며 분류될 수 있는가? 2. 최고경영사의 관리스타일에 따른 경영행위의 특색과 장단점은 무엇인가? 3. 최고경영자의 관리스타일은 기업의 경영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여야 하는가? 위의 3가지 연구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본 연구는 먼저 최고경영자의 경영행위 상의 두가지 주요행동차원을 중심으로 최고경영자를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다음으로 이들 분류된 각 최고경영자의 경영관리 특색과 파생가능한 경영상의 장단점을 논의하였다. 마지막으로 기업경영상의 주요환경변화 요인인 각 제품수명주기단계에 따라 가장적합한 최고경영자유형이 어떠한 것인가를 가설적으로 제시하였다.

      • KCI등재

        Le développement de la culture gastronomique en France au dix-neuvième siècle: L’introduction du service de table à la russe

        이홍 한국프랑스문화학회 2018 프랑스문화연구 Vol.36 No.-

        프랑스 요리에 대한 평판은 이미 수세기 전에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고, 식도락은 프랑스 문화유산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리하여 2010년 11월 16일에는 ‘프랑스의 식도락 식사’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리스트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식도락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초기 레스토랑이 등장하면서 프랑스의 요리 평판이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의 이웃 국가들에게까지도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바로 이 시기에 식도락에 관한 수많은 개론서들이 발행되었다. 앙토냉 카렘Antonin Carê̂me, 위르뱅 뒤부아Urbain Dubois 또는 쥘 고페Jules Goffé 같은 요리사들과 장 앙템 브리아-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Alexandre-Balthazar-Laurent Grimod de la Reynière와 같은 전문가들이 식도락에 관한 저서를 남겼는데, 새로운 요리 및 음식문화를 개발하기 위한 비평과 조언 등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새로운 식도락의 규칙에 무지한 식당 손님들을 일깨워주고, 식탁에 제공되는 포도주와 음식의 질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며 지켜야 할 식사 예절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는 소위 식도락의 ‘초심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본고는 이 당시 프랑스에 도입된 테이블 서비스의 유래 및 적용 과정에 대해 연구해보았다. 특히 여러 저술에서 언급된 주프랑스 러시아 대사인 알렉상드르 쿠라킨Alexandre Kourakine이 소개한 ‘러시아식 테이블 서비스’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었다. 러시아식 테이블 서비스는 위르뱅 뒤부아에 의해 프랑스에 전파되어 유행하게 되었는데, 프랑스식 서비스와 달리 러시아식 서비스에서는 식사의 각 단계에서 개별 음식이 차례로 테이블에 차려졌다. 또한 러시아식 상차림에서는 테이블의 장식이 간소했기 때문에, 테이블에 도자기나 은으로 된 고급 식기들을 많이 올려두지 않았다. 두 가지 상이한 서비스에 관해서는 각각 옹호자와 반대자들이 존재했다. 전통적인 프랑스식 서비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식 요리예술”의 장식 및 미학과 일종의 예식으로서 식사 서비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러시아식 서비스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요리사가 추천하는 적정 온도에 맞추어 요리를 맛보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간소한 방식으로 식사가 차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논쟁은 수 십 년간 계속되었고, 마침내 제2 제정이 시작되는 시기인 1850년 이후에 러시아 테이블 서비스가 프랑스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 KCI등재

        옥상녹화시스템에서 수분 조건에 따른 섬기린초의 광합성 특성

        이홍,강태호,Li, Hong,Kang, Tai-Ho 한국조경학회 2013 韓國造景學會誌 Vol.41 No.6

        This experiment was conducted in order to study the physiological characteristics of Sedum takevimense in different moisture conditions. The photosynthetic rate, water use efficiency and the respiratory rate were determined by using a photable photosynthesis system. According to the results, the best illumination range and moisture range were explicitly selected. The highest photosynthetic rate was at $600{\mu}mol{\cdot}m^{-2}{\cdot}s^{-1}$, and after this value, the trend showed a reduction. When the moisture was 11.31%, the photosynthetic capacity and water use efficiency reached maximum value, but the respiratory rate reached maximum value at 7.91%. According to the measured values, the best illumination range was $600{\sim}1,200{\mu}mol{\cdot}m^{-2}{\cdot}s^{-1}$ and the best moisture range was 7.09~11.31%. 본 연구는 휴대용 광합성측정장치(CIRAS-2, PPS, UK)를 이용하고, 토양 수분조건에 따른 섬기린초의 생리특성을 파악하였다. 섬기린초의 광합성 속도, 식물수분이용효율, 호흡속도 등 측정을 통하여 섬기린초의 생장에 가장 적합한 광도와 토양 수분범위를 명확하게 파악하였다. 광도에 따른 광합성 속도가 증가하였고, $600{\mu}mol{\cdot}m^{-2}{\cdot}s^{-1}$ 경우에서 최고점에 도달한 후 그 이후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났다. 토양 수분 조건에 따른 섬기린초의 광합성 속도과 식물수분이용효율은 수분함량 11.31%에서 가장 높은 값을 보였으며, 호흡속도는 수분함량 7.91%에서 가장 높은 값을 나타냈다. 그 결과에 의하면, 섬기린초는 가장 적합한 광도 범위가 $600{\sim}1,200{\mu}mol{\cdot}m^{-2}{\cdot}s^{-1}$이고, 수분 범위가 7.09~11.31%이다.

      • KCI등재

        창조경제혁신센터형 창조생태계 어떻게 할 것인가?: 실리콘 밸리 및 교토생태계와의 비교를 통한 시사점

        이홍 기술경영경제학회 2017 Journal of Technology Innovation Vol.25 No.4

        This research targeted discussions on re-utilization of Korean creative economic innovation center. It is meaningless to simply discuss its re-organization. The focus of this study was to find a way that transforms it into totally new one. The study followed several steps. First, it delineated criteria from existing literature for comparing creative eco-system of Silicon valley, Kyoto eco-system and eco-system based on Korean creative economic innovation center. Second, it compared the three eco-systems in details. Third, it discussed a direction for transforming eco-system based on Korean creative economic innovation center. It was suggested that the Kyoto eco-system can be a role model. It was also suggested that governmental role should be changed from controller to facilitatior which stimulates regulation relaxations and helps to establish market formation. 본 연구는 창조경제혁신센터의 향후 활용에 관한 논의를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단순한 활용은 의미가 없다. 새로운 방식으로 탈바꿈 시킬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이에관심을 가지면서 창조경제혁신센터형 생태계의 변화방향에 대한 단서를 얻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하였다. 연구는 다음의 과정을 거쳤다. 첫째, 창조생태계 비교를 위한 기준을 이론적 고찰을 통해 도출하였다. 둘째, 도출된 기준을 중심으로 실리콘 밸리, 교토생태계 및 창조경제혁신센터형 생태계를 비교하였다. 셋째, 이런 분석을 통하여 창조경제혁신센터형 생태계 변화방향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변화방향으로는 교토생태계가 적합할 것으로 제시되었다. 단, 정부의 역할은 직접적 통제에서 환경조성, 예로 지역 창조경제혁신센터형 생태계가 살아날수 있도록 자극하는 규제완화와 시장형성을 돕는 것 등에 국한되어야 할 것으로 제시하였다.

      • KCI등재

        L'etat actuel de l'enseignement du coreen a Paris

        이홍 한국프랑스학회 2004 한국프랑스학논집 Vol.48 No.-

        현재의 프랑스 한국학은 10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 1894~18966년)라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낸바 있는 꾸랑(Courant)은 주한 프랑스 외교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서, 그 저서를 저술하게 되었다. 현재의 프랑스 한국학을 이루게 한 직접적인 개척자는 1920년대부터 한국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아그노에르(Haguenauer)교수로부터 시작된다. 본래 일본학자였던 그는 1956년에 이옥 교수를 초청하여 소르본(Sorbonne)에서 처음으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하였다. 1968년 학생운동의 결과로 소르본느가 13개의 대학으로 분리됨에 따라 한국학 강좌는 파리 제7대학(Université Paris 7) 동양학부(LCAO)의 한국학과(Section d'Etudes Coréennes)로 독립되어 이옥 교수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의 대학에서 처음으로 한국학과가 창설되었다. 이때 한국학과는 중국학과, 일본학과, 그리고 월남학과와 더불어 동양학부로 개설되었는데, 이는 동일 문화권을 이루는 극동의 네 지역 연구가 동양학이라는 하나의 단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동양어 학교의 한국어 강좌는 파리 제3대학 부설인 국립 동양어 대학교(INALCO)로 옮겨지게 되어 파브르(Fabre) 교수가 그 책임을 맡게 되었다. 프랑스 한국학은 늘 재학생 수의 부족으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학생들의 무관심이 아니라 한국이 여전히 프랑스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한국학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선 풍부한 문화 교류를 통해서 프랑스인들로부터 한국을 이해하고 알려는 진실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현재의 프랑스 한국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은 대부분 파리 제7대학과 국립 동양어 대학교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본 연구는 파리에서의 한국학 현황만을 다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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