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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길쌈부호기를 이용한 LDPC 패리티검사 행렬생성 및 비터비 복호 연계 LDPC 복호기

        이종수,황은한,송상섭,Lee, Jongsu,Hwang, Eunhan,Song, Sangseob 한국스마트미디어학회 2013 스마트미디어저널 Vol.2 No.2

        본 논문은 오류정정부호의 하나인 LDPC 패리티검사 행렬을 생성 하는 방법에 관한 논문으로 또 다른 오류정정부호의 하나인 길쌈부호를 이용하여 LDPC 패리티검사 행렬을 생성하면 터보부호처럼 LDPC 부호에서도 다양한 부호율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또한 복호기에서 LDPC에서의 복호방식 뿐 아니라 길쌈부호의 복호방식인 비터비알고리즘도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또한 보통의 오류정정부호의 경우 프레임크기가 커야 오류정정성능이 안정적으로 나오는데, 새로 제시하는 방식을 통해 프레임크기가 작은 부호의 경우에도 성능열화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In this paper, we suggest a new technique for WPC parity-check matrix (H-matrix) generation and a corresponding decoding process. The key idea is to construct WPC H-matrix by using a convolutional encoder. It is easy to have many different coderates from a mother code with convolutional codes. However, it is difficult to have many different coderates with LDPC codes. Constructing LDPC Hmatrix based on a convolutional code can easily bring the advantage of convolutional codes to have different coderates. Moreover, both LDPC and convolutional decoding algorithms can be applied altogether in the decoding part. This process prevents the performance degradation of short-length WPC code.

      • KCI등재

        모바일 환경에 적합한 적응형 마쿼트 알고리즘 제시

        이종수,황은한,송상섭,Lee, Jongsu,Hwang, Eunhan,Song, Sangseob 한국스마트미디어학회 2014 스마트미디어저널 Vol.3 No.2

        본 논문은 형광 X선 분석 시스템에서 관찰되는 스펙트럼에서 원하는 원소의 피크값을 검출하는데 쓰이는 마쿼트 알고리즘을 모바일 환경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마쿼트 알고리즘은 본래 잡음이 섞이기 전의 순수한 데이터가 무엇인지 알아가기 위한 유추해 가는 과정의 방법이다. 이러한 마쿼트 알고리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매개변수가 있는데 이 매개변수에 따라서 구하고자 하는 변수 값을 더욱 빠르게 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기존의 방법에서 불필요한 계산량을 줄이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매개변수인 ${\mu}$ 자리에 이 매개변수 대신 다른 매개변수를 도입한다. 또한 하드웨어적 측면을 고려시, 여러개의 정규분포의 모양으로 되어있는 함수를 여러개의 정규분포로 나누어서 생각하면 원하는 값을 구하기 더욱 간단해지지만 신뢰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한다. The Levenberg-Marquardt (LM) algorithm is the most widely used fitting algorithm. It outperforms simple gradient descent and other conjugate gradient methods in a wide variety of problems. Based on the work of paper[1], we propose a modified Levenberg-Marquardt algorithm for better performance of mobile system. The LM parameter at the $k_{th}$ iteration is chosen ${\mu}=A{\bullet}{\parallel}f(x){\parallel}{\bullet}I$ where f is the residual function, and J is the Jacobi of f. In this paper, we show this method is more efficient than traditional method under the situation that the system iteration is limited.

      • KCI등재

        부여 금동 가면 고찰

        이종수(Lee Jongsu) 백산학회 2020 白山學報 Vol.0 No.117

        부여 금동 가면은 부여의 왕성 소재지인 길림시 동단산 일대에서 출토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일본인들에 의해 수집되었으며, 현재 4점이 확인되고 있다. 부여 금동 가면의 형태적 특징으로는전형적인 북방계 얼굴과 상투 튼 머리를 들 수 있다.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용도는 신에게제사를 지내고 길흉을 점치는데 사용되었거나 혹은 최상위층의 무덤이나 제사 관련 유구에 부장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 금동 가면 기원은 형태적으로 고조선 혹은 예맥계 문화에서 사용되던 얼굴형을 그대로따르고 있으며, 제작기법상에서도 거푸집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지의 청동기 제작 기법을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재질적으로는 황금을 숭상하던 북방초원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수 있다. 후대로의 전승은 부여 멸망 이후 북표 라마동 고분군에서 그 흔적이 확인된다. The Buyeo Gilt Bronze Masks is excavated from the Dongtuan Mountain(東團山) area of Jilin(吉林) City, where Buyeo s royal castle is located. It was collected by the Japanes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currently 4 points remain. The Buyeo Gilt Bronze Masks features a topknot on its head, and its face shape is close to the northern system of anthropology. It is presumed to have been made by casting techniques, used to perform ancestral rites to gods, to predict auspicious events, or to use as burial goods in tombs of the highest levels or related relics. The origin of the Buyeo Gilt Bronze Masks is based on the shape of the face used in the existing Old-joseon(古朝鮮) or Yemaek(濊貊) culture, and the production technique uses molds to make the bronze ware. In terms of material quality, it can be seen as being influenced by the culture of the Northern Plains, which used to worship gold. After the fall of Buyeo, traces of it are found in the ancient tombs of Ramadong(喇嘛洞).

      • KCI등재

        속말말갈의 문화적 특징과 형성과정 고찰

        이종수(Lee Jongsu) 동북아역사재단 2018 東北亞歷史論叢 Vol.- No.61

        이 글은 북류송화강유역 속말말갈 유적의 문화내용상 특징과 기원 그리고 성립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대표 유적으로는 노하심 상층고분군, 대해 맹 상층고분군, 사리파고분군, 상하만진 보루군 등이 있다. 무덤 형식은 토광묘, 목관묘, 석축묘로 구분되며, 토광묘와 목관묘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토광묘가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되고 이후 목관묘와 석축묘가 출현하고 있다. 상하만진 일대 보루군은 북류송화강 서쪽의 구릉성 산지에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다. 보루들은 주변 취락을 보호하기 위해 교통로에 설치한 방어시설로 볼 수 있다. 유물은 토기, 철기, 장신구 등 다양하게 출토되는데, 통형관이 수량도 가장 많고 특징적이다. 속말말갈 무덤의 장제적 특징은 무덤 방향이 동-서향에 머리는 서쪽을 향해 있다. 장식은 단인일차장에서 다인이차장과 화장 위주로 변화하고 있으며, 화장은 목관묘에서 주로 확인된다. 유물의 매납 위치에 일정한 규칙이 확인되며, 말 두개골을 매납하는 동물순생이 이루어지고 있다. 무덤의 편년은 노하심 5~6세기, 대해맹과 사리파는 6~8세기로 볼 수 있다. 속말말갈의 문화적 기원은 삼강평원 지역의 곤토령-봉림문화이다. 기원전 2세기경 한서이기문화의 영향으로 곤토령유형이 출현하고 있으며, 2세기경에는 옥저계 단결문화와 폴체-완정하문화 요소가 이 지역에 유입되면서 봉림유형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들 문화의 사용집단은 곤토령유형은 읍루, 봉림유형은 물길로 비정할 수 있다. 곤토령-봉림문화는 그 중심지인 쌍압산시 일대에서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여 5세기경에 북류송화강 유역에 안착하고 있다. 곤토령-봉림문화 사용집단은 이 지역의 토착문화인 부여문화를 흡수하고 고구려문화 요소도 받아들여 새로운 형태의 속말말갈 문화를 탄생시키고 있다. 이들은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통해 강력한 세력집단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5세기 후반에는 부여를 압박하여 멸망시키고 있다. 이렇게 독자적인 세력을 영위하던 물길은 6세기 후반(572년경)에 고구려에 복속되고 있다. 이번 연구를 통해 속말말갈 문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말갈계 문화와는 차이가 있는 곤토령-봉림문화를 기반으로 부여와 고구려 문화 요소가 결합된 형태의 새로운 문화유형이며, 또한 『구당서 · 말갈전』의 상장의례내용은 당시 속말말갈에서 행해지던 장례의식을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밝혀낼 수 있었다.

      • KCI등재

        통화 만발발자 유적 집장묘의 계통과 성격

        이종수(Lee Jongsu) 동북아역사재단 2021 東北亞歷史論叢 Vol.- No.71

        통화 만발발자 유적은 고구려 물질문화의 기원 및 계승 관계를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기원전 4~3세기경에 출현한 토광묘와 집장묘는 선고구려문화의 기원과 백제 계승 관계를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자료이다. 이 유적에서는 모두 21기의 토광묘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관곽을 사용하지 않은 순수토광묘이며, 이른 시기의 A조 토광묘와 늦은 시기의 B조 토광묘로 구분된다. 집장묘인 20호와 21호는 하나의 묘광에 4인과 35인이 매장되어 있다.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20호는 지배층 무덤, 21호는 일반 계층을 집단 매장한 무덤으로 볼 수 있다. 무덤의 시간적 추이는 기원전 4세기경 처음으로 만발발자 유적에 A조 토광묘가 출현하며, 이후 B조 토광묘로 변화하면서 기원전 3세기경까지 석관묘, 대개석묘 등과 함께 사용되다가 기원전 2세기경에는 적석묘로 전환되고 있다. 만발발자 토광묘의 기원은 고조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가와자유형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5세기경 요서 지역에서 요동지역으로 유입된 토광묘가 점차 주변으로 확대되면서 기원전 4세기경에는 혼강 유역까지 전파되었다. 만발발자 유적 토광묘 사용집단은 체질인류학적으로 고동북유형에 속하며, 당시 요동과 장백산맥 일대에 거주하던 고조선 혹은 예맥계 종족으로 볼 수 있다. 유적에서 다량의 설치류 동물 뼈와 가공에 사용되는 석기, 운송에 사용되던 말 재감 멈치 등이 출토되고 있고, 당시 이 지역의 특산품이 모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만발발자 유적의 성격은 혼강 유역의 모피 중간집하지로 볼 수 있으며, 주민집단은 주로 주변지역에서 사냥한 모피동물을 수합하고 가공하여 공급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집장묘는 비정상적 사망에 의한 결과로,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긴급 상황에서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합민망합 유적과 1910년대 동북지역 페스트 유행 자료를 통해 보면 설치류 동물과 관련된 페스트 창궐과 관련될 가능성이 가장 높으나, 기타 다른 전염병에 의한 결과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선고구려문화의 백제 계승과 관련하여 석촌동고분군 대형 토광묘와 비교해본 결과 문화내용과 시간적으로 동질성이 확인되지 않아 계승성을 연결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Tongwha Wanfabozi ruins of pit burial and mass graves provide important data to clarify the origin of the ancient Goguryeo cultur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uccession of Baekje. In these ruins, 21 pit burials were found, divided into early group A pit burials and late group B pit burials. Among them, the mass graves are M20 and M21, and 4 and 35 people are buried in one grave pit. Group A pit burials first appeared in Wanfabozi ruins around the 4th century BC, and later changed into group B pit burials, and were used together with stonecoffin tombs and Dolmen until around the 3rd century BC, and then converted to stone-mound tombs by the 2nd century BC. The origin of the pit burial of the Wanfabozi ruins can be found in the Zhengjiawozi Type in Liaodong region, and is closely related to the Gojoseon culture. The group using the Wanfabozi ruins pit burial belonged to the Paleo-Northeast type in Physical anthropology, and it can be seen as a Gojoseon or Yemaek-type race that lived in the Liaodong and Changbaek Mountains at that time. The character of Wanfabozi ruins is the middle collection of fur in the Hon River basin, and can be understood as a community engaged in the livelihood of collecting, processing, and supplying hunted fur animals. The background of the mass graves is believed to have been used in emergency situations in which a large number of people die due to an epidemic. The type of infectious disease is most likely a plague associated with rodents. In relation to the succession of culture to Baekje, a comparison with the large-scale pit bourial in Seokchon-dong Ancient Tombs shows that the commonalities and succession between the two is not confirmed in terms of culture content and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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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정밀 레지스터 제어 및 공정 개선 기술 개발

        이종수(Jongsu Lee) Korean Society for Precision Engineering 2021 한국정밀공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Vol.2021 No.11월

        인쇄전자기술은 친환경, 저가·대량 생산의 이점이 있어 유연·웨어러블 소자 제조를 위한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롤투롤(Roll-to-roll) 제조 공정은 인쇄 전자 소자 대량생산에 가장 적합한 기술로 평가받고 있으며, Logic Circuit, Ring Oscillator와 같은 Transistor 기반 전자 소자 및 Flexible Printed Circuit Board와 같이 다층의 기능성 패턴으로 구성된 유연 전자 소자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10 μm급의 초정밀 레지스터 제어 기술이 필수적이다. 본 연구에서는 롤투롤(Roll-to-roll) 제조 공정 기반 다층 유연 전자 소자 대량 생산을 위한 ± 10 μm급 고해상도 레지스터 제어 기술 및 이를 위한 공정 개선 기술을 개발하였다. 먼저, 인쇄 공정에서의 레지스터 에러 최소화를 위한 외란 진단 기법을 개발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인쇄 구간 장력외란을 최소화하였으며, 소재의 느린 제어 동특성을 개선하기 위한 제어 기법을 개발하였다. 또한, 패턴 간 위치를 대표하는 레지스터 마크의 측정 에러 발생가능성을 실험적으로 규명하였으며, 공정 조건에 따른 마크 인쇄성 평가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공정 조건 개선을 통한 레지스터 측정 에러 오차 개선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 결과는 롤투롤 공정을 이용한 다층 유연·웨어러블 소자 대량생산을 위한 기반 기술로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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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關野貞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조사 연구, 그 성과와 한계

        이종수(Lee Jongsu) 한국미술사학회 2008 美術史學硏究 Vol.260 No.260

        일제강점기의 고구려 고분벽화 조사와 연구는 동경제국대학 교수인 關野貞(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2년 강서 대묘에서의 벽화 발견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존재가 알려지기는 하였으나, 조직적인 벽화고분 조사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직후 朝鮮古蹟調査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벽화고분의 수는 모두 28기이다. 이 가운데 1912년 강서 대묘 조사에서 시작된 1910년대의 벽화고분 15기의 조사가 모두 關野貞의 손을 거쳤을 만큼,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關野貞의 벽화 연구가 지닌 특성을 살펴보면 그것 자체로 그 성과와 한계를 담고 있다. 먼저 그는 벽화고분의 命名이라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고분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이름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그의 연구 논문은 해설과 함께 사진과 실측도, 모사도 등을 싣고 있어 자료로서 충실한 점에서 두드러진다. 정확한 실측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연구 방식은 근대적인 학문의 한 표준을 제시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또한 그는 조직적인 팀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엄청난 작업량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명민한 관리자로서의 면모와 함께 성실한 연구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학자로서의 자세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채 고구려 고분벽화의 회화적 특성을 중국의 영향이라는 관점으로만 서술하고 있다. 이런 무리한 회화양식의 적용으로 인해 벽화의 편년 작업에서도 스스로의 논의에 모순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연구가 식민지배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논문과 저서 곳곳에서 조선의 미술을 가치 폄하하는 표현들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발굴과 함께 진행된 벽화 연구는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마치게 된다. 1930년대 이후 벽화를 발굴하는 일본인 학자들에게 조사 방법과 벽화 해석의 관점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발굴에 참여하지 않은 학자들에게 미친 영향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연구한 대상은 고대의 벽화이지만 근대 학문의 관점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조사 대상이 고대의 무덤이었다는 것은 근대적인 조사 방식과 더욱 대조를 이루어, ‘정체된 조선과 근대적인 일본’의 이미지 창출에 기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분벽화 발굴이 ‘사실적인’조사였다는 평가의 이면에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이 땅의 고적마저도 소유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의 시선이 내재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Investigation of and research into Goguryeo ancient tomb mural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of Korea were initiated by Professor Sekino Tadashi of Tokyo Imperial University. This initiative, conducted as part of Japan's survey of Joseon's ancient tombs, began with the Gangseo Great Tomb in 1912, while further investigations into the murals of fifteen ancient tombs were conducted by Sekino in the 1910s, making him a significant presence in the research history of Goguryeo s ancient tomb murals. Sekino accomplished considerable achievements, though they suffered from certain limitations. He gave names to those tombs with murals he explored, thereby allowing his name to be recorded in the history of this activity. His works include explanations, photos, drawings based on actual measurements, and copied drawings, offering distinctively excellent references. His research methods, based on accurate measurement, were recognized for setting a standard in the early modem period of archaeological research in Korea. Furthermore, Sekino had a well-organized team to effectively handle a vast workload, giving him the image of a competent manager as well as a faithful researcher. However, Sekino tried to describe, without the presentation of specific data, the characteristics of Goguryeo ancient tomb murals only from the perspective of Chinese influence, an attitude which led him to contradict himself when chronicling the murals. In the research he conducte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of Korea, including various phrases in his research, expressions are used which reveal a certain contempt for the value of Joseon fine arts on his part. His research into the Goguryeo tomb murals along with his excavation work had a significant influence on later researchers. He established certain criteria for research methods and the interpretation of murals for those Japanese researchers who explored the murals from the 1930s onwards, as well as for those scholars who did not personally participate in the excavations. Sekino pioneered research into Goguryeo ancient tomb murals, and produced valuable data. However, although his efforts to explore those ancient tomb murals were geared towards fact-finding surveys, it cannot be denied that they were intended to justify Japan's colonial rule over Joseon and even to take Joseon's historical rel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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