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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쇄극의 근대 연극사적 의의- 테크놀로지와 사실적 미장센, 여배우의 등장

        우수진 상허학회 2007 상허학보 Vol.20 No.-

        Yonsekuk(“a play combined with moving picture”) emerged around the late of 1910’s as a hybrid genre for the purpose of the box-office profits. For that reason, Yonsekuk has been accused as ‘an anomalous play’ in the modern theatre history by Yun, Baek-Nam, etc. However, this study intends to emphasize the role and the significance of the melodramatic Shinpakuk(“New Trend Theatre”) and hybrid Yonsekuk in the formation of the modern theatre at that time. The Electrical Equipment Shinpakuk emerged around the middle of 1910’s just before Yonsekuk. This form of Shinpakuk met the demands of the audience who was eager for the lively and realistic stage. It produced the special effects of the rains, snow, lightning, and ghost, etc. by use of the machinery called as ‘유니버스’. That sorts of reality seemed to be also related with the demands of the verisimilitude and realisitic ‘chosun’-style of mise en scène. Yonsekuk adopted the most advanced technology, that is to say, the moving picture into Shinpakuk. Although the portion of the moving picture was so small and even hurted the aesthetic of the play, it con- tributed to extend the reality or realistic demands of the moving picture into the entire production. For example, an actress, which was the char- acteristic of the modern drama, was being substituted for Onna-gata (“female character played by a male actor”) of Shinpakuk in Yonsekuk. 연쇄극은 서구적인 근대극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1910년대 말경에 계몽이나 예술성보다는 흥행을 목적으로 하여 신파극에 활동사진을 일부 도입했던 혼종적인 연극 형식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윤백남으로부터 ‘변태의 극’으로 비판받았던 연쇄극에 대한 평가는 근대연극사 연구에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근대 연극의 형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가 부정하고자 했던 타자인 멜로드라마적 신파극이나 혼종적인 연쇄극에 의해서도 선취되고 있었다고 본다.연쇄극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1910년대 중반에 등장했던 활동사진 변사들의 전기응용 신파극은 사실적이고 생생한 무대 표현에 대해 점차 커져가는 관객의 요구에 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니버스’라는 첨단의 전기장치를 이용한 것이었는데, 이는 눈이나 비, 천둥, 번개, 유령 등에 대한 생생한 특수효과로 강렬한 시각적 ‘리얼리티’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탐라의 사몽(詐夢)과 같은 레퍼토리를 통해 내용적 사실성 내지는 박진성(迫眞性)의 심화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적인 무대 및 의상 등의 미장센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나아가 연쇄극의 등장은 당시 최첨단의 근대적 테크놀로지인 활동사진을 연극에 적극 도입함으로써 이에 대응하고자 했던 노력이었다. 비록 활동사진은 비록 전체 공연에 비해 아주 짧은 시간을 차지했으며, 신파극이나 연쇄극의 연극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직접 기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나의 연쇄극 안에서 활동사진과 연극이 연속적으로 무대화되는 형식은 관객들이나 제작자들 모두에게 활동사진에서 경험되는 실재적인 사실감을 연극에까지 요구하거나 적용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연쇄극에 와서 신파극의 ‘온나가타’ 즉 여형(女形) 배우가 근대극의 상징인 ‘여배우’로 대체되었는데, 이 또한 활동사진이 빚어내었던 실재적 또는 사실적인 무대감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SUMMARY

      • KCI등재

        협률사와 극장적 공공성의 형성

        우수진 한국근대문학회 2009 한국근대문학연구 Vol.10 No.2

        This thesis is to analysis the relation of the foundation of Hyup-Ryul-Sa and the formation of the theatrical publicity in the capital city, Han-Sung. Hyup-Ryul-Sa was the first residental theatre which was located in the center of the capital city and began to perform at night for the first time. Thus it could be a part of the daily life of the city, especially of the night life. Partly it due to the street illumination and the night circulation of the tramcar. All these things help the accesibility of the public to the theatre in the capital. The theatrical publicity also worked in the theatre repertories. Pansori and Ki-Sang's royal dances, which was the main repertoies, had been limited to the special who were the members of the royal family, the high-ranking officials, the noble men, Yang-Ban and, if the common people, at least the great rich men. However, they began to perform in the theatre not in private but in public. Now the public who had been inaccesible to these performances could pay and enjoy in the same place with the noble and wealthy men. The supper class also could enjoy that every day at a relatively good bargain. However the theatrical publicity worked also limitedly in the theatre. It was open to everybody not virtually but formally only to the people who had the ticket power. After reopening in 1906, some seat price was reduced to 15-jun(錢), which attributed to the theatrical publicity. And yet, the social emergence/existence of the young theatre public was the causitive of the emergence of the public opinion about the abolition of Hyup-Ryul-Sa, which negated the theatrical publicity itself. 이 논문에서는 협률사의 근대적 의의를 한성부라는 도시 안에서의 극장적 공공성의 형성이라는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살펴본다. 기존의 연구에서 강조해왔던 협률사의 상업성은 그것이 도시 내 합법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실내극장으로서 실제적으로나 인식적으로 공공화 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1900년 전후 아현과 용산 등 한강변에 등장했던 무동연희장은 근대적 교통수단을 토대로 접근이 가능해진 도시민을 배후 관객으로 했던 상업적인 가설극장이었다. 이것은 비록 재래적인 형태의 장터 연희장에서 역시 무동패들의 재래적인 아크로바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당시 한성부 내에 연희장 설치가 불허되는 가운데 그 설치와 운영 역시 한성부 도시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는 점에서 무동연희장은 연희장/극장과 근대적인 도시와의 새로운 연관성을 새롭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협률사의 ‘도시 내 설치’가 갖는 의미는 큰 것이었다. 그리고 협률사의 도시 내 설치와 함께 저녁 공연의 시작을 통해 극장구경은 도시의 일상적인 삶, 특히 밤 문화의 일부로 재편될 수 있었다. 즉 저녁이라는 공연시간과 전기조명의 발달로 인한 거리조명의 시작 및 근대적 교통수단의 늦은 운행 등은 도시 내 극장에로의 관객접근성을 현실화시켰던 것이다. 극장적 공공성은 또한 극장 내부에서도 실현되고 있었는데, 즉 협률사의 주된 레퍼토리였던 창부의 판소리와 기생의 춤은 이전에는 제한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제 판소리와 기생연희는 특수계층의 사적인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특정한 관객대중을 위한 개방적인 공공 극장 안에서 연행되었다. 그리고 신분과 경제적인 이유에서 원천배제되었던 일반대중들은 이제 일정한 입장료만 지불하면 상층관객과 같은 시공간에서 이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층관객 역시 예전에 비해 훨씬 값싼 가격으로 특별한 행사가 아닌 날에도 매일매일 이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극장 안에서 공공성은 동시에 제한적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우선 형식적으로는 누구에게나 개방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구매력이 있는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06년 재개장 이후 일부 좌석값을 인하함으로써 협률사의 개방성은 더욱더 현실화되었지만, 동시에 젊은 관객대중의 실체는 사회적인 우려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 극장의 공공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협률사 혁파론의 원인이 되었다 이상의 극장적 공공성은 필연적으로 비균질적인 혼종의 관객대중(theater public)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관객대중(theater public)은, 근대적인 출판매체를 통해 추상적으로 형성되는 독서대중과 달리, 공공적인 극장 안에서 육체적인 현존을 통해 구성되는 구체적인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협률사의 관객대중은 이후 실제적으로나 연극/극장 담론상에서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연극/극장을 도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복권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즉 관객대중의 집단적 비속화에 대한 우려나 두려움은 연극/극장을 둘러싼 지식인들의 논의-협률사 혁파론과 연극개량론-를 견인해나가는 한편, 실제적으로 구매력을 지닌 이들은 이후 극장의 상업화를 가속화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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