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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두장군’ 전봉준과 다나카 쇼조의 ‘공공적’ 삶- 한국과 일본의 근대를 읽는 사례로서 -

        박맹수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3 人文硏究 Vol.- No.69

        The end of the 19th century when Chun Bong-Jun(1855~1895) in Korea and Tanaka Shōzō(1841-1913) in Japan lived was the age of “Western Impact”. The european domination on third world countries, obliteration and destruction of culture, political/economical/social domination, oppression and brainwashing of self-centered way were rampant in East Asia such as Joseon Dynasty and Meijin Japan. Although Chun Bong-Jun and Tanaka Shōzō differs in nationality, residential area, and trajectory of life, they have something in common. They were born into a poverty-stricken farmers, grew up to pay attention to the agony of humble people, and stood against the iniquitous systems or practices which had caused distress of the people. It is much the same that they shared the misery of the people, devoted themselves to eliminate fundamental causes of the misery, and remained firm in their believes to the death. The trajectory of their lives is “the life of publicness”, in other words, the life for the public sake itself. This research reviewed the lives of both Chun Bong-Jun and Tanaka Shōzō in the following orders: the periods of both lived in, the lives of both figures, interactive recognition of both, and the characteristics of “life of the publicness” of both. This paper ended the research with exploration of “universal publicness” through lives of the public sake of both historical figures. 전봉준과 다나카 쇼조가 공통적으로 살았던 19세기 말은 ‘서세 동점’ 즉, ‘유럽의 제 3세계 지배, 문화 파괴와 말살, 정치 경제 사회적 지배, 그리고 자기들 방식의 강요, 착취, 억압, 세뇌’가 조선과 메이지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대였다. 전봉준과 다나카 쇼조는 나라도 다르고, 살다 간 지역도, 삶의 궤적도 달랐지만 서로 닮은 부분이 많다. 시골의 가난한 평민(농민)으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가장 낮은 자리의 민중들이 겪는 고통에 눈을 돌리고, 민중들의 고통을 초래하는 잘못된 국가 제도나 정책을 바로잡는 일에 앞장섰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민중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그 고통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던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굽힘이 없이 그 실천을 계속한 것도 똑 같다.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바로 ‘공공(公共)적 삶’ 다시 말해 ‘공공하는 생애’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전봉준과 다나카 쇼조에 대해 첫째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 둘째 두 사람의 생애, 셋째 두 사람의 상호인식, 넷째 두 사람의 ‘공공적’ 삶의 특징 순으로 살펴보고, 끝으로 두 사람의 ‘공공적 삶’을 통해 ‘우주적 공공성’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고자 하였다. 전봉준의 ‘공공적 삶’은 동학 입도로부터 시작되는데, 전봉준은 동학의 ‘수심경천’과 ‘보국안민’ 사상에 특별히 공감하여 입도하였으며, 이 가운데 ‘보국안민’이야말로 전봉준의 ‘공공적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상이었다. ‘보국안민’에 근거한 전봉준의 ‘공공적 삶’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의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삼례집회는 ‘교조신원운동’의 일환으로써 합법적 청원운동을 통해 동학이 내세운 ‘보국안민’ 즉 ‘국가의 잘못된 제도나 정책을 바로잡음으로써 민중들의 생명, 생활, 생업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보국안민’의 실현은 전봉준이 목숨을 걸고 실현하고자 했던 ‘공공적 삶’의 목표였으며, 그것은 1982년 11월의 삼례집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894년 1월의 고부농민봉기, 1894년 3월의 제1차 동학농민혁명, 동년 9월의 제 2차 동학농민혁명 단계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한편, 다나카 쇼조는 20대 때부터 이미 영주나 현령의 폭정에 항거하여 개혁운동을 주도하였으며, 38세 때에는 “일신으로 공공에 진력하겠다”고 선언하고 국가와 개인 사이의 ‘공공’, 즉 사회와 사회 여러 사람을 위한 일에 뛰어들었다. 특히 ‘자유민권운동’의 영향을 받아 지역 주민의 생명, 생활과 생업에 잘못된 영향을 끼치는 국가의 제도나 정책을 개혁하는 일에 앞장섰다. 즉 젊은 시절부터 다나카 쇼조는 ‘공공적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다나카 쇼조의 ‘공공적 삶’의 결정판은 그가 중의원이라는 국회 의원에 당선된 해에 일어난 ‘아시오 구리광산 광독 사건’ 해결에 참여하면서부터 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시오 구리광산 광독 피해’는 ‘문명개화’ 노선을 지향하고 있던 메이지 일본 정부의 정책 때문에 피해가 광역화하고 장기화되었는데, 다나카 쇼조는 1901년에 중의원 직을 사직할 때까지 ‘아시오 구리광산 광독 사건’의 피해자 구제를 위해 메이지 일본 정부를 추궁했다. 그러나 메이지 일본 정부는 다나카 쇼조의 문제 제기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자 다나카는 중의원 직을 사직하고, 천황에게는 목숨을 건 ‘지키소’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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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권 동학농민혁명의 실상과 동아시아적 의미

        박맹수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4 南道文化硏究 Vol.0 No.26

        이 논문의 목적은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에서 지리산 지역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과 그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데 있다. 지리산은 동학 성립의 역사에서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첫째 지리산은 1860년대 초반에 초기 동학사상이 확립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동학의 핵심 사상을 담은 「논학문」이란 저술은 바로 1862년 경에 지리산 부근의 남원 은적암이란 암자에서 저술되었다. 둘째, 지리산 일대는 예로부터 지식인들이 숨어서 학문을 닦던 곳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구례에 거주하던 매천 황현이란 지식인은『오하기문』이란 역사책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오하기문』에 나타난 매천의 동학농민혁명 에 대한 인식은 ‘일정 부분’ 동학농민군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셋째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제노사이드 작전이 전개되어 많은 농민군이 학살되었다. 최근에 학살에 가담한 일본군 병사의 종군일지가 발견됨으로써 일본군의 행위가 ‘제노사이드(대량학살)’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This article aims to reveal the role of Mt. Jiri(智異山) in thehistoric significance of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DonghakPeasant Revolution(東学農民革命). Mt. Jiri carried out various roleseither in the history of Donghak establishment or the DonghakPeasant Revolution. First, Mt. Jiri greatly contributed to establish the earlyDonghak-Thought in 1860. Nonhakmun(論學文)), which embodiesthe core idea of Donghak was written at the Namwon(南原)Eunjeok temple(隠寂庵) around Mt. Jiri in 1862. Second, Mt. Jiri hadbeen known as a place where intellectuals traditionally did theirstudies in seclusion. In those days of the Donghak PeasantRevolution of 1894, Meiquan Hwang, Hyun(梅泉黃玹, 1855.12.11.∼1910.9.10.) who had lived at Gurye(求禮) in Jeolla-do(全羅道),testified abou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he historic book,Ohagimun(梧下記問). He 'partially' sympathized with the DonghakPeasant army's opinion. Third, at the time of the Donghak PeasantRevolution, many Donghak peasants around Mt. Jiri were victimizedby a Japanese massacre. In a daily journal of a Japanese soldier (who had participated in the massacre) identifies the massacre ofthe Japanese army during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s a 'geno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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