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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通信使 硏究 : 聘禮의 性格 分析을 中心으로

        한기승 동의대학교 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47807

        朝鮮과 德川幕府 간에 행하여졌던 通信使 문제를 朝鮮通信使란 측면이 아니라 日本通信使란 시점을 가지고 交流와 聘禮의 과정을 歷史的으로 檢討해 보았다. 日本通信使를 통한 양국의 교류가 朝鮮 後期의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양국의 국익 추구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通信使를 해석하는 입장과 정치적 의도는 각기 달랐다고 할 수 있다. 朝鮮의 경우 오랜 戰亂에 따른 사회적, 경제적 위기상황을 국가 차원에서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日本과의 交隣을 필요로 하였고, 江戶幕府의 입장에서는 豊臣家를 멸망시킨 德川家 권력의 정당성을 대외적 승인을 통하여 해결하려 하였던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江戶幕府가 朝鮮으로부터의 朝貢이라는 정치적 연출을 통해 권력을 정당화하려 하였다고 보는 주장은 그 聘禮의 형식이나 接待의 수준으로 볼 때 설득력을 결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日本通信使를 朝貢使로 이해하려는 일방적인 인식의 전환은 1711년의 新井白石의 聘禮 개정 문제와 이후 전개된 易地聘禮의 논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日本 通信使 파견 초기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국교회복과 德川幕府 권력의 정당화에서 출발한 日本通信使가 1636년, 1643년, 1655년의 使行 패에 日光山 방문 사건 이후 재정적 문제와 결합되면서 전개된 聘禮 개정 문제와 맞물림으로서 비우호적 인식으로 전환되었다고 보아진다. 부언하자면 幕府의 요청에 의해 德川家康의 무덤과 혼백이 모셔져 있는 權現寬과 大獸院에 참배하고 분향할 때 폐백물을 준비하여 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新井白石를 비롯한 일본의 국수주의자와 明治期의 征韓論派들에 의해 交隣의 명분을 朝貢으로 변질시키는 밀미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海行摠載」를 보면 알 수 있듯이, 12회에 걸쳐 행해진 日本通信使의 사행은 제1회 회답겸쇄환사로부터 제12회 역지빙례에 이르기까지 약 3세기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이들 사행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와 조선과 일본의 政治的과 狀況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동일한 形式의 聘禮가 행하여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목적이 交隣에 있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This study, in view of Japanese Tonsinsa, aims to make a historical review of the exchange and customary process involved in the Tonsinsa delegacy between Chosun and Tokukawa shogunate. Incipient national exchanges between Korea and Japan started with delegating Japanese Tosinsa to promote both countries' interests in the late Chosun, but admittedly the conventional interpretation of these representatives has been different form the political intentions; the pressing need of war-torn Chosun was to recover from social and political crises through the immediate relations with Japan, and the Edo shogunate intended ta gain the Tokukawa regime's validity through the external approval. Seen from the size of reception, the claim is untenable that Edo shogunate sought to justify its authority through a political gesture, tributes from Chosun. A unilateral cognitive conversion of Japanese Tonsinsa as tribute collectors, the issue of which was not considered controversial at the outset of Japanese Tonsinsa delegation, was made until the 1711's Arihakuseki customary revision and its later discussions. Following its 1636, 1643, and 1655's visits to Mt. NiKo, Japanese Tonsinsa, a long-held means of rapprochement and power justification, started to be regarded unfavorably as the country's financial security got worse. To illustrate, with the request of the shogunate, the delegate toot ceremonial offerings to Taihenkan and Taiuen to worship Tokukawa; thereafter, the original cause of the goodwill exchange was relegated to paying tributes by the Japanese chauvinists and Meiji period anti-Korean subjugators. As known in Haihangchonggae, the 12 times of Japanese Tonsinsa delegation was done for three centuries. Because the East Asian political situations were correlated with Korean-Japanese political circumstances, no identical forms of customary practices were believed to be performed; however, it is conspicuous that the objective of this delegation is to set desirable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 조선통신사와 문화교육

        백수진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47807

        The main goal of foreign language instruction is language education, but without the background of society it's hard to not only learn foreign language but also develop the ability so that culture education is essential to increase efficiency. In addition, as not only learning foreign culture unilateral but also comparing other cultures, we are able to recognize the universality, unique characteristics and diversity of the cultures. The main purpose of culture education is to help people better to understand their own culture and to have the proper hierarchy of values. By applying the method which is 'Culture through the comparison of own culture and other culture' with 'Choseon Tongsinsa' in this study, not just learning Japanese or Japanese culture from the textbook but using 'Choseon Tongsinsa', which was a place for friendly exchange between Korea and Japan, I studied that Choseon Tongsinsa is used by the material of culture education Before showing the class plans, Japanese teacher must have the right view of Korean and Japanese history objectively in order to teach Japanese education properly. It is searched that what kind of view we watch each history through a variety of source from both countries about Tongsinsa and aimed to provide the information about the background of Tongsinsa. In the second chapter, the view of Choseon Tongsinsa about Korean and Japanese history books, internet search engines and Korean language dictionaries and the problems were searched. In the third chapter, as searching the historical background, geography, culture etc. about Choseon Tongsinsa on the basis of a variety of historial materials, I was able to prepare expertise about Choseon Tongsinsa. In the forth chapter, by suggesting the lesson plans using the materials about Choseon Tongsinsa, learning language is not only eventual purpose but also can make people feel the necessity to learn cultures and history in many directions. In addition, leading the right view of history to both Choseon Tongsinsa and Korea and Japan exchange, making people have a good knowledge about culture information of both Korea and Japan and using these things and doing role-play like a culture missionary is introduced in the education field in this chapter. The culture lesson through Choseon Tongsinsa will prepare the ground for understanding Japanese and Japanese culture with the proper view of value and status about own culture. In Japanese class, the role-play using Choseon Tongsinsa could contribute to develop the ability which can introduce Japan right knowing the difference of our culture as well as learn Japanese information of the language or culture. From now on, beginning this study to develop lesson plans and to review the effect after applying a variety of Japanese culture lesson using Choseon Tongsinsa is the remaining subjects. 외국어 교육의 주목적은 언어교육이지만 그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모르고는 진정한 외국어 습득은 물론 그 능력을 향상시키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언어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문화교육이 필수적이다. 또한 해당 외국어의 문화만을 일방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타문화와의 비교를 통하여 문화의 보편성, 특수성,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자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게 하는 것이 문화교육의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조선통신사’라는 소재를 ‘자문화와 타문화의 비교를 통한 문화교육’ 이라는 방식에 적용하여 교과서에 제시된 일본어나 일본 문화를 중심으로만 배우는 교육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우호적인 교류의 장이었던 조선통신사를 한국 문화와 일본 문화의 상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문화교육의 소재로 활용한 수업 방안에 대해 연구하였다. 수업 방안 제시에 앞서 일본어 교사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만 참된 일본어 교육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조선통신사에 대한 양국의 다양한 자료들을 통하여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동시에 통신사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제 2장에서는 한국과 일본 국사교과서, 인터넷 검색사이트, 국어사전에 나타난 조선통신사에 대한 시각을 알아봄과 동시에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제 3장에서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역사적 배경, 지리, 문화 등에 대해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살펴봄으로써 조선통신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출 수 있었다. 제 4장에서는 이런 조선 통신사에 대한 자료들을 활용한 수업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언어 학습만이 외국어 수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며 다방면으로의 문화나 역사를 접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조선통신사뿐만이 아니라 한일 교류사에 있어서 역사에 대해 최대한의 올바른 시각을 유도하고, 한일 쌍방의 문화정보에 대한 지식을 가지도록 하며 그를 활용하여 문화전도사가 되어 보는 역할 놀이를 해보는 것은 일본문화 교육현장에 꼭 도입되어야 할 방법이라고 제시하였다. 조선통신사를 통한 문화수업은 자국 문화에 대한 가치나 위상을 바로 보고 정확한 식견을 지니고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이해할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줄 것이다. 일본어 수업에서 언어이든 문화이든 일본의 정보에 대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조선통신사라는 소재를 활용한 역할놀이를 통해 우리 문화와의 차이점을 알고 일본에 올바르게 소개하는 능력을 키우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향후에는 본 연구를 시작으로 장차 조선통신사를 활용한 다양한 일본 문화교육의 수업방안 개발과 실제 수업에서 적용하여 그 효과를 검토할 것을 과제로 남겨둔다.

      • 朝鮮通信使와 朝日關係

        진해옥 인제대학교 교육대학원 2002 국내석사

        RANK : 247807

        麗末 鮮初의 일본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倭寇의 위협이었다. 따라서 鮮初의 일본에 대한 외교적 교섭은 倭寇禁壓을 위한 수단으로 왜인을 회유하여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고자하는 것이었다. 朝鮮·日本 두 나라의 외교형식은 외견상 대등한 관계를 표방하는 교린정책으로 朝鮮國王과 日本幕府將軍은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현안문제의 해결과 外交的 儀禮 유지를 위해 상호 외교사절을 교환하였다. 이때 朝鮮이 日本에 파견했던 국가의 공식적인 외교사절이 朝鮮通信使였다. 通信使라고 불리었던 외교사절의 파견이 시작되었던 것은 고려왕조가 1375년에 왜구금지의 요청을 목적으로 파견했던 羅興儒부터였다. 조선전기에 朝鮮國王이 日本國王으로 인식한 日本幕府將軍에게 파견한 대일본사행은 19회에 걸쳐 시행되었으나, 그 명칭이 報聘使·回禮使·通信使와 같이 다양하게 불리워졌다. 朝鮮時代 대일사행중 通信使의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1413년에 파견된 사절로 正使 朴賁의 發病으로 중지되었다. 通信使의 명칭으로 처음 渡日한 사절은 1428년에 장군습직의 축하, 전 장군의 致祭를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朝鮮은 室町幕府에 5차례, 풍신수길에 2차례, 德川幕府에 12차례에 걸쳐 通信使가 파견되었으나 일본에 도착한 通信使는 16회였다. 20차례의 통신사 파견을 통하여 볼 때 朝鮮通信使는 朝鮮國王으로부터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日本國王(將軍)에게 파견되는 사절로 장군의 즉위에 대한 祝賀와 사망에 대한 弔問 등 將軍의 慶弔를 통해 양국 간의 우호증진을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일본국정의 탐색이라는 현실적인 목적도 포함되고 있었다. 通信使는 正三品에서 縱四品사이의 前職者 가운데서 正使, 副使, 書狀官의 각 1인과 약 50 ~ 500인의 동행사절들로 구성되었으며, 朝鮮國王의 書契와 禮單을 지참한 對日本 外交使節이었다. 즉 예의 명분, 규범을 대외윤리의 원칙으로 하는 조선은 일본국왕의 취임 축하를 통해 양국의 주권자가 상호의례를 교환하여 양국의 평화와 우호를 증진시키며, 南海岸의 안진을 도모하였다. 일본은 通信使를 朝貢使로 전락시켜 막부의 권위와 통치권 확보를 목적으로 通信使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通信使는 상호 양국의 이해관계가 다른 가운데 서로 다른 목적에 의하여 파견됨으로써 國王號와 大君號, 일본 연호와 간지사용, 빙례절차 등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조선 외교정책의 기본인식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華夷論' 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에 대한 인식과 태도도 기본적으로는 華夷觀에 기초하고 왜구를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善隣友好의 交隣政策을 실시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국왕이 일본 최고 통치권자에게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조선초기의 통신사는 倭寇禁壓이라는 문제로 일본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 결과 신숙주와 같은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일본인식이 나타났다. 그러나 왜구를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킨 이후에는 일본에 관한 관심이 줄어 통신사 파견이 중지되었고 일본에 대한 夷狄觀이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 통신사의 일본관은 왜란으로 인한 일본에 대한 공포와 통신사들이 체험한 일본의 경제적 번영, 강한 군사력은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하여 일본을 夷狄視 내지 멸시하고 문화적으로 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17세기 중·후반기이후 국제정세의 안정으로 다소 객관화하지만 이론적으로 보다 체계화된 형태로 전개되어 小中華意識의 틀 속에서 일본을 인식하는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은 일본의 무력적 우위를 강조하여 조선을 '고대 이래의 조공국' 으로 인식하는 日本書紀的 史觀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通信使를 '朝貢使' 로 전락시켜 막부의 권위와 통치권 확보를 목적으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서로에 대한 夷狄觀은 통신사 파견에 國王號와 大君號, 일본 연호와 간지사용, 빙례절차 등을 둘러싼 갈등이 가져왔다. 이러한 갈등은 양국 교류를 통한 경제적 이익을 취득하는 쓰시마의 국서개작을 통하여 충돌을 면하였다. 즉 양국은 현실적 필요에 의하여 표면상 대등관계의 교섭을 하면서도 서로에 대해 우월적 지위에 있다는 인식을 꾸준히 지켜 나갔던 것이다. 이는 양국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식과 외교현실의 괴리가 언제든지 좁히질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The Chosuntongsinsa (envoys dispatched to Japan during Chosun dynasty) has its origin in the dispatch of Mr. Heung-yu Na requesting the prohibition of Wai-gu (the Japanese Pirates) to the Japanese Government during Goryo dynasty in 1375. In 1429, the first envoy of Chosun Dynasty in the name of the Tongsinsa was dispatched to the Japanese Government to express the congratulation of the acquiring of the present General and the condolence to the previous General. Thereafter, the Tongsinsa was dispatched to abroad eight times and the Tongsinsa was dispatched to Japan five times. Although the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Chosun dynasty was severed due to the Japan's aggression against the Korea, Tokugawa-bakuhustrongly requested the reopening of the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two countries for the stabilization of the ruling system of Bakuhu. In response to the Japan's such requests, the Chosun dynasty requests a prerequisite of "Sun YiChiSeo" and "BeomReungJeokBakSong". With a help of the adaptation of the credentials of Tsushima, such disagreement was solved with the dispatch of the envoy in the name of 'HoeDapKyumSwaeHwanSa' for the repatriation of the persons who had been abducted in 1607 (the 40th year of King Seonjo) and for the solving of post-war problems. Thereafter, 'HoeDapKyumSwaeHwanSa' was dispatched to Japan two times in 1617 (the 9th year of King Gwanghaegun) and 1624 (the 2nd year of King Injo). From the year of 1636 (the 14th year of King Injo), the dispatch of envoy in the name of Tongsinsa had been made for the mutually beneficial relationship between two countries, "The Chosun Kingdom" and "The Great Japan". Thereafter, eight dispatches of the envoy were made and the equality in diplomatic relationship had been kept between two countries. Namely, the Chosuntongsinsa was an envoy which was dispatched from the Chosun Kingdom to the sovereign of Japan Government for the delivering of the expression of congratulation or condolence to the bad or good news of Japanese King and for the settlement of the urgent matters between two countries. The Chosuntongsinsa consisting of the 300 - 500 high-ranking officials brought letters and present, from the King of Chosun Dynasty to the sovereign of Japan Kingdom. Chosun Dynasty adopted the "civilized and savage rule" in a recognition to Japan based on the school of Neo- Confucianism. As a result, the Chosun Dynasty principally adopted the "civilized and savage rule" in the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Japan simultaneously adopting "a good-neighbor policy" to them as a means of prohibition of the Wai-gu. The dispatch of the Tongsinsa was made as a part of the "good-neighbor policy". The Tongsinsa of the early Chosun Dynasty had a strong interests in the Japan, and was eager to obtain the information on the Japan for the inhibition of the Japanese pirates. As a result, there were peoples including Mr. Suk-ju Shin who had an objective and positive understanding on the Japan. However, after when the Wai-gu was regarded as a part of a treaty of peace and amity, the interest in Japan was reduced, and the dispatch of the Tongsinsa was stopped, and the understanding that Japan is barbarians like beast was spreaded out. The Tongsinsa of the late Chosun Dynasty had a negative recognition to the Japan since they had the fear against Japan through the experiences of Japan's invasion to Chosun Dynasty and Japan's economical prosperity and strong military power. As a result, they recognized Japan as an enemy and the object to be cultured. Such recognition was objectified with a help of the stabilization of the international conditions and systematized in theory in the middle and late 17 century. Such recognition made Chosun Dynasty unfortunately recognize Japan within the Consciousness of Small China. Japan traditionally recognized Chosun dynasty as a tributary state based on their superiority in military power. Accordingly, Japan degraded the Tongsinsa to the tributary envoy and requested the dispatch of the tributary envoy for the authority of bakuhu and the security of the sovereign power. The above-mentioned principle of barbarians like beast made a conflict between Japan and Chosun dynasty such as problems with regard to the use of terms "King" and "Great Japan", the use of the Japanese era name and the sexagenary cycle, and marriage procedures. However, a collision was evaded due to the adaptation of the credentials of Tsushima. In other words, these two countries continuously kept the consciousness of superiority to each other keeping the apparent equality in diplomatic relationship based on the realistic needs. Such fact hints that the estrangement in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two countries may be reduced at any time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 辛未通信使 派遣의 交涉過程 硏究

        유은용 祥明大學校 敎育大學院 1996 국내석사

        RANK : 247807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3회의 회답겸쇄환사와 9회의 통신 사를 합해 모두 12회의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사는 朝日外交의 평화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1811년 辛未通信使는 마지막 통 신사였다는 점과 그 장소가 변경되어 행해졌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것이 었다. 또한 신미통신사 파견 이후 조일 양국이 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조일외교 변질의 분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약 20여년에 걸친 이 교섭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786년 將軍 家治가 사망하고 將軍 家齊가 습직하자 조선에서는 전례대로 통신사를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江戶幕府는 1788년 10월 通信使請退大差使 를 보내어 막부의 재정난을 이유로 통신사 파견의 연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조정은 交隣의 道로 연기를 허락하여 주었다. 연기 허락을 받 은 막부는 1791년 12월에 通信使議定大差使를 보내어 통신사를 對馬에서 맞이하겠다는 서계를 보냈다. 조선은 이를 전면 거부하여 오다가 對馬藩 의 입장을 고려하여 회답서계를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이웃나라와 사귀 는 것은 성의와 신의를 중히 여겨야 하므로 새 규례를 만들기 보다는 일 본의 사정이 호전될때까지 기간을 늦추겠다는 易地聘禮 拒絶의 뜻을 분 명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對馬藩의 家老들이 朝鮮譯官과 밀의하여 역지 빙례가 조선조정에서 받아들여졌다고 막부에 허위보고함으로써 교섭은 재계되었다. 1805년 조선조정은 역관이 단독으로 서계를 위조한 것을 알 고 이들을 처벌했다. 그러나 대마번 가노들은 戊午協定의 정당성을 주장 하면서 조선이 역지빙례를 허락하여 줄 것을 계속 요청하였다. 이에 조 선은 당시 국내의 상황도 삼정문란 등으로 혼란스러웠으므로 역지빙례가 강호막부의 뜻인지를 확인한 후 이를 허락하였고 1811년에 통신사를 대 마에 파견하였다. 신미통신사 파견 이후 막부는 다시 大坂易地聘禮를 요 청했으나 막부의 붕괴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며, 결국 신미통신사 이후 조일 외교는 변질되었다. Chosun's diplomatic policy toward Japan was a good neighbor policy. It was a sendings of Tongsinsa that were used it's way after Imjinweran. These sendings of Tongsinsa were interrupted in 1811 and the shape of Tongsinsa was changed. That is, previous Tongsinsa was received in edo, while sin-mi tongsirlsa was holded in susima. The summary of these process of negotiatian is as follows. Chosun was received Japan delegation which asked postponement of sending of Tongsinsa. Chosun's government consented this Japan's requestment of postponement which was caused economic depression with morality of neighboring countries. But Japan who was allowed postponement sended message which told Japan would receive Tongsinsa on susima in 1791. Naturally, this negotiation was rejected in Chosun. There after, the Susima's group official bribed a Chosun's simultaneous trimslation and forged a official documents and took various means for agreement of this negotiation. After all Chosun decided to send Tongsinsa to Susima in consideration of Japan's financial difficulties and a situation of Susima group official. after 1811, Chosun's sendings of Tongsinsa were interrupted and gathering of information about Japan was difficult. So Chosun was placed defenseless condition diplomatically, and concluded Kangwhado-treaty after sixty-five years. Consequently Sinmitongsinsa had important meaning because it was a turning point of a good neighbor policy of Chosun and Japan into a modern diplomatic relations.

      • 한일역사교과서의 통신사에 대한 서술 실태와 수업 실천 분석

        빈수민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7807

        이 연구는 현재 한일 양국이 갈등 하고 있는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시각 차이를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논의의 주제는 한일관계사와 관련한 많은 내용 중 비교적 갈등적인 요소가 적고, 비교적 쉽게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통신사를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시각 차이는 학문적인 부분, 교과서의 내용 서술 부분, 교사의 수업 부분을 종합적으로 다룰 때 효과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보고 각각의 부분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학문적인 부분의 경우 역사교과서는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역사교과서 분석의 전제로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였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통신사를 문화적 시혜자로서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분야에 비해 이 분야의 연구 성과가 많고 충실하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의 경우 이른바 조공사절로 통신사를 보는 관점이 예전부터 있어 왔고, 종전 후 이러한 시각을 반성하고 비판하면서 연구주제와 경향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이러한 경향을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사B󰡕의 서술에 조공사절로서 통신사를 기술하는 경향은 이러한 일본의 통신사 관련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것이다. 학문적인 면에 있어서는 통신사가 어느 한 나라의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이 함께 연출한 국제적 행위였던 만큼 양국의 입장이 냉정하게 사실적으로 그리고 상호보완적인 입장에서 다루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교과서 내용 서술은 유네스코에서 제시한 국제이해 증진의 입장에서 설정된 교과서 분석 기준을 차용하여 분석하였다. 이 분석 기준안은 사실의 해석 문제, 기술되어야 할 사항의 누락 및 미흡한 기술, 사용된 어휘, 삽화 자료를 중심으로 교과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일 양국의 교과서는 교과서의 내용 구성 체제의 경우 현재 양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국사󰡕는 경제 부분을 함께 서술할 수 없는 분류사로 구성되어 있고, 󰡔일본사B󰡕는 통신사의 내용을 함께 서술할 수 없는 통사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통신사와 관련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교과서 구성 체제는 각 나라의 교육과정에 따른 고유한 특성이지만, 이 특성으로 인해 전체적인 역사상을 바라볼 수 없다면, 본문 내용을 서술할 때 오해를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기술하거나, 수업 장면에서 교사의 수업 활동을 통해 반드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통신사 관련 내용 서술에 있어서는 중요한 내용의 생략으로 사실과 그에 담긴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서술이 있었다. 또 양국의 교과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통신사와 관련된 일반적인 해석과 명제는 구체적인 사실들과의 연관성이 부족하여 통신사를 통한 교류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상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통신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통신사의 개념에 직접 접근한 교과서는 거의 없었고, 전체 서술을 통해 통신사의 개념을 파악하도록 한 교과서도 없었다. 논쟁적인 문제에 대한 서술에 있어 󰡔국사󰡕는 통신사를 파견한 조선의 입장을 기술하지 않는 균형적이지 못한 서술을 하거나, 문화시혜론적 입장의 기술로 일관하였다. 󰡔일본사B󰡕도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통신사를 취임 축하 사절로 기술하면서,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한 목적을 기술하지 않아 수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정확하고 최근의 정보를 수록하여 상호 이해에 도움을 주어야 할 󰡔국사󰡕의 삽화자료는 수록된 삽화의 설명도 부실했고, 최근의 정보도 담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사B󰡕의 경우 통신사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수록된 종류는 다양했지만,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수록한 삽화자료는 하나의 시각을 남은 단순한 삽화자료였다. 하지만 󰡔국사󰡕의 경우 통신사 관련 내용에 있어서의 보완과 서술에 있어서의 객관적인 표현이 증가하였고, 󰡔일본사B󰡕의 경우에도 최근 통신사와 관련된 서술의 분량이 많아졌고, 정치적, 외교적인 사절로 해석하려는 시각에서 벗어나 대등한 우호의 사절이나 문화 사절로 보려는 다양한 시각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표현에 있어서도 󰡔국사󰡕와 마찬가지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들이 삭제되고 있는 추세였다. 이처럼 갈등 요소 줄이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방향의 교과서 기술 개선은 계속되어야 하며, 한․일관계사와 관련된 다른 주제들에서도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업의 경우 한․일 양국 교사들의 통신사와 관련 수업 실천사례를 분석하여, 역사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한일관계사 수업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업은 사실 교과서의 서술보다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 따라서 학생들의 역사인식 형성과정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교과서 분석과 더불어 교육활동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분석 결과 교사의 수업 부분에서는 비록 교과서가 편향된 시각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이러한 한계는 교사가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극복될 수 있고, 한일관계를 다룬 수업의 경우 무엇보다 교사의 수업이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심화시키는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인식의 차이를 줄이는 방법을 생각한 수업 실천 노력들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 1711년 신묘통신사 접대개정 : 復號문제와 犯諱문제를 중심으로

        신윤정 경희대학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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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일본 문화개방으로 인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독도 영유권 문제와 역사 교과서 문제 등으로 화제를 낳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재조명 해볼 필요성을 느껴 과거 조선과 일본과의 우호의 상징이었던 통신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고에서는 江戶時代 12회 사행 중 8차 사행인 신묘통신사의 사행 중 접대개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711년 신묘통신사 사행은 新井白石의 개혁으로 인해 江戶時代 전 사행 중 가장 분쟁이 많았던 사행이었다. 新井白石는 임진왜란에 대한 원한은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조선이 ‘재조의 은’ 을 모르고 일본을 원망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이 반영된 신묘통신사의 접대개정은 많은 분란을 일으켰다. 이처럼 통신사 접대를 담당하면서 양국의 화평에 힘썼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릇된 조선인식으로 인해 많은 분쟁을 낳았다. 新井白石의 개혁은 경비절약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1719년에 다시 구례(舊禮)로 돌아간 것을 보면 일과성에 그친 개혁임을 알 수 있다. 韓国と日本は地理的に近く、密接な関係を結んできた。最近、日本文化開放により多大な関心を持つようになった。政治的にも独島の領有権問題と歴史教科書の歪曲問題などで話題になっている。こういう状況の中で日本との関係を再照明してみる必要性を感じ、過去、朝鮮と日本との友好の象徴だった通信使に対して考えてみた。 本稿は、江戸時代の12回の使行のうち、第8次使行の辛卯通信使の使行の接待改正を中心に考察したものである。 1711年の辛卯通信使の使行は、新井白石の改革により江戸時代の全使行の中で最も紛争が多かった使行だった。 新井白石は、壬辰倭乱に対して日本を恨んでいることは考えずに、むしろ朝鮮が「再造の恩」を知らないため日本を恨んでいると考えた。彼のこうした考え方が反映された辛卯通信使の接待改正は、多くの混乱を起こした。 このように通信使の接待を担当しながら、両国の和平に努力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彼の誤った朝鮮認識により、多くの紛争が生じた。 新井白石の改革は、経費の節約という側面で肯定的な部分もあるが、1719年に再び旧礼に戻ったのを見ると、一過性に終わった改革であったことが分かる。

      • 筆談唱和集に現れた朝·日の文士の 相互認識の比較 : 『坐間筆語』と『江關筆談』を中心に = 필담창화집에 나타난 한·일 문사의 상호인식 비교 : 『좌간필어』와 『강관필담』을 중심으로

        전지혜 경북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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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에서 에도시대에 파견된 조선통신사에 의한 양국의 교류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주제이다. 왜구의 침범으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았던 조선 측에서는 일본에게 왜구의 침입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사자(使者)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단절되고 말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세상을 떠난 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川) 막부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川家康)는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위해 조선에 지속적으로 교섭을 요청해 왔고, 임진왜란으로 발생한 포로의 송환과 국내ㆍ대외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선은 1607년 「회답겸쇄환사」라는 사신 일행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쟁 이후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던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었다. 이러한 조선 사신의 파견 이후, 1811년까지 총 12회의 조선통신사 파견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1711년 신묘년에 파견되었던 신묘통신사행(辛卯通信使行)은, 조선과 일본 문사들의 교류가 급속히 확대되었고, 일본 문사들이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문학적 상호교류에 대하여 가졌던 기대감이 고조되기 시작한 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양국 문사들이 주고 받은 필담과 시문창화(詩文唱和)로 엮어진 「필담창화집(筆談唱和集)」이라는 문집이 편찬되었다. 본고에서는 이 시기에 편찬된 필담집 가운데 『좌간필어(坐間筆語)』와 『강관필담(江關筆談)』이라는 작품이 일본과 조선 내에서 이본(異本)으로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두 필담집의 내용을 분석하여 그 속에 나타나는 양국 문사들의 상호인식과 그 의의를 문학적ㆍ문화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러한 작품이 편찬된 배경과 당시 필담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문사들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와 조선통신사절단의 삼사(三使)였던 조태억(趙泰億), 임수간(任守幹), 이방언(李邦彦) 및 그들과 동행했던 제술관 이현(李?)과 역관 김현문(金顯門) 등의 생애와 저술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학문적 성향과 사상을 비교해 본다.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당시 자신이 처해 있던 대ㆍ내외적 상황과 조정에서의 위치와 같은 요소가 각자의 학문적인 입장이나 사상에 다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저서에도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이 『좌간필어』와 『강관필담』에도 직ㆍ간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우선 1711년 11월 3일,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여 에도성에서 그들을 위하여 준비한 사향의식(賜饗儀式)에 대하여 당시 연주되었던 악곡에 대한 감상과 하쿠세키의 부연 설명을 엮은 것이 바로필담집『좌간필어』이다. 이 필담집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기존에는 연주되지 않았던 일본의 궁중음악인 아악(雅樂)을 연주해 보임으로써, 조선통신사에 대한 예의를 특별히 표하였으며, 일본 음악에 대한 자부심을 보인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또한, 중국 고대의 음악과 고마가쿠(高麗樂)라고 하는 고구려의 음악까지 연주한 점은 조선통신사 일행의 감탄과 관심을 이끌어내고자 한 의도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일본과 한국, 중국의 음악이라는 한정된 주제에 대하여 주고받은 필담으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를 통하여 당시 일본에서 연주되었던 궁중음악 및 한ㆍ중의 음악이 어떠한 형식이었는지, 어떤 종류가 있었는지를 추찰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은 필담집이다. 『강관필담』은 이틀 뒤인 11월 5일, 조선통신사 일행이 머무르던 시모노세키(下關)의 후혼칸(風本館)에 하쿠세키가 찾아와서 삼사와 함께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나눈 필담을 엮어서 편찬한 필담집이다. 이 작품은 『좌간필어』와는 다르게 주제도 매우 다양하고 분량 면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필담의 주요 내용은 중국의 고서와 문물제도의 보존 유무, 하쿠세키가 서양의 여러 사신들과 만나 얻은 지식에 대한 설명, 류큐(琉球)ㆍ중국과의 왕래와 그 복식제도에 대한 조선의 질문, 일본의 무예 숭상에 대한 양국의 견해, 담배와 술에 관한 농담 등이다. 이를 통하여, 우선 당시 일본에 중국 문물이 보존되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보존되어 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측과 하쿠세키의 고대 문물제도의 보존 방식에 대한 견해차가 나타나 있다. 또한, 서양 여러 나라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하쿠세키의 필담 태도에서는 세계를 보는 자신의 식견을 은연중에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통신사 일행도 류큐나 중국, 마테오리치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중국과 서양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심을 표하고 있다. 그 관심은 복식제도에 대한 것으로, 중국이나 조선의 복식제도와 비교하면서 일본도 이러한 중화문명을 따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기에 이른다. 하쿠세키는 그것을 완곡하게 물리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통하여 중화문명의 수용에 대한 양국의 견해차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일본을 ‘무예 숭상의 나라’라고 간주하는 조선의 의견에 대하여 하쿠세키는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안팎으로 어지러운 일본을 안정시키는 데는 무력 사용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 고대에서도 있었던 ‘인(仁)의 풍속을 변화시켜 용무(勇武)가 된 것으로, 이것이 인자(仁者)의 용맹’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보면 무예를 숭상한다는 조선의 인식에 대하여 중국의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일본을 인후(仁厚)의 풍속이 남아있는 나라로 표현하고, 예의지국으로서의 일본을 조선에게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좌간필어』와 『강관필담』에서 특별히 주목한 부분은, 조선통신사 측이 편집하여 간행한 필담집과 일본에서 편찬된 필담집의 편집형태나 내용에 차이점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동일한 인물들이 주고받은 필담을 엮어서 간행한 필담집이 무슨 이유로 이러한 차이점을 나타내게 된 것일까. 임수간의 『동사일기(東?日記)』에 실려 있는 『강관필담』에는 하쿠세키와 함께 담배와 술에 대해 주고 받은 가벼운 농담조의 필담이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하쿠세키의 『하쿠세키전집본(白石全集本)』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점은 『좌간필어』에서도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사행록과 같은 공식적인 행사에 대한 기록을 남길 때, 양국 문사들의 기록의 성향이나 방식에 차이가 드러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하쿠세키의 경우에는 아마도 자신이 도쿠가와 막부의 고문관이 되면서 처음 맞이하는 조선통신사절이었기 때문에, 이를 접대하기 위한 준비에 특히 신경을 썼을 것이고, 공식적인 행사인 만큼 그에 대한 기록도 공식적인 입장에서 작성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조선통신사의 숙소를 방문하여 주고받은 필담에서 담배나 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사적인 대화라고 생각하여 배제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통신사 측에서는 하쿠세키와는 대조적으로, 이전의 사행록이나 신묘통신사 이후의 통신사행록에서도 보이듯이 주로 일기 형식으로 쓰여졌으며 사행 기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내용의 누락 없이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좌간필어』와 『강관필담』은 1711년 당시 양국의 상호인식에 대하여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고, 필담을 주고받던 상황에서 인용했던 사서오경(四書五經)의 문장을 통하여 유학에 기초한 학문과 경전에 대한 박식함을 엿볼 수 있는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 또한 높다고 판단된다. 또한, 신묘통신사를 기점으로 이후의 통신사행에서 필담과 시문창화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편찬된 필담창화집의 수량적 증가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필담과 시문창화를 주도했던 담당층도 문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해를 거듭하면서 제술관과 역관, 나아가 의원으로 확장되었고, 관련 필담창화집의 간행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12회의 통신사행이 시행되는 동안 많은 필담창화집이 편찬되었다.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필담집과 시문창화집의 수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그에 대한 연구도 최근 들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필담집의 경우에는 정치적이고 대외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하여 그 측면을 위주로 연구를 진행해 온 것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아쉬운 부분이다. 시문창화집의 경우,「시문」이 가지는 문학적인 성향으로 인하여 주로 문학적 측면에서 이를 비교ㆍ분석한 연구가 많은 데 반하여, 필담집은 그렇지 않은 점에서 이후의 연구에서 이러한 부분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은 필담창화집이 다수 남아있고, 또 발견되어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작품 중에서도 어느 한쪽 측면에서만 연구를 진행해 간 서책이 적지 않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한 일환으로,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필담창화집을 연구하여, 그것을 통하여 각 시대의 한ㆍ일 관계를 재고찰해 보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아직 연구되지 않은 여러 필담창화집을 연구하여, 그 작품에 나타나는 양국 문사들의 상호인식은 또 어떠한지에 대하여 분석하는 작업도 진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서책은 주로 조선통신사를 통한 한일관계사의 사초로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책은 시문을 서로 주고 받은 시문창화집이므로, 양국의 문사들이 동일한 사건과 소재를 사용하여 그것을 시문으로 창작할 때는 시문 속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조선과 일본의 작품을 비교해 본다면, 시문창화집에 대한 보다 문학적인 관점에서의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 1711년 通信使의 使行錄과 일본 인식

        허창회 韓國學中央硏究院 201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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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稿は趙泰億の『東槎錄』、任守幹の『東槎日氣』、金顯門の『東槎錄』等、1 711年の使行録を中心として、1711年の通信使の日本認識を分析したもので ある。先行研究では17、18世紀の朝鮮人が小中華主義に立脚した文化優越主義 で日本を認識したと分析してきたが、その中には根拠が不十分であるところもあっ た。ゆえに、1711年の通信使が日本をどのように認識していたのかを根拠とし て既存の見解を批判的に検討してみた。 18世紀の初葉、朝鮮は外交的な困難を覚えていた。日本との間では倭館を巡っ ての様々な事故を經驗しており、清国とは不法入国の事件が起こるたびに皇帝の意 向を伺う困難な立場にあった。よって朝鮮朝廷は日本に通信使を差遣するついでに 交奸に関する約条を締結することで対外的な困難を少しでも緩めようとした。17 11年の通信使の三使はこのような重い任務を帯びていたので、日本を夷狄視する よりは友好的に見ていたり、少なくとも先入観を持たない人物が選抜されたものと 見られる。 このような推論は三使の生涯や思想で裏付けられる。まず正使の趙泰億は少論の 巨頭だった崔錫鼎の弟子であり、崔錫鼎はまた少論の領袖だった南九萬の弟子であった。崔錫鼎と南九萬は朱子学の外にも様々な分野に幅広く関心を持っていた人 物であり、趙泰億の文集『謙齋集』では彼らの影響を受け老荘思想や閭巷文学、仏 教等についての事柄があまねく記されている。また副使の任守幹は師承関係は確認 できなかったが、趙泰億ととても親密な間柄で政治的な考えが同じであったと推測 される。通信使として日本滞在中、二人は少なからぬ数の詩を取り交わし、使行後 も親交が厚かったことは任守幹の死後、趙泰億が彼の祭文を詠んだことからもわかる。趙泰億と同じく、任守幹の文集『遯窩遺稿』にも日本の仏教や自然、文化、詩 文等、幅広い內容が含まれている。最後に従事官だった李邦彦は文集を残さず師承 関係も確認できなかったが、趙泰億や任守幹と親密な間柄だったことが『謙齋集』 や『遯窩遺稿』に見られるので互いに影響を与えあっていたと言えよう。 文集から見る趙泰億と任守幹の開放的な態度は日本に差遣されて書いた使行録で もそのまま見られ、つとに日本人と交流経験のある日本語の訳官であり1711年 当時押物通事として派遣された金顯門が残した使行録と見比べてみても大きな違い が見られなかったほどだ。彼らは先ず日本人が秩序整然で法をよく守り、通信使を 礼を尽くして迎えたと記した。また日本の風景が美しい事を率直に認め、感嘆する 記録が使行録のあちこちに記されており、先の1655年の通信使が日本の美しさ を認めながらも敢えて無視しようとした事に比べると1711年の通信使はより開 けた視線で日本を見ようとしたと言えよう。このような認識は日本の経済について も同じで、1655年の通信使が日本の豊かさを認めながらも批判的に見なそうと した反面、1711年の通信使は日本の寺院や諸太守たちの邸宅は勿論、民家に至 るまで幅広く観察し、客観的で友好的な態度で記錄した。また物產が豊富で、日本 人の経済的な水準が中国に劣らないと評価した。最後に文化においても、町中、道 路、舞楽、風俗等について見聞きしたことをそのまま記錄する―方、建築物、橋、 工芸、舟歌等を肯定的に評価した。日本を指して'蠻'と言う表現を始め小中華主 義から完全に脱した姿までは見えなかったが、中華と比較的無関係な部分までも残 らず批判する文化優越主義的な態度もまた見られなかった。 要するに小中華主義に立脚した文化優越主義で日本を夷狄視したと言う従来の見 解とは違い、1711年の通信使は小中華主義からの脱却には至らなかったが文化 優越主義に立脚して日本を見るのではなく、南九萬や崔錫鼎等、少論系の人物たち と同じく様々な分野に幅広い關心を持ち日本固有の価値を、ありのままその通り認 める態度を取った。1711年の使行録に日本の姿が実証的で客観的に描写されて いることはこのようなな脈絡から理解できる。 이 논문은 趙泰億의 『東槎錄』, 任守幹의 『東槎日氣』, 金顯門의 『東槎錄』 등 1711년 사행록을 중심으로 1711년 통신사의 일본 인식을 분석한 결과이다. 선행 연구에서는 17, 18세기 조선인이 소중화주의에 입각한 문화우월주의로 일본을 인식했 다고 분석해 왔으나, 그 가운데에는 충분한 근거를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에 연구자는 1711년 통신사가 일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근거로 기존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18세기 초엽 조선은 외교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과의 사이에서는 왜관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고들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청과 관련해서는 犯越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황제의 의향을 살피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김에 交奸과 관련된 約條를 체결함으로써 이러한 대외적인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려고 했다. 1711년 통신사의 三使는 이러한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으므로, 일본을 이적시하기보다는 우호적으로 보고 있었거나 적어도 선입견이 없는 인물이 선발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三使의 생애와 사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먼저 正使인 趙泰億은 少論의 巨頭 崔錫鼎의 제자였으며, 최석정은 또 소론의 영수인 南九萬의 제자였다. 최석정과 남구만은 주자학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 이었으며, 조태억의 문집인 『謙齋集』 에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老莊 사상과 閭巷 문학, 불교 등에 대한 관심이 두루 나타나 있다. 또한 副使인 任守幹은 師承 관계는 확인되지 않으나 조태억과 매우 친밀한 사이로서 정치적인 이해가 같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신사로서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두 사람은 적지 않은 수의 시를 주고받 았으며, 사행 이후에도 친분이 두터워 임수간의 사후 조태억이 그의 祭文을 지을 정도였다. 조태억과 마찬가지로 임수간의 문집인 『遯窩遺稿』 에는 일본의 불교나 자연, 문화, 詩文 등 폭넓은 내용이 담겨 있다. 끝으로 從事官 李邦彦은 문집을 남기지 못했고 사승 관계도 확인되지 않으나, 조태억이나 임수간과 두터운 친분을 맺은 것이 『겸재집』 이나 『돈와유고』 에 드러나 있으므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집에서 보이는 조태억과 임수간의 개방적인 태도는 일본에 파견되어 쓴 사행록 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일찍부터 일본인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던 일본어 역관으 로서 1711년 당시 押物通事로 파견된 金顯門이 남긴 사행록과 비교해 보아도 큰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은 먼저 일본인이 질서정연하고 법을 잘 지키며 통신사를 예를 다하여 맞이했다고 보았다. 또한 일본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감탄하는 기록을 사행록의 곳곳에 남기기도 했는데, 앞선 1655 년 통신사가 일본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에 비하면 1711년 통신사는 보다 열린 시선으로 일본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의 경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1655년 통신사가 일본의 부유함을 인정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반면 1711년 통신사는 일본의 寺刹 과 여러 太守들의 저택은 물론 民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찰하고 객관적이며 우호 적인 태도로 기록했다. 또한 물산이 풍부하여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수준이 중국에 못지않다고 평가했다. 끝으로 문화에서도 시가지, 도로, 음악과 춤, 풍속 등에 대해 보거나 들은 그대로 기록하는 한편 건축물, 다리, 공예, 뱃노래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비록 일본을 가리킬 때 ‘蠻’ 이라는 표현을 쓰는 등 소중화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중화와 비교적 관련이 없는 부분까지도 모두 비판하는 문화우월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소중화주의에 기반한 문화우월주의로 일본을 夷狄視하였다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1711년 통신사는 소중화주의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으나 문화우월주의에 기반하여 일본을 바라보지는 않았으며, 남구만이나 최석정 등 소론계 인물들과 마찬 가지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 고유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1711년 사행록에 일본의 모습이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마상재(馬上才) 공연과 일본의 마술(馬術) :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을 중심으로

        이명진 영남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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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通信使の馬上才公演と日本の馬術 - 朝鮮流要馬術を中心に - 李 明 真 嶺南大学 大学院 東アジア文化学科 東アジア文化学専攻 指導教授 金 良 宣 馬上才は乗馬或いは騎馬に上達された人が馬の上で行う様々な動作及び技術を意味する用語として韓国では主に馬上才、中国では馬技、日本では曲馬と呼んでいる。すなわち東アジアの国家ごとに馬上才を指す用語が違っていったと言える。こんな点のため、馬上才は国家別に記録における違いを見せる。朝鮮通信使の馬上才公演とは、文�禄・慶ᅯ長�の役以後、朝鮮と江戸幕府の間に通信使の派遣が再開され、通信使とともに日本に派遣された馬上才人の馬上公演を指す。その公演は、1635年に初めて派遣されたことを皮切りにして1763年の第12回通信使行まで計8回派遣された。 現在まで朝鮮通信使の馬上才公演に対する研究は、朝鮮の馬上才公演が通信使を通じて、日本で行われたという事実にだけ重点を置いており、朝鮮通信使の馬上才公演が異国の文化として当時、日本国内で文化的に一定の影響力があったかどうか、もし影響力があったら、その内容が何であったのかについては注目していない。つまり、文化の伝播やその変容という側面が弱い。そこで本稿では、朝鮮通信使馬上才公演の影響を受けて日本で新しく作られた朝鮮流要馬術に重点を置いて朝鮮流要馬術の成立経緯と馬術の内容、ひいては朝鮮流要馬術が伝わった土佐藩の要馬術について考察してみた。 研究調査を通じて朝鮮通信使の馬上才公演がどんな経緯を通じて朝鮮通信使に含まれて日本へ派遣されたことと馬上才公演の内容が何であったのかについて確認し、馬上才公演を観覧した人物たちの身分と馬上才公演を観覧した人物たちの反応を検討して見た。また、朝鮮通信使の馬上才公演から影響を受けた日本で新たに作られた朝鮮流要馬術がどのように日本内で展開されたかについて分析して見た。この分析を通じて朝鮮通信使の馬上才公演で行われた馬上技術の一部が日本の要馬術に影響を与えた事実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要馬術とは騎馬戦に必要な乗馬技術と馬上武器と言う二つの要素で構成される實踐的な馬術である。このような要馬術に朝鮮の馬上才が影響を与えたことは馬上才公演を通じて紹介された朝鮮の乗馬技術であった。すなわち、朝鮮流要馬術は朝鮮通信使の馬上才公演から影響を受けた乗馬技術と日本固有の馬上武器の使い方が結合されて作られた新たな馬術であり、日朝両国の馬上文化が結合された結果物だと言える。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이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사이에 통신사(通信使)의 파견이 재개되면서 통신사와 함께 17C 초반 ~ 18C 중반까지 8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던 조선의 마상재인(馬上才人) 마상재인(馬上才人) : 마상재를 직접 실시하는 사람 또는 마재인을 지칭 이 행한 마상재(馬上才) 공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마술(馬術)을 가리킨다. 이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략 17C 중반에 카와고에번(川越藩)〔현재의 埼玉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시코쿠(四国)에 위치한 도사번(土佐藩)〔현재의 高知県〕으로 전파되어 19C 중반까지 도사번을 대표하는 마술(馬術)이 되었다고 한다. 즉 일본에서는 16C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보병(步兵)위주의 전투방식으로 전술(戰術)이 변화되어 기마병(騎馬兵)의 필요성이 감소하였고,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17C부터 전쟁의 횟수가 줄어드는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마술(馬術)의 필요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国書刊行会編, 『武術叢書』, 国書刊行会, 1915, p.540. 그 결과 일본의 마술(馬術)은 당시 무사(武士)들이 갖추어야 할 교양교육의 일부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마술(馬術)의 필요성이 줄어든 상황 속에서 일본의 마술(馬術)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은 것이 통신사와 함께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조선의 마상재(馬上才) 공연이었고 이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새로운 마술(馬術)이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이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마상재 공연과 조선류요마술에 관한 연구는 1931년 松田甲 松田甲, 「江戶城に於ける朝鮮人の曲馬」, 朝鮮総督部, 『朝鮮』 176号, 1931 , 中村榮孝 中村榮孝, 「朝鮮曲馬上覽の起源」, 朝鮮総督部, 『朝鮮』 176号, 1931 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仲尾宏 仲尾宏, 「朝鮮通信使の馬上才と馬上才図」, 『高麗美術館官報』 32号, 1996 에 의해 마상재도(馬上才圖), 막부장군(幕府將軍)의 관람 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후 김동철 김동철, 「通信使 隨行 馬上才의 構成과 活動」, 『조선통신사연구』 제3호, 2006 , 임채명 임채명, 「朝日 時文에 나타난 通信使行団의 馬上才 公演에 대하여」, 『漢文學論集』 31集, 2010. , 이찬우 이찬우, 「日本 藤森神社에 傳承되는 朝鮮의 馬上才」, 『한국체육학회지』 제53권 4호, 한국체육학회, 2014 등에 의해 조선통신사 마상재 공연의 구성과 내용, 마상재인들의 활동, 후시노모리신사(藤森神社)에서 전승되고 있는 마상재 공연 등 마상재 공연에 관한 중요한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들은 조선의 마상재 공연이 통신사를 통해 일본에서 행해졌다라고 하는 사실에만 중점을 두고 있을 뿐, 조선통신사의 마상재 공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조선류요마술이 어느 시기에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조선의 마상재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조선통신사 마상재(馬上才) 공연의 내용을 살펴보고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을 만든 유사 마사나오(遊佐正直)의 기록들을 검토하여 조선류요마술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 추정해보고, 조선류요마술의 마술서(馬術書)인 『朝鮮流要馬絵卷』의 기록과 통신사 마상재 공연의 모습을 기록한 『朝鮮聘使詳解』의 내용을 비교·분석하여 조선류요마술이 조선의 마상재 공연으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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