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학위유형
        • 주제분류
        • 수여기관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지도교수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에큐메니칼 선교신학과 복음주의 선교신학 비교 연구 : 통전적 선교신학을 중심으로

        김현진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2943

        선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귀중한 사명이다. 이것을 위해 초대 교회 이전부터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고, 자라나며, 현재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나무가 자라고 그 결과 계속해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대 지상 명령인 복음 전파(선교)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러나 선교의 역사 과정을 살펴보면 다양한 모습의 선교신학들을 마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선교는 전략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을 잘 선택하여 준비하여야 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 등장한 선교신학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복음주의(Evangelical)’ 진영과 다른 하나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진영이다. 이 두 진영은 세계 복음화를 우선하는 신학이라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방법과 전략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그 무엇보다 복음을 가장 강조한다. 즉 개인 구원 선교전략에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반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사회참여를 통한 하나님 나라 실현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개인구원에 대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사회의 변화와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사회구원,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반면 영혼의 구원을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두 선교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연구하여 보다 적절한 선교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사회와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동시에 두 선교신학의 선교전략에도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두 선교신학의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업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즉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필자는 두 선교신학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전략으로 ‘통전적 선교신학’을 사용하려고 한다. 두 진영의 구조와 차이점을 비교 연구하여 포스트모던 사회에 적절한 선교 방법을 모색하고 더 나아가, 이것을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의 복음신학에서 찾고 이를 위해 존 웨슬리 목사님이 어떤 통전적 선교 실천을 하였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세상 속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 확장이 더욱 가속화 되기를 소원한다.

      • 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교회 일치에 관한 연구 : 제10회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이윤성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13 국내석사

        RANK : 2943

        Master’s Thesis A Study on the Church Unity in Ecumenical Movement. –Focused on 10th WCC Conference in Busan 2013- Lee, Yoon-sung Department of Theology Graduate School Hanshin University Advisor: Dr. Choi, Sung Il Abstract Historically, the Korean Church came into existence apprehensively with the anxiety of being divided because the missionaries who came into Korea had different propensities, pursued different missionary policies, and had distinct denominational differences. The Korean Church branched out into several sects afte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from Japan and the Korean War, notwithstanding the early efforts toward unification and cooperation. What has to be kept in mind here is that the Church, which should be sects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t’s even more dismal that the reason for the dissolution wasn't to serve the Lord but rather due to the fault of man. It was the result of selfish factionalism that arose from neglecting the differences between believers and forceful standardization masked by doctrines, confessionals, and theological tradition. However, this factionalism is not the only advocating factor of the dissolution of the Church. There have been cases when a global unification movement actually incited division. In 1959, the source of conflict within the Korean General Assembly of Presbyterian Church was whether or not to join the ecumenical movement. Moreover, Carl McIntire’s ICC started out in the same year WCC did, as a biblical unification movement against it. Yet ironically, this was to be the reason for schism within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The segmentation of the Korean Church generally gained momentum after 1970 and now, there are more or less 200 uman factionalism. For further discussion, things have to be properly placed into context. There exists no reason for the division of the church and its disputes cannot be justified in any case as the Church is the community and life that serves one Christ. Therefore, there is no church but that which is unified, sanctified, universal, and apostolic through the Holy Spirit, who makes everything attained through the truth. The Church, therefore, must be united. This is not an expression of encouragement, but a command of God that must be fulfilled. This is first and foremost because the unification of the Church is the request of Christ. The Church is the body of Christ, we are its body; the Church cannot be divided, just like the body. Thus, it goes without saying that Christ does not want human conflict to cause dissolution and enmity within the Church. Secondly, the Church should be unified for reasons of effective propagation of the gospel. The request of Christ that appears in Matthew Chapter 28 is to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However, Protestants, traditionally having interpreted it as ‘evangelization,’ put much effort into the expansion of regional churches, thus preaching in an ‘imperialistic’ form, much like the crusades. This misguided approach to preaching has put Christian evangelism at risk and debilitating its evangelical ability. However, it does not mean that the unification of the Church does not aim for standardized unification, as can be seen in today’s societal organizations and in any case, a one-sided incorporation or demand for a newly created absolute doctrine or theology cannot occur. Self absolutization is self isolation. Christianity should renounce its crusade-like evangelization and aim instead at evangelization according to the cross. This is expanding the sovereignty of God by fulfilling the social responsibility and role given to Christians and returning the glory to God rather than the church. At this point in time, it hasn’t been long since the evangelical history of the WCC plenary session has been accepted. However, Korea which will be the vanguard of global evangelization, has been granted the jubilation of hosting the WCC. Through the WCC plenary session in Busan, the Korean Church has to become one in carrying out the mission of the times- the evangelization of Jesus Christ- just as the early church did. The principles, cultures, and religions of the world today are confronted by the exploitation and conflict of Western culture and capitalism. The nation is pained by war and violence caused by nationalism, while the Church is contending over egoism and materialism. All the while, the natural environment is being devastated, human rights and ethics are ruthlessly violated, and Christ’s evangelization has become a laughing stock of the world. Thereby, a theology that denies and refuses ecumenical cooperation is one that refuses this era itself- a dead theology and an ailing faith. If the reader agrees to the fact that a big portion of the factors which hinder the unification and collaboration of the Church is due to man, then it is imperative to share the on-going spirit of the ecumenical movement. As the way to fully recover a broken piece is to reattach the debris, the way to recover a Church broken apart by conflict is to reconcile by ecumenical movements, to regain one united body of Christ. It is hoped that this message will be promulgated to Korea and the world as the resolution to pursue humanity, the Church, nature, and world peace.

      •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운동에 나타난 선교에 대한 연구

        양남식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00 국내석사

        RANK : 2943

        앞장에서 각자의 진영이 주장하는 교회와 선교의 사상을 살펴보았는데 현대의 선교신학은 에큐메니칼 입장과 복음주의 입장이 서로 극단적인 이론을 주장함으로서 인간구원과 사회구원으로서의 양극화 현상을 빚게 되었으며 그 결과 교회의 분열과 선교의 역동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전통적인 인간구원과 교회 중심적인 선교관이 20세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극심한 도전을 받은 결과 사회구원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위기감을 갖게 된 복음주의 자들이 반사적인으로 인간구원론을 제창함으로 발생하였다 1910년 이전의 선교개념은 그 내용에 있어서 복음전도와 같은 것으로, 둘다 기본적으로 구두 선포로, 이해되었다. 단지 '대상'으로 볼 때 지리적 측면에서 '선교'는 먼 이방나라, '전도'는 가까운 주변에서 하는 것으로 보든지, 신학적 측면에서 '선교는' '아직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자들'과 관계된 일이라면, '전도'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의 신앙을 부흥시키는 일로 보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에큐메니칼 측의 사회적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선교개념 속에 이때까지 없었던 사회 참여에 대한 문제가 양 진영의 서로 다는 '선교' 이해로 대두되었다. 오늘날 세계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로 양분되어 있다. 양자를 모두 통합하려는 노력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느 한 편에 더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는 문제점도 있다.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의 강조점은 사회 행동과 전도, 특전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 현존과 선포, 사회구원과 개인구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신학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다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하는 점에서 교회의 선교와는 대치되는 선교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비체돔은 교회의 선교한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선교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으며, 호켄다이크도 교회 중심의 선교를 교회부패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중심사상이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교회보다는 세상을 하나님의 활동 무대로 더 중요시한다. 넷째, 하나님의 선교는 모든 평신도가 다 선교사이기 때문에 평신도 신학을 발전시켰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 뿐이라는 고백은 교회의 선교가 필요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아니나 세상에서의 가시적 표상이다. 사실 하나님의 선교개념이 근래에 나오기 전부터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의 선교를 해왔다. 다만 교회의 사역이 오늘날 시대적 요청에 미흡할 뿐이라는 것과 과거의 교파 교회들의 경쟁심에서 비롯된 반 선교적이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선교를 지양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보쉬는 선교가 그 삼위일체적 근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선교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변화 되어 선교는 인간의 활동이 되었고 인간에게 의존한 것이 되었으므로 본래적의도에 따라 진실하게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관심한다는 것과, 선교는 그 하나님 나라가 올 것에 대한 기대에 기초를 두고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구원은 하나님 스스로가 이루어 주시는 것임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에 의하여 포함되어지고 형성되어지는 하나님 선교 그 자체이다. 교회의 선교는 교회의 활동이거나 자의로 선택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에 빛어서만이 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문제는 인간화와 복음화의 문제라고 하겠다. 복음주의 신학은 전통적인 '복음화'를 지향하는 반면 에큐메니칼 신학은 기계 문명과 사회 구조로부터의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인간화'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에큐메니칼 선교의 목표는 인간화이다. 교회의 선교가 사회정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도 인간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며 오늘의 구원문제는 인간화의 달성으로 보는 것이 W.C.C의 구원론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고조되었던 웁살라와 방콕에서 특히 강조되었던 내용이다. 웁살라 총회는 선교의 목표가 인간화임을 선언하였다. 1973년 방콕에서 개체된 I.M.C 의 주제는 오늘의 구원이었는데 여기에서 오늘의 구원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선교의 목적인 구원이 오늘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즉 전통적 의미에 있어서 인간 구원이 오늘의 역사적 처지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밝히고 선교의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려는 것이다. 인간화와 복음화로서의 구원에 대하여 그 각각의 한계성을 지적한 보쉬의 주장은 인간화로서의 구원의 한계성을 지적한다. 즉 구원은 육체적 정치적 차원 이상의 것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보쉬는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을 실천하기 보다는 복음을 방어하는 경향으로 흐르는 때가 가끔 있다고 지적하면서 복음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한계를 말한다. 오늘의 선교 과제는 우선적으로 모든 인간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으는 일이어야 한다. 아무도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은 없으며, 복음은 만인을 위한 것이므로 이방의 모든 민족과 족속들을 구원해 내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이방인은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민족들이 살고 있는 공간, 교회, 교회 선포의 범위인 온 오이쿠메네에 선포되어서 역동적으로 변화의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 결론적으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면 오늘날 복음주의적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쪽 면에 치우지는 과오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선교는 케리그마와 디아코니아의 이중적 과업을 상호보완적으로 실천해 나가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 즉 세계복음화가 되어지리라 필자는 믿는다.

      • 복음주의선교신학과 에큐메니칼선교신학의 비교연구 : 복음주의 진영의 로잔언약과 WCC선교신학의 비교를 중심으로

        이재원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943

        에큐메니칼 신학에서는 수평적인 복음의 차원을 중시하여 인간화가 선교의 중심 내용이요. 사회에 하나님의 샬롬을 구현함을 선교의 내용으로 하며, 또한 전도는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여긴다. 에큐메니칼 신학에서는 사회 복음을 주장하며, 이를 통한 개인 구원과 또한 사회 변화를 강조한다. 사회적 책임, 사회적 관심, 사회적 행동을 가질 것을 말하며,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마음을 가지고 정치제도, 경제제도, 사회구조 속에도 뛰어들어 직접 관여하며 이것들을 변화시켜 나갈 것들을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세계적이고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체라 하며, 세계는 변화하나 복음은 불변하고, 크리스챤의 삶이 예수를 닳는 삶,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이 되어지는 크리스챤 라이프를 강조한다. 신학적 폭이 넓으며, 이에 따라 종교적 다원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으나 다음과 같이 인종, 교파, 국가, 민족을 초월한 교회의 일치, 연합을 강조한다. 케인은 선교를 영혼구원과 사회봉사로 해석한다. 그는 "복음주의는 선교를 전도와 동일시하여 영혼 구원은 잘하지만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데 는 느린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봉사에서는 잘하지만,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없다. " 고 양자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복음주의자에서는 복음전도와 개인 구원을 강조하며 미래지향적, 타계 지향적 구원을 말하고,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강조하기에 행함이 약한 일면이 있고 개교회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다. 또한 성령의 역동성, 능력을 경시하며, 신학의 폭이 좁은 면이 있다. 로잔 언약에서는 복음전도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심, 책임, 행동까지도 수용하며, 오순절 카리스마 운동에서 강조하는 성령의역동성을 인정하면서 성령이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임을 또 한 인정한다. 에큐메니칼에서의 연합이 중요성도 인정하며 교파의 장벽을 넘어서야 함도 인식한다. 로잔 언약의 정신들은 한국 교회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인식되어야 하는 것들이며 개개 신학교들 간의 교류를 통한 연합과 신학교 교수들의 자질 향상, 그리고 목사 후보생들의 소명의식과 훈련 교육 등을 통한 철저한 복음의 고수는 선행되어야 할 과제들이기도 하다. 로잔 선교 신학이 사회 참여를 주장하고 하나님나라 선포에 있어서 예언자적인 사명을 말한다고 해서 WCC계통의 선교 신학 입장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닐라 선언문은 밝히고 있다. "우리가 사회참여를 계속하여 다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위 기독화된 사회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 마찬가지로 전도에서 능력의 역사, 곧 표적과 기사의 동반을 말하지만 그것이 주된 사역일 수는 없다. 로잔 신학은 하나님 자신이 주된 전도자이심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없이는 효율적인 전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전도가 궁극적인 의미에서 악의 정사 잡은 자들과 세력과의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먼저 개인구원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관심, 책임, 행동을 크리스챤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타내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에는 반드시 개인적 구원, 개인적인 예수님과의 만남이 선행되어야 한다. 선교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마음, 기독교의 본질이며, 수단이나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인 것이지 교회를 성장, 부흥시키기 위해 선교를 과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선교는 아니라고 본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선교의 영역은 온 세상이다. 교회는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이며 교회의 사역 전체를 선교라 본다. 선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다른 말로 샬롬의 추구와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샬롬은 평화라는 뜻과 함께 온전(Wholeness)하다는 뜻이 있는데, 선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온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온전 속에는 개인 영혼 구원과 사회의 구원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개인영혼+구원사회구원)이라고 표시할 수 있다. 이런 선교활동을 수행하는 교회의 기본적인 자세는 '고난의 종'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일체의 선교 활동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했던 주님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세상을 섬기는 정신으로 수행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수직적이냐 수평적이냐, 인간화냐 복음화냐를 결코 양자택일할 수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러나 이것을 보기 좋게 적당히 결합시키거나 섞어 놓아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확실히 하지 못한다면 둘 다 잃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이 없는 인간화는 휴머니즘적인 활동에 불과한 것이고, 형제와의 화해가없는 복음화는 하나님 앞에서 위선자일 뿐이다.

      • 신앙고백의 에큐메니칼 배경 연구 :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한 제언

        박병선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943

        신앙고백은 그 자체로서 에큐메니칼 차원을 가진다.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정황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신앙고백에는 사회의 변혁이나 정의의 실현의지가 반영되어 있고, 또 많은 교회들이 같은 고백을 함으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의의와 함께 수많은 분열의 위기에서 교회 공동체를 지키고 교회를 일치시키는 일에 크게 공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칼케톤 신조는 고대의 에큐메니칼 신조라고 불리워진다. 또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제2스위스 신앙고백, 도르트노회 신조, 회중교회 신조등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개혁교회의 수많은 고전적 신조들 또한 당시의 신앙고백적 상황아래에서 기독교 신앙공동체를 지키고 일치와 연합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신앙고백이 그러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루어 냈다고 말 말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의 에큐메니칼적 배경과 성격은 현대의 교회에 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현대의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현대의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교회기구로 연결되고 있다 하겠다. 특히, 신앙고백의 에큐메니칼적인 성격의 중요성을 인식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교회의 분열을 막고 분열된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서 하나의 신앙고백을 향한 멀고도 험난한 발걸음을 시작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동안의 치밀한 연구 간에 1993년 8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제5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에서 내놓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안에 고백된 사도적 신앙에 대한 하나의 에큐메니칼 해석」이라는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 한국교회는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짧은 기간동안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성장을 하였지만 그 성장속에는 자라나는 기쁨과 갈래갈래 찢어지는 분열의 아픈 경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의 요인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세포분열 하듯한 교회의 분열이 오히려 성장의 큰 요인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21C 초를 맞이하여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속에서 교회는 성장을 멈추었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 의하여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비극적 상황아해 놓여있다. 한국교회는 이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분열의 아픔을 이기고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여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연합과 일치의 사업을 시작하여 활발하게 해 나가고 있지만 진정한 연합과 일치, 그리고 그 열매는 매우 불확실하고 또 요원하기만 하다는 것이 현실인식이다. 이와 같은 상황아래에서 보다 근본적인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는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는 전제가 성립한다. 이는 과거 모든 신앙고백들에게는 에큐메니칼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교회는 여러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대두된 사회정의와 경제적 풍요에 따른 윤리적 도덕적 해이 등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거치면서 교회와 신앙공동체를 지키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단이 서로 다른 두개의 신앙고백을 하였고, 감리교, 성결교 등 다른 교회들도 고유한 신앙고백과 교리적 언급하거나 유사한 신앙고백을 표현을 가지고 있다. 이들 신앙고백들은 서구교회의 신앙고백을 수용만 하는 입장 아래에서 신앙고백을 통한 에큐메니칼에 대한 이해와 활용을 매우 소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한국의 신앙고백들이 먼저는 그 뿌리가 크게 다르지 않고, 따라서 고백하는 그 신앙의 내용이 대등소이하며, 비록 강렬하지는 않지만 "형제애",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등의 에큐메니칼 정신과 표현이 모든 고백에 나타나있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신앙고백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문은 열려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모든 연합과 일치를 위한 사업에 앞서서 전체 한국교회가 과거의 분열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복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신앙고백을 도출해 내야 한다. 교회의 분열이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연합과 일치도 신앙고백을 통하여 시작하여야 한다. 이를 도외시하고 추진되는 연합과 일치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기득권이나 교단의 이해득실이라는 걸림돌에 효과적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우며, 그러한 현실은 이미 적시된 바와 같기 때문이다.

      • 공공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상관성 연구

        서은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943

        19세기 말엽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후 한국 기독교는 놀라운 성장을 하였다. 그동안 교회는 양적성장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서 공적인 책임들을 많이 수행해왔다. 계몽차원에서 민족의 희망이었고, 한글을 보급하였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세웠고, 평등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교육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해 왔다. 나아가 1970년대의 반독재운동과 1980년 남북평화통일운동에도 앞장섰고, 장기기증운동과 태안 앞바다 기름제거 운동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는 계속 하락하고 있다. 지난 2008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18.4%의 낮은 점수를 받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몇 가지 이유로 교회와 교단의 분열로 인한 교회의 불일치적인 이미지, 성과 속의 이분법적 논리로 신앙을 사사(私事)화하고 세상과 교회를 분리한 점, 사회 속에서 교회의 공공성을 드러내지 못한 점, 성장 중심 주의로 인한 문제점, 목회자 윤리의 문제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사회와 분리되어 게토(ghetto)화 되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신뢰성의 문제를 에큐메니칼 운동과 공공신학의 고찰을 통해 그 회복방안을 모색하고자 본 논문을 쓰게 되었다. 본 논문은 기본적으로 문헌연구의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조사기관의 통계자료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본 논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Ⅰ부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고찰한다. 이를 위해서 ‘에큐메니칼’ 용어의 의미와 그 운동의 역사를 고찰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한 성공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부에서는 공공신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공공신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본 후에 몇몇 학자들의 연구를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공공신학의 접근방법과 역사에 대해서 고찰하고 공공신학의 성공 사례를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사례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Ⅲ부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공공신학의 상관성에 대해서 연구할 것이다. 두 운동의 상관성을 찾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교회-세상’에서 ‘하나님-세상-교회’로의 패러다임의 이동을 살펴본 후 ‘하나님-세상-교회’의 관점에서 어떻게 공공신학의 관점이 에큐메니칼 운동 속에 녹아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 후에 공공신학의 분야에 에큐메니칼이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 두 흐름의 관계를 정리하도록 한다. Ⅳ부에서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진단한 후 한국교회에 어떠한 에큐메니칼과 공공신학적 자원들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자원들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 속에서 신뢰도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모색해 볼 것이다.

      •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신학이 북한선교에 끼친 영향

        이승배 총신대학교 선교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942

        이 논문에서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북한선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한국교회의 양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신학을 정리하였다. 제1절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배경에서는 초대교회 이후의 에큐메니칼적 움직임과 복음주의 각성운동을 통해 확인하였다. 제2절에서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을 정리하면서 선교대회를 통해 분석하고, 에큐메니칼 선교의 주요주제를 정리하였다. 제3절에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는 복음주의를 정의하고, 복음주의 진영의 움직임과 로잔세계복음화 운동으로 정리하였다. 이 두 진영 선교신학의 개념은 하나님의 선교와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제3장에서는 현재진행중인 북한선교방법을 정리하였다. 제1절에서는 북한선교사역의 분류법을 확인하였고, 제2절에서는 북한선교사역의 방법과 특징을 공식적 교회중심사역, 비공식적 교회중심사역, 공식적 선교환경 중심사역, 비공식적 선교환경 중심사역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제4장에서는 복음주의진영과 에큐메니칼진영의 북한선교 방법을 분석하였다. 제1절에서는 한기총과 KNCC의 북한선교를 비교면서 통일관과 한기총과 KNCC의 북한선교현황을 분석하였고, 제2절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과 통합측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북한선교를 분석하였다. 제5장에서는 분석된 내용들을 종합하여 복음주의진영과 에큐메니칼진영의 북한선교현황과 나아갈 방향을 제안하고 있다.

      • 삼자간 에큐메니칼 선교협력 연구 -영등포노회 한국·독일·가나 교회 협력선교를 중심으로-

        이명석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012 국내석사

        RANK : 2942

        전 세계적으로 에큐메니칼 선교협력이 선택의 차원이 아닌 절대적인 조건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우리 교단(Presbyterian Church of Korea) 소속 영등포노회(YoungDeungPo Presbytery)가 독일개신교연합(EKD) 산하의 팔츠주교회(The Church of Paletinate in Germany)와 함께 가나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Ghana) 볼타노회(Volta Presbytery)와 더불어 행한 “삼자간 에큐메니칼 선교협력(Trilateral Ecumenical Partnership)”은 우리 교단의 “정책총회 사업노회”와 맞물려 향후 우리 교단이 취할 수 있는 선교협력의 방향을 가늠 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에큐메니칼 선교협력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 보다 훨씬 앞선 경험을 가진 독일교회와 교회 형성시기 부터 에큐메니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가나장로교회는 개 교회 중심의 선교가 주류인 한국교회가 앞으로 지향해야할 선교적 방향에 대해 지시해 주는 바가 컸다. 그간 모든 대외적인 교회 협력과 교류가 총회단위나 개별교회 단위로 이루어지던 것에서 노회소속의 위원회체제로 전환되었을 때 일어나는 파급효과는 아무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등포노회는 이 분야에 있어서 선구적인 발걸음 내딛었다. 본 논고에서는 우선 세 교회가 각 자의 대륙에서 별도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쳐 형성된 현재 교회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특히 이 과정을 통해서 독일과 가나의 교회는 한국 교회와는 달리 그들 교회의 생존조건에 에큐메니칼 적인 필수성이 대두되었음을 알았다. 대신에 한국교회는 다종교 사회와 이념적 대립에서 자란 독특한 생존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삼자간 선교협력은 서로의 이면을 보여주는 거울의 역할을 하면서 어느 한쪽으로의 일방 진행이 아닌 상호배움과 나눔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로 인해 선교의 영역은 시간의 진행에 따라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인적교류를 통해 상호이해가 증가했고, 홈스테이로 가족과 가족차원으로 관계가 심화되었으며, 교류의 레벨이 확대되어 청년들의 참여가 두드러졌고, 여성들의 참여영역에 커다란 약진이 있었다. 또한 교회내적인 이슈에서 교회외적인 선교적인 이슈로 발전을 가져왔고 모든 교류의 결과는 학술적인 영역으로 발전하여 선교적인 원리를 발견하는데 이르게 되었다. 삼자간 교회선교협력은 다음의 구체적인 진행을 가지고 왔는데 공동의 선교적인 아젠더가 발굴되어 서로가 합심협력하게 되었으며, 에큐메니칼 선교동역자의 초청과 파송으로 이어져서 가나교회와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가나컴퓨터훈련학교를 설립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이 학교는 한국과 독일교회를 통해서 청년들의 참여를 극대화하는 자원봉사를 이루게 되었으며 가나청년들에게는 직접적인 혜택으로 다가서게 되었다. 이에 더 나아가 가나목회자들을 위한 장신대 선교신학석사 장학과정이 이루어지고 한국정부 행정 외교라인과의 교류도 열매를 맺게 되었다. 본고는 한국교회가 개 교회중심의 교회활동영역에서 범세계적인 에큐메니칼 교회로 발돋움하기 위해 필요한 선결조건이 무엇인지 삼자간 교회협력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자간 선교협력의 과정 중에 도전과 유익들이 몇 가지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이런 분석을 통해서 필자는 한국교회가 협력선교를 위해서는 우리 교회 안에 선교적인 장치들이 먼저 조성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 장치들은 노회내의 선교위원회와 같은 적당한 크기의 선교 실행기구, 다자간 협력구도, 서로가 공감하는 공동의 선교목표, 국내교회 안에서의 협력체제 구축, 에큐메니칼 선교동역자의 자질과 역할, 선교지 재산의 중립성과 투명성, 다양한 교회 레벨 중에서 청년들의 지속적인 유입 등이 협력선교를 지속하고 발전시키는 장치임을 알게 되었다. 본고는 끝으로 향후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협력선교를 위해서 지향해야 할 전망과 제언으로서 주는 것만이 아닌 받는 것도 배우는 선교, 공감하는 관계증진, 보다 확대된 선교협의회로서의 발전, 교류를 넘어서 선교원리로서의 자리매김, 그리고 한국교회의 가장 큰 걸림돌인 이념의 벽을 뛰어넘는 협력선교를 바라보게 되었다.

      • 세계교회협의회 형성과 여성 에큐메니칼 선구자들의 공헌

        김은하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17 국내박사

        RANK : 2941

        국문초록 변혁기마다 여성들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가장 앞장서서 창조적인 사역의 길을 개척하고 여성공동체를 형성하여 교회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성장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안정화되면, 여성들만의 특수성을 가졌던 여성공동체는 전체공동체에 흡수 혹은 통합됨으로써 여성들이 다시 소외되는 역사를 반복하여 왔다. 본고는 여성공동체가 “창의적 사역 개척-여성공동체 형성-통합위원회로 변화-여성의 특수성 약화”라는 역사의 순환이 반복되어왔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여성의 참여가 활발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 여성, 청소년 및 장애인을 강조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에큐메니칼 선구자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의 성찰과 에큐메니칼 대화를 통해 여성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세계교회협의회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가령,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다수를 차지하던 여성선교사들은 해외선교 현장에서 기독교 문명화 정책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를 삶으로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난민구호활동 NGO 단체인 시마데 사무총장이었던 마들렌 바롯은 교회가 연합하여 난민을 돕는 사역을 하도록 주도함으로써 교회를 전 세계적인 존재로 보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촉발하였다. 또한 에반스톤 총회에서 캐슬린 블리스는 평신도 신학을 발전시켜 남성 위주였던 초기 세계교회협의회 조직에서 여성들의 참여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더 나아가 세계교회협의회의 첫 아시아 회장이었던 사라 차코는 서구기독교 중심이었던 에큐메니칼 운동을 아시아로 확대함으로써 세계기독교중심으로 무게 중심을 아시아로 돌리는 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수잔 드 디트리히는 보세이 에큐메니칼 연구소를 통해 수많은 평신도를 양성하였다. 이들을 공헌은 20세기 교회론과 선교론의 변화에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 본고는 세계교회협의회 임시위원회(1938)부터 에반스톤 중앙위원회(1955)에 이르기까지 여성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에큐메니컬 운동을 연대순으로 분석하였다. 여기에는 세계교회협의회 집행위원회 또는 중앙위원회의 회의록, 세계교회협의회 문서보관소 및 세계 YWCA 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본고의 결론으로 교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완전하고 동등한 참여를 위해서는, 여성공동체는 전체 공동체의 일치를 보호하고, 전체공동체는 여성공동체의 특수성을 배려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숙한 관계 형성과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사역 참여는 진정한 교회 개혁의 가시적인 표현이며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ABSTRACT The Formation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nd the Contribution of the Women Ecumenical Pioneers to it. Throughout history, women have been more sensitive than anyone else in a rapidly changing era, pioneering creative ministry; and they formed a women's community and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development, and growth of the church. However, once the church has stabilized, the women's community, which had had its own peculiarities, came to repeat the history of re-alienating women by being absorbed or integrated into the whole community. This dissertation argues that women's participation in the church has not been active because the women's community repeated the cycle of "pioneering creative ministry - forming a women's community-changing into a whole committee-weakening the peculiarity of women." or the same pattern was found in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hich is known to emphasize the empower of women, youth and the disabled today. Nevertheless, Women ecumenical pioneers have contributed greatly to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rough joint reflection and ecumenical dialogue based on trust. For example, Women missionaries who consisted of the mission force at the time of the majority of the 1910 World missionary conference in Edinburgh in fact practised "Missio Dei" through their civilizing ministries in overseas mission field by “Women’s Work for Women” Project. During the World War II, Madeleine Barot, as the General Secretary of CIMADE, helped numerous people, and paved the way for the church’s social ministry. In addition, Kathleen Bliss developed a “Theology of Laity” in the Evanston General Assembly to expand women's participation in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n its early years, which was predominately male-centered. Furthermore, Sara Chako, the first Women president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n Asia, helped to shift the center of gravity of Christianity to Asia from the west by expanding the ecumenical movement, which was centered on Western Christianity, to Asia. And Susan de Dietrich equipped numerous lay people through the Ecumenical Institute at Bossey. They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the change of the ecclesiology and the missiology in the 20th century. This study chronologically reviewed the ecumenical movement work of women committee during the period from the Provisional Commission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1938) to the Central Committee of Evanston(1955). To do this, it surveyed the minutes of the Executive Committee or Central Committee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ith documentation and reports in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rchives and World YWCA Archives. The Conclusion drawn from this study is that for the full and equal participation of men and women in the Churches, the women's community should protect the unity of the whole community, and at the same time, the whole community should seek the ways to maintain the uniqueness of the women's community. The matur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women in the Churches and the equal participation of the work of the church will be a visible expression of the genuine church reformation and help to create a new Christian culture in the new era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