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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植民地統治下韓國における近代初等學校體育の成立過程に關する歷史的硏究

        유근직 筑波大學 1997 해외박사

        RANK : 247807

        1. 연구의 동기 및 목적 일본에 의한 36년간의 식민지통치(1910-1945)는 한국민족에게는 주권상실과 피식민지 지배의 단절과 굴욕의 역사이었으나, 한국 학교체육사상 체육이 제도(制度)로서 정착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근대 학교체육의 성립·전개과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일본 식민지통치하의 체육의 규명은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그 의의도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해방이후 한국의 역사연구에 있어서는 「민족사관」이 강하여 모든 역사연구에 영향을 미치어 민족주의적 입장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체육학연구에 있어서도 한국 근대체육의 성립과 전개를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파악하여 왔고 「식민지체육」에 대해서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탄압」과 한국민족의 「저항」 운동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대부분이다. 「식민지체육」은 오로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군국주의 체육」(軍國主義 體育)으로 간주되어 통조리채 부정·비판되어 왔으며,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기는 한국 체육사상 「민족체육의 수난기」또는 「민족체육의 시련기」로 평가되어 왔다. 이러한 「민족사관」에 입각한 연구내용만으로는 식민지체육의 전체상, 더 나아가 한국의 근대 학교체육의 성립·전개과정을 종합적·체계적으로 파악하는데 있어서 충분하지 못하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해방후 한국 학교체육이 표면적으로는 식민지체육의 청산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식민지 시대의 학교체육 시스템과 식민지 시대의 교사들의 지도아래 전개되어 왔다고 하는 사실은 식민지체육 연구에 대한 새로운 시점과 패러다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즉, 「민족사관」이라고 하는 일국사(一國史)적 시점과 그것으로부터 기인하는 「일본의 탄압-한국의 저항」이라는 「二項對立圖式」에서 벗어나 한국에 있어서 근대 학교체육의 성립과정을 보다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새로운 시점과 패러다임이 요청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일본의 식민지교육이 「초등보통교육」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사실과 관련하여 초등학교 체육을 대상으로 하여 일본 식민지정책의 변용에 따른 제도적 변천과정과 근대 초등학교 체육의 성립과정을 규명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다. 2. 연구 과제 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항을 연구의 과제로서 설정하였다. (1) 일본 식민지통치하 초등학교 체육제도의 역사를 식민지 통치정책 및 교육정책의 변용과 관련하여 규명한다. (2) 제도로서 학교교육에 위치하고 있던 체조과가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한국·일본 양국의 사료(史料)를 이용하여 규명한다. (3) 일본 식민지통치하의 초등학교체육을 식민지통치 전·후와 관련하여, 또한 일본국내의 학교체육과 관련하여 고찰함으로써 한국 근대초등학교 체육의 성립과정과 특색을 규명한다. 3. 연구 방법 (1) 분석 틀 본 연구에서는 민족적 주권의 존재여부에 구애됨이 없이, 한국의 근대 학교체육의 성립과정을 보다 객관적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2가지 분석 틀을 설정하였다. 먼저 「학교체육제도」에 관해서는 ①교과과정, ②학교위생·보건, ③교과서, ④교원양성, ⑤시설·용구의 5가지 요소를 가지고 분석하였고, 다음으로 「근대 학교체육의 성립」은 ①학교제도의 확립, ②공교육 기관에 있어서의 체육수업의 의무화, ③교원양성과정에 있어서의 체육의 필수화, ④신체운동의 내용과 지도를 규정한 공적인 지도서의 제정, ⑤운동시설을 규정한 설치기준의 제정 등의 중앙집권화된 제도적 단계를 거쳐 성립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2) 사료 및 시기구분 식민지 통치정책 및 교육정책의 내용, 특색, 변천과정은 당시의 칙령(勅令), 훈령(訓令), 부령(府令), 훈시(訓示) 등의 각종 법규와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급관리의 연설, 지시, 의견을 분석하여 규명한다. 초등학교 체육제도는 교육제도의 기본적·중핵적 부분이 어느 나라이건 교육법규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일본의 식민지교육제도 또한 교육법규에 의해 추진되어 형식의 정비와 발전하여왔던 점과 관련하여 초등학교 체육제도에 관련하는 칙령, 조선총독부령 및 조선총독부가 각 道를 대상으로 냈던 유고(諭告), 훈령(訓令), 고시(告示), 예규(例規)등의 법규를 중심으로 초등학교 체육제도의 내용, 특색, 변천과정을 규명한다. 초등학교체육의 실제 전개과정은 조선총독부 발행의 관보(官報)를 비롯하여 식민지 관련문헌, 서류 등의 사료외에 조선총독부 관리에 의한 저작물, 초등교육연구회의 현장연구 보고서, 학교誌, 학교일람표, 통지표 등의 원전사료와 한·일 양국의 체육·교육관련의 잡지를 이용한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신체검사통계를 비롯해 취학률, 퇴학률, 출석률 등과 같은 통계수치를 활용한다. 한편 대상시기와 시기구분에 있어서는 일본의 식민지교육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던 구한국 말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일본의 식민지통치가 끝난때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또한 식민지 통치정책의 전환을 시기구분의 주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제1기: 구한국말기 (1895-1910) 제2기: 무단통치기 (1910-1919) 제3기: 문화통치기 (1919-1937) 제4기: 황민화정책기 (1937-1945) 4. 연구 결과 - 한국 근대 학교체육의 성립과정과 그 성격 - 한국에 있어서 근대 초등학교 체육은 구한말기 일본의 통감부 설치(1906) 이후, 당시 교육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일본인 관리·교사들의 관여하에 시작되었으며 「한·일 합방」(1910)후,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서 위치하여 장려됨으로써 제도로서 정착하여 초등학교 제도의 확립과 함께 성립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해방(1945)후의 학교체육에도 계승·답습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목적이 식민지 통치정책인 「동화정책」(同化政策)에 입각한 「조선인 아동·학생의 일본 신민화(臣民化)」에 있었던 관계로 초등학교 체육에 있어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학교체조교수요목」(學校體操敎授要目)이 제정되어 (1914) 그것에 따른 체조중심의 수업이 행하여지고, 또한 학교위생·보건, 교과서, 체육시설·용구에 있어서도 일본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규정되었으므로 한국에 있어서 근대 초등학교 체육은 「日本型 體操敎育」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국에 있어서 근대 초등학교 체육은 일본 식민지 지배하에서 제도화·근대화와 함께 성립하였으나, 이것이 식민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서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일본 식민지 지배기의 초등학교 체육이 구한말기의 체육보다 제도화되었고 또한 체육의 목표·내용·방법도 합리적으로 개선되어 광복후의 초등학교 체육에까지 계승, 답습되는 일정한 「진보성」(進步性)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동시에 근대 한국의 역사주체로서의 국민형성과는 반대로 일본 천황을 위한 신민형성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 하는 「비민주성」(非民主性)을 가진 이중적 성격을 띄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전개과정에 있어서는 생활주의, 합과(合科)주의 등의 근대의 교육 이념과 아동중심주의적 방법원칙(예를 들면 흥미, 발육, 유희화), 교수내용의 향토화(「要目」의 조선화)등 일정한 근대화 또는 합리화가 추구되는 한편으로, 궁극적으로는 「忠良한 臣民」의 육성이라고 하는 식민지 통치 이념아래 「從順한 身體」형성을 목적으로한 절대주의적인 체육사상의 강화·철저를 위한 비 합리적인 수업(예를 들면 신체를 통한 德育訓練의 중시, 호령과 지시에 의한 劃一的 授業, 교사중심의 一齊指導, 군대식 통제와 질서훈련의 강조, 皇國臣民體操·建國體操의 보급등)이 실시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에 있어서 근대 초등학교 체육은 「植民地 支配下」라고 하는 특수한 정치적 배경아래서 식민지 권력이 필요로하는 가치, 즉 「臣民」이 갖추어야 할 「從順한 身體」의 형성이라고 하는 권력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신체적 영위를 본질로 하여 성립·전개되었던 것이다.

      • 일제 식민지 시기 일상사를 활용한 한국사 수업 방안 연구

        임아영 전남대학교 2018 국내석사

        RANK : 247807

        한국사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는 일제의 침략에 의해 근대 국민국가 건설이 좌절된 암흑기로 묘사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수탈 전략과 그에 저항하는 운동사 위주로 기술되어 왔다. 일제 식민지 시기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도 일제에 의한 가혹한 탄압과 그에 저항하는 독립투사의 모습이다. 이 시기는 유독 민족주의 관점이 강조되면서, 일방적인 지배와 피지배, 수탈과 저항, 또는 개발과 협력이라는 도식적인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식민지인들은 균질적인 민족의 범주로 포착되었고 개인들의 다양한 정체성은 부인되었다. 식민지인의 삶은 저항의 원인인 수탈의 현장으로 묘사될 뿐이었다. 하지만 식민지 시기 개인들이 항상 일제의 수탈에 고통 받으면서 민족적 투쟁만을 생각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저항의 원인을 제공한 수탈의 현장으로 보던 시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일제 식민지 시기 서술 또한 지배와 피지배, 수탈과 저항이라는 기존의 공식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라는 단원이 신설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는 노동․농민운동 같은 계급운동이나 민족문화수호운동과 같은 독립 운동이다. 식민지 시기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구체적 삶은 찾기 어렵고 당대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에도 부족하다. 한편, 일제 식민지 시기는 근대 문물이 들어와 대중문화가 유행하고 근대적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 시기이다. 새로운 언어와 방식의 내용과 형식을 이해하건 하지 못했건,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근대적 생활질서, 생활체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식민지의 현실이란 일상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근대성 뿐 만 아니라 식민지성을 수반하게 하였고, 따라서 근대의 모습은 불완전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기존에 일제 식민기를 보는 대표적 시각이었던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런 부분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수탈론은 식민성을, 근대화론은 근대성을 강조하여 양자를 함께 보지 못했다. 또한 두 논의는 근대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근대가 가진 폭력성과 식민성을 간과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식민지적 근대성 논의에서 제기된 일상생활 연구를 활용해 기존의 민족주의 서사에 가려 등장하지 못했던 다양한 민중의 일상과 삶의 모습을 가시화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일제 식민지 시기 일상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3차시의 수업안을 구상하였다. 자료는 1920년대~1930년대의 근대적 일상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식민지 시기 일상에 관심을 갖는 것은 현재 한국사회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현대 사회를 통찰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다. 이 연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학생들이 일제시기의 역사에 대한 도식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3차시의 수업 지도안과 학습 자료를 개발하여 제시하였다.

      • 식민지기 조선·대만의 고등교육기관 문예활동 비교연구 : 학내 잡지 및 일본어 문예물을 중심으로

        김욱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RANK : 247807

        本論文は、植民地期における朝鮮と台湾において、帝国日本により設立された官立高等教育機関出身の植民者や被植民者が展開した日本語文芸活動について考察したものである。特に帝国の<内地>の周辺部である植民地もしくは<外地>という特殊な場所に存在した帝国大学及び予科、高等学校において、植民者である在朝日本人や在台日本人、被植民者である朝鮮人や台湾人が、文芸活動の中でそれぞれどのように植民地を認識していたのかに注目して議論を展開した。 帝国日本は植民地に対する支配を正当化する為、近代的な概念である文明と野蛮の言説を用いて朝鮮と台湾の前近代的表象を強化し、1920年前後には、より円滑な統治を行う為に共通法を制定し、これら植民地を<内地>の延長線上に位置する<外地>として扱い、同化政策を断行した。これは朝鮮と台湾を植民地としてではなく、帝国の一地方として編入し、最終的には被植民者の抵抗の種を消えそうとしたわけで、その政策の一つがまさに帝国が主導する植民地の高等教育政策であった。帝国日本は新しく制定された第二次朝鮮・台湾教育令や帝国大学令に基づき、朝鮮には京城帝国大学とその予科、台湾には台北帝国大学と台北高等学校をそれぞれ設立するに至った。このような文化統治政策の根底には、日本が朝鮮や台湾を単なる植民地としてではなく、帝国の一部分である<外地>として見なし、体制協力的な植民地知識人を養成したうえで、彼らに被植民者の同化を牽引させたいという思惑が作用していた。西洋帝国主義の帝国―植民地の間における宗主―従属構造から進んで、<内地>-<外地>の間における中心―周辺、及び中央―地方という構造を造り上げ、植民地の文化や思想まで同化させようとした帝国日本の統治方式は、西洋列強と植民地の関係とは違い、地政学的にとても近く、人種的にも似ており、さらに漢字文化圏という共通の文化的背景を持っている東アジアにのみ見いだされる<植民地的特殊性>が存在していたからこそできることであった。 こうした中で植民地に設立された高等教育機関は一見、朝鮮人と在朝日本人、台湾人と在台日本人が同等な立場で学問ができる共通の空間として見えるが、その実体はそうではなかった。一先ず生徒の構成率をみても被植民者のほうより植民者のほうが絶対的多数を占めており、 教員は二十年の間、朝鮮人と台湾人合わせて十人を超えなかった。それのみならず、これらの校内文芸雑誌である京城帝大予科の『清涼』と台北高校の『翔風』をみても、雑誌構成の主導権は何時も植民者側が握っていた。このような傾向は一時的ではなく、1940年代に至るまで、これら雑誌の流れを貫通している。 当初、1920年代初期の『清涼』や『翔風』においては、 植民者と被植民者の間の植民地認識が大きく異なっていた。『清涼』では俞鎭午が、『翔風』では黃得時がそれぞれ朝鮮の古典文学を和訳して紹介したり、植民地下に置かれた台湾に対する哀傷を中文詩で表現したりするという形で朝鮮や台湾を文学的素材としていたが、日本人学生が書いた文章においては、植民地に関する文脈に関しては、文化的に豊かではない前近代的朝鮮像や台湾像が読み取れる。 これが1930年代に入ると、経済の沈滞と共に、社会主義言説が植民地内で受容されるようになり、こういった思想から影響を受けた日本人学生は、抽象的でなく直接見て感じた朝鮮と台湾のものをできるだけ事実に即して描く小説などを書くことが出来た。朝鮮人や台湾人もまた、この時期には積極的に植民地の現実を反映した散文を掲載し続け、両者の間では活発でより豊かな文芸活動が行われていたのだった。 しかし1937年、日中戦争が勃発し、思想統制が厳重になると、朝鮮人は<朝鮮>を素材とした創作活動を諦め、台湾人は大陸との文化的緊密性を拒むことにより、台湾独自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創る一方法として自ら<皇民化>する道を選ぶ。1935年以降に発刊された京城帝大の雑誌『城大文學』、『城大文化』や、台北帝大の『臺大文學』の中でも同じく、極一部を除いて、すべて日本人の主導の下で植民地の<外地>化を進展するような言説が提示され、時局的に帝国が与えた<外地>の使命感が満ちた文で溢れている。 このように少数の朝鮮人や台湾人は、文芸活動の中で、自ら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探り、固有の<朝鮮的なもの>や<台湾的なもの>を発見することもあったが、多数の被植民者側の生徒は、植民者の言説に振り回されたり、もしくは日本語雑誌の文芸活動に加担しなくなったりしてきた。またこれらの文芸活動は、<内地>の文芸思潮の流れに一歩遅く反応しており、在朝日本人や在台日本人の立場から彼らの生活的基盤である<朝鮮>と<台湾>を文化的素材として活用していたが、その<外地>に住んでいる大多数の朝鮮人や台湾人には目を向けようとはしなかった。 こういった中で太平洋戦争に至るのであり、この時期に<外地>高等教育機関の出身でありながら、積極的に日本語文芸活動を行っていた植民地知識人として俞鎭午と黃得時が挙げられる。彼らは、植民地期の末期に帝国の全体主義理論が溢れる中、独自の傾向を持つ文学領域を構築し、自らの民族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守ろうとした。俞鎭午はたとえ<国民文学>の枠の中で日本語文学を創作していたとしても、単純に大東亜共栄圏の論理の側に身を投じたのではなく、<朝鮮的なもの>を精神的な領域にまで引き上げ、過去と現在を貫通する朝鮮人像を作品の中で創り上げた。黃得時もまた、島田謹二のような著名な知識人と交流しつつも、<内地>中心の<外地>文学観を批判し、解放以降に台湾人中心の<台湾>文学観を形成することに関して、早くも重要な理論的手がかりを提示した。 以上のように、本論文の研究対象である校内雑誌や日本語文芸作品のテキスト分析を通して、植民地期朝鮮及び台湾の高等教育機関出身者達の文芸活動を比較、考察してみた結果、帝国日本の植民地もしくは<外地>に対する三つの民族のそれぞれ異なる認識を確認することが出来た。日本人学生は共通して<朝鮮>や<台湾>に関して、初期には文化を盛り立てるべき新天地と捉えていたが、中期には植民地人と共存すべき<外地>として、そして最後には植民地人から目をそらし、朝鮮・台湾を日本人二世のための物理的基盤として見なしてきた。しかし朝鮮人学生は、<外地>としての<朝鮮>は、あくまでも啓発また継承すべき独自の民族文化を持つ、帝国の特別な一地方として把握していた。その反面、台湾人学生にとって<外地>としての<台湾>とは、中国大陸の文化的影響から離脱し、重層的な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発見できる固有の空間でありながら、帝国の一地方に止まらず、皇国の一部にならざるを得ない宿命の前で苦悩する彼らの拠り所なのであった。 본 논문은 식민지기에 조선과 대만에서 제국 일본에 의해 세워진 관립(官立) 고등교육기관 출신의 식민자(植民者)와 피식민자(被植民者)가 전개한 일본어 문예활동에 대하여 고찰한 글이다. 특히 제국의 ‘내지’ 바깥에 존재한 식민지 혹은 ‘외지’ 고등교육기관이라는 특수한 학문의 장(場)에서, 식민자인 재조일본인과 재대일본인, 피식민자인 조선인과 대만인이 각각 어떠한 방식으로 식민지를 표상하였는지를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다. 제국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근대적 개념인 문명과 야만의 담론을 통해 조선과 대만의 전근대적 표상을 강화하였고, 1920년대에 들어서는 보다 원활한 통치를 위해 공통법을 제정하여, 이들 식민지를 내지의 연장선상에 있는 ‘외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동화정책을 단행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가 아닌 제국의 지방으로 편입하여 저항의 불씨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며, 그 중심에 놓인 것 중 하나가 제국이 주도하는 식민지의 고등교육정책이었다. 제국 일본은 새로 제정된 제2차 조선․대만교육령과 제국대학령을 토대로 조선에는 경성제국대학과 그 예과, 대만에는 대북제국대학과 대북고등학교를 각각 설립하였다. 이러한 문화통치정책의 기저에는,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닌 제국의 일부분인 ‘외지’로 간주하고, 체제 협력적인 식민지 지식인을 양성하여 식민지인의 동화를 추동하려는 사고가 깔려 있었다. 서양 제국주의의 제국-식민지 간 종주-종속 구조에서 나아가, ‘내지’-‘외지’ 간 중심-주변 내지는 중앙-지방의 구조를 통해 식민지의 문화와 사상까지 동화시키려 했던 제국 일본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서구 열강과 식민지와의 관계와 달리, 지정학적으로 매우 가깝고 인종적으로 매우 비슷하며, 더불어 한자문화권이라는 공통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동아시아만의 ‘식민지적 특수성’이 존재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설립된 ‘외지’ 고등교육기관은, 얼핏 보면 조선인과 재조일본인, 대만인과 재대일본인이 같은 공간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학문을 하는 공간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학생의 민족 구성비에서 피식민자가 식민자에 비해 매우 열세였고, 교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십여 년 간 조선인과 대만인 교원은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공동으로 펴낸 학우회 문예잡지 󰡔청량(淸凉)󰡕과 󰡔상풍(翔風)󰡕을 살펴보면, 잡지 구성의 주도권은 항상 식민자 측에 있었다. 이러한 기류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전기 고등교육기관 잡지 󰡔청량󰡕과 󰡔상풍󰡕의 흐름을 관통하고 있다. 먼저 1920년대의 초기 󰡔청량󰡕과 󰡔상풍󰡕에서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간에 통일된 식민지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청량󰡕에서는 유진오(俞鎭午)가, 󰡔상풍󰡕에서는 황더시(黃得時)가 각각 조선의 고전문학을 소개하거나 식민지하에 놓인 대만에 대한 애상을 피로하는 방식으로 ‘조선’이나 ‘대만’을 그렸다면, 일본인 학생이 쓴 글에서 식민지에 관한 문맥은 전근대적 조선상이나 대만상이 묻어나는 글이 중심이 되었다. 이것이 1930년대에 들어와 경기의 침체와 더불어 사회주의 담론이 식민지에 파고들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인 학생들은 추상적이 아닌 직접 보고 느낀 당대와 조선과 대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인과 대만인 또한 이 시기에는 적극적으로 식민지의 현실을 반영한 산문을 게재하면서, 양자 간 활발하고 풍부한 문예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사상의 통제가 심해지면서, 조선인은 ‘조선’을 소재로 한 창작 활동을 포기한 듯 보였고, 대만인은 대륙과의 문화적 연결을 부정하고 독자적 정체성을 담보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스스로 ‘황민화’하는 길을 택한다. 1935년 이후 발간된 제국대학 잡지인 경성제대의 󰡔성대문학(城大文學)󰡕·󰡔성대문학(城大文化)󰡕이나 대북제대의 󰡔대대문학(臺大文學)󰡕 역시, 한두 명을 빼고는 모두 일본인의 주도하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식민지 문화의 ‘외지’화를 추동하며, 시국에 따라 제국이 부여한 ‘외지’의 사명에 충실한 글로 가득 차게 된다. 이와 같이 소수의 조선인과 대만인은 문예활동 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고유한 ‘조선적인 것’이나 ‘대만적인 것’을 발견해내기도 하지만, 다수의 피식민자 학생은 식민자의 담론에 휘둘리거나, 혹은 잡지에 참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이들 ‘외지’ 고등교육기관의 문예활동은 ‘내지’ 문예사조의 흐름에 조금 늦게 반응하면서 재조일본인 혹은 재대일본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터전인 ‘조선’과 ‘대만’을 문학적으로 활용하기만 할 뿐, 그 ‘외지’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조선인과 대만인에게는 시선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1940년대의 전쟁 시국 하에서 ‘외지’ 고등교육기관 출신으로 적극적으로 일본어 문예활동을 했던 식민지 지식인으로 유진오와 황더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식민지 말기의 제국의 폭압적 전체주의 이론 속에서, 독자적인 경향을 띤 문학 영역을 구축하여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지내려 했다. 유진오는 비록 ‘국민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일본어문학을 창작하였지만, 단순히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에 영합하여 그들의 주장을 대변하기보다 ‘조선적인 것’을 담보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조선인상을 작품 안에서 관철시켰다. 또한 황더시는 시마다 긴지와 같은 제대일본인 지식인과 교류하면서도 ‘내지’ 중심의 ‘외지’문학관을 비판하며, 해방 이후 대만인 중심의 ‘대만’문학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종합하자면 본 논문에서 다룬 학내 잡지와 일본어 문예물의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식민지기 조선․대만의 고등교육기관 출신자들의 문예활동을 비교, 고찰해본 결과, 제국 일본의 식민지 혹은 ‘외지’에 대한 세 민족의 서로 다른 인식을 확인하였다. 일본인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조선’과 ‘대만’을 두고 초기에는 문화를 부흥시켜야 할 신천지로 인식하다가, 중기에는 식민지인과 공존하는 ‘외지’로, 그리고 말기에는 식민지인이 부재한 일본인 2세의 터전으로 상상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은 ‘외지’로서의 조선을 어디까지나 계발, 계승되어야 할 독자의 민족 문화를 가진, 제국의 특별한 지방으로서 파악하였다. 반면 대만인 학생에게 ‘외지’로서의 대만이란, 중국 대륙의 문화적 영향에서 벗어나 중층적인 정체성을 발견하는 고유의 공간이면서도, 제국 일본의 지방에 그치지 않고 황국(皇國)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숙명 앞에서 고민해야 하는 그들의 터전이었다.

      • 식민지 시기 한국과 인도의 문학에 반영된 하층민 삶의 비극성 연구 : 리얼리즘 소설을 중심으로

        토마르안슈만 경희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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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의 목적은 식민지 시기 한국과 인도의 문학에 반영된 하층민 삶의 비극성을 연구하는 데 있다. 아시아 국가인 한국과 인도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식민지로 전락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에 해당 시기 유사한 사회적 배경적 토대를 기반으로 문학 작품이 창작되었을 것이다. 식민지 당시, 두 나라 국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였으며 하층민들의 생활환경은 날이 갈수록 열악해졌다. 당대 국민들의 심경을 대변하듯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작가들은 협회를 만들고 일본과 영국의 식민지배 종식을 염원하는 작품을 창작하고, 문학을 통해 국민들이 아픔과 고통을 드러냈다.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는 빈곤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과 고통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문학이 선택된 것이었다. 당시 한국과 인도는 각각 일본과 영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는 정치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문화·경제까지 예속상태가 지속되었다. 그 결과 식민지 시대 작가들의 문학 작품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척박한 생활환경을 반영되었고 그들의 아픔이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는 한국과 인도의 목표는 제국주의적 억압에서 벗어나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양국 국민들은 필사적으로 제국주의적 억압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건설하길 원했고 자유를 갈망하였다. 일례로 1920년 이후 수많은 인도인들이 영국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해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영국 정부의 부정부패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특히 식민지 시기 인도에서는 다양한 시위운동을 조치한 마하트마 간디 같은 지도자가 여러 번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억압과 빈곤에 시달리던 인도 국민들은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도 없었고,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이어갈 수도 없었다. 영국 지배 아래 인도인들은 언론의 자유는 물론이고, 의견에 대한 자유조차 주장할 수 없었다. 극도로 곤궁한 삶에 고통 받던 인도인들은 영국 정부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문학을 선택하였다. 1920년대에는 리얼리즘 문인들이 협회를 만들어서 국민들의 아픔을 반영하는 소설을 본격적으로 창작하였다. 작가들은 이러한 작품을 통해 일반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국민들이 영국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도록 선동하는 역할을 하였다. 식민지 시기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산 계층은 하층민이었다. 이들은 식품과 의복 같은 기본적인 필수품조차도 구매할 수 없어, 인간 이하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양국의 식민지 문학 작품을 비교 분석해 보면 일본과 영국 지배 아래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한, 나라의 정치·사회·경제적 문제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과 인도의 식민지 문학의 근본 토대를 이해하기 위해 양국의 식민지시기에 발행된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비교하고자 한다. 하층민 삶의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 소설을 통해 양국의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기본 텍스트로 선택한 한국과 인도 소설 속 등장인물의 현실을 통해 일본과 영국 지배 아래 피지배 국가 하층민이 어떤 착취를 당하였는지를 분석할 수 있다. 제 2장에서는 식민지 시기와 분단을 경험하였던 한국과 인도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식민지 시기 한국과 인도의 당시 사회 문화적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고 분석하도록 한다. 제 3장에서는 식민지 시기 한국과 인도의 문학에 반영된 하층민의 모습을 비교 연구하기 위해 한국과 인도 각국의 소설 작품 3편을 선택하고 비교 분석함으로써 본고의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대상 텍스트는 김동인과 재넨드라 구마르, 현진건과 자이샨카르 프라사드, 최서해 와 아르 케이 나라얀의 작품 선택, 비교 분석하기로 한다. 제 4장에서는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본 양국의 소설을 비교해 보았으며, 선별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 방식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적 측면을 살펴보았다. 작가들은 작품 속 인물이 사는 시대적인 배경과 그들이 영위하는 삶을 보여줌으로써 식민지 사회의 현실에 대한 작가적 관점을 드러냈다. 이에 대상 작품을 통해 등장인물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을 때 취하는 행동 및 생활 방식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그들의 대처 방식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각 작가들의 관점과 의식에 따라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의 행동양식을 분석함으로써 작가의 시대의식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마지막 5장은 결론 부분으로 해당 장에서는 앞서 전개한, 한국과 인도의 식민지 치하에서 문학적 자생 과정 및 역사적 의의를 요약·정리해 보았다. 한국과 인도의 식민지 시기 문학 작품에 반영된 하층민 아픔을 비교함으로써 한국과 인도의 역사·문화 사회적,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해 보았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한국과 인도가 공유하는 식민지 상황을 더욱 이해하고 양국의 리얼리즘 문학의 특징 및 근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In recent years, political, economical, cultural and educational exchanges between Korea and India have witnessed a rapid increase. Relations between India and Korea have become truly multidimensional. Cultural and historical contacts between Korea and India date back to ancient times. According to “The heritag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which was written in the 13th century, a princess from Ayodhya named Suriratna traveled to Korea, married King Kim-Suro and became Queen Hur Hwang-ok in 48 AD. Lives and thoughts of the people of Korea and India have also been influenced by Buddhism. Both the countries experienced colonial rule for a very long time and various kinds of anti-colonial movements. India experienced colonialism for much longer period of time than Korea. Korea was under the rule of Japan, whereas India was under the rule of The Great Britain. As both the countries were suffering from brutal hardships under the colonial rule they got interested in each other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condition of lower class people of both Korea and India during the colonial period. Historically both the countries suffered a common phase and the realist novels that were published during this time in both the countries had a lot of things in common. Being under the rule of such powerful countries brought different kinds hardships to the citizens of Korea and India. The people who suffered the most were from the lower class. Poor people were exploited by upper classes and there was a lot of discrimination faced by the needy people. Lower class people were able to make an earning by doing various unsuitable jobs even if they suffered hardships and exploitation doing such jobs. The condition of women was also not good in both the countries. Problems faced by the lower class were depicted in novels by writers of that time in both Korea and India. Literature was used as a tool to represent the hardships of the poor people under colonial rule. British wanted to secure a monopolistic trading position in India. British capitalists wanted to make India a huge market for British goods and source of raw materials. They made huge investments in India and enjoyed monopolistic privileges. India also provided a lot of interesting and lucrative job opportunities to a large number of British upper middle-class people. British replaced wasteful warlord aristocracy by a bureaucratic-military establishment which helped in maintaining law and order in India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British did not try to improve production techniques in agriculture and made no changes in the caste system or the position of untouchables. Indian subcontinent suffered economic, political and social exploitation under British rule. During the colonial period, Western literature had an intensive impact on Indian literature. Indian literature was highly influenced by English literature which helped in the development of various kinds of novels, short-stories, essays and dramas. Works of Shakespeare were translated into several Indian languages and literature in India was enriched by the western impact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comparative analysis of the condition of lower classes in Korea and India during the colonial rule. Three realist novels of both the countries have been compared to understand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 problems faced by lower class people and how upper-class people took advantage of poor people for their own benefit. Kim dong In’s “Potato” is compared with Jainendra Kumar’s “Sunita”, Hyun-Jin Geon’s “A lucky day” with Jaishankar Prasad’s “Young Magician” and Cheo So Hae’s “Bakdol’s death” with R. K. Narayan’s “Iswaran”. These novels show the dark side of the colonial rule. Through these stories, we can understand that patriarchal society existed in both the countries and women were not given the respect they deserved. Poor people were exploited and were forced to serve as slaves to the upper class. People faced discrimination and died due to hunger and poverty. Lower class could not fulfill their basic necessities such as food, shelter, medical facilities etc. Through this kind of comparison of realist novels of both the colonies, we can get a better idea of problems of colonialism and how closely literature is connected to it. Whether its Korea or India both the countries suffered different kinds of hardships in many ways. Lower class in Korea and India faced similar problems and exploitation. Authors of both the countries have represented conditions of poverty-stricken people in different styles. The description of different characters and their problems varies according to the point of view of the writers. In this study,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Korea and India has been analyzed. Historical background of both the countries helps to understand the problems faced by Korea under Japanese rule and condition of India under British rule. This study also compares the characters of some selected realist novels and their various life situations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Korea and India. These realist novels provide a better understanding of how the writers during the colonial period used literature as a tool to incite patriotism among the people of all classes of society. The writers used their excellent skills to show the actual problems and the extent of exploitation suffered by the lower class in their novels which could not be seen in the newspapers or magazines. Literature was being used as a tool to make people realize how important it was to end the brutal rule of Japan in Korea and Britain in India. This study is basically a comparison of Korean and Indian literature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is research would help in a better understanding of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 colonial literature of the two important Asian countries Korea and India.

      • 식민지기 조선·대만 일본전통시가 비교연구 : 로컬컬러 관련 하이쿠(俳句)·단카(短歌) 문헌을 중심으로

        김보현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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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論文は拙稿「日帝强占期韓半島刊行短歌と俳句研究-1930年代朝鮮色談 論と創作物を中心に-」を発展させた研究として、植民地期朝鮮と台湾で行われた 日本伝統詩歌ジャンルについて論じたものである。 日本の植民支配にともない朝鮮と台湾で形成された日本語文学は、多様な総合 雑誌とジャンル個々の専門書籍を量産し「外地」文壇と呼ばれるほどに隆盛してい た。特に俳句、短歌のような日本伝統の詩歌ジャンルへの関心は、朝鮮と台湾にお いても植民地期の初期から末期まで途切れることなく持続し、「外地」日本語文学 における核心的なジャンルであった。また、独自の俳句と短歌結社を組織し多様な句 集と歌集を発刊するなど、他のジャンルに比べ膨大な量の文献を生み出した。 このように植民地期に日本伝統詩歌が隆盛した朝鮮と台湾には現存する文献も多 く、当時における俳句と短歌の全史を辿ることが可能である。その中でも本論文は、 朝鮮、台湾における日本伝統詩歌ジャンルの史的展開からさらに一歩進み、「外 地」俳壇と歌壇の特色、またそ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とも言える「ローカルカラー」をめ ぐる言説と関連文献を重点的に考察した。したがって、第一章では俳句と短歌関連 資料分析をベースとし、第二章から第四章を通して朝鮮と台湾の俳句と短歌ジャンル における「ローカルカラー」言説の展開様相と、実際に作られた作品を分析した。ま た、第五章では「内地」で発刊された歌集『新萬葉集』を通じて「外地」のロー カルカラーが反映された短歌が当時「内地」ではどのように受容されていたのかにつ いて考察した。 結論として、ローカルカラーが指す意味や内容は時代とジャンルによって異なってい たが、俳句では季語を中心に、短歌では風土を媒介にしてローカルカラー言説とその 文献を分析することで、「内地」とは異なる「外地」の風土と異国的な趣きがローカ ルカラーの定義であることが確認できた。 一方、朝鮮と台湾ではローカルカラーという根幹は共通していたが、個々の俳壇と 歌壇の状況や、朝鮮と台湾の風土の違いによってそれぞれが異なる展開を見せてい た。特に季語という創作規則が存在する俳句は、時として「内地」の既成の季語や その概念と摩擦も生じたが、「外地」ならではの新しい季語を作るなど、斬新なロー カルカラー言説とその副産物が出た。このような「外地」俳壇と歌壇のローカルカ ラーを巡った言説と文献は、現在の植民地のローカルカラー論を主導する同時期の 美術界や、大衆文化の政治的限界性としてのローカルカラー論と一元化できない多 元性を持っている。つまり、植民地期朝鮮と台湾の俳壇、歌壇で起ったローカルカ ラー問題は、従来の主流言説を主張する美術界の基準によっては説明できない側面 を持っていた。それは何よりも俳句と短歌が持っているジャンル的な特色と、植民地期 という時代の屬性に基因していた。 本論文では、既存のローカルカラー論を政治的な枠から見ようとすることから脱し、 それぞれジャンルが持っている特色に立脚し、日本の伝統詩歌ならではのローカルカ ラー論を立てることを目的とした。それにより植民地期「外地」の俳壇、歌壇での ローカルカラーは、政治的な側面を含めた「外地」に対する複合的な認識から形 成、発展されていたたこと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た。 본 논문은 졸고「일제강점기 한반도 간행 단카(短歌)와 하이쿠(俳句) 연구 - 1930년대 조선색(朝鮮色) 담론과 창작물을 중심으로-」를 확장시 킨 연구로 식민지기 동안 조선과 대만에서 이루어진 일본 전통시가장르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함께 조선과 대만에 형성된 일본어 문학은 다양한 종합잡지와 장르 각각의 전문 서적들을 통해 ‘외지’ 문단이라 불릴 만큼 융성하였다. 특히 문학 장르 중에서 하이쿠, 단카와 같은 일본 전통시가는 양국 모두에서 식민지기 초기부터 말기까지 단절 없이 지속되었던 장르로 ‘외지’ 일본어 문학의 핵심을 이루는 장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독자의 하이쿠, 단카 결사를 조직하여 다양한 구집과 가집을 발간하는 등 여느 장르보다 방대한 양의 문헌들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조선과 대만 양국에서는 식민지기 동안 일본 전통시가가 공통적 으로 융성하였으며 현존하는 문헌들을 통해 각국의 하이쿠, 단카의 전사 (全史)를 조망해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양국의 일본 전통시가장르 의 사적 전개 비교에서 더 나아가 ‘외지’ 하이단과 가단의 특색이자 아이 덴티티라고도 할 수 있는 ‘로컬컬러’라는 주제에 착목하여 이를 둘러싼 담 론과 그 관련 문헌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따라서 제1장에서 의 하이쿠, 단카 관련 자료 분석을 토대로 제2장부터 제4장까지는 양국의 하이쿠, 단카 장르에서 이루어진 로컬컬러 담론의 전개 양상과 실제 구작, 가작화된 작품들을 분석하였다. 제5장에서는 ‘내지’에서 발간된『신만요슈 (新萬葉集)』라는 가집을 통해 당시 ‘외지’의 로컬컬러가 드러난 단카들이 ‘내지’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규명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로컬컬러’에 대한 명칭은 장르와 시대마다 상이하였으나 하이쿠에서 계어를 중심으로, 그리고 단카에서 풍토를 기반으로 하였던 로 컬컬러 담론과 그 문헌들을 검증해 보았을 때 결국 ‘내지’와는 다른 ‘외지’ 의 풍토가 배태한 이국적인 정취를 로컬컬러라고 정의해 볼 수 있었다. 한편 양국은 ‘로컬컬러’라는 큰 줄기는 공유하고 있었으나 각각의 하이 단과 가단의 상황, 그리고 조선과 대만을 둘러싼 풍토에 따라 다른 식으 로 발전, 전개해 나아갔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계어라는 창작 규칙이 있 는 하이쿠는 ‘내지’의 기성 계어나 계어 관념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외지’만의 새로운 계어들을 만들어내며 역동적인 로컬컬러 담론과 부산물 들을 낳았다. 이러한 ‘외지’ 하이단과 가단의 ‘로컬컬러’를 둘러싼 담론과 다양하고 방대한 양의 문헌들은 현재 식민지기 ‘로컬컬러’론을 주도하고 있는 동시기 미술계나 대중문화의 정치적인 한계성으로의 ‘로컬컬러’로 일 원화 할 수 없는 다원성을 지니고 있다. 즉, 식민지기 조선과 대만의 하이단과 가단에서 일었던 ‘로컬컬러’는 기 존의 주류 담론의 잣대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정치성까지도 포함하여 ‘외지’에 대한 복합적인 인식 속에서 형성, 발전한 것임을 본 연구를 통해 규 명해 낼 수 있었다

      • 植民地時期における朝鮮人女子日本留學生の硏究

        박선미 [京都大學] 2004 해외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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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식민지지배는 조선에서 식민지본국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물결을 초래했다. 이 물결 속에 등장한 유학생, 노동자, 이주자에 관해서는, 재일조선인운동사 혹은 유학생운동사 및 재일조선인사회형성사에서 연구되어 이미 상당한 축척을 이루어왔다. 이에 비해 조선인여자일본유학생에 관한 연구는 1970년대 일본내 연구자(中塚明、李順愛)에 의해 시작된 이래, 큰 진전을 보지 못하여 왔고, 1990년 이후 한국내의 신여성연구에 힘입어 여자유학생연구가 주목받았으나, 연구성과는 매우 미약한 실정이다. 그간 한일 양국에서 단편적으로 진행된 조선인여자유학생연구는, 유학중의 활동, 유학을 통해서 획득한 새로운 의식, 귀국후의 활동 등, 매우 중요한 테마 하나 하나를 부분적으로 검토해온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제하 조선여성이 어느 정도의 수적 규모로, 왜 일본으로 건너가, 무엇을 배우고, 귀국후에는 어떠한 역할을 조선사회에서 했는지 등, 그 주제 하나 하나를 조선근대사 혹은 조선근대젠더사의 과제로 의식하면서, 역사적 이해와 분석을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조선인여자유학생의 출발에서부터 귀국이후에 이르는 전 과정을 시야에 두고 각 단계의 중요이슈를 분석하는 것을 통해, 여자유학생의 전체상을 조선근대사 혹은 조선근대젠더사안에서 보다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하 각 장의 연구과제를 요약한다. 제 1장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유학생정책의 변천에 대해 다룬다. 1910년대, 총독부는 유학생제도를 정비하여, 농공상관계의 기술관료의 육성에 중점을 두는 반면, 유학생을 통하여 다양한 사상과 풍조가 조선에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사비유학생을 최대한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1919년 3.1독립운동의 충격으로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방향전환시킨 총독부는, 식민지지배에 대항하는 조선인의 거절의 에네르기를, 학력획득과 관료적 승진이라는 ‘경쟁’안으로 흡수시킴과 동시에, 향학심과 근대지식에 대한 조선인의 욕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키기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총독부는 1920년대 들어가 일본유학을 제도상 자유화시켜, 친일세력을 육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총력전(総力戦)체제기에는, 유학생관리체제를 한층 강화시켜 갔다. 제 2장에서는, 조선인일본유학의 상황을 고찰한다. 먼저, 조선총독부 등의 자료를 이용하여, 유학생수의 추이를, 성별, 유학간 지역별, 출신지역별, 전공학과별, 관비유학으로 나누어 개관한다. 다음으로, 일본내 각대학이 소장하는 학적부 등의 자료와 전여자유학생(64명)에 대한 인터뷰조사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이용하여, 일본의 고등교육기관에 재적한 조선인여자유학생의 전공학과와 출신가정의 특징을 분석한다. 이에 덧붙여, 일본의 미션학교에 있어서의 조선인여자유학에 대해 검토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미션계여자학교가 여자고등교육의 중요한 일단을 맡고 있었는데, 각 미션계학교에는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조선의 미션학교에서 일본의 미션학교로라는, 여자일본유학의 또하나의 코스(道)에 대해 고찰한다. 제 3장에서는, 유학생의 일본유학에 관한 인식을 분석한다.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의해, 근대국가형성을 위한 조선인의 주체적 노력은 근본적인 제약을 받았지만, 일본유학생은 선진문명을 수입하여, 조선에 신문화를 일으키려 했다. 본논문에서는, 조선인일본유학생이 동경에서 발생한 잡지인 『학지광』을 분석하여, 이 점을 우선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 본논문에서는, 유학생의 인식을 조선인의 「메트로지향」에 관련지어 다루려고 한다. 식민지화에 의해, 조선은 일본제국의 외지로 설정되고, 내지(일본열도)는 일본제국의 권력과 문화의 총본산인 메트로가 되었다. 조선인은 내지에 문화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식민지지배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에 관계없이, 내지로부터 「知」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때문에 조선인은 식민지본국에서의 교육에 희망을 걸고, 많은 학생이 일본각지로 건너가 배웠거나 배우고자 꿈꿨다. 문화의 중심부를 사람들이 동경하고, 그 곳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식민지적 사회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본논문에서는 전여자유학생에 대한 인터뷰조사를 통하여, 유학에 이르는 각자의 모티브를 밝혀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본논문의 이와 같은 시도는, 종래의 조선근대사연구에 대한 근년의 새로운 문제제기를 의식한 것이다. 즉, 종래의 연구는 식민지시기를 「일본의 지배와 조선민중의 저항」이라는 도식에서 다루는 경향이 강하여, 그 결과 식민지시기에 발생한 조선사회의 정치경제적 변화와 사회문화적 변화를 보다 다면적으로 검증하는 노력이 충분히 뒤따르지 못하였다고 지적되었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식민지지배의 역사적 실태와 조선민중의 피해, 그리고 그 지배에 저항한 조선민중의 운동을 밝히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본논문의 과제에 관련지어 말한다면, 식민지지배 바로 그것이 조선인의 일본유학의 내실을 어떻게 변화시켜 갔는지를 분석하는 것이야 말로, 유학이라는 사회문화적 현상은 물론, 식민지시대를 보다 중층적이고 다양한 실체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제 4장에서는, 여자유학생의 식민지본국에서의 경험을 다룬다. 전여자유학생에 관한 인터뷰조사와, 그들이 잡지에 남긴 글이나, 서신, 전기 등을 자료로하여, 여자유학생이 식민지출신자로서, 여성으로서, 일본에서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여, 어떠한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중심으로 하여, 식민지적여성주체의 경험을 분석한다. 유학중의 경험을 남긴 기록자료가 매우 한정되어 있는 지금에 있어서, 식민지출신의 여성이 일본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계기에서, 새로운 의식을 획득하게 되는지를 상세히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본논문에서는, 1910, 20년대의 신여성연구에 의해 발굴된 자료에 기초하여, 1910년대 중반이후 여자일본유학생 가운데서 나타난 선각자의식 등을 검토함과 아울러, 여자유학생의 「식민지인」이라는 의식에 대해 고찰한다. 식민지지배를 받아, 조선인사이에서는 불가피하게 「식민지인」이라는 출신의식 및 사회문화적 신분의식이 생겨나고, 이 의식은 조선인의 행동과 사고를 다향한 형태로 규정해 갔다. 그리고 이 의식은 식민지본국에 가서 생활하는 것에 의해 더욱 첨예하게 나타나게 된다. 제 5장에서는, 여자유학생과 교류하고, 그들을 원조한 야나기하라기치베에이(柳原吉兵衛)에 대해 검토한다. 사까이시(大阪府堺市)에서 염색공장을 경영하는 신흥기업가이자, 방면위원(大阪府方面委員)으로서 지역사회의 유력자였던 야나기하라는, 경건한 그리스도교신자이자 열렬한 천황주의자였다. 1920년대, 일본내지의 조선인수가 급증함에 따라, 일본내지의 「외지사회」가 형성되어 갔는데, 야나기하라는 이러한 제국의 변화에 주목하였다. 그는 일본제국의 문화와 중심가치를 일본내지의 조선인에게 전달하고자 한, 말하자면 미션너리(선교자)와 같은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여, 조선인여자유학생과 일본거주조선인에 대한 「보호・원조」사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내선융화」에 솔선하고자 했다. 특히, 나라여자고등사범에서 배우고 있는 여자유학생을 원조하는 조직을 스스로 결성하여, 「慈父」와 같은 태도로 그들과 접해, 감화를 주고자 했다. 그의 안에는, 고등교육의 발전을 억제시킨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이나, 일본어보급이나 일본황실에 대한 충섬심을 강요하는 종래의 동화정책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조선지배에 관한 새로운 비젼이 있었다. 즉, 야나기하라는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엘리트조선인의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유학생이 일본제국의 지배이념이나 문화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여, 그것에 경복하여, 나아가서는 그것을 조선민중에 전달하는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더우기, 야나기하라는 장래에 조선가정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여성의 교육을 맡을 조선인여자교원의 양성에 힘을 쏟아, 제국의 지배이념이 차세대로 이어져 갈 수 있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과 의식을 밝힘으로써, 일본 민간인의 입장에서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공헌, 바꾸어 말하면, 일본제국을 밑에서부터 떠받친 인적 기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제 6장에서는, 여자유학생이 일본에서 어떠한 근대적 「知」를 획득했는가를, 가정학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가정학은 많은 여자유학생이 여자전문학교에서 배운 학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여성의 행동과 사고에 많은 영향을 미친 「知」였다. 먼저, 당시 일본에서 성립되었던 가정학이란, 주부나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가정내 역할을 확립시키기 위해, 나아가서는 그 역할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여성의 역할을 사회로 확대시키기 위해, 과학적 지식, 기술, 기예를 여성들이 습득하도록 한 학문이었음을 검토한다. 그리고 여자유학생이 일본에서 배운 가정학은, 당시 미국에서 동아시아로 보급되어, 세계적 규모로 통일되어 간 여성들의 「知」였음을 논증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가정학을 배운 여자유학생이 귀국후, 조선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고찰한다. 특히, 그들은 내지에서 「知」와 자격을 딴 전문가(특히 가사과교원)가 됨으로서, 급기야, 식민지권력의 일원으로 흡수되어 갔음을 고찰한다. 마지막 제 7장에서는, 1920,30년대,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여성지식인들이 현모양처라는 젠더규범을 보급시켜간 과정을 분석한다. 여성지식인들의 현모양처론은, 한말에 등장한 새로운 젠더론을 계승하여 전개되었고, 또한 1940년대의 「총후부인」「군국의 어머니」라는 권력담론에 흡수되어 갔음을 밝힌다. 본논문은 여성자신이, 20세기를 통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의식이나 행동을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구속해온 현모양처라는 젠더규범을 형성시켜 온 주체였다는 인식위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 식민지 초기 노동계급 형성의 식민지성 : 미성숙한 구조적 조건과 급진화된 계급의식

        강진연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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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식민지 시기 노동계급의 형성과정과 그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글에서 제기하는 질문은, 식민지 초기인 1920년대가 노동계급이 형성되기에 미성숙한 구조적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노동계급이 형성되었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 취하는 접근방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먼저,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이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이론적 입장에서 식민지 시기 나타난 노동쟁의를 중심으로 계급형성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이다. 또한 쟁의를 통해 노동자들이 갖게 되는 계급의식은 쟁의에 대한 자본이나 국가의 대응에 따라 그 내용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관계론적 입장을 취한다. 마지막으로 계급투쟁, 나아가 계급 형성은 단지 자본과의 경제적 이해대립이라는 측면에서만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의 영향을 받아 총체적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기 노동쟁의를 주요한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분석한 결과로 당시 노동계급이 급진화할 수 있었던 원인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먼저 역사적 측면으로, 총독부 농업정책의 결과 지주와 농민의 계급관계가 악화되고 소작쟁의가 급진화하는데 농민운동의 계급적 경험이 노동쟁의로 전수된다는 점이다. 노동쟁의가 계급적 성격을 갖게 되는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사회주의 이념과의 결합으로 설명된다. 당시 도입되었던 사회주의 이념은 노동운동이 대중에 기반한 계급적 지향을 갖도록 함으로써 노동계급 형성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증대된 노동조직의 역량은 계급형성의 물질적 토대로 작용하게 된다. 역사적, 이념적 측면이 계급 급진화의 직, 간접적 원인이 되고는 있으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쟁의의 과정을 통해 계급으로 형성된다는 점이다. 식민지시기 노동자들은 노동력 재생산이 어려울 정도의 낮은 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시간이라는 노동조건을 가졌고 대부분의 쟁의는 노동자의 생존과 연관된 문제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자연발생적인 경제투쟁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쟁의의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본과의 계급대립을 인식하고 급진적 의식을 갖게 되는데 여기에는 쟁의에 대한 자본의 대응 가령, 집단해고, 공장폐쇄 등의 극단적 대응방식이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경찰력을 동원하여 쟁의를 무산시키거나 법적 수단을 이용하여 노동자를 검거하는 식민국가의 강압적 노동통제 방식은 쟁의를 통해 드러난 계급대립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이처럼 노동쟁의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대응으로 인하여 식민지 시기 노동자들은 급진적계급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결국 식민지 시기 급진적 노동계급이 형성되는 데에는 정치와 경제의 결합이라는 식민지적 조건이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총독부 권력이 소수의 대지주 혹은 자본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고 노동을 통제함으로써 노동운동에는 계급대립만이 아니라 민족갈등의 측면이 부가됨으로써 오히려 급진적 성격의 노동계급이 형성될 수 있었다. 노동쟁의를 중심으로 계급형성을 논의하는 이 글에서 설정하는 급진적 계급형성의 지표 역시 쟁의와의 연관 속에서 파악된다. 이 글에서 급진화의 지표로 설명하는 것으로는 먼저 1920년대 전, 후반기를 거쳐 쟁의의 요구조건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요구조건이 임금과 관련된 내용이었던 전반기와 달리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단체교섭권 확립, 8시간 노동제,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지급 등과 같이 노동자들의 일반적 이해를 대변하는 계급적 요구가 등장하고 이를 제도화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또한 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노조를 조직하는 모습은 자발적 주체화의 측면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조직을 매개로 다른 지역과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쟁의에 일정한 물질적 원조를 하는 것은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감 형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다 폭력적 형태의 노동쟁의의 등장, 해고 혹은 검거된 노동자들의 복직이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의 출현 등은 급진적 성격의 현실적 표출이자 계급 연대감의 지표로 설명된다. 식민지 시기 노동계급 형성과정과 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 이 글에서는 미성숙한 구조적 조건과 상대적으로 급진화된 계급의 형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이러한 계급적 성격을 계급 형성의 식민지성으로 규정한다. 당시의 조건들 가령, 산업화 정도가 낮은 농업 중심의 사회였다는 점,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반농반노나 일용직 노동자라는 과도기적 존재양태를 가졌다는 점 등은 노동계급이 형성되기에 미흡한 구조적 조건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이에 반해 노동자들은 오히려 쟁의를 통해 급진적 의식을 갖게 되는데 사회주의 이념의 도입이나 조직적 역량의 증대가 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 쟁의의 과정을 통해 자본과 식민국가의 긴밀한 연합관계가 급진화의 직접적 계기이고 이는 정치와 경제가 결합된다는 식민지적 조건 속에서 파악된다는 점에서 이를 계급형성의 식민지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The aim of this dissertation is to shed limit on process of working class formation and its character in the colonial period. Let me put it into a more elaborated question: Despite its too immature structural conditions to form a working class in Chosen colony during the 1920s, what does the formation of relatively radical working class attribute to? In order to get the answers to this question, this thesis uses following approaches. First, based on the theoretical perspective that assumes the interaction between class consciousness and class struggle, I dealt with the class formation in the form of labor dispute during the colonial period. Second, from the relational perspective, I assumed that the contents and characters of class consciousness of workers can vary as responses of capital and the state to the dispute change. Finally, I underscored that the class struggle as well as class formation of working class should not be defined exclusively in terms of opposite economic interests against capital, but be discussed considering whole affects of social, political, ideological dimensions, as well as the economic dimension, from the perspective of holistic approach. As a result of analyzing research object, the labor disputes in the colonial period, the causalities of making working class radical can be categorized to following several dimensions. First, historically, the policy of Chosen Sotokufu(The Japanese Residency General) made both class relation between landlords and peasants worse off and peasant disputes radicalized. Labor disputes fall heir to this class experience of peasant movements. Second, socialist idea, as a direct effect, enabled the labor disputes to take form of class struggle. In other words, labor movements could obtain the class orientation based on the masses from the socialism. In addition, increased capacity of labor organizations got to function as a material base of class formation. While above each historical and ideological terms falls into direct and indirect causes among the causality categories of radicalization of working class, most mportantly, the class is formed through the dispute process in which workers take part. Workers in the colonial period were under a low wage and long time labor to the extent reproduction of labor itself was threatened. The character of the labor disputes were initially spontaneous economic struggle, because most of disputes at that time began with the problems related to workers' subsistence. Eventually, the workers got class consciousness recognizing class opposition toward capitalists through the process of disputes. Additionally, extreme responses to the dispute from capitalists such as lay off and factory closing worked as prime cause to radicalize worker's struggle. Moreover, oppressive labor control of the colonial state, either mobilizing police to repress the disputes or arresting workers by legal application strengthen the class oppositon to have expressed in the disputes. Such responses to the labor disputes from capital and state make workers get a radical class consciousness. This combination of political and economy under the colonial conditions, therefore, has a potent effect on the formation of radical working class. As national conflict added to class hostility prevailed in labor movements, as if pouring oil on the flames, radical working class can be formed, under the colonial rule of Chosun Sotokt? which is closely associated with a few major landlords or capitalists, repressing and controlling labor. In this thesis examining the class formation, revolving around labor disputes, the index of radical class formation is also related to the disputes. Regarding changes through the dispute processes as an index of class consciousness can be explained by the theoretical perspective assuming dialectical relationship between class consciousness and class struggle. The index of radicalization in this thesis is, most of all, that the claim of labor is changed through the 1920s. Whereas the claim was about wage increase in the earlier 1920s, it began to arize that class claims such as getting a collective bargaining right, 8-hour a day labor, and paying same wage to same labor content, and their institutionalization. They represented general interests of workers regardless of its specific labor content or beyond specific factory conditions. Furthermore, we can regard self-organizing of trade unions by workers during the process of disputes as an aspect of voluntary subjectification of working class, and we can consider material support to other disputes in other regions and other shops through organizations as a formation of solidarity mentality among various workers. Finally, the emergence of ever more violent labor disputes, protests to demand restoring laid-off workers and releasing arrested or incarcerated workers from prison can be explained by a expression of radical character of this movement or a index of class solidarity. The conclusion of this thesis intended to elucidate the process of working class formation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its specific character is that what made the formation of relatively radicalized working class possible is due to immature structural conditions, namely the colonialism of class formation. While the conditions at that time such as an agricultural society with small extent of industrialization, temporal and unstable status of most workers such as semi-proletarians, part-lifetime-employees, and half-peasant and half-workers can be regarded as insufficient structural conditions to form working class, workers could have radical consciousness through the disputes in the context in which the socialist idea was introduced and the organizational capacity increased. More directly, close combination of capital and colonial state functioned as a direct moment to radicalize the working class. It was possible under the colonial conditions in which the political and economy tightly interwoven with each other. Thus, it can be called the colonialism of class formation.

      • 1930년대 한국 대중음악 가사에 나타난 모던세대의 식민지 근대성 : 재즈송과 유행가를 중심으로

        박예나 경희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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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aim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colonial modernity revealed in modern generation based on jazz song and trot lyrics that were the representative sections of Korean popular song in the 1930s. At first, I examined the confused periodic background, the influx of modern culture and the formation of popular culture, and then also looked into the section of popular music and the characteristics of sections that were formed at that time. In addition, after examining the formation process of modern generation that was the newly publicized generation due to the influx of modern civilization, I investigated its emotion, the ideological characteristics, and the aspect of colonial modernity that modern generation shared. Finally, after categorizing based on vocabulary and subject appeared in jazz song and trot lyrics that modern generation enjoyed, I checked out colonial modernity embedded in this. Colonial modernity leads to trauma, which has the characteristic that it occurs from daily experience, and it also occurs in the whole members from the direct and indirect experience. Trauma from colonial modernity destroys the identity of group and presents the experience that is frustration. In addition, it can be known that colonial modernity affects the emotion of colonial main agent, awareness system, the relationship of individual, lifestyle, and the emotion structure from the violence that occurs in the daily life realm. The modern generation that was born in the complicated era has the closest relationship with colonial modernity and has the different thinking method and distinct esthetic sense from older generation because it is the generation that is newly formed with modernization of Chosun. Colonial modernity of modern generation mainly envies the modern world, and appears as the form that is divided as the colonial subject after experiencing the cultural hybridism that despises its own ethnic group at the same time. In terms of aspect of colonial modernity that modern generation shared, there were postnationalism that actually felt the limits of people in the process of being incorporated into the West due to the fascination of modern civilization, Americanism that made the West an indication of civilization and disclosed the sense of aspiration through idealization, and the free love idea and eroticism based on liberalism idea against the outlook on marriage of older generation. Colonial modernity in jazz song appeared as various aspects according to hedonism that was the characteristic of jazz song, exotismus, and mourning heart (ea-sang). In case of jazz song in the early period of formation, hedonism strongly appeared due to the effect of western music, and it can be known that jazz song also showed up mourning tone interlinked with the trend of blues and the mourning atmosphere rampant in whole society by the late 1930s. Based on the vocabulary and subject used in lyrics and the characteristic of song, I divided jazz song into one with hedonism and one with mourning heart and separately categorized the subject related to the phases of times such as the description of modern, criticism, satire, and wish for liberation. At first, in jazz song in which subjects related to hedonism appeared, subjects emerged in relation to the free love idea and eroticism that pursued the western romanticism against the feudal outlook on marriage of older generation, Americanism that pursued the modern civilization from the West , idealized the West and created the excessive space of happiness, the admiration of youth, and the theme related to escapism that was fascinated with the night culture of the pleasure-seeking city in order to forget the suffering from the reality of the colony.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reason why modern generation was absorbed in the pleasure-seeking city culture was to escape the suffering coming from the reality and there were joys and sorrows of colonial citizen on the base. Secondly, in jazz song in which subjects related to mourning heart appeared, subjects emerged in relation to the loss of national ruin that enforced to leave the hometown due to the deportation and economic reason, joys and sorrows of displaced people, farewell and waiting between a man and a woman due to the unwanted farewell, the colonial joys and sorrows and nihilism in which the resigned emotion appeared due to the impossibility of escaping the colonial reality, This mourning heart resulted from the depression and trauma of colony, making the inner side of modern generation that tried to escape the reality feel empty. Thirdly, in jazz song in which subjects related to phases of times appeared, subjects emerged in the humorous description of a person who could not adapt to the rapid era, the criticism of people who pointed out that modern was the thing Japan injected and showed severe repulsion, the satire, the aspiration for the liberation that expressed the will toward the establishment of ethnic enlightenment through the acceptance of modern civilization and the autonomy. While subjects were formed based on modernity, Americanism, and postnationalism in jazz song, it can be known that subjects in trot were affected by the mourning heart from the colonial trauma and colonial depression. In addition, in trot, various images of women appeared by different phases of times could be confirmed. Based on these characteristics and vocabulary and subject used in trot, I divided trot into one with mourning heart and one with images of women, and separately categorized songs with phases of times besides this subject. First of all, in trot in which subjects related to mourning heart appeared, subjects emerged in wandering, the mood of traveler, the emotion of nostalgia dealing with wandering, farewell and waiting between a man and a woman, and joys and sorrows and nihilism coming from the suffering that the colonial era gave. Even though most of people who left their hometown at that time went overseas to study for solving food, clothing and shelter right now and to live for better world, or selected exile by themselves, the life away from home was never easy. The farewell and waiting originated from this process settled into the emotion of lamentation and led to resign the reality, which ultimately made the main agent lethargic. Secondly, in trot in which subjects related to images of women appeared, subjects could be seen in relation to premodern images of women, and colonial images of women that were newly formed in the necessity of the colonial era. In premodern images of women, the appearance of women who waited for men leaving to battlefield or for personal reason and could not forget them emerged. On the other hand, subjects appeared in relation to women in prostitution world where Korean geisha that frequently emerged at that time appeared. Even though they were women in prostitution world, they had to protect pure love, which implied the fantasy of men in order to coerce premodern images of women to modern girl coupled with the purity ideology. Thirdly, in trot in which subjects related to phases of times appeared, subjects emerged in relation to the hedonic modern experience, the military country with the political purpose for publicizing, instigating and advertising the war basis, and the will to overcome that expressed the hope for liberation in the humiliating situation. In the double group national anthem, the purpose to actively encourage the participation of war and to force women to have the appearance of women in the rear ground and maternity of a military nation for the rear support. In addition, in the song that deals with the aspiration for liberation, it consistently expressed the will to realize the forbidden utopia, the independence, and to overcome the colonial reality. It can be known that the colonial trauma, postnationalism, Americanism, the free love idea and eroticism all appeared in jazz song among the aspects of colonial modernity. In addition, as the aspect that deals with various emotions and subjects in one song of jazz song appeared, this is seen as one of fragmented aspects coming from colonial modernity. On the other hand, one emotion and one subject are dealt with in one song in trot. In addition, in case of trot, the colonial trauma and colonial depression appeared as the main aspect, which was associated to the fact that most trots gazed at the era from the position of victim of modern civilization. In addition, the subjects that are commonly dealt with in two sections appear and these show differences per sections. There is a difference in that while jazz song deals with relation of lovers in farewell and waiting between a man and a woman, trot deals with conjugal relations. Even though commonality exists in that they deal with common aspiration of society member in case of yearning for liberation, difference exists in that jazz song expresses liberation by alluding to natural object, but trot expresses nation’s liberation by alluding to paradise. Even though jazz song and trot deal with similar subjects, there are differences in that while jazz song tried to awaken the suffering and joys and sorrows through hedonism, trot mainly showed the self-abandonment emotion by accepting the suffering and sorrow from the reality. However, these two aspects were the sign of self-collapse and emotion division that the colonized underwent, and they were associated with the violence that colonial modernity occurred in the daily realm. Therefore, modern times were a breakthrough that could escape the gloomy reality, the colony, but it can be confirmed that it was actually a mechanism to enable to experience the position of the colonized. Colonial modernity is representative of crowd’s emotion at that time, and is the emblem of era that can recognize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rough this. Because complicated phases of the times are connotated in colonial modernity, difficulties exist to investigate all with some aspects. However, in this study, meanings exist in that this is the study to open the port about the popular music and colonial modernity that have not been discussed in the academic circles. I hope that the study investigating colonial modernity of modern era through jazz song and some lyrics of trot will be meritoriously utilized in future research and the study about colonial modernity in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popular music will be consistently performed. 본 연구의 목적은 1930년대 한국 대중가요의 대표 갈래 중 재즈송과 유행가의 가사를 바탕으로 모던세대에게 나타난 식민지 근대성을 살펴보는 데에 있다. 먼저 식민지라는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과 근대 문화의 유입, 대중문화의 형성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당시 형성된 대중음악의 갈래와 갈래별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또한 근대 문물의 유입으로 새롭게 공론화된 세대인 모던세대의 형성과정과 특징에 대해 살펴본 다음 이들의 정서와 사상적 특징, 모던세대가 공유하던 식민지 근대성의 양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모던세대가 향유하던 재즈송과 유행가를 가사에 나타난 어휘와 주제를 바탕으로 분류한 다음 이에 내재된 식민지 근대성에 관해 확인해보았다. 식민지 근대성은 식민지 트라우마와 이어지는데 식민지 트라우마는 일상 경험에서 발생한다는 점, 직·간접적인 경험에 의해 구성원 전체에게 발생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 근대성에 의한 트라우마는 집단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좌절이라는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식민지 근대성은 일상 영역에서 나타나는 폭력으로 식민 주체의 정서, 의식체계, 개인의 관계, 생활 방식, 감정 구조 등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복잡한 시대에서 탄생한 모던세대는 식민지 근대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조선의 근대화와 함께 새롭게 형성된 세대로 기성세대와는 다른 사고방식과 독특한 미감을 가진다. 모던세대의 식민지 근대성은 주로 근대세계를 선망함과 동시에 자기 민족을 멸시하는 문화적 혼종을 겪으며 식민지 주체로서의 분열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모던세대가 공유하던 식민지 근대성의 양상으로는 근대 문물에 심취하여 서구에 편입하고자 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한계를 체감하며 주체를 분열시켰던 탈민족주의, 서구를 문명에 대한 지표로 삼으며 이상향화하며 동경 의식을 드러낸 아메리카니즘, 기성세대의 결혼관에 반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자유연애 사상과 에로티시즘이 있었다. 재즈송에 나타난 식민지 근대성은 재즈송의 특징인 향락성, 이국성, 애상성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형성 초기 재즈송의 경우 서양음악의 영향으로 향락성이 강하게 나타나나 193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며 블루스의 유행 및 사회 전체에 만연한 애상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재즈송 또한 애상적인 어조를 띄게 됨을 알 수 있었다. 가사에 사용된 어휘 및 주제, 곡의 특징을 바탕으로 재즈송을 향락성이 나타난 재즈송, 애상성이 나타난 재즈송으로 구분하였으며 모던에 대한 묘사, 비판, 풍자, 광복에 대한 염원 등 시대상과 관련된 주제는 별도로 분류하였다. 첫 번째, 향락성과 관련된 주제가 나타난 재즈송에서는 기성세대의 봉건적인 결혼관에 반대하며 서구적인 낭만성을 추구하던 자유연애 사상과 에로티시즘, 서구에서 온 근대 문물을 추구하며 서구를 이상향으로 여기며 과도한 행복의 공간으로 연출했던 아메리카니즘, 청춘에 대한 예찬, 식민지라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을 잊기 위해 향락적인 도시의 밤 문화에 심취한 현실 도피와 관련된 주제가 나타났다. 모던세대가 향락적인 도시문화에 심취했던 것은 현실에서 오는 고통에서 도피하기 위함으로 그 기저에는 식민지민의 애환이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애상성과 관련된 주제가 나타나 재즈송에서는 강제 이주 및 경제적인 이유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망국에 대한 상실과 실향민의 애환, 원하지 않았던 이별에 고통받아야 했던 남녀 간의 이별과 기다림, 식민지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의 정서가 나타나는 식민지적 애환과 허무주의와 관련된 주제가 등장했다. 이러한 애상성은 식민지에서 비롯된 우울과 트라우마에 기인한 것으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모던세대의 내면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 시대상과 관련된 주제가 나타나는 재즈송에서는 급격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인물에 대한 해학적 묘사, 모던은 일제가 주입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모던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보이던 이들의 비판, 풍자, 근대 문명 수용을 통해 민족 계몽을 이루고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표출했던 광복에 대한 염원에 대한 주제가 나타났다. 유행가에 나타난 식민지 근대성은 재즈송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재즈송에서는 근대성과 아메리카니즘, 탈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주제가 형성되었으나 유행가에서의 주제는 식민지 트라우마와 식민지 우울에서 비롯한 애상성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유행가에서는 달라진 시대상에 의해 나타난 다양한 여성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과 유행가에 사용된 어휘와 주제를 바탕으로 유행가를 애상성이 나타난 유행가, 여성상이 나타난 유행가로 구분했으며 이 외의 주제를 다룬 곡은 시대상이 나타난 곡은 별도로 분류했다. 첫 번째, 애상성과 관련된 주제가 나타나는 유행가에서는 방랑, 나그네의 정취, 유랑을 다룬 망향의 정서, 남녀 간의 이별을 다룬 이별과 기다림, 식민지라는 시대가 주는 고통에서 비롯된 애환과 허무주의를 다룬 주제가 등장했다. 당시 고향을 떠나던 이들의 대부분은 당장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살기 위해 유학을 하러 가거나 스스로 망명을 선택했으나 타향살이는 절대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비롯된 이별과 기다림은 한탄의 정서로 자리 잡아 현실을 체념하게 하였으며 결국 주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여성상과 관련된 주제가 나타나는 유행가에서는 신여성과 대조되는 전근대적 여성상, 식민지라는 시대의 필요로 새롭게 형성된 식민지 여성상과 관련된 주제를 볼 수 있었다. 전근대적 여성상에서는 전장에 떠나거나 개인적인 이유로 떠나야 하는 남성을 기다리며 잊지 못하는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편에서는 당시 빈번하게 등장하던 기생 화자가 등장하는 화류계 여성과 관련된 주제가 나타났다. 이들은 화류계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순정을 지켜야 했는데 이는 모던걸에게도 순결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전근대적인 여성상을 강요하기 위한 남성의 판타지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시대상과 관련된 주제가 나타나는 유행가에서는 향락적인 근대적 체험, 전시체제를 홍보하고 선동·선전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성을 가진 군국가요,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광복에 대한 희망을 표출한 극복의 의지와 관련된 주제들이 나타났다. 이중 군국가요에서는 전쟁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고자 하는 목적과 후방 지원을 위해 여성에게 총후부인의 모습과 군국의 모성상을 강요하고자 하는 목적이 드러났다. 또한 광복에 대한 염원을 다룬 곡에서는 독립이라는 금지된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며 식민지라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속적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재즈송에서는 식민지 근대성의 양상 중 식민지 트라우마, 탈민족주의, 아메리카니즘, 자유연애 사상과 에로티시즘이 모두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재즈송의 곡의 한 곡에서 여러 가지 정서와 주제를 복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양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식민지 근대성에서 비롯된 분열적인 양상 중 하나로 보인다. 반면 유행가에서는 한 곡에서 한 가지 정서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유행가의 경우 식민지 트라우마와 식민지적 우울이 주된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대부분의 유행가가 근대 문물의 피해자인 처지에서 시대를 바라보고 있음과 관련이 있다. 또한 두 갈래에서 공통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가 나타났으며 이는 갈래별로 차이점을 보인다. 남녀 간의 이별과 기다림에서 재즈송은 연인 관계를 다룬다는 점, 유행가는 부부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염원의 경우 사회 구성원의 공통된 염원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존재했으나 재즈송은 광복을 자연물에 빗대어 표현했다는 점, 유행가는 조국 광복을 낙원으로 빗대어 표현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존재했다. 재즈송과 유행가는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재즈송은 시대에서 오는 고통과 애환을 향락성으로 환기하고자 했다는 점, 유행가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자포자기적 정서가 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였다. 그러나 두 가지 양상 모두 피식민지인으로서 겪게 되는 자아 붕괴와 정서 분열의 징조였으며 이는 식민지 근대성이 일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임과 관련이 있었다. 때문에 모던세대에게 근대는 식민지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돌파구였으나 실상은 피식민지인이라는 처지를 경험하도록 하는 기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식민지 근대성은 당대 대중의 정서를 대표하며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알아볼 수 있는 시대의 표상이다. 식민지 근대성에는 복잡한 시대상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몇 가지 양상으로 모두 살펴보기에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학계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대중음악과 식민지 근대성에 대해 포문을 연 연구라는 점에서 의의가 존재한다. 재즈송과 일부 유행가의 가사를 통해 모던세대의 식민지 근대성을 살펴본 본 연구가 훗날 진행될 연구에서 가치 있게 활용되기를 바라며 일제강점기 식민지 근대성과 대중음악에 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행해지기를 바란다.

      • 日帝 植民地 經濟가 解放後 韓國貿易에 미친 影響에 관한 硏究

        오병석 檀國大學校 1994 국내박사

        RANK : 247807

        이 論文은 日帝植民經濟가 韓國貿易에 어떤 影響을 미쳤는가를 考寮함으로써 現在의 貿易環境에 適應하는데 參考 寄與하고자 한다. 冷戰終熄以後 世界貿易環境은 급변하고 특히 韓國이 속해있는 동아시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와같은 狀況下에서 韓國의 經濟 특히 貿易은 모든 면에서 현명하게 運營되어야한다. 여기에 日帝植民地經濟의 結果 즉 影響은 參考價値가 있을 것이다. 本 硏究의 構成은 총 6章으로 構成하였으며 硏究 方法으로는 書誌 및 可用資料의 分析方法을 취했으며 최근 特定 論旨에도 약간의 批評을 가하였다. 傳統的 韓國經濟는 農業 手工業 그리고 六矣廳과 市廬商人들로 構成되어 있었다. 이러한 傳統的 商業은 18-19c에 衰退 하였으며 그자리는 日本商人들에 의해서 메꾸어 졌다. 日本商人들은 韓國의 港口로 부터 서울을 비롯한 內陸地方까지 浸透하여 왔다. 그들은 쌀과 금, 은 그리고 도자기류를 輸出하였고 주로 유럽 製品이지만 工業製品을 收入 販賣하였다. 러 · 일戰爭을 前後하여 日本資本과 建設業者들이 鐵道等 社會間接資本의 敷設을 위하여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日木 軍隊의 輸送誘要를 充足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러 ·일전쟁직후의 保護條約으로 인해서 日本은 韓國의 通常外交國防에 全權을 行事하여 日本은 韓國의 農業과 鑛業에 까지도 진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日本은 韓國의 土着資本 形成의 발아 기회마저 抹殺하였다. 合倂때에 그들온 韓國의 舊關稅据置를 宣言하였는바 이것은 명백히 韓國과 日本의 差別化를 의도하였던 것으로 韓國의 勞賃을 日本人의 勞賃보다 低位에 머물게 함으로서 日本이 韓國人勞勳力을 극도로 적은 報酬下에 착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와같은 狀況下에 日本産業은 급격히 發展하여 韓國市場을 그들 工業製品의 處分處로 利用하게되었으며, 이것은 韓國資源의 利用과 더불어 外見上 傳統的 植民地貿易과 같은 形態를 취하고 있으나 그 착취 방법의 차이를 간과하여서는 않될것이다. 이것은 특히 人力과 物資의 動員에 있어서 그렇다. 이것은 특히 송탄유 採取에 動員한 人力의 문제인데 그때 動員된 인력은 농촌의 모든 人口와 심지어 國民學校 兒童까지 포함해서 無料로 動員하였던 것이다. 物資動員과 關聯해서 더욱 심했는데 穀食과 日用金屬製品을 供出하였으며 그것은 配當量에 미달하면 家宅授索을하고 거기서 이들 物資가 發見되면 軍警察에 끌려가서 苦難을 당했다. 結果的으로 獨立된 韓國온 絶對貧困만이 남아있었고 貧弱하나마 있었던 消費財 産業은 日本産業과 北韓에 있었던 産業과의 系列關係가 단절됨으로해서 可動 및 供給의 길이 없었다. 雪上加霜으로 避難民과 歸還民의 流入은 消費需要를 격동시켜 인플레이션 現象이 불가피하게 일어났으며 여기에는 막대한 外國援助도 큰 효과가 없었다. 貧困의 惡循環은 産業化를 沮害하였고 이 惡循環을 탈피하는 唯一한 길은 外資導入밖에 없었다. 日本의 植民地 經濟의 가장 중요한 結果는 絶對貧圈 이었으며 그것은 貧困의 惡循環을 남고 土着資本形成을 沮害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약 20여년간 支配的이었던 對美貿易 赤字와 對美依存性은 美 軍政과 6.25때문이며, 美軍政과 國土分斷은 역시 日本植民地이었었기 때문에 派生된 結果라고 생각된다. 日本의 植民地經濟는 工業化의 遲延을 가져온 貧困과 그에 따라서 消費財 供給의 심한 不足과 그로인한 상당기간 對美 輸入超過와 따라서 美國援助에 依存할 수 밖에 없는 狀況을 남게 하였다. 以上과같이 本 論文에서는 日帝下 植民地經濟를 分析하고 이러한 植民地 經濟狀況이 解放後 韓國의 貿易에 미친 影響을 硏究하였다. This paper is to study Japanese colonial economy and cousequence to independent Korea's foreign trade, in the hope to be utilized as a reference in addapting to the current economic environments. The worlds trade envronment is drastically changing since the cold war become to an end. This is more so in the eastem Asia where Korea is in the middle of the region. Under such circumstances Korean economy especially trade will have to be managed wisely in all directions, east, west and north. Here, the study of the counsequences of Japanese colonial economy will bear the value. The study is based on existing papers articles and other available matehals, and some coments on recent arguments are made. Traditional economy of Korea was comprised of agriculture, handicrafts, licensed oficial suppliers and private merchants. These traditional merchandising system has gradually been faded away duhng 18 century and 19 century and much have been replaced by Japanese merchants Japanese merchants penetrated into Korean market from harber to Seoul and other inland regions, and they exported rice, gold, silver and pottehes and china wares and inported and sold manufactured goods mostly of Europe. Arround the Russo-Japanese war Japanese capital along with construction companies came in for laying railway and other social over head capital for the purpose of facilitating the transport requirements of Japanese army. Soon after the Russo-Japanese war Korea was forced to become Japanese protectorate when after Japanese dominated Korea's trade and foreign policies as well as national deference followed by colonialization, under which Japanese advanced into Korea's aghculture and mining. Thus Japanese took away the opportunity of budding local capital formation At the time of annexation Japanese declared that Korean customs tariff remain effective. This declaration, apparently, was aimed at differenciating Korea from Japan in order to leave Korean living standard as it was, so as to Korean wages maintaned at the level a bellow that of Japanese, which without doubt benefitted Japanese militia and industries by exploiting Korean labor with the least remuneration Under such circumstances, Japanese industries developed rapidly and began to utilize Korea as their market for disposal of their products This along with the use of Korean resources apper to be the same as the coventional colonial trade. However, one thing not to be over-looked is that their method of exploitation differ This is typcally so in labor and material mobilization Examrpulary case in labor mobilization is the "extracting oil from pine trees," for which mobilized were all the rural populaces including even phmary school children free of change. Material mobilization was so brutal as to search houses and cotages for grains or metal-made daily necessities which were subject of "assigned government procurement." or donation, if found hidden the possesor were they war dragged to the police and tortured Cousequently, independent Korea was left with only the absolute purverty. Consumer industries poor as it may be had no way to operate and supply daily necessities as they were closely linked with Industries in Japanese and North Korea Moreover, inflow of refugees and repatriates increased the consummer demand. Resultant hiper inflation was inevitable, despite the enormous inflow of foreign aid. The persistant vicious circulation of purverty hampered Industhalization. And the only way to break this introduction of foreign loans.

      • 식민지시대 국내 좌파 지식인에 관한 연구 : 사회주의 당조직활동을 중심으로

        전상숙 이화여자대학교 1997 국내박사

        RANK : 247807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perform a study of Koreas leftist intelligentsia during the Japanese colonoal period. The study is focused on those who led the socialist movement and were involved in the case surrounding the formation of the Communist Party and will examine their ideological inclinations, the socio-economic conditions and how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evolved under Japanese occupation. The leftist intelligentsia during the colonoal period were those who lost western supporters following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and sought to build a new movement for national independence based on Russias Bolshevik Revolution and the Soviet Unions revolutionary government. As the result, their characteristics were discussed at the level of the socialist nationalistic movement. While the focus of such a discussion became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re was not much research conducted on the existence of such a leftist intelligentsia from the class or categorical point of view . Therefore the study of their ideology and the socio-structural charateristics which lead to the characterization of the intelligentsia of the colonial period is a crucial point in understanding the thinking of the period. The study of the leftist intelligentsia during the colonial period reveals the importance of the socialist movement in the Anti-Japanese movement and the anti-imperialist revolutionary movement which was prevalent throughout the colonial period. In addition, the study reveals a part of the anti-Japanese nationalist movement history and allows a later forms of the leftist intelligentsia which led to the formation of the Communist Party was from the beginning based on the theoretical guidance and principles of the Comintern. The efforts by the early leftist intelligentsia to develop an independent movement from the Comintern were undermined by the lack of theoretical leadership, realistic lack of funds and the Japanese ruling policies which made the situation even worse. And in the end these factors led to the group following the lead of the Comintern. Under such circumstances, there were many leftist intelligentsias who defected because they could not endure the pressure or the persuation of the ruling system. These defections were more the result of the force of the ruling system rather than a shifting of their theories. Nevertheless, these results were by themselves favorable to the Japanese situation. And considering their effects on the public, resulted in an effective ruling policy to suppress the nationalist movement. Therefore, the trend of the leftist intelligensia can be compared to that of intellectuals trying to discover a new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in communism after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Of course,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existed, both were based on te defiance or the perception of contradictions of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time. And showed one aspect of the intelligentsia in trying to form a solution. 이 논문의 목적은 식민지시대 국내 좌파지식인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식민지시대 국내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던 공산당 조직사건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념적 지향과 사회경제적 배경 및 둘 사이의 연관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 하에서 어떻게 대응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 좌파 지식인들은 3.1운동 이후 서구 진영으로부터 민족독립의 지원 가능성을 상실하고, 일제의 문화통치라는 변모된 통치상황에서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과 소련 혁명정부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으로부터 새로운 독립운동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지식인들이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이들의 성격이 논의되어 왔다. 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과 지식인의 역할이 이러한 논의의 중심이 되었지만, 계층적 또는 집단적인 관점에서 좌파 지식인의 존립여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이 갖고 있었던 이념과 사회구조적인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식민지시대 지식인의 존재양식을 밝히는 것이 이 시기의 상황인식에 중요한 관건이 된다. 식민지시대 좌파 지식인에 대한 연구는 식민지시대 사회주의운동이 항일민족운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및 그것이 식민지시대 전 기간에 걸쳐 지속된 반제혁명운동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 상황인식에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식민지시대 항일민족운동사의 한 부분을 밝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전체적인 성격을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 논문에서는 식민지시대 공산당 활동 관계자들과 그들의 당조직활동에서 논의된 대표적인 전략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의 정책에서 발생한 이른바 조선공산당 조직사건에서 연유된 좌파 지식인들 중에서 표본을 추출하여 이들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이념적 지향성에서의 연관성문제를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식민지시대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경제적 배경에서는 대부분 쁘띠부르조아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이를 쁘띠부르조아 ??년지식인의 출현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의한 신학문과의 접합을 통해서였다. 신학문을 통한 쁘띠부르조아 좌파지식인의 형성은 민족주의독립운동의 한계를 대체할 신지식, 신사상에 대한 이론적 측면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성격은 그들이 쁘띠부르조아 지식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제국주의 지배체제하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들이 사회주의를 수용한 동인으로서의 민족주의적 지향성은 초기에는 코민테른과의 관계에서 항일민족해방운동의 독자성을 찾기위한 노력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코민테른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이 중요했던 그들에게 있어서 코민테른으로부터 독자성을 갖는데는 이론적인 측면에서나 실천적인 측면에서 모두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 지배정책하에서의 간헐적인 검거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므로 공산당재건운동으로 표현된 후기좌파지식인운동은 처음부터 코민테른의 방침과 이론적 지도에 따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코민테른으로부터의 독자성의 영역을 구축하려던 식민지시대 초기 좌파 지식인들의 노력은 실천운동을 지도할 논리적 미성숙과 현실적인 자금문제,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좌절되었으며, 오히려 코민테른에 추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지배체제의 강제와 회유를 견디지 못하고 전향하는 좌파지식인들도 속출하였다. 이들의 전향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논리의 전환의 결과라기 보다는 지배체제의 강제력에 의한 행동의 전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것은 또한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일제에게 상황의 호전이었고, 그것이 일반 민중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한다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효과적인 지배정책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좌파 지식인들의 전향은 3.1운동 이후 지식인들이 공산주의로부터 새로운 민족독립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것과 비견될 수 있다. 물론 양자의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모두 기성 정치상황에 대한 불만 또는 모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한 지식인의 한 행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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