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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國文學의 文獻批判的 硏究方法試考 : 山城日記의 本文 轉化 批判 硏究

        김순실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1959 국내석사

        RANK : 248670

        古典的인 轉寫本을 檢討한다는 것, 즉 原文再建을 꾀한다는 것은 비단 國文學에 있어서만이 必要不可缺한 것은 勿論 아니고 科學的인 學問 全般에 걸쳐서 一段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作品을 轉寫한다는 것은 곧 그 轉寫本에 誤謬을 만든다는 말과도 通할 수 있는 것이다. 人間의 行爲에 誤謬가 隨伴한다는 것은 빼놀 수 없는 現實的인 現象이다. 그리고 原作者의 原年記本이라 할지라도 誤謬는 반드시 隨伴되는 것이다. 이 두 現象은 心理學的인 하나의 빼놀 수 없는 事狀이기 때문이다. 한 作品이 곧 그 作者의 思想의 結晶이라고 한다면 그 作品에 誤謬가 있어선 完全한 그 作者의 思想이 反映되었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東洋과 西洋의 모든 學者들은 自己가 專修하려는 學問의 對象이 되는 作品과 文獻을 우선 正確하며 正當하고 純粹한 텍스트의 位置에 올려놓으려고 努力하는 것이 그의 學問의 基礎工事였을 것이다. 이 第一次的인 學問의 準備가 끝나지 않고 즉 原鑛物과 같은 素材의 文獻을 學問의 對象으로 삼는 다는 것은 곧 作戰計劃없는 戰鬪와 같은 것이요 모래 위에 집 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만큼 文獻批判的 措置란 곧 그 學問의 與否를 決定짓는 것이 된다. August Boeckh 는 「批判」과 「解釋」의 原理를 古代學的文獻學의 二大原理로 했고 Gustaue Rudler는 「批評은 文獻과 같이 行하여진다. 그리고 學者의 最初의 配慮는 自己의 主題에 關하는 文獻을 調査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라 하며 lilliographil의 重要性을 說破하고 「原狀修復」에 關하는 方法論을 말하였다. 또 梁啓超는 그의 著「淸代學術槪論」에서 많은 僞書 및 書中의 錯亂을 容易히 識別하여 精力의 浪費를 防止하였다. 胡樸安은 그의 著 「校讐學」에 있어서 「泊書」와 「治學」의 內容을 說明하고 治書가 文獻 그 自體의 眞實性을 求하는 것이요 治學은 그 文獻에 씨워진 內面的인 意味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고 論한 다음에 「治學은 반드시 書本으로써 根據를 삼는다. 萬若 書本이 眞이 아니면 닭는學도 반드시 敷淺誤繆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治書는 곧 治學의 基本工夫다 이를 判定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 했고, 蔣元卿은 그의 著 「校讐學史」에서 「古書의 傳流는 곧 벌써 本來의 面目을 잃는 것이다. 後人은 每日 誤書를 읽어 作者의 本意를 잘못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一字의 是非로써 學者는 □□의 爭辯을 引起한다. 故로 교수의 學은 實로 學者에 반드시 있지 않으면 안될 基本學術이 되어야 한다」라 하였다. Paul maas는 그의 著 「本文批判」에서 가장 可能的으로 가까운 본문의 整定이다.」라고 하였다. 以上의 文獻學者들의 말과 같이 文獻批判 즉 本文批判은 그 學問의 第一步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意味에서 나는 그 方法을 우리 國文學에 援用함으로써 國文學의 正道를 열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의 獨創的인 그 方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 方法을 배우는 面에서 日本의 有名한 文獻學者인 池田龜鑑氏의 「古典の批判的處置に關する硏究」의 一部方法을 援用하기로 하였다. 즉 池田龜鑑氏의 方法으로써 우선 「山城日記의 三異本을 그 對象으로하고 原文을 索出코저 하였으나 具體的인 結論은 얻어지지 못했으나 좀더 時日을 갖는 동안에 그 曙光을 얻을 것 같은 餘有는 把握하였다고 본다. 第一部에선 池田氏의 方法論을 攝取했고 第二部에선 池田氏의 文獻批判 즉 本文批判의 方法으로써 「山城日記」를 整理했고 第三部엔 「山城日記」의 세 異本들 가운데 서로 異文된 곳을 索出하여서 對照하여 놓았다. 이 第三部의 異文對照를 잘 주물으므로써 그 本文의 再建이 가능하리라고 自信 하는 바이다. 이 課題는 時日이 解決할 것으로 믿는다. 비단 「山城日記」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古典的 存在인 모든 轉寫本의 異本이 以上의 方法으로써 一次 整理되지 않고 如前히 流布된다면 우리의 學問은 結局 하나의 空念佛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旣往에도 大堂 崔南善 爲堂 鄭寅普 先生들의 業績이 없는배는 아니나, 좀더 科學的인 이 方面의 硏究가 切實히 要請되는 오늘이다.

      • 역주《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이영삼 전남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석사

        RANK : 199534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은 석지형(石之珩, 1610~미상)이 27세 때에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 이하 工曹佐郞이라 함)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겪은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전의 배경에서 시작하여 1636년 12월 9일 청이 조선의 국경을 넘은 날부터, 이듬해 인조(仁祖, 1595∼1649)가 항복한 후 소현세자 등이 청에 압송될 때까지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본 번역 논문인 《남한해위록》은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며 간행된 해는 미상이다. 본 필사본은 1책 37장(74면)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면부터 66면까지는 석지형이 직접 임금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서 겪은 병자호란을 기록한 것이고, 그 나머지는 구봉 송익필(宋翼弼, 1534∼1599) 등의 시와 갑인년(1854, 철종5) 11월 29일 수원 유생들이 당시 경상도 관찰사 조석우(曺錫雨, 1810~1878)가 그의 고조부인 조하망(曺夏望, 1682∼1747)의 문집인 《서주집(西州集)》을 간행한 것에 대해 토죄하기를 청하는 통문(通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인 《남한해위록》은 병자호란 당시 27세의 공조 좌랑이었던 석지형(石之珩)이 남한산성에서 겪은 일을 기록하고, 난이 끝난 이듬해인 1638년(28세, 判官)에 자편(自編)하여 서문과 발문을 지어서 세상에 알린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쓴 서문과 발문에서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간 이후 자신이 목격한 사실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여진족이 금을 거쳐 청에 이르는 연원을 간략히 밝히고, 이어 정묘호란과 그 이후의 조선과 후금과의 관계 및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 양상을 기록하였다. 이어서 1636년 12월 병자호란의 발발에서부터 이듬해 1637년 11월까지, 왕실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나누어 피난하게 된 상황, 남한산성에서의 방어와 청군과의 소규모 전투 내용, 남한산성에서의 군량 및 물자의 부족 상황, 청과 조선 사이의 강화회담의 진행 과정과 척화파 주화파 간의 대립 양상, 강화도 함락에 이은 인조의 항복과 환도, 이후 세자와 대군 및 대신들이 청으로 압송되는 모습 등을 시간 순으로 기록하였다. 특히 남한산성에 피난한 기간은 매일매일 날짜를 밝히며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날인 1636년 12월 9일부터 이듬해 3월 6일까지는 12월 12일, 13일과 1월 7일, 8일을 제외하고 매일 썼으나, 그 이후 4월부터는 월별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병자호란과 그 뒤 사후 처리에 관한 기록은 총 66면 분량이다. 이어서 67면부터 74면까지는 최초 필사자인 이운회(李雲會)가 추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본 논문을 번역함에 《남한해위록》과 관련이 없는 67면부터 74면까지는 제외함을 밝혀 둔다. 병자호란을 기록한 책은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仁祖實錄》과 당시 대표적 척화파인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쓴 《南漢紀略》, 최명길의 《丙子封事》, 공조참의 나만갑(羅萬甲)이 쓴 《丙子錄》, 승려였던 법홍(法弘)이 쓴 《南漢紀略》, 석지형이 쓴 《南漢日記》와 《南漢解圍錄》, 그리고 이긍익이 쓴 《練藜室記述》의 제25권, 제26권, 남급(南?)의 《南漢日記》, 어한명(魚漢明)의 《江都日記》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김상헌이 쓴 《남한기략》은 필사본으로 1636년 12월 12일 저자가 고향인 경기도 양주의 석실(石室)에서 변보(變報)를 전문(傳聞)하였을 때부터 다음해 1월 삼전도(三田渡)에서 왕이 항복한 후 환도할 때까지의 사실을 일기체로 서술하였다. 《남한기략》은 산성의 수비 및 척화파(斥和派)·주화파(主和派) 사이의 알력을 척화파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특징이며, 병자호란 당시 조정의 동향과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갈등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최명길의 《병자봉사》는 말 그대로 병자년의 상소문을 모은 책으로, 당시 척화파인 김상헌과 주화파인 저자 사이에 서로의 주장을 치열하게 전개해 나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남한기략》과 《병자봉사》를 비교하여 살펴보면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는 비록 갈등관계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이해관계가 아닌 나라를 아끼는 같은 마음에서 치열하게 서로의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만갑이 쓴 《병자록》은 《白登錄》, 《丙子南漢日記》라고도 하며, 화의(和議)의 진행과 농성(籠城), 척화파(斥和派)의 화의 반대와 항복 등의 경과를 생생하게 기록하여, 병자호란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승려인 법홍이 쓴 《남한기략》은 필사본으로 1권 1책이며, 주로 남한산성 안에 있는 사찰의 연기(緣起)와 승군설치(僧軍設置) 등의 경위를 밝히기 위하여 쓴 것이다. 그러므로 병자호란과 산성제도(山城制度)·군사제도·승군(僧軍)에 관한 일 등을 알아보는 데 참고가 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병자호란 관련 기록을 수집하여 모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남급의 《남한일기》는 석지형의 《남한해위록》과 유사하게 병자호란 당시의 기록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고, 더하여 강도관련 기사와 당시의 군권을 장악한 장수들의 공과를 서술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출성할 때 남급도 함께 출성하여 당시 직접 목격한 것을 기록한 부분은 다른 어느 기록보다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석지형이 쓴 《南漢日記》는 청군의 군비상황과 부대배치, 적장의 인적 사항과 당시 남한산성의 전란방어책과 청군의 격퇴상황 등이 면밀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1992년 경기도 광주문화원에서 번역하였다. 어한명(魚漢明)의 《강도일기(江都日記)》는 수운판관이었던 저자가 병자호란 발발 직후 수운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피난민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경기도 김포의 통진 나루에서 직접 목격하고 생생히 증언 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강화도 일대에서 벌어진 피난 상황을 직접 기록함으로써 병자호란 당시의 이면 정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남한해위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전의 배경에서 시작하여 1636년 12월 9일 청이 조선의 국경을 넘은 날부터, 이듬해 인조(仁祖, 1595∼1649)가 항복한 후 소현세자 등이 청에 압송될 때까지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저자가 자신이 직접 쓴 서문과 발문에서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간 이후 자신이 목격한 사실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듯이, 그 내용은 가감 없이 왕실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나누어 피난하게 된 상황, 남한산성에서의 방어와 청군과의 소규모 전투 내용, 남한산성에서의 군량 및 물자의 부족 상황, 청과 조선 사이의 강화회담의 진행 과정과 척화파 주화파 간의 대립 양상, 강화도 함락에 이은 인조의 항복과 환도, 이후 세자와 대군 및 대신들이 청으로 압송되는 모습 등을 시간 순으로 객관적으로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병자호란에 대한 기록은 각기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기록하였으나, 본서처럼 처음부터 병자호란에 대해 사대부 지식인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시 조정 안팎 관원들의 무능과 기강의 문란에 대해 비판적 시각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이를 통해 후세에 경계로 삼고자 했던 편찬 의도를 가지고 기록한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따라서 본서는 당시 공조 좌랑이었던 당하관의 입장에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병자호란 당시 및 그 전후의 사정과 풍속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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