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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전각의 바닥형식과 마루의 이용방식에 관한 연구 : 16~19세기 기록화의 공간 이용모습을 중심으로

        배창현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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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전근대시기 한국 건축에서 보편적인 바닥형식으로 사용된 마루의 이용방식을 살펴, 마루사용의 의미와 기거양식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동일한 의례를 목적으로 건립된 전각에서 전돌과 마루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바닥형식이 혼재되어 사용되는 양상에 주목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의 문헌을 통해 바닥형식과 기거양식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으며, 동시기에 제작된 기록화를 통해 당대(當代)의 마루 이용모습을 확인하였다. 그 동안 한국의 건축에서 마루가 사용된 공간에 대해 ‘해당 공간을 좌식 또는 신발을 벗은 상태로 이용하기 위한 것과 관련이 있다’라는 해석은 거의 모든 경우에 타당하다고 여겨져 왔다. 이러한 절대적 인식은 그간 사찰 전각과 주택 등을 중심으로 한 연구를 바탕으로 매우 강하게 형성되어 왔으며, 현대 한국주택 내부에서의 탈화(脫靴)의 관습과 어우러져 마루의 이용방식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관념으로 자리 잡았다. 마루를 절대적 좌식 또는 탈화공간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마루 설치 여부에 따라 공간 이용방식의 추정을 가능케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유교적 의례를 위해 건립된 전각의 마루 이용방식을 해석함에 있어 많은 모순점을 가진다. 또한 본 연구에서 다룬 여러 사례들을 통해 볼 때, 과연 마루라는 바닥형식이 공간의 이용방식을 구속하는 요소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된다. 유교의례를 위해 건립된 전각의 바닥에는 각각의 사례에 따라 전돌과 마루가 혼재(混在)되어 있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러한 혼재 양상은 마루의 좌식 이용방식 및 의례 공간의 바닥형식 인식과 관련한 의문의 단초가 된다. 또한 이러한 전각들에서 행해진 의례의 동선과 진행 과정을 살펴볼 때, 신발의 탈착이나 가구의 사용형식에 있어서 마루를 완전한 입식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고 보여 진다. 유구(遺構)만을 통한 과거의 이해는 결국 현재의 시각을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루의 이용 모습이 담겨 있는 조선시대의 기록화들은 당대의 마루 이용방식에 대한 분석에 유용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조선시대의 기록화를 통해 전각 마루의 이용방식, 즉 신발의 탈착여부나 사용되는 가구의 형식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마루라는 바닥형식이 신발의 탈착여부나 가구 사용의 형식을 직접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전돌과 마루, 좌식과 입식으로 대별되어온 바닥형식과 기거양식 사이에 절대적인 대응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입식 전통에서 유래한 유교 의례의 공간은 전돌의 바닥형식을 전제하지만, 조선시대의 대성전, 객사의 정청, 진전이나 영전은 제향을 위한 전각의 내부공간에 마루가 설치되어가는 변화의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의 경향은 거의 모든 경우 전각의 내부에 마루가 깔리는 서원 사당의 경우와, 전각의 내부에 더하여 전퇴의 공간에까지 마루가 깔리는 가묘(家廟)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진다. 특히 가묘의 경우, 조선 중기 이후 복식(服飾)에 관한 규정이 완화되어가면서 탈화의 공간으로 마루의 이용방식이 변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묘를 비롯하여, 개방형 전퇴의 공간에도 마루가 깔리는 경향을 조선후기의 사묘건축인 칠궁, 신선원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전각의 마루설치 확대과정을 통해, 사묘건축의 전퇴가 바닥형식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사묘건축의 개방형 전퇴는 공간적 범위에 있어서는 전퇴의 내부와 같은 당(堂)으로 인식되었지만, 물리적으로는 창호에 의해 구분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전각의 내부와 퇴의 바닥형식이 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바닥형식 변화와 관련한 일차적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렇게 분화된 개방형 전퇴의 공간은 전돌에서 마루로 바닥형식이 점차 변화되어 가는 과정의 순서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바닥형식의 분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한편, 신발의 착용여부와 사용되는 가구의 형식을 통해 기거양식을 입·좌식으로 구분한다면, 조선시대의 마루는 완전한 좌식이나 입식의 이용방식을 비롯하여 두 가지 기거양식이 절충적 모습을 보이는 이용방식의 복합적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이용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마루는 공간의 성격에 따라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이 되는 요소는 온돌과의 물리적 결합관계, 위계적 공간규범의 성격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의 틀을 바탕으로 볼 때, 전각의 마루는 온돌과의 관계에서는 물리적으로 결합되지 않은 독립적인 상태로 볼 수 있고, 의미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높은 위계를 가지는 공간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전각의 마루에서는 주로 공적인 의례나 연회가 행해졌으며, 이러한 행사의 일반적인 성격에 따라 엄격한 복식의 규정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신발을 착용한 이용방식의 모습을 보인다는 추정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에서 마루는 전돌과 함께 의례적 공간인 전각의 바닥형식을 구축하는 주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전각에서의 마루는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기존의 전돌을 대체해가며 사묘건축의 내부, 전퇴 부분에까지 확대되는 등 사용의 폭을 크게 넓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마루가 특정한 이용방식에 대한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신발을 신어야 하거나 입식의 가구를 사용해야 하는 공간에도 사용될 수 있었던 점이 특히 주목된다. 이렇듯, 마루가 한국의 건축에서 보편적인 바닥형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기 쉽고, 딱딱하고 강한 표면을 가진 마루의 물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중국연변지역 조선족과 한족 농촌주택의 현대적 변화에 관한 비교연구 : 중국사회정책변화에서 본 주택평면변화를 중심으로

        허성걸 가톨릭관동대학교 일반대학원 2016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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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주택은 그 지방 고유의 자연적, 사회문화적 환경 등의 제반조건에 따라 농민들에 의해 축적된 생활의 지혜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의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주택 연구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으나, 현재까지의 연구는 전통주택에 한정되고, 원형에서 공간의 성격을 파악하는 현상적인 연구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 관점을 달리하여 연변지역의 조선족과 한족농촌주택이 중국사회정책의 변천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여 현재의 주거공간으로 이용되느냐를 비교분석하는 것은 주거문화의 변화성과 지속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농촌주택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본 연구는 중국의 사회정책을 주요 연구의 단면으로 설정하여 연변지역의 조선족과 한족의 이주정착기(1860-1940년대) 농촌주거 공간구성의 특징에서부터, 인민공사화 및 문화대혁명정책시기(1950-1970년대)를 비롯하여, 개혁개방 및 계획생육정책시기(1980-1990년대), 사회주의 신 농촌건설정책시기(2000년 이후)에 이르기까지 중국사회정책이 실시됨에 따라 기거양식이 변화되면서 주택의 공간구조에 미친 영향을 조사 분석해 보고자 하였으며, 도출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주 정착기 조선족은 남녀노소에 따라 출입, 취침, 식사, 단란이 분리되어 이루어지는 반면, 한족은 집안의 위계에 따라 취침 공간이 분리 되며, 출입과 식사, 단란은 공동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농업을 바탕으로 한 조선족 주택은 몇 간의 살림방과 농업에 적합한 부속 공간들을 가지고 있으나, 한족은 광업노동 종사를 목표로 생존에 필요한 공간이외의 부속 공간이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민공사화 및 문화대혁명정책의 영향으로 공동축사운영제도가 도입됨으로 인해 조선족주택내의 부속공간인 외양간이 소멸되고 그 자리에 창고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도시 외교의 일부 주택은 벽돌구조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농촌에 전기화된 정미소가 등장함으로 인해 주택내의 방앗간이 소멸되었다. 인민공사화와 문화대혁명은 소수민족을 한족화(漢族化) 하려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한족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이 당시의 한족주택은 기본적인 식(食)과 주(住)의 기능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혁개방 및 계획생육정책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에 따라 신축주택을 짓을 수 있었으며, 새로운 재료와 기술 도입으로 인해 벽돌구조 주택이 일반화 되면서 툇마루가 소멸되었다. 또한 마을단위의 공동축사운영제도가 소멸됨으로 인해 주택지 내에 독립적으로 외양간을 건축한다. 평면구조는 방과 방 사이가 개방적으로 변하고, 침대, 싱크대, 가스레인지 등의 입식가구의 도입으로 일부 주택 내에서는 좌식+입식이라는 혼합적 기거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조선족이 적고 한족이 많은 마을에서의 조선족 주택에서 부분온돌을 설치하는 주택이 출현하였고, 한족이 적고 조선족이 많은 마을에서의 한족 주택에서는 전면을 온돌로 설치한 주택이 출현하였다. 그리고 계획생육 정책으로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조선족의 온돌방과 한족 내옥(內屋)의 칸수가 줄어든다. 사회주의 신 농촌건설시기에는 정부에서 농촌주거환경개선정책으로 보조금을 주면서 주택의 구조와 지붕을 벽돌과 기와로 개량을 함으로 인해 초가집이 대량 소멸되었다. 또한 농촌주택에서는 화장실, 욕실, 싱크대와 같은 현대화 시설이 일반화 되면서 주택내의 기거양식은 좌식과 입식을 함께 쓰는 좌·입 혼합(坐立混合)형태로 변화한다. 그리고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방은 개방적인 통간형의 주택이 일반화 된다. 한족의 주택에서는 내옥의 캉(부분온돌)을 넓게 꾸며 조선족 주택의 전면온돌방식을 따랐다. 이는 두 민족이 온돌방식의 변화와 상호 융합된 결과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과 한족의 시대별 중국정책변천에 따른 주택 변화를 정리해보면 주택평면은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조선족은 중국 사회정책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되어온 반면, 한족은 영향을 받지 않고 변화되었으며, 생존에서 생활의 단계를 거쳐 진화함과 동시에 생활방식의 필요에 따라 공간을 만들어 왔다. 이상과 같은 변화과정 이후에도 연변지역 조선족과 한족의 농촌주택은 계속 변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그 변화의 방향은 앞으로 더 기다려 보아야 확인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가 보다 체계적이고 일반화된 결론으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농촌주거의 사례조사와 실내뿐만 아니라 실외의 사례조사를 바탕으로 후속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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