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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gust Hermann Francke의 신학인식과 교회봉사 실천의 상관관계 고찰

        박해숙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9663

        한국기독교 역사는 선교사들의 복음전파와 함께 '민족을 위한 기독교 지도자 양성'이라는 뚜렷한 사회갱신의 의지를 담고 출발한 것이 사실이다. 1884년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120여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이러한 사회갱신의 기능과 역할 면에서는 다소 약화 되었고 소극적이 된 반면에 개교회적인 성장 면에서는 지대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여겨진다. 더구나 1998년 한국사회는 세계외환위기를 경험하면서 경제, 사회, 정치의 다방면으로 움츠려지고 위축되면서 '지도자 부재론'이 지속적인 사회의 화두로 등장했다. 이러한 사회의 전반적인 위축은 곧 바로 한국교회 기독성의 허약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지도자 부재에 관한 이해는 항상 기독교 문화와 내용이 사회전반에 대한 실효성이 매우 허약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전래와 더불어 한국사회는 '민족 지도자 양성'이라는 내용을 늘 사회적으로 반영하여 왔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기독교의 대사회적 역할 및 기능에 대해서 논하고자 하면 어김없이 그리스도교 신학과 교회의 존재론적 중심 과제 안에 '기독교적 지도자'의 문제와 내용이 늘 새롭게 재조명되곤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발전과 신학은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교회와 신학의 사명을 '교회와 세상' 이라는 정확한 주제로 이끌어 내고 있다고 보여 진다. 이렇게 현대신학과 교회의 주체적 역할이 대 사회적인 사명과 세상 구원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이때에 한국교회 문화 전반에서 아직은 개 교회 성장과 발전에 치중하고 있는 신학의 편협성과 교회발전의 지역적 편중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과 신학논쟁들이 이루어져야만 하겠다는 염려와 기대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한국사회의 현실은 경제위기의 영향과 더불어 '자살증후군' 증상이 현저히 늘어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자살률이 높았던 유럽 국가들에서는 그 비율이 감소하는 반면, 2002년 세계보건기구의 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회원국 가운데 10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의 발전은 교회의 문화가 사회질서와 사회전반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상황과 사회적 불안요소가 사회전반의 문화를 장악하고 형성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확실한 기독 종교성이 사회에 대한 강한 기능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안한 경제상황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갈등 등이 인간 존재와 사회상황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와 신학이 사회의 부정적 영향과 내용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정확한 진단과 더불어 희망 있는 미래를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신학탐구의 당위성이 본인으로 하여금 이 주제를 다루게 하였다. 이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주요하게 인식되는 과제가: ① '신학이론과 신학실천'이 하나의 목회자의 인격 안에서 '통합(Vereinigung)' 과정으로 발전하는데 상당히 미진한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며, ② 인격과 신학의 통일체적인 역동력 보다는 오히려 목회의 프로그램적 발전으로 교회의 발전이 세속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③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케의 일생에서 신학함→신학됨과 인간의 변혁→신학됨의 증거와 교회 봉사와 세계 변화라는 구체적인 신학 탐구와 신학적 인격, 그리고 신학적 삶이 확실한 신학인들의 푯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 세 가지의 주요한 연구의 과제가 이 논문의 핵심 질문으로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 안락사에 관한 기독교적 고찰 : 영남지역 신학도들이 이해한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고찰

        안효욱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63

        본 논문에서는 안락사에 대한 기독교적 고찰을 함으로서 신학적 의미의 생명을 생각해 볼 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죽음의 문제도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당연히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사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이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생명의 연장이 이루어졌고 더 나은 삶의 질의 문제에 직면함으로 죽을 때도 편안한 죽음을 선택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안락사라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즉 안락사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가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경우, 의학적으로도 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인위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며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죽음을 인위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명백한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한 살인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죽일 수 없다는 것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존엄한 가치로 유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안락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생명은 안락사라는 의료적 문제나 사회 법적 문제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양심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각 국에서는 안락사법안 마련되어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우리 영남지역 신학도들이 이해한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고찰에서 신학도들은 안락사 문제와 그에 따른 윤리적 문제를 설문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에서 안락사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인간의 생명과 관련해서 신학도들은 환자의 극심한 고통 경감에 대해서 안락사를 찬성한다는 응답자들이 많았지만 가족의 고통경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와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 때문에 안락사를 동의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응답자들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한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가 정서적으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힘들지만 어려움을 같이 하겠다는 뜻으로 생각 될 수 있다. 또한 안락사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살펴볼 때 생명의 존엄성 때문에 반대한다는 응답자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보면 신학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해서 귀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며, 종교적인 이유와 윤리적인 이유에서도 많은 응답자들이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신학도들은 생명을 사랑하고 윤리적으로도 바른 신학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생가능성 없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치료 중단에 대한 윤리적 이해를 봤을 때 치료를 중단에 대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치료를 해줌이 윤리적으로 찬성함을 볼 수 있다. 이 설문에 대해서 연령을 보면 다수의 응답자가 젊은 층임을 볼 수 있고 청. 장년기에 많은 사람들이 응답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아직까지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경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죄로 인해 이 사랑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죽음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기능주의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아서 안락사를 행한다거나 또한 죽음을 필요이상으로 미화하여 안락사를 자행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적인 면에서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간에게 살인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고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설문을 하면서 요즘 젊은 세대들이 효에 대한 관심이 없고 점점 서구화되어 가는 이 때에 안락사를 찬성하지 않겠느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의외로 신학도 들이라서 인지 이러한 예상을 뒤엎은 사실을 볼 때 내심 반가운 마음도 앞선다. 요즈음에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는 시대에 스스로 생명을 끓는 현실에서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회의 저변에 놓여 있는 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해서 한국 교회에서는 좀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생명의 주권자 되심을 주지시키고, 아직도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에 대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하며 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심어주어 자연스런 죽음을 맞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인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안락사를 거부하며 인간의 생명이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아 안락사를 행한다거나 또 죽음을 필요이상으로 미화시켜 안락사를 자행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적인 면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 칼빈의 성화론에 관한 연구

        박성근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47

        칼빈은 성화를 가장 명쾌하게 체계화한 신학자이다. 그의 성화교리는 교리적으로 타당하며,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가 말하는 성화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사역하심에 참여하는 진지한 응답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칭의와 함께 수동적이며 이중적인 은총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성화는 인간의 편에서 공로의 잣대로 삼거나 업적의 수행으로써 자랑하려는 경향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구도를 가진다. 칼빈의 성화는 칭의에 따른 회개와 동시에 주어지는 중생의 사건이다. 칭의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반면, 성화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최고의 요체이다. 칭의가 일시적인 것이라면 성화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화의 삶을 통하여 칭의를 견고하게 한다. 칭의와 성화는 신앙에 있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필요충분조건의 관계에서 상호 의존적이다. 그러나 성화가 칭의에 대하여 어떤 변수로써의 기여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칭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취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써 독립성과 완전성을 가진다. 그러나 칼빈이 주장하는 성화는 칭의 이후에 반드시 칭의를 필연적으로 수행(隨行)해야하는 동반자로 이해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원인이 되며, 일평생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걸어가야 할 제자도의 삶이다. 이를 칼빈은 경건의 삶으로 규정하면서 독특한 제자도를 설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경건의 삶이며, 그 삶은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으로써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내세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종말을 바라보며, 현세를 선용함으로써 종말을 현재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화의 삶은 현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를 긍정하며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의 성화는 폐쇄된 주제가 아니라 성도의 삶의 자리를 폭넓게 하고, 현세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개방성을 가진다. 칼빈은 성화의 삶을 성령하나님께 완전히 의존시킨다. 성화를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인 성화의 영역을 축소하거나 통제하여서는 안 된다. 만약 성화의 범위를 특정 대상이나 특정한 분야로 제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보다 적극적인 성화의 사역에 참여함으로 보다 적극적인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특별히 성령의 사역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은 칼빈이 이미 주지한 사실이다. 그 범위는 육체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성화론은 지구촌의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는 은혜의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의 성화론은 종말론에 있어서도 효력이 있다. 성화가 천국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지만 성화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인도하여 천국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완전한 성화는 종말에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는 죽음이후에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성화가 종말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는 약화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종말의 구원과 부활 역시 값싼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스스로 자신의 구원과 종말을 보배롭고 풍성하게 맞이하도록 성실하게 예비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오로지 주어진 현세에서 성화의 삶을 삶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다. 이제 칼빈의 성화론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삶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1인칭 단수로 표현되는 우리의 신앙적 사고와 삶의 언어가 1인칭 복수로 바뀌어져야 한다. 즉 '내 믿음,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라고 하는 편협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모두의 믿음, 우리모두의 가정, 우리모두의 교회, 우리모두의 지구촌' 등 공동체와 타자(他者)들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성화의 삶은 빛과 같이 적극적이며 능동적이며 포용적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교회와 성도는 이러한 성화의 삶에 대한 취약한 한계를 극복하고 역동적인 성화의 삶을 살 때 한국교회는 미래는 견고하게 설 것이며, 세상 속에서 그 영향력은 확장 될 것이다. 그리고 성화의 삶이 있는 그 현장에는 마침내 진정한 샬롬의 평화가 임할 것이다.

      • 신명기 역사 안에 나타난 히스기야 연구

        임명수 嶺南神學大學校 大學院 2007 국내석사

        RANK : 249647

        히스기야의 개혁이 실제 역사 속에서 진행된 제의 중앙화 개혁이었는지 아니면 후대의 신명기 사가의 신학적 성찰에 의해 소급된 개혁 프로그램이었는지가 그간 히스기야 개혁 연구의 주된 과제였다. 왜냐하면, 신명기 신학의 제의 중앙화 이념이 히스기야 개혁에 덧입혀져 있을 경우 히스기야 개혁의 역사적 실재를 규명하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시야 시대에 율법책이 발견되고, 발견된 율법책의 내용에 따라 산당을 철폐하고 이방 신상들을 깨뜨리는 등 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는 신명기 사가의 기록은 어느 면에서 히스기야의 제의 중앙화 개혁의 역사성을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요시야 시대의 개혁상이 히스기야 시대로 소급된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제의 중앙화의 역사성과 전승비평적 연구를 통해 현재의 히스기야 개혁기사가 단지 신명기 사가의 신학적 성찰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한 개혁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신명기 사가의 독특한 필체와 본문의 역사적인 성격을 규명하여 구별하고, 히스기야 시대의 느후스단 전승의 추적을 통해 히스기야 개혁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제의 중앙화의 기원이 역사적으로 히스기야 시대에 형성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명기 사가의 신학적 성찰의 반영이란 측면에서도, 히스기야의 제의 중앙화 개혁은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역사 서술과 전개 방식을 살펴보면, 신명기 사가는 아하스는 히스기야와 정반대로 우상 제의를 만연시킨 인물로,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개혁을 원점으로 돌려 개혁의 영향력을 무산시켜서 유다를 멸망시킨 왕으로 보고, 신앙적 관점에서 멸망원인을 제공한 악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히스기야는 역시 신명기 개혁을 단행한 왕으로, 요시야와의 비교 속에서 간접적으로 더 부각되고 있다. 즉 요시야는 히스기야 제의 개혁을 회복하고자 한 인물로 부각되어 있지만, 애굽 바로 느고의 원정을 막으려고 하다가 급사한 인물로 평가함으로써 요시야보다 상대적으로 히스기야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다른 왕들에 관한 기사와는 차별화된 히스기야 기사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신명기 사가의 독특한 신학을 엿보게 된다. 앗시리아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히스기야는 내적으로 유다의 입지를 견고히 하고 야웨 신앙을 준수하며, 유다의 정통성의 상실을 막기 위해 외적으로는 앗시리아의 침략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정책을 강구하기 위해 이러한 내,외적 요구에 부응하는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히스기야의 개혁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총체적인 개혁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의 중앙화는 개혁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간주된다. 제의 중앙화는 신명기 사가가 강조하는 신학적인 특성인데,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후, 유다에 대한 침략에 대비하여 히스기야는 주체적으로 개혁 프로그램을 가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국체를 유지하고 야웨신앙을 수호하며, 이스라엘의 정통성의 붕괴를 막기 위한 종합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히스기야의 제의 중앙화 개혁으로 집약되는 개혁 프로그램은 정치, 경제, 군사, 심리적인 측면들을 포괄하는 고강도의 종합적 개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성서에서 제의 개혁과 제의 중앙화 개혁, 정치적 반란으로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히스기야 개혁기사는 다음과 같은 세부분석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되었다. 즉 히스기야 개혁의 전승의 기원과 전승층 구분을 통하여 히스기야 개혁의 역사성과 신학적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신명기 역사 안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첫째, 히스기야의 시대적 상황이 개혁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상황이었고, 이를 반증하는 것이 주변국들의 움직임이었다. 또한 이러한 정세로 인해 히스기야는 종교적, 정치적 개혁을 일으키는데 종교적으로는 중앙 성소를 확립하고, 주상과 아세라 등 가나안 우상을 배격하며, 놋뱀과 같은 우상을 제거함으로 신명기 역사가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앗시리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벽을 건설하고 수로를 만들며, 요새화 성채를 건설하여 친 앗시리아적 성향의 주변국들에 대한 응징을 하여 종교적 개혁보다는 정치적 개혁에 더 앞장섰음을 말해주고 있다. 둘째, 신명기 역사의 히스기야와 관련된 연대 구성은 정확도에 있어서 여러 모순된 문제들이 나타나 고대 근동의 자료와 상호의존 할 수밖에 없다. 즉 고대 근동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타협적인 역사 재구성밖에는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명기 사가가 히스기야의 역사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그만큼 포로기 상황의 구심점이 되고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이끈 중심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적인 한계를 가지고는 있지만 신명기 역사 안에 나타난 히스기야 왕은 필요할 때 정치적, 종교적 개혁을 이룬 개혁자로써 신명기 역사가들의 최고의 평가를 받을 만한 왕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 이주노동자를 위한 선교적 접근과 경산 벧엘 중국인근로자 교회 선교모델 연구

        명재영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47

        우리는 지금껏 이주 노동자의 현실과 국가적 정책 그리고 교회의 선교적 과제와 그 자리를 간략히 조명하여 보았다. 이상 다루어 본바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단지 우리이웃의 소외계층에 대한 단순한 구제의 차원이 더 이상 아니다. 또한 복음적 열정으로서 선교적 기회의 적절한 대상의 차원 역시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과제요, 그런 까닭에 또한 교회가 세상에 대해 현실화되는 자리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적 자리에 위치해 있음을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이처럼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현실화되는 문제를 위한 작은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 논문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선교학적인 분석에는 당초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선교학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더욱더 실천적인 분야이기에 실천적인 면에서 그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해결과제와 법의 이해에 할당한 면을 더 다룬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찍이 실천신학자인 황금봉 교수는 그의 글 "이주노동자 선교의 실천신학적 당위성"을 통하여 이 같은 면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산 벧엘 외국인 근로자 교회의 모델을 통해서 이주노동자 선교가 구체화되는 자리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본 논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시도해 보았는데 그 시도로서 성경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입장을 알아보았다. 외국인노동자에 해당하는 단어는 '게르'이다. 이 단어는 주로 나그네로 번역되었는데 이스라엘 열조들과 그들 공동체가 먼저 '게르'로서 나그네의 삶을 살았고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규정 지워졌음을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신약과 그리스도 역시 '나그네'는 주변대상이 아닌 중심개념임도 살펴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주노동자의 이해로서 그들의 삶의 정황과 당면문제들을 개괄하여 보았다. 이런 이해 없이는 그 어떤 선교적 전략도 사상누각과 같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현황과 국가정책을 알아보았는데 외국인노동자의 현황을 세계적 현황과 국내적 현황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연수생 제도와 비슷하게 산업기술연수생이라는 제도를 통해 외국인노동자를 받아들여 3D업종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산업기술연수생제도는 불법체류자와의 많은 임금격차로 연수생들이 사업장을 이탈하여 불법체류노동자로 전락하는 문제점을 낳았고, 불법체류노동자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올해 가장 큰 이슈와 법제화가 된 고용허가제는 아직 시행을 앞두고 있는 법으로서 과도기적 법으로 그 변화와 대응을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변화중에 미완결 상태에서 조명한다는 것이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고 한계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끝으로 경산벧엘 중국인 근로자 교회를 조명해 보았는데 그 의의는 5장의 단락에 첨가하였는바 이 지면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앞으로 교회의 특성화된 사역을 선교신학적 재료로서 새롭게 재조명하여야 할 책임을 가진채 미완으로 이 글의 마지막을 마쳐본다.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는 이제 가까이에서부터 찾아도 될 것 같다. 그들의 선교적 자원과 역량은 과히 폭발적일 것이다. 디아스포라에 의한 선교적 결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제 한국교회는 그 가능성을 이들에게서 찾아보길 바라며 글을 맺어본다.

      • 영성에 관한 기독교 교육 연구

        이상호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49647

        기독교의 영성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이웃과 사회와 사람의 관계성을 이루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통한 화목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런 까닭은 급변하는 사회의 변천과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참된 영적인 삶을 잃었고, 영적인 빈곤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장에만 치중했던 한국교회가 이런 모습 속에서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 2세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에서 성숙을 위한 몸부림이 있었고 거기에 따라 점점 영성훈련에 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들 사이의 영적현상은 혼돈되어 왔으며, 이러한 혼돈 속에서 영적으로 갈급한 교인들의 요구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영성개발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만 급급하여 영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문제를 통하여 본 고는 영성신학 문제를 기독교 교육과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도해 본 것이다. 본 고에서는 바른 영성신학의 정립을 위해 먼저 영성의 일반적 이해, 성서적 이해, 역사적 이해, 영성신학을 고찰하였다. 다음으로 영성교육과 기독교 교육의 공유점을 모색하면서 교육내용과 방법 을 모색하고자 시도하였다. 영성이란 그 의미가 매우 넓고 다양하여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영성의 일반적 의미는 "자기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정신으로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생명을 거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하나의 영성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기독교 영성은 가장 이상적인 정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의 이해는 그 출발점을 달리한다. 일반 영성이 인간 내적 정신이나 종교성에 근거한다고 한다면, 기독교 영성은 먼저 하나님의 존재가 전제되고 그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영성의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대교회 이전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구약성서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필요한 존재였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내재해 있을 때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영은 하나님과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존속되는 것이지 어떤 인간의 한 구성요소로서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성서에서의 영성은 관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영성은 지혜와 신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회당교육을 통하여 이루어 졌으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세교회의 영성은 수도원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동방교회가 apophatic영성임에 비하여, 서방교회는 kataphatic영성을 형성하여 보다 활동적이고 참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영성은 루터의 오직 은총으로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하강 운동을 주장함으로서 중세기적 영성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룬다. 그의 경험은 성서로부터 왔으므로 그 후의 개신교 영성의 특징은 말씀 중심이 되었다. 현대의 영성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라는 상이한 두 형태의 영성으로 대표된다. 지나친 사회참여에 의한 복음 변질의 우려가 복음주의의 성향을 보수적으로 규정하게 하였으며,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탈 역사적인 경향에 대한 반성이 '에큐메니칼'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양 진영이 서로 화해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영성의 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성이 내면적 수련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통하여 그 의미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성 교육에 관한 연구는 개인의 내적인 하나님 체험과 아울러, 그 사람의 삶과 그 사회에 대한 연대성 및 책임성을 함께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본 고의 목적은 이러한 영성 이해를 기초로 하여 그것을 기독교 교육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있다. 영성 교육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혹은 완덕에 둔다.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달성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영성훈련의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피해야 할 위험한 요소로는 훈련 자체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 자만심, 율법주의, 내면주의 등이 있다. 영성 교육을 위한 장(場)으로는 인간의 삶의 전체 영역으로서 교회와 사회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훈련으로서의 영성교육은 교회 중심이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 전통과 성서에서 벗어난 잘못된 영성 형성의 위험성을 배제할 수 있다. 삶으로서의 영성 교육은 그 장이 사회이다. 교회를 통하여 훈련된 영성은 사회로 확산되어야 하며, 사회를 통하여 형성된 영성은 교회의 영성을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교 육의 장으로 바탕으로 한 영성교육의 방법은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개인을 위한 영성교육으로 기도, 묵상, 단순화 훈련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혹은 하나님 사랑의 측면에서의 접근이다. 두 번째는 공동체를 위한 영성 교육으로 예배, 말씀, 봉사 훈련이다 이는 횡적인 그리스도인됨의 교육이다. 이 단계의 교육목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축적된 사랑이 외적 표현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영성생활을 위한 영성교육으로 공동체에 속한 개인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분명히 깨닫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영성교육으로 다차원적인 삶의 목표를 향해 영성을 조화시키면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삶을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교육은 예배나 수련회 혹은 기도회 등의 신앙 활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을 통하여 이룰 수 있다. 이상의 본 연구의 결론을 통하여 앞으로 바람직한 영성 교육을 위한 제안을 몇 가지 해보고자 한다. 먼저 올바른 영성교육을 위하여 기독교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은 어떤 완전한 모델로 제시된 덕목이나 성품을 소유하고서 행동함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성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의 본질은 일차적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및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다. 이 관계성을 통하여 영성은 개발된다. 기독교 영성은 그 관계성의 본질을 사랑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영성교육의 목적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한 완덕 혹은 완성에 둔다. 이러한 완성에의 과정이 영성적 삶이며, 이 삶 자체가 영성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 이렇듯 기독교 영성을 사랑의 관계와 실천적 삶으로 이해할 때, 신앙과 삶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영성 교육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의 방향은 수도원 신학이 아니어야 하며, 금욕주의가 아니어야 하며, 고행주의도 아니어야 한다. 또한 영성신학은 샤머니즘적인 것도 아니며, 명상적이고, 모든 존재를 수직적 체계로 보며 영성을 단지 수양만으로 생각하는 불교화도 배격해야 한다. 그리고 영성 신학은 세상과 교회, 영과 혹은 속을 구별하는 이원론적 체계를 가져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성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그리고 철저히 성령에의 의지함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영원지향성, 신서지향성, 사랑을 소유 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랑을 소유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영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교육은 전체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필요가 없고,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며, 현재의 일이 죽음의 장벽을 넘어 미래 세계와 내세에까지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며, 개개인에게 주어진 은총의 경험이 삶의 현장 속에서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생활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을 통해서도 영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영성 안에서 성과 속의 일치를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기독교 영성교육의 방법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한다. 개개인의 삶의 정황이나 개인적 특성에 따라 더 구체적인 교육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신교 전통에서 일은 하나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의 수단이며, 무엇보다도 그 자체가 소명으로 인식되어 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은 그 자체가 영성교육의 수단이요 과정이다. 각자의 직업을 통한 독자적 영성개발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각 업종별 영성교육도 필요할 것이며, 직위나 직책간의 영성교육도 필요할 것이다. 회사 단위나 학교 단위의 영성교육도 필요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가정을 위한 영성 교육이나 세대별 영성교육도 필요 할 것이다. 이러한 영성교육은 사회와 자연을 폭 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시도되어야 한다. 영성은 내면 수련으로부터 삶으로, 개인적 삶으로부터 사회적 구현으로 확산되어 왔다. 영성이 삶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개인적 차원에 머무른다면 역사성과 사회성의 상실로 말미암아 역시 개인적, 탈 역사적 신앙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를 향해 책임적인 청지기로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 영성과 윤리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영성을 지향하는 기독교 교육자라면 반드시 윤리적인 모습으로 이 땅에서 그의 삶을 구현해 나가야 하는 데,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유다의 멸망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새로운 공동체 재건의 희망에 대한 고찰

        김동호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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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웨의 백성들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다 멸망이라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위기는 역사적 위기로 그치지 않고 결국 신학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영원 불가침 신앙의 온상이었던 예루살렘 성전과 도시가 몰락되었고, 다윗의 영원한 계약이 와해될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조상대대로 내려왔던 약속의 땅이 상실되었고, 시내산 계약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포로기의 야웨 신앙인들이 어떻게 그 위기에 대처하였으며,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명하였는가, 또 그러한 절망의 상황에서 어떻게 공동체의 재건을 꿈꾸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결과들이 포로기 전후에 작성된 구약성서 본문들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바벨론 시대의 멸망의 경험때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강대국 사이에서 그들의 이해다툼과 주변 정세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주변 강대국들의 쇠퇴기에 이스라엘은 안정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반면에 강대국의 힘이 융성한 시기에는 어김없이 그들의 속국으로 지배를 받는 역사를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러한 되풀이 되는 고통의 역사를 그들은 독특한 눈으로 보고 해석을 하게 된다. 또한 그러한 견지에서 새로운 희망을 갖고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구약성서의 본문들에 나타난 국가 멸망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보면, 신명기적 역사서는 가나안 정착부터 줄 곧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반역을 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희망의 근거로 조상들과의 계약과 다윗 계약을 들었다. 예레미야는 유대민족주의적인 한계를 극복하면서 멸망을 해명하고, 멸망 너머에 있는 희망을 언급하기를 땅 회복, 포로 귀환, 새계약을 들어 제시하였다. 이러한 문서들은 국가 멸망의 불행 속에서 야웨의 신앙인들은 야웨를 불신하거나 다른 신을 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하나님인 야웨의 새로운 발견과 해석에 힘썼다. 이러한 문서들에 나타난 신학적 대응과 함께 또한 새로운 공동체의 재건에 대한 희망 또한 엿보게 되는데, 에스겔은 바벨론에 끌려간 귀족 계층, 즉 제사장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다. 에스겔은 유대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말미암은 바벨론의 포로생활은 곧 생명의 상실이라고 보고, 그러나 이제 포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것에 대해서는 생명의 회복으로 말하고 있다. 이때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생명을 회복해 주시는 이는 전적으로 야웨이다. 또한 에스겔의 공동체의 재건구상은 성전 중심적이며 그 성전은 사독 계열의 사제들에게만 모든 권한이 주어지는 중심 체제라는 것이다. 결국 이는 특정 소수 계급의 이익을 채우려고 했던 사회구상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이에 반하여 제2이사야는 신학적 해명과 재건의 구상은 에스겔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 데 그 차이중 하나는 제2이사야에서는 사제들이나 희생제의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44장 28절에서 그 예언자는 일반적인 재건 사업의 일부분으로서 성전도 건설될 것이라고 언급하지만 그것도 두드러지게 드러나진 않았다. 더욱이 그 성전이 에스겔에서처럼 다윗이 목자가 되고 다윗 왕조의 재건과 성전을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고레스가 목자가 되고 그에 의해 성전의 기초가 세워질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겔이 사독 계열 제사장의 권력 유지를 위해 다윗 왕조의 회복과 함께 성전의 재건을 원했지만, 제2이사야는 다윗 왕조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처럼 제2이사야가 구상하고 있는 유대공동체 재건의 모습은 에스겔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2이사야에게 있어서 포로귀환의 사건은 전적인 야웨의 은총이며, 이는 어느 특정 소수 계급에 국한시킴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 민중이라는 것이다. 이는 제2이사야가 사독 계열의 제사장 그룹이 구상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신정적 재건구상에 대해 반대하고, 민중들에게 향하여 그들이 야웨의 은총을 받을 것임을 역설한 것이다. 제2이사야에게 있어서는 귀환 후 유대공동체의 모습에 그 어떤 지배 계급이 등장하는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그의 민중적 유대공동체 재건구상의 면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포로기의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독립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 의해 붕괴 되지 않고 살아남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바벨론 포로 시대의 이스라엘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아주 풍성한 생산적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위기를 맞아 그들이 더욱더 확고한 신학적 기반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야웨 신앙을 끝가지 고수한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포로기는 역사적 현실로서 참담한 경험이지만 신앙의 역사에 있어서는 신앙 전승을 집대성하고 새로운 신학이 창조되는 가장 빛나는 창조적 시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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