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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경의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 분석 연구

        김윤경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47679

        김윤경의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은 무조성을 바탕에 두고 작곡된 곡이다. 이 곡은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점’, ‘선’, ‘면’이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다. 또한 현대적 색채를 지닌 선율, 리듬,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 특수주법 등의 다양한 음악적 표현이 이 곡에 사용되었다.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은 각 악장이 통일된 음악적 재료들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식에 있어서 3개의 악장은 모두 세 부분 형식(Ternary Form)으로 구성되었지만 각기 다른 세부 구조를 갖는다. 6개의 동기들은 서로 다른 음정 관계와 리듬 구조를 지니며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동기들은 독립적으로 구분지어지기 보다는 다른 동기로부터 파생된 음정과 리듬을 이용하여 생성되기 때문에 모두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결국 각 악장이 서로 다른 특징들 속에서 구분되고 있지만 각 악장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공통의 음악적 재료들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본 논문은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의 형식, 음정, 리듬을 각 section별로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각 악장을 표현하고 있는 음악적 재료들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 composed by Kim Yun Kyoung, is a work featuring atonality. Its three movements are entitled ‘dot’, ‘line’, and ‘plane’ respectively. This piece features a variety of musical expressions which denotes a modern character in its melodies, rhythm, articulation, and special playing techniques. The movements for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 are unified in developing a common musical material. They are identical in employing a ternary form, yet are different in their sub-structures. The six motives are developed using different tone intervals and rhythmic structures. However, each motive is not independent but rather created based on the intervals and rhythms from the other motives, thus maintaining a connection with one another. This recalls one to the fact that although each movement is unique in its own way, all three movements are united based on a common musical material. Present study analyzes each section of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 with regard to its form, interval, and rhythm. It aims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musical materials that each movement is trying to express.

      • 진보당 사건 관련자 양이섭의 실체에 대한 연구

        김윤경 서울시립대학교 2011 국내석사

        RANK : 247647

        이 논문은 1958년 ‘조봉암 진보당 사건’에서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고 1959년 7월 29일 사형에 처해진 ‘북한간첩’ 梁利涉(梁履涉, 일명 양명산)의 實體를 규명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양이섭의 公訴 혐의는 1955년 5월 중순경 미군 첩보기관 공작원 김동혁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노동당 정보위원회 부위원장 朴日英을 만나 북한의 지령사업을 수행할 것을 승낙함으로써 간첩으로 포섭된 후 1955년 6월 중순경부터 1957년 9월 중순경까지 12차례 월북하여 위 박일영 등으로부터 북한의 지령 및 금품을 수수하여 조봉암에게 전달함으로써 간첩예비 및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조봉암의 간첩죄는 양이섭을 통해 북한의 자금 및 지령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고, 진보당을 창당하고, 기관지 󰡔중앙정치󰡕 발간을 통해 북에서 주장하는 평화통일 노선을 선전함으로써 국가변란을 꾀했다는 것이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 자녀들이 청구한 재심재판에서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판결 이유는 조봉암의 간첩죄에 대한 유죄 증거들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를 기록상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과거 판결과정에서 양이섭 진술의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양이섭의 간첩죄 판결은 별도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조봉암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양이섭의 간첩죄는 법률적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양이섭은 간첩이었을까. 지금까지 양이섭의 실체에 대해서는 변론적 수준의 해석만이 존재했다. 특히 과거의 이력과 활동은 수사 및 공판과정에서 그 자신이 진술한 내용으로만 알려졌다. 본 연구에서는 당시의 수사·공판기록뿐 아니라 법정에 제출되지 않은 특무대의 미행 내사기록(국군기무사령부 존안 특무대의 기록), 일제시기 양이섭의 행적을 알 수 있는 日警 체포 보도 및 高麗共靑 기록과 신분장, 국방경비법 위반 판결사례 및 대북공작원 김동혁 사건 판결 등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두루 활용하여 양이섭이 어떤 사람이었고, 조봉암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어떻게 간첩이 되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양이섭은 신의주우체국 집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25년 9월 거액의 현금이 든 우편행랑을 들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上海로 망명했다. 그는 臨政과 학교에 큰돈을 희사하는 한편, 高麗共靑에도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후보회원으로 入會했다. 그 무렵 조봉암을 알게 되었고, 조봉암이 주도하던 上海 한인청년동맹,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과 중국공산당 한국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4월 日警에 체포되었다. 재판결과 치안유지법 위반(업무횡령)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4년 7월 가출옥했다. 양이섭은 과거 조봉암과 같은 독립운동 노선에서 활동한 사상적 동지였다. 다음, 1950년대의 남북교역 사실을 확인했다. 1948년 분단정권 수립 후 남북간의 공식 교역은 금지되었지만, 1950년대에도 남과 북 양측 첩보기관들에 의해 비공식적인 교역이 행해지고 있었다. 양측 첩보기관들은 민간인을 고용하여 교역을 假裝한 첩보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교역은 ‘敵地’를 드나들어야 하는 만큼 위험부담이 있었으나, 양측 첩보기관의 보증하에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비교적 안전하고 2~5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고수익 사업’이었다. 교역수익금의 상당액은 첩보기관 운영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양이섭은 HID측 교역상인으로서 북한을 내왕했고, 교역수익금 5,000만환의 1/3에 상당하는 금액을 HID에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양이섭의 신분이 공작원인가, 이중간첩인가, 아니면 단순한 남북교역 상인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 첩보기관의 공작원으로는 정식 등록된 공작원 신분과 첩보기관의 공작책임자가 개별적으로 고용한 민간인이 있었다. 후자가 이른바 남북교역 상인이다. 교역상인 자신의 내심은 장사에 목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장사 행위는 첩보기관의 공작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므로, 이들도 첩보 임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또, 교역의 성격상 ‘敵側’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다른 군부대나 경찰 등 수사당국에 발각, 체포될 경우 완전히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첩보기관의 공작 차원에서 행해지는 교역이라 하더라도 이북지역을 내왕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중첩자’로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양이섭의 경우 ‘이중첩자’가 아니라 북한의 일방적인 첩자로 규정되었는데, 조봉암과 만나고 그에게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양이섭은 남북교역에 참여한 이래 첩보기관 및 특무대의 미행감시를 통해 일거일동이 파악되고 있었음에도 조봉암과 만나는 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는데,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특무대의 검거대상이 되었다. 특무대는 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되던 날 1958년 1월 13일에 양이섭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양이섭은 2월 8일 특무대에 자진출두한 이래 3월 17일 검찰 송청시까지 40일 동안 특무대 근처 여관에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재판과정에서는 특무대 조사시 양이섭이 자살을 시도하고 재산헌납을 강요당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런데 그 재산헌납은 자살시도 실패 후 3일 동안에 행해진 것으로 ‘관대 처우에 대한 감사의 징의’로 약정된 것이었다. 2심 재판부는 양이섭의 진술번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진술에 대한 증거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2심 재판의 사실심리가 끝난 직후 1958년 10월 13일에는 뒤늦게 양이섭의 처와 그 자녀들의 가정교사 처가 간첩방조 및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양이섭에 대한 심리적 겁박이었다. 양이섭은 최후진술에서 사후 조봉암 옆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조봉암이 대통령이 되면 고아원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과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조봉암이 해방된 조국의 정치인으로서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목숨을 건 남북교역에서 얻은 수익금의 1/3을 기꺼이 제공했던 것이다. 조봉암에게 있어 그는 헌신적인 후원자였으며, 죽어서도 옆에 묻히기를 희구한 존경하는 동지였다. 일찍이 조봉암에 대해서는 이승만정권에 의한 피해자이자 한국사회 반공냉전체제의 희생자라는 평가가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양이섭 역시 이승만정권의 정치적 음모사건의 희생양이자 분단된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로 규정하고자 한다. 양이섭의 公訴 혐의는 1955년 5월 중순경 미군 첩보기관 공작원 김동혁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노동당 정보위원회 부위원장 朴日英을 만나 북한의 지령사업을 수행할 것을 승낙함으로써 간첩으로 포섭된 후 1955년 6월 중순경부터 1957년 9월 중순경까지 12차례 월북하여 위 박일영 등으로부터 북한의 지령 및 금품을 수수하여 조봉암에게 전달함으로써 간첩예비 및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조봉암의 간첩죄는 양이섭을 통해 북한의 자금 및 지령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고, 진보당을 창당하고, 기관지 󰡔중앙정치󰡕 발간을 통해 북에서 주장하는 평화통일 노선을 선전함으로써 국가변란을 꾀했다는 것이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 자녀들이 청구한 재심재판에서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판결 이유는 조봉암의 간첩죄에 대한 유죄 증거들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를 기록상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과거 판결과정에서 양이섭 진술의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양이섭의 간첩죄 판결은 별도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조봉암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양이섭의 간첩죄는 법률적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양이섭은 간첩이었을까. 지금까지 양이섭의 실체에 대해서는 변론적 수준의 해석만이 존재했다. 특히 과거의 이력과 활동은 수사 및 공판과정에서 그 자신이 진술한 내용으로만 알려졌다. 본 연구에서는 당시의 수사·공판기록뿐 아니라 법정에 제출되지 않은 특무대의 미행 내사기록(국군기무사령부 존안 특무대의 기록), 일제시기 양이섭의 행적을 알 수 있는 日警 체포 보도 및 高麗共靑 기록과 신분장, 국방경비법 위반 판결사례 및 대북공작원 김동혁 사건 판결 등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두루 활용하여 양이섭이 어떤 사람이었고, 조봉암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어떻게 간첩이 되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양이섭은 신의주우체국 집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25년 9월 거액의 현금이 든 우편행랑을 들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上海로 망명했다. 그는 臨政과 학교에 큰돈을 희사하는 한편, 高麗共靑에도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후보회원으로 入會했다. 그 무렵 조봉암을 알게 되었고, 조봉암이 주도하던 上海 한인청년동맹,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과 중국공산당 한국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4월 日警에 체포되었다. 재판결과 치안유지법 위반(업무횡령)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4년 7월 가출옥했다. 양이섭은 과거 조봉암과 같은 독립운동 노선에서 활동한 사상적 동지였다. 다음, 1950년대의 남북교역 사실을 확인했다. 1948년 분단정권 수립 후 남북간의 공식 교역은 금지되었지만, 1950년대에도 남과 북 양측 첩보기관들에 의해 비공식적인 교역이 행해지고 있었다. 양측 첩보기관들은 민간인을 고용하여 교역을 假裝한 첩보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교역은 ‘敵地’를 드나들어야 하는 만큼 위험부담이 있었으나, 양측 첩보기관의 보증하에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비교적 안전하고 2~5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고수익 사업’이었다. 교역수익금의 상당액은 첩보기관 운영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양이섭은 HID측 교역상인으로서 북한을 내왕했고, 교역수익금 5,000만환의 1/3에 상당하는 금액을 HID에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양이섭의 신분이 공작원인가, 이중간첩인가, 아니면 단순한 남북교역 상인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 첩보기관의 공작원으로는 정식 등록된 공작원 신분과 첩보기관의 공작책임자가 개별적으로 고용한 민간인이 있었다. 후자가 이른바 남북교역 상인이다. 교역상인 자신의 내심은 장사에 목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장사 행위는 첩보기관의 공작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므로, 이들도 첩보 임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또, 교역의 성격상 ‘敵側’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다른 군부대나 경찰 등 수사당국에 발각, 체포될 경우 완전히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첩보기관의 공작 차원에서 행해지는 교역이라 하더라도 이북지역을 내왕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중첩자’로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양이섭의 경우 ‘이중첩자’가 아니라 북한의 일방적인 첩자로 규정되었는데, 조봉암과 만나고 그에게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양이섭은 남북교역에 참여한 이래 첩보기관 및 특무대의 미행감시를 통해 일거일동이 파악되고 있었음에도 조봉암과 만나는 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는데,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특무대의 검거대상이 되었다. 특무대는 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되던 날 1958년 1월 13일에 양이섭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양이섭은 2월 8일 특무대에 자진출두한 이래 3월 17일 검찰 송청시까지 40일 동안 특무대 근처 여관에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재판과정에서는 특무대 조사시 양이섭이 자살을 시도하고 재산헌납을 강요당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런데 그 재산헌납은 자살시도 실패 후 3일 동안에 행해진 것으로 ‘관대 처우에 대한 감사의 징의’로 약정된 것이었다. 2심 재판부는 양이섭의 진술번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진술에 대한 증거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2심 재판의 사실심리가 끝난 직후 1958년 10월 13일에는 뒤늦게 양이섭의 처와 그 자녀들의 가정교사 처가 간첩방조 및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양이섭에 대한 심리적 겁박이었다. 양이섭은 최후진술에서 사후 조봉암 옆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조봉암이 대통령이 되면 고아원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과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조봉암이 해방된 조국의 정치인으로서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목숨을 건 남북교역에서 얻은 수익금의 1/3을 기꺼이 제공했던 것이다. 조봉암에게 있어 그는 헌신적인 후원자였으며, 죽어서도 옆에 묻히기를 희구한 존경하는 동지였다. 일찍이 조봉암에 대해서는 이승만정권에 의한 피해자이자 한국사회 반공냉전체제의 희생자라는 평가가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양이섭 역시 이승만정권의 정치적 음모사건의 희생양이자 분단된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로 규정하고자 한다. This study is a trial to investigate the truth of Yang Eseop, a North Korean spy, who was brought to trial on suspicion of spying in Jo Bongam-Jinbo Party Case in 1958, sentenced to death, and was executed on July 1959. Yang Eseop was thought that he had spied by going to North Korea 12 times from June, 1955 to the middle of September, 1957, getting orders, money and valuables, and passing them to Jo Bongam. Jo Bongam-Jinbo Party's spy crime was seemed that it attempted the national rebellion by receiving money and orders from North Korea through Yang Eseop, creating Jinbo Party, promoting peaceful unification which was suggested by North Korea through publishing Jungang Jungchi(Metro Politics). On January 20, 2011, the Supreme Court overturned the original conviction in retrial of Jo Bongam' case, declaring him not guilty for spying and violating national security law. The reasons of a judgment of acquittal were as follows: (1) it was hard to see that guilty evidences for spying was proved without sensible curiosity (2) There were no other evidences found on the record. That is, there was illegality of juridical misunderstanding, so the spy quilt for Yang Eseop remains. Therefore, was Yang Eseop a spy? So far Yang Eseop was known by his statements made during investigations and trial processes. This study utilized newly found materials - (a) records of investigations and trial processes (2) records of secreat internal investigation of Defense Security Command (3) report on Yang Eseop arrested by the Japanese poli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4) records of attending Korean Communist Party (5) personal records of the prison (6) judgement cases of violating National Defense Guard Act (7) case of Kim, Donghyuk, a South Korean Spy - and examined (1) who was Yang Eseop (2) What kind of relations he had with Jo Bongam (3) who he became a spy. First of all, Yang Eseop sought asylum in Shanghai, China where there was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eptember, 1925 while working as a postman in Shineuiju Post Office. He contributed a lot of money to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donated money to Korean Communist Party, and gave and joined as a candidate member. He got to know Jo Bongam in those days, worked in Jo Bongam's community group, and was arrested by the Japanese police in April, 1931. Yang Eseop was an ideological comrade with Jo Bongam who worked on the same line of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past. Second, the trade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were verified. The official trade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was prohibited, but unofficial trades were made in both Koreas by intelligence agencies in 1950's. Intelligence agencies in both Koreas hired civilians and carried out spy businesses, disguising trades. Trades between North & South were dangerous because they needed to go to enemy territories, but these trades were made under guarantee of both intelligence agencies, so they were high-return businesses with 2~5 times of profits. a very large sum of money of trade profits were used for operation of intelligence agencies. Yang Eseop provided about 1/3 amount of trade profits to HID (Headquarters Intelligence Department) as a trade merchant of HID side. Lastly, it is a matter that Yang Eseop was a spy. He was considered as a spy because he met with Jo Bongam and provided financial aid to him. Though all his activities were observed and followed by HID and Defense Security Command while participating in trades between both Koreas, it was not a crime to meet with Jo Bongam, but Yang Eseop suddenly became an apprehension target of Defense Security Command. Defense Security Command tried to locate Yang Eseop on the day of arresting. He was investigated under illegal detention at the inn near by Defense Security Command for 40 days till March 17, since he appeared in Defense Security Command voluntarily on February 8. The fact that Yang Eseop tried to kill himself and was threatened to donate his fortune by Defense Security Command was revealed during the trial processes. That donation of his fortune was made in 3 days after he tried to commit suicide and it was agreed as a token of appreciation for generous treatment. The judge panel of his retrial didn't check his new evidences, though Yang Eseop changed his testimonies. But in hindsight his wife and the wife of kids' tutor were arrested on the charge of aiding spies and spying, so that Yang Eseop could get more psychological pressures. Yang Eseop wished he would be buried besides Jo Bongam after his death. He used to say that he wanted to run an orphanage, if Jo Bongam would become a president. He took a keen interest in Jo Bongam when he insisted "Politics of peaceful unification and the damaged public and did his best to support Jo Bongam financially. Yang Eseop was willing to provide about 1/3 amount of profits that he gained from the life-and-death trades between both Koreas. Yang Eseop was a dedicated supporter and respectful comrade who wanted to be buried besides Jo Bongam after his death. Earlier there was a appraisal that Jo Bongam was an undeserved victim of the Rhee Syngman government and the cold war system against communism of both Koreas. This study provides that Yang Eseop was also a victim of the political plot of the Rhee Syngman government and the modern history of divided Koreas. Key Words : Jinbo Party Case, Retrial, a spy, the Rhee Syngman government,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Korean Communist Party, the Maintenance of the Public Order Act, Defense Security Command,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partment), Trade between North & South Kroea, National Defense Security Act

      • 택시 교대근무자의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와의 관계

        김윤경 전남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7647

        Objective: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relationships between fatigue, sleep disturbance and job stress among taxi drivers in shift work in G city. Methods: The subjects were 72 taxi drivers in shift work from eleven taxi companies where cardiovascular demonstration project has been conducting by Korean Association of Occupational Health Nurses funded by Ministry of Labor since 2004. Study instrument to test fatigue was Checklist Individual Strength (CIS): 7-point, 20-items scale (α = .863); that to test sleep disturbance was revised version of the scale which developed for psychiatric patients Wonjin Hospital at Yongin: 4-point 5-items scale (α = .728 in day shift; α = .721 in night shift); and that to test job stress was also revised version (α = .702) of Korean version (Yoon, 2005) of Energy Reward Imbalance developed by Johannes Siegrist (1996). Data were collected by self-reported from July 2 to August 21 2007, and analyzed with frequency, percentage, χ2-test, t-test, ANOVA, Duncan's multiple range test, and Pearson's correlation coefficient using SPSS-PC win-12 program, Results: 1. Average score of fatigue was 3.98±1.12 out of 7-point; that of sleep disturbance in day shift was 2.08±.56, and in night shift was 2.18±.57 out of 4-point; and that of job stress was 3.31±.50 out of 5-point. 2. According to the demographics, sleep disturbance was milder in married group than in others (t = 2.196, p = .031) in only day shift. On the other hand, it was more severe in heavier drinking group both in day (F = 4.677, p = .012) and night (F = 4.105, p = .021) shift, and was also more severe in more frequent drinking group in day (F = 3.188, p = .047) and night (F = 4.276, p = .018) shift. Job stress was significant different according to the amount of daily income from taxi driving (F = 3.592, p = .035); and it was also more severe in the group of heavier smoking (F = 3.264, p = .032) and of much more drinking (F = 3.709, p = .030) groups. 3. According to job-related characteristics, sleep disturbance was more severe in the group who could not earn their daily due in seven days a month or more than the others in day (F = 3.766, p = .015) and in night shift (F = 3.569, p = .019). And it was also more severe in the shorter career group as driver than the others in only night shift (F = 3.727, p = .029). Job stress was also more severe in the group who could not earn their daily due in seven days or more per month (F = 4.312, p = .008) and who earned less than ₩10,000/day net income than the others (F = 4.712, p = .012). But fatigue did not show any differences according to the demographics and job-related characteristics. 4. Relationships among fatigue, sleep disturbance in both shifts and job stress showed all positiv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sleep disturbance of day and that of night shift showed highest correlated (r = .895, p = .001). Conclusion: Based on the above findings, authors recommend feasible, practical measures to make sure regular working hours for taxi drivers in shift work, and some break to reduce fatigue, sleepiness and stress. And also recommend methodological research to develop appropriate study instruments to examine fatigue, sleep disturbance and job stress of taxi drivers in shift work. 본 연구는 택시 교대근무자들의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와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G 광역시에서 한국산업간호협회가 한국산업안전공단 용역으로 실시하는 뇌?심혈관계질환 예방사업장 11곳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연구대상자는 전체 정규직 교대근무자 587명중 연구 참여에 구두로 동의한 교대근무자 72명을 대상으로 하였고, 자료수집은 2007년 7월 2일 부터 8월 21일 까지 실시하였다. 연구도구로 피로정도는 Checklist Individual Strength(CIS)를 이용하였고, 수면장애도구는 원진 녹색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사용한 수면장애 측정도구를 택시 교대근무자에 맞게 수정?보완하였다. 직무 스트레스 정도는 Johannes Siegrist가 개발한 Effort-Reward Imbalance(ERI)의 한국형 도구(임상혁, 윤간우, 2005)를 연구자가 택시 교대근무자의 특성에 맞게 수정?보완하였다. 수집한 자료는 SPSS win 12.0을 이용하여 실수, 백분율, 평균, 표준편차를 구하였고, 일반적 특성과 직업적 특성에 따른 피로, 수면장애와 직무스트레스는 t-test, ANOVA, Duncan's multiple range test를 하였으며, 변수 간 상관관계는 Pearson's correlation coefficient로 분석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연구 대상자의 피로정도는 총 7점 만점에 평균 3.98±1.12점 이었고, 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총 4점 만점에 평균 2.08±0.56점, 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총 4점 만점에 평균 2.18±0.57점, 직무스트레스는 총 5점 만점에 평균 3.31±0.50점이었다. 2. 수면장애는 주간근무 시 배우자와 함께 사는 기혼 군이(1.99±0.52점) 그렇지 않은 기타 군(2.31±0.63점)보다 덜 겪었으며(t = 2.196, p = .031), 주 평균 1병 이상 마시는 군이(2.49±0.64점) 반병 미만인 군(1.90±0.44점)보다 심했으나(F = 4.677, p = .012), 음주빈도에 따라서는 유의한 차이만 나타냈다(F = 3.188, p = .047). 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주 평균 1병 이상 마시는 군이(2.56±0.57점) 반병 미만인 군(2.00±0.47점)보다 (F = 4.105, p = .021), 주 3회 이상 마시는 군이(2.41±0.59점) 1회 이하로 마시는 군(2.00±0.45점)보다 심했다(F = 4.276, p = .018). 직무스트레스는 택시 교대근무자 개인의 월 평균 수입이 적을수록 더 유의한 차이를 보였고 (F = 3.519, p = .035), 하루 평균 1갑 이상 피우는 군이(3.57±0.47점) 1갑 미만인 군(3.22±0.43점)보다 (F = 3.264, p = .032), 매주 1병 이상 마시는 군이(3.57±0.55점) 반병 이하로 마시는 군(3.14±0.52점)보다 직무스트레스 정도가 높았다(F = 3.709, p = .030). 3. 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사납금을 못 채우는 일수가 7일 이상인 군이(2.40±0.60점) 사납금을 못 채운 날이 없는 군 즉, 매일 정해진 사납금을 채우는 군(1.95±0.52점)보다 수면장애가 심했다(F = 3.766, p = .015). 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운전경력이 5년 이하인 군이(2.33±0.53점) 11년 이상인 군(1.91±0.44점)보다 (F = 3.727, p = .029), 사납금을 못 채우는 일수가 7일 이상인 군이(2.50±0.62점) 사납금을 못 채운 날이 없는 군(2.05±0.43점)보다 심했다(F = 3.569, p = .019). 직무스트레스는 사납금을 지급한 후 남은 수입이 1만원 미만인 군이(3.41±0.44점) 3만원 이상인 군(2.90±0.58점)보다 (F = 4.712, p = .012), 사납금을 못 채우는 일수가 7일 이상인 군(3.56±0.43점)이 사납금을 못 채우는 날이 없는 군(2.99±0.56점)보다 높았다(F = 4.312, p = .008). 그러나 피로정도는 일반적 제 특성과 직업적 특성에 따라 유의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4. 연구 대상자의 피로정도, 주?야간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간의 상관관계에서 상관성이 가장 높은 것은 주?야간근무 시 수면장애였고(r = .895, p = .001), 다음으로 피로정도와 야간근무 시 수면장애(r = .652, p = .001), 피로정도와 주간근무 시 수면장애(r = .645, p = .001), 그리고 피로정도와 직무스트레스(r = .506(p = .001) 순이었다. 이상에서 택시 교대근무자들은 평균근무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고 실제 수입정도도 낮은 편이었으며, 교대근무로 인해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를 겪는 것으로 나타나 산업장 간호사들의 이들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결과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자 한다. 1. 택시 교대근무자들의 건강문제 해결 및 완화를 위한 법정 근로시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2. 택시 교대근무자들의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 완화를 위한 유급 휴게시간의 마련이 필요하다. 3. 택시 교대근무자들의 고유한 직무특성을 반영한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의 측정도구 개발 연구가 필요하다.

      • 문화콘텐츠산업을 위한 IT 플랫폼 기반의 공유모델 연구 : 공유경제 사례분석을 중심으로

        김윤경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2014 국내박사

        RANK : 247631

        Abstract A Study on the Sharing Model Based on IT Platform for Cultural Contents Industry : Focused on the Case Study of Sharing Economy by Kim, Yoon KyungDept. of Digital Contents Design, Graduated School of Techno Design, Kookmin University, Seoul, Korea Since the emergence of concept of Sharing Economy in 2008, Sharing Economy has been changing and expanding its scope with ICT and diverse culture beyond rent and intermediary in simple way. In the real economy, Sharing Economy is showing explosive growth in the United States and Germany. Whereas, in terms of academic research on the Sharing Economy is very incomplete. In this study, I studied on the ‘Sharing Model' based on IT platform for the Cultural Contents Industry, and established a theoretical framework of the Sharing Economy. Through theoretical studies, I redefine the concept of Sharing Economy, rapidly changing and expanding. According to the redefined concept of Sharing Economy, I proposed Sharing Model's concept and components through analysis. In addition, I proposed major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Sharing Model’, through case studies of Sharing Economy based on IT platform in abroad. I studied on the 'Sharing Economy' with cultural resources and human resources in abroad within limited cases. In the future, I will study on the 'Sharing Economy' with financial assets and natural resources, including cultural resources and human resources for a more in-depth study. 2008년 공유경제 개념이 등장한 이후, ‘협력적 소비’라는 개념 내에서의 단순한 대여 또는 중개 방식을 벗어나, 공유경제는 ICT 기술과 다양한 문화와 융합하여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그 범위가 확장하고 있다. 실물경제에서는 미국과 독일 중심으로 공유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는 데 반하여, 학술적 측면에서는 공유경제에 대한 연구가 매우 미비한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문화콘텐츠산업을 위한 IT 플랫폼 기반의 공유모델을 연구하여 공유경제에 대한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론적 연구를 통해 빠르게 변화하고 확장되고 있는 공유경제 개념을 명확히 재정립하고, 이에 따른 공유모델의 개념과 구성요소를 분석하여 제시하였다. 또한, IT 플랫폼 기반의 해외 공유경제 사례분석을 통해 공유참여자의 자원 공유방식에 따른 공유모델의 유형과 특징을 분석하여 제시하였다. 본 연구의 한계점은 분석대상이 문화자원·인적자원을 공유하는 해외 공유경제 사례로 한정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문화자원·인적자원뿐만 아니라 재무자산·천연자원 같은 다른 유형의 자원을 공유하는 공유경제 사례에 대해 더욱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될 것이다.

      • 조선시대 菱花紋 표지 복원 제작 연구

        김윤경 용인대학교 2007 국내석사

        RANK : 247631

        典籍 文化財에 대한 국가적 · 사회적인 관심의 증대와 함께 그 보존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현존하는 전적 문화재의 菱花紋 표지와 유사한 능화문 표지를 복원 제작하기 위한 연구를 실시하였다. 먼저 문헌 기록을 통해 능화문 표지 제작과 관련된 史實을 조사해본 결과, ꡔ朝鮮王朝實錄ꡕ과 ꡔ實錄廳儀軌ꡕ에서는 능화문 표지 제작 방식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대신 물품 목록 중 綾花紙 또는 菱花紙와 菱花板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서 조선시대에 능화문 표지의 사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능화문 표지는 능화판 · 밀랍 · 밀돌 · 배접된 표지를 사용하여 제작한다. 문헌 기록과 선행 연구에 따르면 밀랍은 防濕 효과가 있고, 표지 염색에 사용하는 황벽과 치자는 防蟲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연구된 열 가지의 능화문 표지 제작 방식에 따른 재현을 통해, 표지에 주는 습기, 표지 앞면에 칠하는 밀랍, 배접 후 표지 면을 보존하기 위한 풀칠이나 콩즙 塗布와 같은 특정 작업이 능화문 표지 제작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임을 알아 내었다. 특히 표지에 습기를 주고 표지 앞면에 밀랍을 칠하는 방법이 표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도드라진 능화 문양을 나타나게 한다.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능화문 표지가 사용된 전적 문화재 중에서 선별된 16점으로부터 표지에 도드라진 능화 문양과 광택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능화문 표지 제작 방식이 본 연구를 통해 밝혀진 능화문 표지 제작 방식과 유사함을 밝힐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습기에 따라 표지의 손상과 능화 문양이 도드라지는 정도는 차이를 보이는데, 표지에 19.03%의 습기가 있을 때 표지의 섬유가 손상 받지 않으면서 능화 문양이 적절하게 도드라진다. 따라서 표지에 19.03%의 습기를 주고 표지 윗면에 밀랍을 칠하는 방법이 표지의 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능화 문양을 도드라지게 하고 광택을 띠게 할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전적 문화재와 유사한 상태의 능화문 표지를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본 연구는 능화문 표지 제작에 관한 직접적인 문헌 기록을 찾지 못하고, 제작 도구에 따른 효과에 관해 직접적이고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물품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에 능화문 표지가 사용되었음을 고증하고, 선행된 제작 방식을 재현하여 능화문 표지 제작에 미치는 요소를 밝혀내는 성과가 있었다. 본 연구에서 미처 접근하지 못한 문헌 기록을 통한 능화문 표지 제작 방식에 대한 과학적 실험을 통한 연구는 다음 과제로 남겨 두기로 한다. As the importance of conserving cultural properties of Classical Books in the Joseon Dynasty rises along with the growing national and social interests in Classical Books, this paper examines the method which restores Neunghwa patterned covers similar to the extant covers of Classical Books. First, I conducted philological research on the manufacture of Neunghwa patterned covers in the Joseon Dynasty; however, I could not find any immediate records with regard to the manufacture in The True Record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Record on the Compilation of the True Record of the Joseon Dynasty. Instead, I could affirm the use of Neunghwa patterned covers during the Joseon Dynasty by finding the records on Neunghwa papers and Neunghwa plates. Neunghwa patterned covers were made of Neunghwa plates, beeswax, rubbing stone, and the sheets of paper repeatedly overlapped. According to the records and previous studies, beeswax is good for moisture-proofing and Phellodendron amurense and Gardenia jasminoides Ellis, used for cover dyeing, are effective in moth protection. By reproducing Neunghwa patterned covers according to the ten methods investigated to date, I came to get the factors to have influence on the production of Neunghwa patterned covers: humidity on the covers, beeswax on the front sides of the covers, and the specific process (applying paste or bean juice on the covers) for conserving the state of the covers after the repeated process of pasting sheets of paper to overlap. In particular, the method of providing the covers with moisture and applying beeswax to the surfaces enables production of covers which have resolute shapes of Neunghwa pattern without damage. I could see the striking shapes of Neunghwa pattern and clear gloss on the selected sixteen pieces of Classical Books, which covered with Neunghwa patterns, made from the fifteenth to the twentieth centuries. This indicates that the method of producing Neunghwa patterned covers, proved by this thesis, is similar to that of the Joseon Dynasty. Specifically, it is humidity that determines the resolution of Neunghwa shapes and causes damage on the fiber of the covers. Maintaining 19.03% humidity and beeswax on the covers is the optimum condition which ensures to make Neunghwa patterned covers of exact lozenge shapes and without damage. The covers produced by this method is strikingly similar to those of the present Classical Books. Yet, there are still some matters to examine further, since this thesis did not find the records directly related to producing Neunghwa patterned covers and it also did not contain a direct, scientific research analyzing manufacture equipments efficiency. However, this thesis has its own accomplishment in that it ascertains the use of Neunghwa patterned covers during the Joseon Dynasty with indirect philological research and reveals the factors to influence Neunghwa patterned covers by repr

      • 애착관계 결핍으로 인한 청년기 우울증

        김윤경 총신대학교 상담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247631

        우울증을 가리켜 ‘마음의 감기’라고 부른다. 흔히 걸릴 수 있는 병이지만 가볍게 생가하고 지나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될 수 있다. 우울증의 여러요인중 초기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결핍되어 자라는 내내 인간관계의 어려움, 사회 부적응을 호소하는 청년들이 많다. 본 연구자는 부모와의 애착관계 결핍으로 인한 우울증 해결을 위한 성경적인 상담을 연구하였다. 연구 방법으로는 문헌 연구와 사례 연구를 하였다. Paul D. Tripp의 성경적 상담의 원리와 방법으로 상담사례를 분석하였다. 2장에서는 청년기의 개념과 우울증의 개념을 살펴보고 청년기의 발달특성에 따른 우울증 증상과 원인을 살펴보았다. 우울증의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개념이해를 살펴보았고 성경에서는 우울증을 어떻게 바라봐야하는지 우울증을 경험한 성경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3장에서는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부모와의 애착관계 결핍에 대한 이론적 배경과 애착유형 및 양육태도를 살펴보았고 성경에서의 애착의 개념은 무엇인지 연구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애착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애착을 제외한 모든 것은 우상이라고 말한다. 애착이 결핍이 되었을 때 어떻게 우울증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4장에서는 청년기 우울증에 대한 심리치료와 성경적 상담을 소개하고 그 한계점을 성경적 관점에서 제시하였다. 성경적 상담의 원리와 방법을 소개하였으며 애착관계로 인한 우울증을 극복한 성경인물들을 연구함으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5장에서는 애착관계결핍으로 인한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는 청년들의 사례를 연구하였다. 성경적 상담의 원리와 방법을 적용하여 상담을 진행하였으며 마음의 문제를 찾아 스스로 자신의문제를 고려하도록 하였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초기부모와의 관계는 청년기뿐만 아니라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특별히 성인의 사회화 과정을 이루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과거의 부모와의 애착 결핍이 된 상황들은 바꿀 수 없지만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과 사고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꿀 수 있다. 우울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그 감정과 상황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며 그상황과 환경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도왔다.

      • 의복스타일, 색, 톤조합이 인상형성에 미치는 영향

        김윤경 경상대학교 2002 국내석사

        RANK : 247631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ut the effect of clothing style, color, tone combination and perceiver's age on impression formation. The experimental materials developed for this study are a set stimuli and response scale. The 7-point semantic differential response scale were designed. The subjects were 216 female undergraduate and 216 female of middle age(40∼50) in Chin-ji city. This study composed by between subjects. The experimental design consists of 3 factorial design : (1) Clothing style (Casual, Formal) (2) Color (Chromatic, Achromatic) (3) Tone Combination (Light/Light, Medium/Light, Dark/Light, Light/ Medium, Medium/Medium, Dark/Medium, Light/Dark, Medium/Dark, Dark/Dark) The result of this study can be summeriged as follows : 1. By analyzing in the dimensional structure of impressions of the femal figure by clothing style, color and tone combination. The 5 factors ase charm, elegance, ability·activity, revealation, tenderness. Among these charming and elegance factors proved to be more important. 2. The effect of clothing style, color, tone combination and perceiver's age are according to each impression factors differentiate. Each impression of clothing style and clothing color with the combination of tone combination and perceiver's age has significant effects all the 5 factors. In the effect of interactions both charming and revealation, the combination of clothing style and color and that of clothing style and tone combination and that of color and perceiver's age was significant. Also, the effect of interactions on revealation, the combination of color and tone and that of tone and perceiver's age was significant. Among the 5 factors, color of clothing are most influential to the charming and revealation. The effect of interactions on elegance factor is showed at the combination clothing style and perceiver's age and that of color and tone combination. Lastly, effect of interactions both color and perceiver's age is showed on tenderness f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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