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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티누스와 덕의 윤리: 기독교적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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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에 대한 관심은 간헐적이고 단편적인 경향이 있다.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착수한 이유가 여기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영미철학 및 기독교신학에서 덕의 윤...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에 대한 관심은 간헐적이고 단편적인 경향이 있다.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착수한 이유가 여기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영미철학 및 기독교신학에서 덕의 윤리를 다루는 과정에 아우구스티누스를 재발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맥킨타이어(A. MacIntyre)의 경우, 아우구스티누스적 대안(The Augustinian Alternat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기독교윤리학에서 교회의 공동체적 특징을 덕의 윤리와 연관 지으려는 하우어워스(S. Hauerwas)의 관심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덕의 윤리에 관한 기독교적 배경과 특징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그 연원으로서의 아우구스티누스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고전적 거작들 속에 녹아있는 덕성에 관한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특히, 기독교윤리학에서 말하는 성품의 윤리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연원한다는 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덕 개념에 대한 해석상 문제가 있다면, 어느 관점에서 읽는 것이 옳은가 하는 점일 듯싶다. 이는 해석의 방향에 영향을 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덕 개념을 ‘행복론적 윤리’(eudaimonism)로 읽어야 하는가? 혹은 덕의 윤리가 말하는 ‘공동체적 윤리’로 읽어야 하는가? 만일, 행복론적 윤리로 읽는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이어진 행복(eudaimonia)의 추구를 윤리학의 근본문제로 삼아 기독교적 통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행복론적이다. 이 대목에서는 질송(E. Gilson), 마우스바하(J. Mausbach)의 견해 등을 참고할만하다.
      공동체적 윤리로 읽는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맥킨타이어는 물론이고, 하우어워스의 교회적 윤리(ecclasial ethics)를 아우구스티누스와 연관지으려는 밀뱅크(John Milbank)의 관점 또한 여기에 속한다. 하우어워스가 명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요더(J. H. Joder) 및 맥킨타이어와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 하우어워스의 관점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흔적이 충만하다. 시민사회에서 ‘교회로 교회되게 하자’(make church be the church)는 관심, 교회가 사회윤리의 이론을 제시하기보다 교회 자체로 사회윤리이어야 한다는 주장 등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말한 순례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에 관한 현대적 재론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를 덕성함양의 공동체로 보는 것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그리 멀지 않다. 한 가지, 아우구스티누스의 덕론에 대한 재해석의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도덕철학자 맥킨타이어에게서 나타난다. 그는 현대사회를 윤리적 위기로 파악하고 칸트의 계몽주의적 기획(modern project)을 비판적으로 재고해야 한다고 보았다. 맥킨타이어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덕론은 희랍의 덕과 달리 자유의지의 문제로 환원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의 전개과정과 결말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뜻에서, 로마인들의 덕성은 진정한 미덕이라 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영원을 향한 위탁도 없으며 덕스러움을 흉내 내기에 급급한 유사미덕(a quasi-virtue)일 뿐이다. 혹은 ‘화려한 악덕’(splendida peccata; splendid vices)에 지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로마가 추구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진정한 평화는 로마의 영웅적 덕성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하고 남을 지배하려는 권력욕을 포기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그토록 앞세우는 덕스러움이란 인간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 덕의 진정한 완성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언급들은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순례자 공동체로서의 교회인식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주제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요소들이 이 연구에 종합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연구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를 단지 고전의 권위로 읽는 것에 머물지 않고, 고전연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원전연구를 통해 그것이 오늘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인지를 재조명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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