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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대 活人署에 대한 인식과 운영 실태 = The Perception and Management of the Office for the Saving of People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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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연구는 영조대를 중심으로 활인서에 대한 인식과 운영의 실태를 살펴본 것이다. 영조 연간에는 활인서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는 두 가지 양상의 속담이 회자되었다. 하나는 ‘活人署가 아니라 殺人署’라는 속담이다. 활인서가 유명무실하여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의료 기관이라는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다. 또 하나는 ‘活人別提罷職’이라는 속담이다. 병자가 죽게 되면 활인서 별제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파직시키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죄가 없이 횡액을 당한 경우에 이 속담이 사용되었다. 이 두 가지 속담의 용례들은 당대의 활인서에 대한 시선과 인식이 단일하지 않고 다층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활인서는 도성의 전염병자를 전담해서 구료하는 기관이었으므로 전염병의 발생과 확산은 활인서의 존재 의의를 가늠케 하였다. 전염병이 불같이 일어나고 사망자가 속출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어김없이 활인서의 무실함이 강조되고 ‘살인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그렇지만 영조대는 활인서의 운영을 정비하고 활인책을 강구함으로써 일정하게 의료적인 성과를 거두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활인서의 경험과 대책은 京外에서 한결같이 따라야 할 규례로 제시·계승되고 있었다. 당대의 시각에서는 병막에 수용된 병자 중에서 절반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면 조정에서 활인서를 설립한 뜻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감안하면 영조 연간에 운영되었던 활인서는 종래 ‘살인서’로 평가된 것과 같이 기능을 전혀 상실한 관서라고는 할 수 없으며, ‘활인’의 영역에서 절반 정도의 성공(혹은 실패)을 거둔 의료 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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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구는 영조대를 중심으로 활인서에 대한 인식과 운영의 실태를 살펴본 것이다. 영조 연간에는 활인서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는 두 가지 양상의 속담이 회자되었다. 하나는 ‘活人署가 ...

      이 연구는 영조대를 중심으로 활인서에 대한 인식과 운영의 실태를 살펴본 것이다. 영조 연간에는 활인서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는 두 가지 양상의 속담이 회자되었다. 하나는 ‘活人署가 아니라 殺人署’라는 속담이다. 활인서가 유명무실하여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의료 기관이라는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다. 또 하나는 ‘活人別提罷職’이라는 속담이다. 병자가 죽게 되면 활인서 별제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파직시키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죄가 없이 횡액을 당한 경우에 이 속담이 사용되었다. 이 두 가지 속담의 용례들은 당대의 활인서에 대한 시선과 인식이 단일하지 않고 다층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활인서는 도성의 전염병자를 전담해서 구료하는 기관이었으므로 전염병의 발생과 확산은 활인서의 존재 의의를 가늠케 하였다. 전염병이 불같이 일어나고 사망자가 속출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어김없이 활인서의 무실함이 강조되고 ‘살인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그렇지만 영조대는 활인서의 운영을 정비하고 활인책을 강구함으로써 일정하게 의료적인 성과를 거두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활인서의 경험과 대책은 京外에서 한결같이 따라야 할 규례로 제시·계승되고 있었다. 당대의 시각에서는 병막에 수용된 병자 중에서 절반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면 조정에서 활인서를 설립한 뜻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감안하면 영조 연간에 운영되었던 활인서는 종래 ‘살인서’로 평가된 것과 같이 기능을 전혀 상실한 관서라고는 할 수 없으며, ‘활인’의 영역에서 절반 정도의 성공(혹은 실패)을 거둔 의료 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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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perception and management of the Office for the Saving of People (活人署), or OSP, particularly focusing on the reign of King Yeongjo.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there were two phrases that was well-known to the contemporary people containing the perception of OSP at the time. The first phrase was that “the Office for the Saving of People is in fact an office that kills people (殺人署).” This saying reflects the recognition that OSP did not function as it was intended and rather became a medical institution that took lives, thus making it unworthy of its name. The second phrase was that “the special director of the Office for the Saving of People is dismissed from his position(活人別提罷職).” When patients died from disease, it was common for the special director of OSP to take responsibility for the losses of lives and be dismissed from his position. Because of this, the saying was used when a person was unfairly treated or went through an unexpected disaster. These two examples display a multi-layered complex reception and perspective toward OSP throughout the period. During the reign of Yeongjo, some medical advancements were achieved due to the reorganization of OSP and taking measures to implement medical policies for saving lives. From a contemporary perspective, a death toll of about a half of the accommodated patients in the quarantine station was believed to be against the purpose of the establishment. Considering the perception regarding its function and purpose, we cannot assert that OSP had completely malfunctioned as done in previous studies and as was evaluated in its byname “an office that kills people.” It is possible to say that it was a medical institution that had achieved about half a success (or failure) in the area of “saving th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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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examines the perception and management of the Office for the Saving of People (活人署), or OSP, particularly focusing on the reign of King Yeongjo.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there were two phrases that was well-known to the conte...

      This study examines the perception and management of the Office for the Saving of People (活人署), or OSP, particularly focusing on the reign of King Yeongjo.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there were two phrases that was well-known to the contemporary people containing the perception of OSP at the time. The first phrase was that “the Office for the Saving of People is in fact an office that kills people (殺人署).” This saying reflects the recognition that OSP did not function as it was intended and rather became a medical institution that took lives, thus making it unworthy of its name. The second phrase was that “the special director of the Office for the Saving of People is dismissed from his position(活人別提罷職).” When patients died from disease, it was common for the special director of OSP to take responsibility for the losses of lives and be dismissed from his position. Because of this, the saying was used when a person was unfairly treated or went through an unexpected disaster. These two examples display a multi-layered complex reception and perspective toward OSP throughout the period. During the reign of Yeongjo, some medical advancements were achieved due to the reorganization of OSP and taking measures to implement medical policies for saving lives. From a contemporary perspective, a death toll of about a half of the accommodated patients in the quarantine station was believed to be against the purpose of the establishment. Considering the perception regarding its function and purpose, we cannot assert that OSP had completely malfunctioned as done in previous studies and as was evaluated in its byname “an office that kills people.” It is possible to say that it was a medical institution that had achieved about half a success (or failure) in the area of “saving th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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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Ⅱ. 활인서에 대한 인식의 교차 Ⅲ. 활인서의 운영 정비와 ‘活人’ 강구 Ⅳ. 맺음말
      • Ⅰ. 머리말 Ⅱ. 활인서에 대한 인식의 교차 Ⅲ. 활인서의 운영 정비와 ‘活人’ 강구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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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대한감염학회, "한국전염병사" 군자출판사 2009

      2 여인석, "한국의학사"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2012

      3 李圭根, "조선후기 疾病史 연구-『朝鮮王朝實錄』의 전염병 발생 기록을 중심으로-" 96 : 2001

      4 최종성, "조선조 무속 國行儀禮연구" 일지사 2002

      5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2007

      6 박훈평, "조선 시대 활인서 연구 - 연혁 및 상비처방을 중심으로" 한국의사학회 33 (33): 11-20, 2020

      7 김영미, "전염병의 문화사-고려시대를 보는 또 하나의 시선" 혜안 2010

      8 하명준, "영조대 재지사족의 재난 경험과 기록의 정보화: 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94) : 291-324, 2021

      9 박훈평, "내의원 편 『內醫院 式例』의 저술 시기와 내용 연구" 한국의사학회 28 (28): 39-51, 2015

      10 金斗鍾, "韓國醫學史 全" 탐구당 1966

      1 대한감염학회, "한국전염병사" 군자출판사 2009

      2 여인석, "한국의학사"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2012

      3 李圭根, "조선후기 疾病史 연구-『朝鮮王朝實錄』의 전염병 발생 기록을 중심으로-" 96 : 2001

      4 최종성, "조선조 무속 國行儀禮연구" 일지사 2002

      5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2007

      6 박훈평, "조선 시대 활인서 연구 - 연혁 및 상비처방을 중심으로" 한국의사학회 33 (33): 11-20, 2020

      7 김영미, "전염병의 문화사-고려시대를 보는 또 하나의 시선" 혜안 2010

      8 하명준, "영조대 재지사족의 재난 경험과 기록의 정보화: 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94) : 291-324, 2021

      9 박훈평, "내의원 편 『內醫院 式例』의 저술 시기와 내용 연구" 한국의사학회 28 (28): 39-51, 2015

      10 金斗鍾, "韓國醫學史 全" 탐구당 1966

      11 吉田光男, "近世ソウル都市社会研究 : 漢城の街と住民" 草風館 2009

      12 "藏氷謄錄 (奎12902)"

      13 "英祖實錄"

      14 "英祖實錄"

      15 "肅宗實錄"

      16 "續大典"

      17 "經國大典"

      18 "燕山君日記"

      19 金 澔, "正祖代 醫療 정책" 82 : 1996

      20 "松南雜識 (趙在三)"

      21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22 李相協, "朝鮮時代 東·西活人署에 대한 考察" 56 : 1996

      23 文勇植, "朝鮮後期 賑政과 還穀 運營의 硏究" 高麗大學校 大學院 1999

      24 金 澔, "朝鮮前期 對民 醫療와 醫書 編纂" 68 : 1996

      25 "承政院日記"

      26 "成宗實錄"

      27 "惠局志 (奎 7361)"

      28 한규진, "巫覡의 役割과 統制 : 麗末鮮初를 중심으로" 원불교사상연구원 (79) : 283-313, 2019

      29 "太祖實錄"

      30 "增補典錄通考"

      31 "勝聰明錄 (仇尙德)"

      32 "典錄通考"

      33 "六典條例"

      34 "備邊司謄錄"

      35 "中宗實錄"

      36 "世宗實錄"

      37 이강욱, "『承政院日記』를 통해 본 草記의 전면적 考察" 한국고전번역원 34 (34): 307-354, 2010

      38 염정삼, "《說文解字注》 部首字 譯解"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7

      39 공준원, "5궁과 도성" 생각나눔 2020

      40 이형대, "18세기 전반의 농민현실과 「임계탄(壬癸歎)」" 민족문학사연구소 22 : 34-57, 2003

      41 김대원, "18세기 민간의료의 성장" 39 : 1998

      42 許在惠, "18세기 醫官의 經濟的 活動樣相" 71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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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5-31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외대사학 -> 역사문화연구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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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75 0.75 0.6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6 0.49 1.216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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