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50여 년간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가장 험난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병자의 양대 호란과 극심했던 자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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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16세기 말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50여 년간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가장 험난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병자의 양대 호란과 극심했던 자연재...
16세기 말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50여 년간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가장 험난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병자의 양대 호란과 극심했던 자연재해, 그리고 趙大妃의 服을 둘러싼 禮訟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고 죽이는 정치적 派爭 등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기를 살았던 本考의 주인공 龍洲 趙絅(1586~1669)은 광해군 때 북인의 출사 요구를 뿌리치고 거창 ‧ 함양(안의) 등지에서 옮겨 다니며 10여 년간 은거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신진 언관으로 조정에 출사했다. 당시 격렬한 언론활동으로 반정공신들의 권력독점과 탐학을 공격하는 등 利를 버리고 義를 추구하는 眞儒의 길을 걸었다. 아울러 그는 폭넓은 교유를 보여주었다. 특정 당파에 국한되지 않고 남인계를 비롯하여 노론과 소론, 북인계(중북) 인사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는 曺植(1501~1572) ‧ 吳健(1521~1574) ‧ 鄭逑(1543~1620)로부터 文緯(1555~1632)를 잇는 학맥의 영향을 받았고 金湜(148∼1520)에 연원하는 尹根壽(1537~1616)의 문하를 출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용주는 당시 許穆(1595~1682)과 함께 남인계의 공론을 주도해 나가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다른 당파에 속한 인물들과도 公義에 입각하여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물이었다. 용주는 인조 대에 대제학을 역임했고, 인조가 승하한 뒤 「長陵誌文」을 찬술했으며, 효종이 승하한 뒤에는 諡冊文을 지었다. 이처럼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 문형을 맡은 일이나, 양대 임금을 위한 주요한 傳後文字의 찬술자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그가 당시 朝野의 선비들로부터 당파를 초월하여 대문장가로 인정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 주로 다루고자하는 그의 한시 작품은 이 같은 고난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分泌된 현실인식의 응축물이다. 파란만장한 內憂外患의 격동기를 살아가며 정치가로, 문인으로 적잖은 업적을 남겼던 용주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지금까지 遲遲不進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과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구체적으로 一代記를 조명하는 글조차 거의 없었다.
임병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 용주의 시대에 비추어 그의 의식세계도 간단치가 않았을 것으로 본다. 한시연구는 간단히 작품의 형식적 내지 내재적 분석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산문자료의 도움을 받아 창작배경 및 주제형성의 이면을 추적하여 객관화된 이해에 도달하는 것도 긴요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시가창작과 산문창작 사이의 소통관계를 알아내어 서로 보완해주는 연구방법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용주의 사상이 산문저작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일정 부분 시를 통해 집약적으로 발현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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