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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성덕왕대의 정치 질서와 ‘종실 · 척리(宗室·戚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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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글에서는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 下 附錄 允中에 보이는 “宗室 ․ 戚里”를 중심으로, 新羅 聖德王 대(702~737)의 정치 질서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宗室 ․ 戚里”가 보이는 해당 사료의 시간적 배경은 712년 8월 무렵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愷元 ․ 金元泰 등의 인사를 구심점으로 형성되었던 세력으로, 중시 등 관료들의 인사를 통제하려 하였고 불교에 친화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들의 성격은 마찬가지로 “宗室 ․ 戚里”로 불릴 수 있는, 이후 宿衛 외교에서 보이는 ‘왕족’ 인사 ․ 金順元 등까지 계승되었다고 보았다.
      이들과 대립한 비“宗室 ․ 戚里”계 인사들은 允中(允忠)으로 대표되며 유교적 관료제를 추구하면서 “親親”의 논리에 맞서 “善善”의 논리로 비호되었다. 이들은 712년 무렵부터 “宗室 ․ 戚里”계 인사와 대립하며 집단화되어 7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권의 주류를 차지하였으며, ‘왕족’을 宿衛 외교에 동원해 국내 정치와 격리시키고 외척을 통제할 적지 않은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이들의 권력이 일정 이상 강해지자, 후계자인 金承慶(孝成王)은 신충과 김순원 등 “宗室 ․ 戚里”계 인사와 접촉하며 이들을 해체시킨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볼 때, 성덕왕 대 정국 속에서 “宗室 ․ 戚里”의 성격을 재고해 보게 된다. 곧 그들은 그 성격상 오히려 국왕에 의존적이었으며, “宗室 ․ 戚里”라는 집단이 등장한 것 또한 방어적인 의미에서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효성왕 대에는 “宗室 ․ 戚里”와 비 “宗室 ․ 戚里”계 인사의 대결 구도 자체가 해체되었으며, “宗室 ․ 戚里”는 성덕왕 대의 정치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한정된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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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는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 下 附錄 允中에 보이는 “宗室 ․ 戚里”를 중심으로, 新羅 聖德王 대(702~737)의 정치 질서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宗室 ․ 戚里”가 보이는 해당...

      이 글에서는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 下 附錄 允中에 보이는 “宗室 ․ 戚里”를 중심으로, 新羅 聖德王 대(702~737)의 정치 질서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宗室 ․ 戚里”가 보이는 해당 사료의 시간적 배경은 712년 8월 무렵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愷元 ․ 金元泰 등의 인사를 구심점으로 형성되었던 세력으로, 중시 등 관료들의 인사를 통제하려 하였고 불교에 친화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들의 성격은 마찬가지로 “宗室 ․ 戚里”로 불릴 수 있는, 이후 宿衛 외교에서 보이는 ‘왕족’ 인사 ․ 金順元 등까지 계승되었다고 보았다.
      이들과 대립한 비“宗室 ․ 戚里”계 인사들은 允中(允忠)으로 대표되며 유교적 관료제를 추구하면서 “親親”의 논리에 맞서 “善善”의 논리로 비호되었다. 이들은 712년 무렵부터 “宗室 ․ 戚里”계 인사와 대립하며 집단화되어 7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권의 주류를 차지하였으며, ‘왕족’을 宿衛 외교에 동원해 국내 정치와 격리시키고 외척을 통제할 적지 않은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이들의 권력이 일정 이상 강해지자, 후계자인 金承慶(孝成王)은 신충과 김순원 등 “宗室 ․ 戚里”계 인사와 접촉하며 이들을 해체시킨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볼 때, 성덕왕 대 정국 속에서 “宗室 ․ 戚里”의 성격을 재고해 보게 된다. 곧 그들은 그 성격상 오히려 국왕에 의존적이었으며, “宗室 ․ 戚里”라는 집단이 등장한 것 또한 방어적인 의미에서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효성왕 대에는 “宗室 ․ 戚里”와 비 “宗室 ․ 戚里”계 인사의 대결 구도 자체가 해체되었으며, “宗室 ․ 戚里”는 성덕왕 대의 정치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한정된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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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is paper, I tried to figure out the political order in the King Seongdeok (聖德王)’s era, looking through the record of “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宗室 ․ 戚里)” in the biography of Yunjung(允中) in Samguksagi(三國史記). That record might describe the situation around August 712. The word, I think, means the political faction represented by Gaewon(愷元) ․ Kim Wontae(金元泰). They endeavored to control the appointments of bureaucrats like Jungsi(中侍) and were familiar with Buddhism. The faction might contain people extensively who had similar political direction and could include ‘Royal(王族)’ Guards(宿衛) and Kim Sunwon(金順元).
      Non-“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faction, including Yunjung, pursued Confucian bureaucracy system and received protection by the slogan of “Be Virtuous to the Virtuous People(善善)”, against the that of “Be Familiar to the Familiar People(親親).” They had become an influential faction around 712 and became a powerful one around the mid-720s. However, the situation had been disadvantageous to the royal successor Kim Seungkyeong(金承慶), who became King Hyoseong(孝成王) later. So, he contacted figures of “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like Sinchung(信忠) and Kim Sunwon, and made the Non-“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faction dissolved.
      “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is thought to have been dependent on the king and have emerged to defend itself. The faction was seemingly re-established by King Hyoseong, but because of the dissolution of the political structure itself in the King Seongdeok’s era, “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could not last more as a political f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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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is paper, I tried to figure out the political order in the King Seongdeok (聖德王)’s era, looking through the record of “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宗室 ․ 戚里)” in the biography of Yunjung(允中) in Samguksagi(三國...

      In this paper, I tried to figure out the political order in the King Seongdeok (聖德王)’s era, looking through the record of “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宗室 ․ 戚里)” in the biography of Yunjung(允中) in Samguksagi(三國史記). That record might describe the situation around August 712. The word, I think, means the political faction represented by Gaewon(愷元) ․ Kim Wontae(金元泰). They endeavored to control the appointments of bureaucrats like Jungsi(中侍) and were familiar with Buddhism. The faction might contain people extensively who had similar political direction and could include ‘Royal(王族)’ Guards(宿衛) and Kim Sunwon(金順元).
      Non-“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faction, including Yunjung, pursued Confucian bureaucracy system and received protection by the slogan of “Be Virtuous to the Virtuous People(善善)”, against the that of “Be Familiar to the Familiar People(親親).” They had become an influential faction around 712 and became a powerful one around the mid-720s. However, the situation had been disadvantageous to the royal successor Kim Seungkyeong(金承慶), who became King Hyoseong(孝成王) later. So, he contacted figures of “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like Sinchung(信忠) and Kim Sunwon, and made the Non-“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faction dissolved.
      “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is thought to have been dependent on the king and have emerged to defend itself. The faction was seemingly re-established by King Hyoseong, but because of the dissolution of the political structure itself in the King Seongdeok’s era, “Royal Family and Relatives by Marriage” could not last more as a political f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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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요약
      • Ⅰ. 머리말
      • Ⅱ. 聖德王代 정국 속의 “宗室 ․ 戚里”
      • Ⅲ. 聖德王代 정치 질서의 추이
      • Ⅳ. 맺음말
      • 국문요약
      • Ⅰ. 머리말
      • Ⅱ. 聖德王代 정국 속의 “宗室 ․ 戚里”
      • Ⅲ. 聖德王代 정치 질서의 추이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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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金聖洙,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漢譯年度 및 刊行地에 관한 연구" 106 : 1999

      2 신라사학회, "흥무대왕 김유신 연구" 경인문화사 2007

      3 강만길, "한국사 3" 한길사 1994

      4 國史編纂委員會, "한국사 3" 探究堂 1976

      5 신정훈, "한국 고대의 서상과 정치" 혜안 2013

      6 서정목, "요석" 글누림 2016

      7 박해현, "신라중대 정치사연구" 국학자료원 2003

      8 한준수, "신라중대 율령정치사 연구" 서경문화사 2012

      9 이천우, "신라 효소왕대의 정국 운영과 성덕왕의 즉위 과정 - 김순원의 활동을 중심으로 -" 호남사학회 (65) : 1-27, 2017

      10 이영호,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 지식산업사 2014

      1 金聖洙,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漢譯年度 및 刊行地에 관한 연구" 106 : 1999

      2 신라사학회, "흥무대왕 김유신 연구" 경인문화사 2007

      3 강만길, "한국사 3" 한길사 1994

      4 國史編纂委員會, "한국사 3" 探究堂 1976

      5 신정훈, "한국 고대의 서상과 정치" 혜안 2013

      6 서정목, "요석" 글누림 2016

      7 박해현, "신라중대 정치사연구" 국학자료원 2003

      8 한준수, "신라중대 율령정치사 연구" 서경문화사 2012

      9 이천우, "신라 효소왕대의 정국 운영과 성덕왕의 즉위 과정 - 김순원의 활동을 중심으로 -" 호남사학회 (65) : 1-27, 2017

      10 이영호,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 지식산업사 2014

      11 신선혜, "신라 성덕왕대 禁殺生 下敎의 배경과 의미" 한국고대사학회 (83) : 267-300, 2016

      12 이장웅, "신년 의례를 통해 본 8세기 전반동아시아 국제 질서-신라・발해・당・일본의 상호 관계를 중심으로-" 신라사학회 (49) : 243-279, 2020

      13 서영교, "부산 영도(絶影島), 신라왕실목장"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33) : 105-140, 2017

      14 邊太燮,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15 "高麗史"

      16 金秉仁, "高麗 睿宗代 政治勢力 硏究" 景仁文化社 2003

      17 李基白, "韓國史講座 古代編" 一潮閣 1982

      18 李基白, "韓國古代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96

      19 申瀅植,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20 全海宗, "韓中關係史 硏究" 一潮閣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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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資治通鑑"

      24 李丙燾, "譯註 三國遺事" 한국학술정보 2012

      25 "舊唐書"

      26 金英美, "聖德王代 專制王權에 대한 一考察" 22 ․ 23 합 : 1988

      27 "續日本紀"

      28 趙二玉, "統一新羅의 北方進出 硏究" 서경문화사 2001

      29 "禮記"

      30 "皇福寺 3層 石塔金銅舍利函記"

      31 "甘山寺 石造 阿彌陀佛 造像記"

      32 "甘山寺 石造 彌勒菩薩像 造像記"

      33 "朝鮮王朝實錄"

      34 "春秋公羊傳"

      35 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36 李基白,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37 濱田耕策, "新羅國史の硏究" 吉川弘文館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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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김영하, "新羅中代社會硏究" 일지사 2007

      40 金壽泰, "新羅中代政治史硏究" 一潮閣 1996

      41 李昊榮, "新羅三國統一과 麗 ․ 濟敗亡原因 硏究" 書景文化社 1997

      42 김흥삼, "新羅 聖德王의 王權强化政策과 祭儀를 통한 河西州地方 統治(上)" 강원사학회 (13) : 103-122,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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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윤태양, "孝成王代의 정치ㆍ외교적 動向과 景德王으로의 왕위 계승" 진단학회 (135) : 1-34, 2020

      53 池田溫, "唐朝氏族志の一考察" 13 :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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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정순모, "唐 玄宗의 佛敎 대책과 開元寺" 역사연구소 (95) : 131-16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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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冊府元龜"

      62 "全唐文"

      63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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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박인희, "〈신충괘관〉과〈원가〉연구" 신라문화연구소 (28) : 299-32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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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신정훈, "8세기 신라의 정치와 왕권" 한국학술정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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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5 학회명변경 한글명 :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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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9 0.59 0.5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46 0.41 1.83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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