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柳麟錫의 국권 회복 운동과 華夷의식의 변용 = Yu In Seok's Movement for Resumption of the National Sovereignty and the Transformation of Sino-barbarian Dichotomy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4429454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유인석은 근대 중화론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유인석에게 주목되는 것은 확고한 중화론자이면서도 시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유연하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스승 이항로를 ...

      유인석은 근대 중화론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유인석에게 주목되는 것은 확고한 중화론자이면서도 시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유연하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스승 이항로를 비롯한 선배 유림들이 시세보다 의리에 집착했던 데 반해 유인석은 의리와 시세를 참작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점에서 유인석은 근대 시기 중화론의 변용 과정을 살피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에 본고에서는 유인석의 중화론의 변화과정을 그의 국권회복 운동을 중심으로 1910년 전후의 시기로 나누어 고찰해보고자 한다.
      유인석은 을미의병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실패하자 청에 청원을 시도하였다. 그의 사우들은 청원에 비판적이었지만 유인석은 청이 다른 이적과는 다른 국가이기 때문에 청원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유인석은 더욱 청원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때 주목되는 것은 청 뿐 아니라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는 방안도 모색하였다는 사실이다. 국망의 현실 앞에 유인석은 청보다 못한 이적 국가로 간주되던 러시아로부터도 도움도 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유인석은 화이관을 변용시켰다고 할 수 있다.
      1910년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후 중국에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중화민국의 건국이 그것인데 유인석은 주의 깊게 중화민국의 변화상을 살폈다. 그는 중화민국이 기대와는 달리 서양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권 회복의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 동양삼국연대였다. 동양삼국이 중국을 중심으로 연대하여 서양을 제압하고 궁극적으로 세계를 유교화하고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동양삼국연대론에서 주목되는 것은 인종론이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당시의 시세를 동서양의 대결로 보아 서양화의 길을 걷고 있던 중화민국,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본과의 연대를 제기하였다. 화이관의 관점에서 보면 중화민국이나 일본 모두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동서의 대결로 당시의 시세를 판단했던 탓에 그들과 연계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국권회복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드러나 유인석의 의식은 전통적인 화이관과 상충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그 상충을 기꺼이 용인하였던 점 그것이 바로 유인석의 인식에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더보기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Even though Yu In Seok(1842~1915) was one of the most strong believers of Sino-centrism of the late pre-modern Korea, he was also flexible in responding to the times. While Confucian scholars of older generation such as his teacher Lee Hang Ro stuck t...

      Even though Yu In Seok(1842~1915) was one of the most strong believers of Sino-centrism of the late pre-modern Korea, he was also flexible in responding to the times. While Confucian scholars of older generation such as his teacher Lee Hang Ro stuck to traditional values, Yu In Seok was open to newly introduced ideas as well in his movement for resumption of the national sovereignty. Such flexible attitude of him has a great significant in elucidating the shift of Sino-centrism in modern times. This study aims to conduct a close analysis on his changing view of Sino-barbarian dichotomy during his movement around 1910.
      When the righteous army of Eulmi that Yu In Soek led turned out to be a failure, he tried to petition Qing China for an aid. Though his colleagues were critical of the petition, since he regarded Qing as a distinctive country among other barbaric enemies, he thought making a petition to Qing was acceptable. After the Japan-Korea Treaty of 1905 was concluded, he was more active in making a petition. The fact that he even sought for help from Russia has an important significant. In response to national crisis, he changed his attitude toward the 'barbaric' Russia and tried to derive an aid from it. An actual necessity changed his Sino-barbarian Dichotomy.
      After Korea was absorbed to the Imperial Japan in 1910, the Republic of China was established. Yu In Soek carefully studied changes of the Republic and made a conclusion that, against his expectations, China was being westernized. Amid this circumstance, he suggested the solidarity of Korea, China and Japan as a solution for recovering the national sovereignty. According to Yu In Soek, the three East Asian countries should band together with China as a center and defeat the West to eventually ‘Confucianize’ the world and to regain peace. The core factor of his suggestion was the ethnic theory. He thought there was an ongoing war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and that was the reason for his suggestion. Even though the Republic of China and Japan were enemies to exclude according to the Sino-barbarian perspective, he thought Korea should band together to fight against the West.
      His ideas that he maintained in the process of recovering the national sovereignty often were contradictory to the traditional Sino-barbarian dichotomy. But he accepted the contradictions according to an actual necessity and that is the unique feature of his thoughts.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황성신문"

      2 홍원식, "한주학파의 공자교 운동" 26 : 1999

      3 김종석, "한주학파 유교종교화론의 본질과 공자교운동" 새한철학회 4 (4): 47-72, 2006

      4 김형찬, "한국사상가 평전 : 유인석" 4 (4): 1993

      5 윤대식, "한국 위정척사의 보수응변(保守應變) - 유인석(柳麟錫)의 국권(國權) 관념 변화를 중심으로 -" (사)한국인물사연구회 (21) : 387-424, 2014

      6 "태극학보"

      7 정옥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 연구" 일지사 1998

      8 배우성, "조선과 중화" 돌베개출판사 2014

      9 윤병석, "이상설전" 일조각 1984

      10 송지연, "유인석(1842-1915)의 위정척사론의 구조와 변용과정 : 『소의신편』과 『우주문답』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2011

      1 "황성신문"

      2 홍원식, "한주학파의 공자교 운동" 26 : 1999

      3 김종석, "한주학파 유교종교화론의 본질과 공자교운동" 새한철학회 4 (4): 47-72, 2006

      4 김형찬, "한국사상가 평전 : 유인석" 4 (4): 1993

      5 윤대식, "한국 위정척사의 보수응변(保守應變) - 유인석(柳麟錫)의 국권(國權) 관념 변화를 중심으로 -" (사)한국인물사연구회 (21) : 387-424, 2014

      6 "태극학보"

      7 정옥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 연구" 일지사 1998

      8 배우성, "조선과 중화" 돌베개출판사 2014

      9 윤병석, "이상설전" 일조각 1984

      10 송지연, "유인석(1842-1915)의 위정척사론의 구조와 변용과정 : 『소의신편』과 『우주문답』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2011

      11 오영섭, "유림 의병의 선도자 유인석" 역사공간 2008

      12 姜在彦, "아시아主義와 一進會" 2 : 1984

      13 이상익, "서구의 충격과 근대 한국사상" 한울아카데미 1997

      14 노대환, "문명" 소화 2010

      15 민경현, "러시아와 한국" 서울 2010

      16 노대환, "동도서기론 형성 과정 연구" 일지사 1995

      17 "독립신문"

      18 金度亨,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연구" 지식산업사 1994

      19 노관범, "대한제국기 박은식과 장지연의 자강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2007

      20 金度亨, "대한제국기 계몽주의계열 지식층의 ‘삼국제휴론’-‘인종적 제휴론’을 중심으로-" 13 : 2000

      21 총성의, "근대 한국 지식인의 대외인식" 성신여대출판부 2000

      22 "高宗實錄"

      23 宋相燾, "騎驢隨筆"

      24 李晩燾, "響山集"

      25 李承熙, "韓溪遺稿"

      26 李光麟, "開化期 韓國人의 아시아連帶論" 61·62 : 1988

      27 금장태, "近代 儒敎改革思想의 類型과 思想史的 展開" 2 : 1989

      28 吳瑛燮, "華西學派의 思想과 民族運動" 국학자료원 1999

      29 田愚, "艮齋集"

      30 李沂, "海鶴遺書"

      31 박민영, "毅菴柳麟錫의 衛正斥邪運動-「昭義新編」을 中心으로" 2 : 1995

      32 이애희, "毅菴 柳麟錫의 沿海州에서의 義兵鬪爭과 思想的 變移에 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회 (69) : 123-161, 2012

      33 柳麟錫, "毅庵集"

      34 "承政院日記"

      35 朴敏泳, "大韓帝國期 義兵硏究" 한울아카데미 1998

      36 崔益鉉, "勉菴集"

      37 노관범, "1910년대 한국 유교지식인의 중국 인식 - 柳麟錫, 朴殷植, 李炳憲을 중심으로 -" 한국고전번역원 40 (40): 7-39, 2012

      38 박민영, ""의암 유인석의 위정척사운동" 3 : 1986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2-05-02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유교사상연구 -> 유교사상문화연구
      외국어명 : THE STUDY OF CONFUCIANISM -> THE STUDY OF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E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10-0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STUDY OF CONFUCIANISM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 0.6 0.55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3 0.53 1.438 0.14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