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이신칭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오직 은혜”...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T11898915
서울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
학위논문(석사)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목회학과 , 2010. 2
2010
한국어
서울
52 p. ; 26cm
0
상세조회0
다운로드국문 초록 (Abstract)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이신칭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오직 은혜”...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이신칭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오직 은혜”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신학적 발견은 개혁신학의 신학적 모토이며 복음의 중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은혜”와 “이신칭의”의 교리는 오히려 한국교회에서 많이 오해받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강단에서의 메시지는 오직 은혜에 의한 전적인 구원을 강조하고, 믿음“만”으로 모든 구원이 완성되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값 싼 은혜”(값 싼 복음)를 성도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성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삶 가운데 정초하여 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신자(信者)는 있으나 성도(聖道)들은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교회는 그 복음의 힘과 능력을 상실해 버렸으며, 힘없는 기독교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서는 윤리적, 도덕적 설교는 복음적이지 않기 때문에 지양해야 하며, 그리스도만 이 유일한 해결이 될 수 있다는 그릇된 은혜지상주의를 만들어 버렸다.
과연 한국교회는 은혜를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일까? 오히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은혜와 믿음만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을 왜곡하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의 본질이 은혜에 있음에도 (Sola Gratia), 그리고 오직 믿음(Sola Fide)에만 있음을 알고 그렇게 설교를 하였음에도 왜 한국교회는 삶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필자는 그 이유가 율법에 그릇된 이해에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이 필자가 이 논문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교회가 율법을 균형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양자 중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마도 바울서신에서 바울이 유대인과의 대립된 상황 속에서 보여준 그의 논쟁적인 서신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바울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인 태도로 이해하였는가? 또한 종교개혁자들도 그렇게 이해하였을까?
한국교회 성도들은 목회자들의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이라는 설교로 인해 성도로서의 의무와 교훈적 측면으로서 “~행하라, ~하라”라는 가르침에 대해서 “율법주의적”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으며, “행하라”는 가르침들은 비복음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 한국교회가 이해하는 율법에 대한 이해는 어떠한가? 칼빈은 율법을 제 3 용례까지 설명하여 말하였으나, 한국교회는 율법은 죄를 깊이 인식하게 하여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데 까지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게 하고, 이 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간이 구원자를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서만 (제 2용례) 이해함으로써 지극히 루터란적인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칼빈의 율법사상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언약의 교리를 수립하였고, 율법의 규범적 용례를 강조하는 칼빈의 신학에 정초하였다. 하지만,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신자의 삶과 그 율법이 요구하며 복을 누리는 조건성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갖지 못함으로써 성도들은 율법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이미 구원 얻은 백성은 더 이상 율법 아래 매여 있지 않다는 강력한 주장이 자칫하면 무율법주의로 성도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삶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배출해 냈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오늘날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의 교훈을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광포가 얼마나 극성스러운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교훈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자들이 다소 있음은 사실이나 자기의 생활로 자신의 고백의 신실성을 입증하는 사람은 열 사람 중 하나도 찾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최소한의 경건이라도 남아 있다고 한다면, 단 몇 방울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 눈에서는 강 같은 눈물이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전하고 부패되지 않은 열심의 증거를 보이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부터 슬퍼하도록 하자. 즉 우리가 아직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볼 때 더욱더 그래야 한다. 사실 우리의 육체적 본성의 부패한 욕망은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여 번번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성도들에게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칼빈의 율법의 바른 이해를 돕고자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를 다룸에 있어서 율법의 중보자로서의 개념이 약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모범론적으로 이해하거나 그리스도의 중보를 말하면서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양성적인 중보를 해주시고 계시다는 측면을 놓침으로써 현재적
목차 (Table of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