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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耐村) 강홍립(姜弘立)의 신원과 복권 = Exoneration and reinstatement for Kang Hong-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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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29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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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강홍립은 1619년 조선과 후금(청)이 싸운 심하전역에서 패전 후 항복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강홍립은 광해군과 미리 짜고 항복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조선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강홍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하나는 패전 당시의 인식이다. 평안감사 박엽은 군량 공급에 소홀했던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사실과 다르게 조정에 보고했다. 또 하나는 숭명반청을 명분으로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서인들의 태도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청나라와 전개한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청나라를 상국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청나라를 부인하는 모순된 행위를 계속했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합리화하는 방안으로 강홍립이 일부러 청나라에 항복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강홍립은 항복하라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지 않았다. 또한 강홍립은 포로로 있으면서 광해군은 물론 인조에게도 청나라의 현실을 전달하면서 조선을 전화(戰禍)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1627년의 정묘호란 때 후금군이 황해도 평산에서 멈추고 남하하지 않은 것은 강홍립이 중재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비변사는 강홍립이 “나라를 잊지 않았다”고 칭찬하고 부원수였던 정충신은 “강홍립 덕분이 수만 군이 물러나서 모든 백성들이 그 은혜를 감사한다”고 칭찬했다. 이 전쟁 때 고국에 정착한 강홍립은 곧 사망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은 숭명반청 정책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고, 1636년에 다시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이때는 강홍립도 사망한 후였으므로 인조는 직접 청나라 군영으로 나가서 항복해야 했다. 두 전쟁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은 계속 정권을 유지했고,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면서도 강홍립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절개 있는 것으로 포장했다. 서인(노론)이 조선 후기 내내 집권하면서 이런 인식이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강홍립은 나라의 명으로 원치 않는 전쟁에 나가서 최선을 다했고 패전 후에도 나라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제 그를 나라를 위해 생애를 바친 애국자로 재평가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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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홍립은 1619년 조선과 후금(청)이 싸운 심하전역에서 패전 후 항복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강홍립은 광해군과 미리 짜고 항복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조선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

      강홍립은 1619년 조선과 후금(청)이 싸운 심하전역에서 패전 후 항복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강홍립은 광해군과 미리 짜고 항복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조선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강홍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하나는 패전 당시의 인식이다. 평안감사 박엽은 군량 공급에 소홀했던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사실과 다르게 조정에 보고했다. 또 하나는 숭명반청을 명분으로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서인들의 태도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청나라와 전개한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청나라를 상국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청나라를 부인하는 모순된 행위를 계속했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합리화하는 방안으로 강홍립이 일부러 청나라에 항복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강홍립은 항복하라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지 않았다. 또한 강홍립은 포로로 있으면서 광해군은 물론 인조에게도 청나라의 현실을 전달하면서 조선을 전화(戰禍)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1627년의 정묘호란 때 후금군이 황해도 평산에서 멈추고 남하하지 않은 것은 강홍립이 중재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비변사는 강홍립이 “나라를 잊지 않았다”고 칭찬하고 부원수였던 정충신은 “강홍립 덕분이 수만 군이 물러나서 모든 백성들이 그 은혜를 감사한다”고 칭찬했다. 이 전쟁 때 고국에 정착한 강홍립은 곧 사망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은 숭명반청 정책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고, 1636년에 다시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이때는 강홍립도 사망한 후였으므로 인조는 직접 청나라 군영으로 나가서 항복해야 했다. 두 전쟁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은 계속 정권을 유지했고,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면서도 강홍립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절개 있는 것으로 포장했다. 서인(노론)이 조선 후기 내내 집권하면서 이런 인식이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강홍립은 나라의 명으로 원치 않는 전쟁에 나가서 최선을 다했고 패전 후에도 나라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제 그를 나라를 위해 생애를 바친 애국자로 재평가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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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ng Hong-lib is considered as a surrendered General in 1619 after losing the battle at Simha, between the Joseon Dynasty and the post-Jin(後金) Dynasty. However, Kang Hong-lib has been accused of having surrendering after receiving a secret order from King Kwangh-hai since King In-jo’s rebellion. The negative perception on General Kang has been accepted not only during the Joseon Dynasty, but also until now. This thought was made in two stages. First, it was a report by Park-yeop, the governor of the Pyong-An Province. He made in a false report to pass on his mistakes to Kang Hong-lib. Park-yeop couldn’t deliver the troops in time. The second reason was the attitude of the Seo-In Party. They seized power in a military coup called ‘Injo-Banjeong’ in the pretext of pro-Ming Dynasty. But after losing the two wars against the Qing Dynasty, the Seo-In Party served the Qing Dynasty as the Emperor’s nation. But inwardly, they denied the Qing Dynasty, which was a contradiction. To rationalize this contradiction, they accused Kang Hong-lib surrendered deliberately to the Qing Dynasty.
      But Kang Hong-lib did not secret received the order by the King Kwang-hai. Also while being a prisoner, Kang Hong-lib secretly reported to the King on the situation on the Qing Dynasty. He tried to get Joseon Dynasty out of the war disaster. During the war of 1627, the Qing Dynasty’s army stopped at Pyongsan, Hwanghae Province, because of Kang’s intervention. So the Office of Border Defense(비변사) praised him for not forgetting home country. Jung Chung-shin, The deputy commander, praised him, “Thanks to him, a great number of soldiers stepped down and all the people are grateful for his grace.” Kang Hong-lib settled in his homeland during this war but died soon after. Even after this war, however Joseon Dynasty did not change its policy of pro-Ming Dynasty and anti-Qing Dynasty, and the war broke out again in 1636. This time was after Kang’s death, King InJo himself had to go to the Qing Dynasty military camp to surrender. Despite the crushing defeat of the two wars, the Seo-In Party remained in power. They tried to conceal their incompetence by criticizing Kang Hong-lib. As they continued to take power even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perception was also introduced to the present people. Kang Hong-lib went to an unwanted war by the King’s order but did his best. It’s time to reevaluate him as a patriot who dedicated his life to his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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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ng Hong-lib is considered as a surrendered General in 1619 after losing the battle at Simha, between the Joseon Dynasty and the post-Jin(後金) Dynasty. However, Kang Hong-lib has been accused of having surrendering after receiving a secret order f...

      Kang Hong-lib is considered as a surrendered General in 1619 after losing the battle at Simha, between the Joseon Dynasty and the post-Jin(後金) Dynasty. However, Kang Hong-lib has been accused of having surrendering after receiving a secret order from King Kwangh-hai since King In-jo’s rebellion. The negative perception on General Kang has been accepted not only during the Joseon Dynasty, but also until now. This thought was made in two stages. First, it was a report by Park-yeop, the governor of the Pyong-An Province. He made in a false report to pass on his mistakes to Kang Hong-lib. Park-yeop couldn’t deliver the troops in time. The second reason was the attitude of the Seo-In Party. They seized power in a military coup called ‘Injo-Banjeong’ in the pretext of pro-Ming Dynasty. But after losing the two wars against the Qing Dynasty, the Seo-In Party served the Qing Dynasty as the Emperor’s nation. But inwardly, they denied the Qing Dynasty, which was a contradiction. To rationalize this contradiction, they accused Kang Hong-lib surrendered deliberately to the Qing Dynasty.
      But Kang Hong-lib did not secret received the order by the King Kwang-hai. Also while being a prisoner, Kang Hong-lib secretly reported to the King on the situation on the Qing Dynasty. He tried to get Joseon Dynasty out of the war disaster. During the war of 1627, the Qing Dynasty’s army stopped at Pyongsan, Hwanghae Province, because of Kang’s intervention. So the Office of Border Defense(비변사) praised him for not forgetting home country. Jung Chung-shin, The deputy commander, praised him, “Thanks to him, a great number of soldiers stepped down and all the people are grateful for his grace.” Kang Hong-lib settled in his homeland during this war but died soon after. Even after this war, however Joseon Dynasty did not change its policy of pro-Ming Dynasty and anti-Qing Dynasty, and the war broke out again in 1636. This time was after Kang’s death, King InJo himself had to go to the Qing Dynasty military camp to surrender. Despite the crushing defeat of the two wars, the Seo-In Party remained in power. They tried to conceal their incompetence by criticizing Kang Hong-lib. As they continued to take power even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perception was also introduced to the present people. Kang Hong-lib went to an unwanted war by the King’s order but did his best. It’s time to reevaluate him as a patriot who dedicated his life to his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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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박희병, "한국고전소설과 서사문학" 집문당 1998

      2 이덕일, "태조 이성계" 다산북스 2018

      3 이민환, "책중일록" 서해문집 2014

      4 이덕일, "조선선비당쟁사" 인문서원 2018

      5 "인조실록"

      6 계승범, "역사소설로 본 조선후기 ‘역사 만들기’의 일면" 한국사학사학회 (38) : 315-339, 2018

      7 "선조실록"

      8 "광해군일기(중초본)"

      9 "維基百科(中國)"

      10 "紫巖集"

      1 박희병, "한국고전소설과 서사문학" 집문당 1998

      2 이덕일, "태조 이성계" 다산북스 2018

      3 이민환, "책중일록" 서해문집 2014

      4 이덕일, "조선선비당쟁사" 인문서원 2018

      5 "인조실록"

      6 계승범, "역사소설로 본 조선후기 ‘역사 만들기’의 일면" 한국사학사학회 (38) : 315-339, 2018

      7 "선조실록"

      8 "광해군일기(중초본)"

      9 "維基百科(中國)"

      10 "紫巖集"

      11 안세현, "紫巖 李民寏의 「柵中日錄」과 「建州聞見錄」에 대하여" 동방한문학회 (34) : 111-143, 2008

      12 "癸亥靖社錄"

      13 "淸史稿, 太祖 努爾哈齊"

      14 소인호, "姜虜傳 이본 연구" 우리어문학회 (24) : 101-133, 2005

      15 "中京誌"

      16 이긍익, "『연려실기술』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심하지역(深河之役)’"

      17 조현우, "『강로전』에 나타난 전쟁의 기억과 욕망의 서사" 민족문학사학회 (46) : 55-84, 2011

      18 "『明史』 238卷, ‘李成梁 子如松 如柏 如楨 如樟 如梅列傳"

      19 "『史記』 「五帝本紀」 帝舜 注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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