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하에 만주로 이주한 한인은 일제에 의한 자본이동에 따라 ‘생존경제’(subsistence economy)가 파괴되어 감에 따라 새로운 생존의 장을 찾아 이동, 정착한 것이었다. 만주에서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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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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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 조선인 ; 만주 ; 만주국 ; 이민 ; 이주 ; 경제구성체 ; 제도 ; 제도학파 ; 식민지 ; 국적 ; 민족공존 ; Korea ; institution ; migration ; social formation ; Institutionalism ; technology ; colonization ; Manchuria ; racial co-existence ; nationality social 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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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후보
학술저널
163-199(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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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하에 만주로 이주한 한인은 일제에 의한 자본이동에 따라 ‘생존경제’(subsistence economy)가 파괴되어 감에 따라 새로운 생존의 장을 찾아 이동, 정착한 것이었다. 만주에서 한인...
일제 하에 만주로 이주한 한인은 일제에 의한 자본이동에 따라 ‘생존경제’(subsistence economy)가 파괴되어 감에 따라 새로운 생존의 장을 찾아 이동, 정착한 것이었다. 만주에서 한인들은 중국인들과 그 이전부터 상호 교류를 해 왔던 처지라 정서적 이질감을 그다지 느끼지 않을수 있었고, 또 본격적 이주 후에도 중국인들이 갖지 못한 미작 기술 탓에 만주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함으로써 공존과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또 그 후 일제의 침략으로 한인들의 만주 거주가 복잡한 문제로 되었을때는 식민지조선에서 분출한 조선 거주 화교에 대한 분노(보복)가 하나의 교섭력을 형성하여 만주 거주 한인들의 삶이 안정적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제도학파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Veblen이 말하는 ‘기술이 제도를 형성해 간’ 예로서, 또 후자의 경우는 Commons가 말하는 ‘이해갈등으로부터 이해를 조정하는 과정에 집단적 행동의 산물로서 제도가 형성되어 간’ 예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BR> 일제의 식민정책이 강화되면서 중국 국가의 국적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그 평화로운 공존의 상태가 파괴되어 갔다. 중국민들은 거주와 영업을 제한함으로써 국적을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경제적 이익이 아닌 말 그대로의 지대 추구를 가능하게 됐고, 반면 한인들은 국적을 보유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경제활동이 막히고 지대수탈을 당하게 되었다. 한인들은 전통적인 계조직을 통해 상부상조의 제도적 장치를 확보했으나,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인독립단체 등 각 권력기관은 독자적인 조직구성을 통해 국가영역의 확장을 꾀했다. 제도가 일부의 이익에 봉사함으로써 다른 집단 혹은 사회 전체에 손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신(new)제도학파’의 관점이 적용되는 상황이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Under the Japanese Imperial rule, Koreans migrated to North-Eastern area of China(commonly called Manchuria). In that region Korean did not feel emotional heterogeneity against native Chinese due to long mutual interchange. Koreans enjoyed...
Under the Japanese Imperial rule, Koreans migrated to North-Eastern area of China(commonly called Manchuria). In that region Korean did not feel emotional heterogeneity against native Chinese due to long mutual interchange. Koreans enjoyed co-existence and harmony with Chinese through the economic contribution by their traditional rice-cultivating capability even after a massive migration. It can be interpreted as a case where ‘technology would make a social institution’ told by Veblen.<BR> With the Japanese invasion, the Koreans encountered complicated nationality problem because Korea was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In that situation, Koreans’ attitude toward Chinese in mainland Korea became a bargaining power for Korean in China. It can be accepted as a case where ‘collective activity result in social institution during the process of interest control from interest trouble’.<BR> With intensified Japanese colonization, Chinese government practiced stricter nationality policy. That in turn destroyed that peaceful co-existence. Chinese, as legal residents, were able to seek rent against Korean farmers but Koreans who did not hold legal residency could do nothing but suffer. Koreans tried to survive through their own traditional social organization ‘Kye’, but Chinese and Japanese governments and even Korea Independent Movement Organization all seeked to enlarge their own realm. We can consult here the viewpoint of New-Institutionalist which social institution hurt the interest of other group or general society through serving the interest of some.
목차 (Table of Contents)
조선후기의 이상세계 추구 경향과 현대 한국의 현실 -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바라시던 세상,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북-미관계 정상화의 국내정치적 제약 - 국가정체성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