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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후반 ‘鬱陵島爭界’의 종결과 對馬島(1696년~16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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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99767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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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논문은 막부의 ‘竹島(울릉도)도해금지령’이 내려진 1696년 1월부터 1699년 10월 ‘울릉도쟁계’가 최종적으로 처리되기까지, 4년여 동안 조선정부와 대마도간의 교섭과정을 검토한 것이다. 대마도가 ‘울릉도쟁계’의 종결 처리과정, 즉 4년 동안 自藩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시도의 실상을 살펴봄으로써, 조선후기 한일관계의 특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먼저, 대마도가 1696년 막부의 제1차 ‘竹島(울릉도)도해금지령’을 바로 조선에 전달하지 않고, 그해 10월에 있을 문위행의 도해까지 미룬 배경에는, 안용복의 송환 및 조선과의 교섭 과정에서 막부가 대마도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림으로써, 울릉도(竹島)를 일본에 귀속시키고자 했던
      대마도의 필사적인 노력이 무산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1696년 10월 막부의 ‘竹島(울릉도)도해금지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대마도가 竹島=조선령이라는 사실을 막부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의 전달로 처리하면서 조선정부에게 예조의 답서를 요구한 이유는, 竹島=조선령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하면서, 조선과의 교섭에 대마도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막부에 과시하고,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서 대마도의 역할론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 그 배경으로 보인다.
      셋째, 안용복의 피랍 및 자발적인 도일이 대마도로서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매개로 진행되어 온 조일외교 교섭에 제3자가 관여하여 사건을 처리 할 수 있는 새로운 외교절차의 발생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므로, 대마도는 예조참의가 보낸 답서의 사본을 왜관에서 수령한 이후 대마도가 왜관 난출이라는 무리수를 감행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마도로서는 조일간의 외교교섭 창구로서의 위상이 위태로워지는 상황 속에서, 조일교섭에서 제3자 개입을 차단하기 위하여, 왜관 난출이라는 물리적 행동을 감행하면서까지 대마도 내지 막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서계 내용을 개찬하려는 목적을 관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도는 “흔히 말하는 옛날 방식과 오늘날 방식을 구별하지 못하고 사정과 시세를 분별하지 못한 그릇된 생각”으로 사안을 처리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었다. 결국 대마도에게 ‘울릉도쟁계’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지적한 대로 “위력과 공갈을 써서라도 이쪽(대마도)의 주장을 관철시켜야만 한다는 분위기로 7년간 교섭에 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에) 통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대마도의 평판에 지장이” 생기게 된 사건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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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막부의 ‘竹島(울릉도)도해금지령’이 내려진 1696년 1월부터 1699년 10월 ‘울릉도쟁계’가 최종적으로 처리되기까지, 4년여 동안 조선정부와 대마도간의 교섭과정을 검토한 것이...

      본 논문은 막부의 ‘竹島(울릉도)도해금지령’이 내려진 1696년 1월부터 1699년 10월 ‘울릉도쟁계’가 최종적으로 처리되기까지, 4년여 동안 조선정부와 대마도간의 교섭과정을 검토한 것이다. 대마도가 ‘울릉도쟁계’의 종결 처리과정, 즉 4년 동안 自藩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시도의 실상을 살펴봄으로써, 조선후기 한일관계의 특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먼저, 대마도가 1696년 막부의 제1차 ‘竹島(울릉도)도해금지령’을 바로 조선에 전달하지 않고, 그해 10월에 있을 문위행의 도해까지 미룬 배경에는, 안용복의 송환 및 조선과의 교섭 과정에서 막부가 대마도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림으로써, 울릉도(竹島)를 일본에 귀속시키고자 했던
      대마도의 필사적인 노력이 무산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1696년 10월 막부의 ‘竹島(울릉도)도해금지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대마도가 竹島=조선령이라는 사실을 막부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의 전달로 처리하면서 조선정부에게 예조의 답서를 요구한 이유는, 竹島=조선령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하면서, 조선과의 교섭에 대마도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막부에 과시하고,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서 대마도의 역할론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 그 배경으로 보인다.
      셋째, 안용복의 피랍 및 자발적인 도일이 대마도로서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매개로 진행되어 온 조일외교 교섭에 제3자가 관여하여 사건을 처리 할 수 있는 새로운 외교절차의 발생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므로, 대마도는 예조참의가 보낸 답서의 사본을 왜관에서 수령한 이후 대마도가 왜관 난출이라는 무리수를 감행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마도로서는 조일간의 외교교섭 창구로서의 위상이 위태로워지는 상황 속에서, 조일교섭에서 제3자 개입을 차단하기 위하여, 왜관 난출이라는 물리적 행동을 감행하면서까지 대마도 내지 막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서계 내용을 개찬하려는 목적을 관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도는 “흔히 말하는 옛날 방식과 오늘날 방식을 구별하지 못하고 사정과 시세를 분별하지 못한 그릇된 생각”으로 사안을 처리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었다. 결국 대마도에게 ‘울릉도쟁계’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지적한 대로 “위력과 공갈을 써서라도 이쪽(대마도)의 주장을 관철시켜야만 한다는 분위기로 7년간 교섭에 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에) 통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대마도의 평판에 지장이” 생기게 된 사건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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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대마도의 ‘竹島(울릉도)渡海禁止令’ 전달
      • 3. 1697년 왜관 난출사건과 ‘울릉도 쟁계’의 종결
      • 4. ‘울릉도쟁계’의 종결과정에서 나타난 조일교섭의 특징-맺음말을 대신하여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대마도의 ‘竹島(울릉도)渡海禁止令’ 전달
      • 3. 1697년 왜관 난출사건과 ‘울릉도 쟁계’의 종결
      • 4. ‘울릉도쟁계’의 종결과정에서 나타난 조일교섭의 특징-맺음말을 대신하여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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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손승철, "중・근세 조선인의 島嶼 경영과 경계인식 고찰" 한일관계사학회 (39) : 205-260, 2011

      2 이훈, "조선후기 표류민과 한일관계" 국학자료원 2000

      3 이훈, "조선후기 獨島영속 시비, In 독도와 대마도" 지성의 샘 1996

      4 장순순, "조선후기 對馬藩의 조선 교섭과 1693년 울릉도 영속시비" 동북아역사재단 (37) : 189-232, 2012

      5 竹島紀事本末, "울릉도・독도 일본 사료집Ⅰ" 동북아역사재단 2013

      6 송병기, "울릉도와 독도,그 역사적 검증" 역사공간 2010

      7 송휘영, "독도 영유권 확립을 위한 연구Ⅲ" 경인문화사 2011

      8 "邊例集要"

      9 雨森芳洲, "譯註교린제성" 國學資料院 2001

      10 "肅宗實錄"

      1 손승철, "중・근세 조선인의 島嶼 경영과 경계인식 고찰" 한일관계사학회 (39) : 205-260, 2011

      2 이훈, "조선후기 표류민과 한일관계" 국학자료원 2000

      3 이훈, "조선후기 獨島영속 시비, In 독도와 대마도" 지성의 샘 1996

      4 장순순, "조선후기 對馬藩의 조선 교섭과 1693년 울릉도 영속시비" 동북아역사재단 (37) : 189-232, 2012

      5 竹島紀事本末, "울릉도・독도 일본 사료집Ⅰ" 동북아역사재단 2013

      6 송병기, "울릉도와 독도,그 역사적 검증" 역사공간 2010

      7 송휘영, "독도 영유권 확립을 위한 연구Ⅲ" 경인문화사 2011

      8 "邊例集要"

      9 雨森芳洲, "譯註교린제성" 國學資料院 2001

      10 "肅宗實錄"

      11 鳥取藩政史料, "竹嶋之書附 ;鳥取縣立圖書館" 矢谷印刷所 6 : 1971

      12 "竹島紀事"

      13 池內敏, "竹島渡海と鳥取藩 大君外交と武威" 名古屋大學出版會 2006

      14 川上建三, "竹島の歷史地理學的硏究" 古今書院 1966

      15 對馬藩政史料, "東平行ニ付釜山ニ而喧譁則右之意趣御國江申上口上東萊と接待仕御國申上候狀扣、丁丑八月日、唐方新五郞"

      16 "因幡國江朝鮮人致渡海候付豊後守樣へ御伺被成候次第幷御返答之趣其 外始終之覺書"

      17 "元祿六癸酉年竹嶋一件拔書 此砌阿部豊後守樣より御渡被成候御書付"

      18 장순순, "17세기 조일관계와 ‘鬱陵島 爭界’" 부산경남사학회 (84) : 37-7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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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5-30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한일관계사학회 -> 한일관계사연구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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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5 1.5 1.3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17 1.09 1.872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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