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ghai Commandery(蒼海郡) is Han(漢) dynasty’s commandery established in the areas of Chosŏn(朝鮮), which held a strategic position between Han and Xiongnu(匈奴) at the height of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factions. Although it was est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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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슬기 (고려대학교)
2021
Korean
Canghai(蒼海) ; East Sea ; Bohai Sea ; Yegun Namnyŏ ; Ye(Tongye) ; Yemaek ; Liaodong Commandery ; 창해 ; 동해 ; 발해 ; 예군남려 ; (동)예 ; 예맥 ; 요동군
KCI등재
학술저널
169-20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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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ghai Commandery(蒼海郡) is Han(漢) dynasty’s commandery established in the areas of Chosŏn(朝鮮), which held a strategic position between Han and Xiongnu(匈奴) at the height of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factions. Although it was estab...
Canghai Commandery(蒼海郡) is Han(漢) dynasty’s commandery established in the areas of Chosŏn(朝鮮), which held a strategic position between Han and Xiongnu(匈奴) at the height of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factions. Although it was established two decades earlier than the so-called “Four Commanderies of Han(漢四郡)” installed after the fall of Wiman Chosŏn(衛滿朝鮮)”, Canghai Commandery was abolished within only two years. So far, the commandery has been referred as a side issue in the studies about Four Commanderies of Han, or simply understood as a predecessor to Zhenfan(眞蕃) or Xuantu(玄菟) Commandery. Generally, the studies that considered its location in regard to the name ‘Canghai(蒼海)’, or estimated the location at the ‘East Sea region’ focusing on the ethnic background of ‘Yegun Namnyŏ(穢君南閭; Namnyŏ, the Lord of Ye) dominated the research trend in academia.
Those studies that focused on the ethnic background of Yegun Namnyŏ have usually linked him with Puyŏ(夫餘), Koguryŏ(高句麗), Okchŏ(沃沮), Ye(濊, or Tongye). However, since these conlusions were based on Sanguozhi(三國志) or Hou Hanshu(後漢書) illustrating the situation in the third century A.D., they have a blind spot that it is far from the historical situation during the period when Yegun Namnyŏ was alive. Additionally, the estimations based on place names often overlooked the fact that ‘Canghai’ is not an exclusive name to East Sea. Considering the context of the original historical texts, it is necessary to estimate the location of Canghai Commandery in the historical context during the period when the event occurred, in other words, when Wiman Chosŏn still existed.
This paper questions the previous studies that the Han dynasty established the commandery in East Sea regions across Wiman Chosŏn’s territory before its fall. Also, it pointed out that Canghai is likely to refer Bohai(渤海) Sea under the perspective of its submission to Liaodong Commandery.
국문 초록 (Abstract)
창해군은 한과 흉노의 각축이 한창일 무렵, 양자 사이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했던 조선 지역에 설치된 한의 군현이다. 창해군은 위만조선 멸망 뒤에 설치된 한군현보다 20여 년 앞서 설치되었...
창해군은 한과 흉노의 각축이 한창일 무렵, 양자 사이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했던 조선 지역에 설치된 한의 군현이다. 창해군은 위만조선 멸망 뒤에 설치된 한군현보다 20여 년 앞서 설치되었지만, 2년이 채 안되어 폐지되었다. 창해군은 한군현을 다루는 연구들에서 부수적으로 언급되거나 진번군 혹은 현도군의 전신으로 이해되어 왔다. 대체로 ‘창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위치를 고려하거나, ‘예군남려’의 종족기반에 중심을 두어 창해군을 ‘동해안 지역’에 비정하는 연구가 주류를 점해왔다.
예군남려의 종족기반에 주목한 연구들은 대체로 예군남려를 부여나 고구려, 옥저, 예(동예)와 연결시켜왔다. 그러나 이는 기원후 3세기경 『삼국지』, 『후한서』에 근거하여 내린 결론이므로 예군남려가 생존했던 당시의 역사상과 거리가 멀다는 맹점이 있다. 또한 지명에 근거한 견해 역시 ‘창해’가 동해만 전유하는 명칭이 아닌 점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원사료의 문맥을 고려하여 사건이 발발한 전한 무제기, 즉 위만조선 존속시기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창해군의 위치를 파악해야한다.
이 글은 위만조선 멸망 전에 한이 그 영역을 관통하여 동해안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했을 것이라는 기존 견해에 의문을 던진 것으로, 요동내속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창해는 발해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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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본 고조선의 영역: 漢代 『方言』에 수록된 朝鮮・北燕지역 어휘의 정체성 및 지리적 범위 탐구
고고현상의 空間性에 대한 定量的 理解 -靑銅器時代 石製道具 분포에 대한 連續・多層的 分析을 기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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