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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재만조선인, 이등국민론의 비판적 성찰 - 교육정치사의 관점과 사례를 중심으로 - = A Critical Introspection of the Argument of Second-Class Citizens toward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in the 1930s: Focusing on Educational and Political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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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5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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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937년 재만조선인의 교육행정권은 만주국의 치외법권 철폐의 결과, 종래 조선총독부로부터 만주국 정부 관할로 이관되었다. 1938년 이래 신학제에 입각한 재만조선인 교육은 재만일본인과의 명백한 민족차별과 양질 저하로 이어지면서 재만조선인 사회는 물론이고 현지조선인 사회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그 와중에서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따른 중국인의 민심이반과 조선인의 전시동원은 재만조선인의 교육문제에 대한 일본제국 차원의 대응을 불가피하게했다. 그 결과, 1941년 4월 선만수뇌의 ‘신경회담’이 개최되었고, 재만조선인교육행정권은 종래 일원적인 만주국 정부 관할로부터 ‘선만일여의 문교정책’에입각한 선만공동관리로 전환했다. 결국, 1937년 이래 재만조선인 교육정책의변화는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재만조선인의 정치적 위상이 급변했음을 시사한다. 이 연구는 선만관계사 혹은 교육정치사의 관점에서 1937년 이래 재만조선인의 교육문제를 검토하고, 종래 ‘이등국민론(二等國民論)’ 혹은 그 ‘허상론(虛像論)’과도 구별되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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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재만조선인의 교육행정권은 만주국의 치외법권 철폐의 결과, 종래 조선총독부로부터 만주국 정부 관할로 이관되었다. 1938년 이래 신학제에 입각한 재만조선인 교육은 재만일본인과의...

      1937년 재만조선인의 교육행정권은 만주국의 치외법권 철폐의 결과, 종래 조선총독부로부터 만주국 정부 관할로 이관되었다. 1938년 이래 신학제에 입각한 재만조선인 교육은 재만일본인과의 명백한 민족차별과 양질 저하로 이어지면서 재만조선인 사회는 물론이고 현지조선인 사회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그 와중에서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따른 중국인의 민심이반과 조선인의 전시동원은 재만조선인의 교육문제에 대한 일본제국 차원의 대응을 불가피하게했다. 그 결과, 1941년 4월 선만수뇌의 ‘신경회담’이 개최되었고, 재만조선인교육행정권은 종래 일원적인 만주국 정부 관할로부터 ‘선만일여의 문교정책’에입각한 선만공동관리로 전환했다. 결국, 1937년 이래 재만조선인 교육정책의변화는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재만조선인의 정치적 위상이 급변했음을 시사한다. 이 연구는 선만관계사 혹은 교육정치사의 관점에서 1937년 이래 재만조선인의 교육문제를 검토하고, 종래 ‘이등국민론(二等國民論)’ 혹은 그 ‘허상론(虛像論)’과도 구별되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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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1937, the educational and administrative rights of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were transferred from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Manchuria thanks to the abolition of extraterritoriality. As a result, from 1938 education for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based upon the theological system brought obvious racial discrimination and a lowering of the quality of education, which in turn caused severe resistance from Korean residents in Korea, as well as by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With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Japan’s aggressive response to the education-related matters of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was inevitable in terms of the estrangement of public sentiment among Chinese people and the wartime mobilization of Koreans. The study found that a Korea- Manchuria meeting was held in Changchun in April 1941. In terms of education for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a conventional one-way system was transformed into a joint Korea-Manchuria management system under the educational policy of “Korea and Manchuria are one and the same.” The changes in educational policy for Korean residents meant that the political stance of Korean residents in Changchun had dramatically changed since the start of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This study attempted to investigate changes in the educational and administrative rights of the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since the abolition of extraterritoriality in 1937 and trends among the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and to pay attention to the Korea-Manchuria talks in 1941 from the new research perspectives of the history of Korea-Manchuria Relations and the history of educational politics.
      Then, it suggested another perspective which differs from the view of second-class citizens among Korean residents and the illusion of second-class citizens in Manchu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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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1937, the educational and administrative rights of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were transferred from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Manchuria thanks to the abolition of extraterritoriality. As a result, from 1938 education for Korean...

      In 1937, the educational and administrative rights of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were transferred from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Manchuria thanks to the abolition of extraterritoriality. As a result, from 1938 education for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based upon the theological system brought obvious racial discrimination and a lowering of the quality of education, which in turn caused severe resistance from Korean residents in Korea, as well as by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With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Japan’s aggressive response to the education-related matters of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was inevitable in terms of the estrangement of public sentiment among Chinese people and the wartime mobilization of Koreans. The study found that a Korea- Manchuria meeting was held in Changchun in April 1941. In terms of education for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a conventional one-way system was transformed into a joint Korea-Manchuria management system under the educational policy of “Korea and Manchuria are one and the same.” The changes in educational policy for Korean residents meant that the political stance of Korean residents in Changchun had dramatically changed since the start of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This study attempted to investigate changes in the educational and administrative rights of the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since the abolition of extraterritoriality in 1937 and trends among the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and to pay attention to the Korea-Manchuria talks in 1941 from the new research perspectives of the history of Korea-Manchuria Relations and the history of educational politics.
      Then, it suggested another perspective which differs from the view of second-class citizens among Korean residents and the illusion of second-class citizens in Manchu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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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주권과 벌거벗은 생명" 새물결 2008

      2 이인영, "한국 만주 관계사의 연구" 을유문화사 1984

      3 야마무로 신이치,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소명출판 2009

      4 시현, "최남선 평전" 한겨레출판 2011

      5 임성모, "중일전쟁 전야 만주국·조선 관계사의 소묘 ― ‘日滿一體’와 ‘鮮滿一如’의 갈등 ―" 역사학회 (201) : 165-202, 2009

      6 廉仁鎬, "조선의용군 연구 : 민족운동을 중심으로" 國民大學校 大學院 1995

      7 고지현,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읽기" 인문학연구원 93 : 213-239, 2011

      8 조건, "일제의 간도성 ‘朝鮮人特設部隊’ 창설과 재만 조선인 동원(1938~1943)" 한국근현대사학회 (49) : 46-81, 2009

      9 정미량, "일제 강점기 재만 조선인의 교육과 그 체험 :장춘(신경)보통학교(1922-1945)의 사례를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회 29 (29): 187-210, 2007

      10 김만선, "압록강" 동지사 1949

      1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주권과 벌거벗은 생명" 새물결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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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임성모, "중일전쟁 전야 만주국·조선 관계사의 소묘 ― ‘日滿一體’와 ‘鮮滿一如’의 갈등 ―" 역사학회 (201) : 165-202, 2009

      6 廉仁鎬, "조선의용군 연구 : 민족운동을 중심으로" 國民大學校 大學院 1995

      7 고지현,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읽기" 인문학연구원 93 : 213-239, 2011

      8 조건, "일제의 간도성 ‘朝鮮人特設部隊’ 창설과 재만 조선인 동원(1938~1943)" 한국근현대사학회 (49) : 46-81, 2009

      9 정미량, "일제 강점기 재만 조선인의 교육과 그 체험 :장춘(신경)보통학교(1922-1945)의 사례를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회 29 (29): 187-210, 2007

      10 김만선, "압록강" 동지사 1949

      11 김미선, "식민지시대 조선여성의 제국 내 이주경험에 관한 연구 - 양충자(중국 천진)와 이종수(만주국 안동)의 구술을 중심으로 -" 한국여성사학회 (11) : 1-41, 2009

      12 김주용,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 한일관계사학회 (31) : 169-199, 2008

      13 홍종필, "만주사변이전 재만조선인의 교육에 대하여" (6) : 1994

      14 임성모, "만주농업이민 정책을 둘러싼 관동군・조선총독부의 대립과 그 귀결 - 우가키(宇垣) 총독의 구상 및 활동과 관련하여 -" 일본사학회 (29) : 133-16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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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申奎燮, "‘滿洲國’의 治外法權撤廢와 在滿 朝鮮人에 대한 認識" 대동문화연구원 43 : 67-85, 2003

      69 장용경, "]조선인’과 ‘국민’의 간극: 전시체제기 내선일체론의 성격과 조선지식인의 대응" (15)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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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정안기, "1930년대 在滿朝鮮人의 敎育政治史 연구" 만주학회 (17) : 121-15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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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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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18 1.18 1.1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06 0.98 2.15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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