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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관왕묘 향유의 두 양상 = Two Aspects of the Meaning of the Shrine of Guan Yu in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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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3644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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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에서 관우를 기념하는 사당[關王廟]이 처음 생긴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그러나 거의 100년 동안 관우의 영험함을 빌려 개인적 복을 구하는 사람들만 즐겨찾는 장소였다. 선조가 처음 이 곳을 찾을 때 왕이 무묘에 찾아가는 예를 차용했고, 이후 국가 祀典에 포함되어 제향이 이루어졌지만 그 제향이 갖는 국가적 의미는 불확실했다.
      이 장소는 숙종대에서 정조대에 이르는 동안 국가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숙종은 관우를 忠義와 尊周의 아이콘으로 해석해냈다. 당시 왕조의 수복을 위해 노력하며 時勢보다는 정의正義를 중시했던 촉한을 가장 정통성이 있는 나라로 여기는 ‘촉한정통론’의 역사의식은 『삼국지연의』라는 책을 통해 조선에 더 널리 퍼졌다. 숙종은 관우의 충성심을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아니라 국가를 넘어서 보편적인 정의를 지향하는 차원에서 재정의했다. 관우는 단지 무력이 뛰어난 무장이 아니라 『춘추』라는 책을 즐겨 읽었던 정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장수였고, 시대를 뛰어넘어 기억할 만한 ‘武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영조와 정조는 관왕묘를 조선의 무묘로 정립시켰다. 숙종과 마찬가지로 관우를 형세에 굴하지 않고 오롯이 漢 왕조의 회복을 위해 몸바친 이로, 춘추 의리의 상징으로 기념했다. 무묘에서 절하는 무장들과 군사들에게 관우를 본받아 무력이 사적 이익과 權勢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고 보전하는 데에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숙종~정조에 이르는 시기는 군사 방면의 업적이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도 두드러진 시기였다. 왕조는 의리에 바탕한 무의 상징으로 관우를 재정립시키며 그의 사당에서 조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무’를 설득했다. 내부로부터 신뢰를 쌓아가는 정치로 관왕묘에서의 설득에 설득력을 더하는 일은 왕조의 몫이었다. 19세기 역사 속에서 관왕묘 의례는 지속되었지만, 관왕묘의 18세기적 상징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관왕묘는 다시 사적인 무당집으로 변해갔고, 끝내는 국가가 스스로 관왕묘를 왕실의 안녕을 위해 맹목적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관왕묘는 더 이상 국가의 안위와 무관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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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서 관우를 기념하는 사당[關王廟]이 처음 생긴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그러나 거의 100년 동안 관우의 영험함을 빌려 개인적 복을 구하는 사람들만 즐겨찾는 장소였다. 선조가 처음 이 ...

      조선에서 관우를 기념하는 사당[關王廟]이 처음 생긴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그러나 거의 100년 동안 관우의 영험함을 빌려 개인적 복을 구하는 사람들만 즐겨찾는 장소였다. 선조가 처음 이 곳을 찾을 때 왕이 무묘에 찾아가는 예를 차용했고, 이후 국가 祀典에 포함되어 제향이 이루어졌지만 그 제향이 갖는 국가적 의미는 불확실했다.
      이 장소는 숙종대에서 정조대에 이르는 동안 국가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숙종은 관우를 忠義와 尊周의 아이콘으로 해석해냈다. 당시 왕조의 수복을 위해 노력하며 時勢보다는 정의正義를 중시했던 촉한을 가장 정통성이 있는 나라로 여기는 ‘촉한정통론’의 역사의식은 『삼국지연의』라는 책을 통해 조선에 더 널리 퍼졌다. 숙종은 관우의 충성심을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아니라 국가를 넘어서 보편적인 정의를 지향하는 차원에서 재정의했다. 관우는 단지 무력이 뛰어난 무장이 아니라 『춘추』라는 책을 즐겨 읽었던 정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장수였고, 시대를 뛰어넘어 기억할 만한 ‘武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영조와 정조는 관왕묘를 조선의 무묘로 정립시켰다. 숙종과 마찬가지로 관우를 형세에 굴하지 않고 오롯이 漢 왕조의 회복을 위해 몸바친 이로, 춘추 의리의 상징으로 기념했다. 무묘에서 절하는 무장들과 군사들에게 관우를 본받아 무력이 사적 이익과 權勢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고 보전하는 데에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숙종~정조에 이르는 시기는 군사 방면의 업적이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도 두드러진 시기였다. 왕조는 의리에 바탕한 무의 상징으로 관우를 재정립시키며 그의 사당에서 조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무’를 설득했다. 내부로부터 신뢰를 쌓아가는 정치로 관왕묘에서의 설득에 설득력을 더하는 일은 왕조의 몫이었다. 19세기 역사 속에서 관왕묘 의례는 지속되었지만, 관왕묘의 18세기적 상징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관왕묘는 다시 사적인 무당집으로 변해갔고, 끝내는 국가가 스스로 관왕묘를 왕실의 안녕을 위해 맹목적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관왕묘는 더 이상 국가의 안위와 무관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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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수영, "효종(孝宗)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독서와 번역" 국문학회 (32) : 67-88, 2015

      2 김 호, "조선후기의 중화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대보단의 역사적 의의를 중심으로" 9 : 2011

      3 정옥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1998

      4 김호, "조선후기 華夷論 再考 -‘域外春秋’論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회 (162) : 123-163, 2013

      5 우경섭, "조선중화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 유니스토리 2013

      6 심승구, "조선시대의 정치와 제도" 집문당 2003

      7 김일권, "조선 후기 關聖敎의 敬信修行論" 한국도교문화학회 40 : 157-186, 2014

      8 김수영, "영조(英祖)의 소설 애호와 그 의의" 인문학연구원 73 (73): 107-134, 2016

      9 김필례, "관우설화연구" 17 : 1998

      10 김용국, "관왕묘건치고" 25 : 1965

      1 김수영, "효종(孝宗)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독서와 번역" 국문학회 (32) : 67-88, 2015

      2 김 호, "조선후기의 중화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대보단의 역사적 의의를 중심으로" 9 : 2011

      3 정옥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1998

      4 김호, "조선후기 華夷論 再考 -‘域外春秋’論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회 (162) : 123-163, 2013

      5 우경섭, "조선중화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 유니스토리 2013

      6 심승구, "조선시대의 정치와 제도" 집문당 2003

      7 김일권, "조선 후기 關聖敎의 敬信修行論" 한국도교문화학회 40 : 157-186, 2014

      8 김수영, "영조(英祖)의 소설 애호와 그 의의" 인문학연구원 73 (73): 107-134, 2016

      9 김필례, "관우설화연구" 17 : 1998

      10 김용국, "관왕묘건치고" 25 : 1965

      11 심승구, "관왕묘 의례의 재현과 공연예술화 방안" 한국공연문화학회 (24) : 265-308, 2012

      12 "朝鮮王朝實錄"

      13 한종수, "朝鮮後期 肅宗代 關王廟 致祭의 性格" 한국역사민속학회 (21) : 73-106, 2005

      14 "星湖僿說"

      15 "日省錄"

      16 "承政院日記"

      17 "弘齋全書"

      18 이성형, "對明義理論의 推移와 朝鮮 關王廟-宣祖~肅宗 年間을 中心으로-" 한국한문학회 (53) : 353-390, 2014

      19 김지영, "典享司 『祭禮謄錄』을 통해 본 朝鮮後期 國家祭禮와 일상" 한국사학회 (116) : 243-286, 2014

      20 민관동, "《三国志演義》의 國內 流入과 出版 - 조선 출판본을 중심으로" 중국문화연구학회 (24) : 207-234, 2014

      21 이은봉, "<삼국지연의>의 수용 양상 연구" 인천대학교 대학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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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9-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2006-05-23 학회명변경 한글명 : 한국문화연구소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영문명 : Institute of Korean Studies ->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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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8 0.68 0.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82 0.75 1.856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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