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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 낙양춘의 형성과정 연구 = A Study of Formation of the Current Version of “Nagyangc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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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31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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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낙양춘”(洛陽春)은 현전하는 유이한 당악곡(唐樂曲)이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송(宋)나라의 사악(詞樂)으로 고려 때 전해져 전승과정 속에서 변하여 현재에 이른다”는 등의 구체성...

      “낙양춘”(洛陽春)은 현전하는 유이한 당악곡(唐樂曲)이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송(宋)나라의 사악(詞樂)으로 고려 때 전해져 전승과정 속에서 변하여 현재에 이른다”는 등의 구체성이 없는 서술을 사용한다. 본고에서는 그 “낙양춘”의 형성과정이 어떠한 지를 설명코자 “낙양춘”의 선율이 전하는 모든 문헌(악보)들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본격적인 형성과정 이전에 고악보들의 시기 순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악장요람』(樂章要覽)의 점(·)단락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래서 점(·)이 ‘대금(大笒)의 숨구’임을 앎과 동시에 『樂章要覽』의 “낙양춘”이 1음1박이 아니라, 각기 고유한 시가를 지닌 음악이며, 이것이 『속악원보』(俗樂源譜) 권4의 “낙양춘”과 동일한 음악임을 알았다. 이를 통하여 『樂章要覽』(순조)―『俗樂源譜』 권4(고종)―『俗樂源譜』 권6(일제강점기)의 순서임을 알게 되었다.
      형성과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악곡명의 변화는 『樂章要覽』·『俗樂源譜』 권4 및 권6 모두 “낙양춘”이라고 쓰고 있으나, 『아악부악보』(雅樂部樂譜)·『아악생교과철』(雅樂生敎科綴)·『이왕직아악부오선악보』(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는 “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 일명 “기수영창”)으로 바뀌고, 부수적으로 괄호 속에 (“낙양춘”)이라고 쓰거나 아예 쓰지 않는 형태로 변하였다. 해방 이후 1970년대에도 “낙양춘”을 표기했으나, 여전히 “기수영창지곡”을 원제(原題), “낙양춘”을 부제(副題)로 표기했고, 2007년부터 “낙양춘”을 원제, “기수영창”을 부제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악기편성은 악보를 통하여 나타난 것들만 다뤘다. 『俗樂源譜』 권4에서는 장고점(杖鼓點)이 있어 장구가 편성됐음이 명확하다. 그런데 『俗樂源譜』 권6부터 장구가 등장하지 않았고, 이는 『雅樂部樂譜』도 마찬가지였다.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는 아악기인 절고(節鼓)가 처음으로 등장했다가 해방 이후부터 민간악기인 좌고(座鼓)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1978년에 장구를 다시 편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2007년 이후 사용하지 않는다(교습본인『樂章要覽』과 『雅樂生敎科綴』 제외). 이 외에 일제강점기에 보이지 않던 방향(方響)과 박(拍)이 해방 이후부터 다시 편성되었고, 노래가 추가되었다.
      선율선의 변화 없이 음고(音高)의 교체가 있었다. 먼저 주요 5음이 아닌 2음에서 나타난 『樂章要覽』과 『俗樂源譜』 권6의 ‘姑·無’, 『俗樂源譜』 권4의 ‘夾·應’이 『雅樂部樂譜』에 이르러 각 악기보에 혼재되어 불협화음을 이루다가 『雅樂生敎科綴』을 거쳐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 이르러 다수결에 의해 ‘姑·應’으로 통일되었다. 주요음 중에서는 『樂章要覽』과 『俗樂源譜』 권4, 권6 모두 ‘太·仲·太·黃’이었던 악구가 『雅樂部樂譜』에서 ‘太·林·太·黃’ ’(鐘磬·大笒· 唐笛·牙箏), ‘太·南·太·黃’(觱篥), ‘太·太·黃’(奚琴)으로 나뉘어 변하였다. 『雅樂生敎科綴』에서는 ‘太·南·太·黃’으로 나타나 다수결에 의해 ‘太·林·太·黃’으로 통일 및 연주된 것이 보였고,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 주선율인 당필률·대금은 ‘太·林·太·黃’, 종경·해금·아쟁은 ‘太·太·黃’으로 정리됐다.
      『雅樂部樂譜』부터 삽입음이 나타났는데 이는 어떤 악보에서도 문헌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었고, 음악적으로도 의도하지 않은 불협화음을 만들거나 절주를 맞지 않게 하는 방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낙양춘”이 전승된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는 재연(再演)이라기보다 창작(創作)이고, 이러한 형태의 창작은 훼손이다. 이후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 이 삽입음들이 통일되었는데, 주선율인 당피리·대금은 가장 삽입음이 많은 『雅樂部樂譜』의 당적보(唐笛譜)로, 종경은 종경보(鐘磬譜), 해금·아쟁은 아쟁보(牙箏譜)로 선택되었다. 이들이 절주(節奏)를 맞추는 것은 주선율이 삽입음을 연주할 때 나머지 악기가 쉬거나 본음을 지속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삽입음들은 반드시 본음(本音)의 앞에만, 반드시 본음보다 음고(音高)가 위였다. 이러한 특징이 해방 이후 전승악보집 시리즈의 악상기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했다.
      『樂章要覽』·『俗樂源譜』 권4까지는 각 음이 고유한 시가(時價)를 가졌고, 『俗樂源譜』 권6부터 현재까지 1음1박이다. 다만 『俗樂源譜』 권6은 1음1박만 나타나고, 그 1박이 3분박인 것은 『雅樂部樂譜』부터 시작되는데, 명시(明示)가 아니라 암시(暗示)되어 명확하지 않다. 또한 『雅樂部樂譜』부터 본음끼리 결합, 본음과 삽입음의 결합이 시작되어 1/3-2/3박, 2/3-1/3박 구조가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나, 역시 명시가 아니라 암시였다. 3분박이라는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근거는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 이후에 찾을 수 있었다.
      환입(還入)은 『樂章要覽』·『俗樂源譜』 권4, 권6까지는 모두 명기되었다. 그러나 『雅樂部樂譜』에서는 『俗樂源譜』 권6과 같은 위치에 종경(鐘磬)·필률(觱篥)·아쟁보(牙箏譜) 3종에서만 점(·)이 작게 찍혀있었고, 『雅樂生敎科綴』에도 환입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필기만이 있었다.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는 아예 환입이 사라지고, 환입이 시작음인 南으로 음악이 끝났다. 해방 이후에는 1978년부터 다시 환입이 원래의 위치대로 연주된다.
      이상을 종합하면 『樂章要覽』과 『俗樂源譜』 권4의 조선조 “낙양춘”과 『俗樂源譜』 권6의 “낙양춘”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다. 『俗樂源譜』 권6에서는 1음1박화라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고, 이후 『雅樂部樂譜』―『雅樂生敎科綴』―『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를 거치며 일어난 음고의 교체 및 결합, 그리고 근거없는 음의 삽입과 악기군에 따른 선율의 분화 등이 현행 “낙양춘”의 형성에 중대하게 작용했다. 또한 이는 전승과정 속에서가 아니라 재연과정, 더 엄밀히 훼손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낙양춘”을 설명할 때 “전승과정 속에서 변하였다”는 서술은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행 “낙양춘”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俗樂源譜』 권6과 1929~31년경(『雅樂部樂譜』)부터 1936~39년경(『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까지 일제강점기 약 10년 안팎의 세월동안 변화를 겪었고, 최종적으로 1936~39년경 『李王職雅樂部五線樂譜』에서 완성됐다. 이후에는 선율적인변화 없이 환입의 재사용, 편성에 방향과 박을 추가, 노래선율의 추가 등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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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Nagyangch'un” 洛陽春(Spring in Lo-yang, Lo-yang-ch'un in Chinese) is the only two of remained tangak 唐樂(Chinese-derived music), though its importance, use exp lanation without concreteness such like “As one of Song 宋 saak 詞樂(music ...

      “Nagyangch'un” 洛陽春(Spring in Lo-yang, Lo-yang-ch'un in Chinese) is the only two of remained tangak 唐樂(Chinese-derived music), though its importance, use exp lanation without concreteness such like “As one of Song 宋 saak 詞樂(music for poe try of Sung China, tz'u-yueh in Chinese) delivered during Koryo 高麗 dynasty, “Na gyangch'un” has changed with the process of transmission until today.” This study ex amined for concrete describing the formation of “Nagyangch'un” by reviewing all the existing documents that contained the melody of “Nagyangch'un”.
      First of all, it needs to clear the period of documents that examined the paragraph of dots(·) in Akchang yoram 『樂章要覽』. The dot(·) was breathing marks for the taegum 大笒 and each tone in the Akchang yoram has its own rhythm, not one-tone one-beat music. Therefore “Nagyangch'un” in the Akchang yoram and the fourth volum e of Sogak wonbo 『俗樂源譜』 were the same music.
      The followings are the features that are founded. The name of “Nagyangch'un” du ring Choson 朝鮮 dynasty was “Nagyangch'un” and wrote by itself onl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however, it changed to “Kisu yongch'ang chigok” 旣壽永昌之曲(“Piece of Kisu yongch'ang”, also called “Kisu yongch'ang”). Even after the post - liberation era, “Kisu yongch'ang” used as original in the 1970’s not used as second ary until 2007. As for “Kisu yongch'ang”, it has never been used as the name of “Nagyangch'un” from Koryo 高麗 to Choson dynasty.
      Changgu 杖鼓(hourglass drum) was necessary for Choson’s “Nagyangch'un” but di sappear in the colonial period, cholgo 節鼓(large drum) listed instead any relations with the Nagyangch'un’s identity. As same as perspective of any relations with identi ty, chwago 座鼓(seated drum) listed during liberation era and still same in today.
      There were some replaces of pitches without melodic variation. During the Japanes e colonial era, the scale of “Nagyangch'un” changed into ‘黃·太·姑·仲·林·南·應’(c·d· e·f·g· a·b) and these are still the same in nowadays which had never been in the Cho son period. A phrase ‘太仲太黃’(d-f-d-c) at the Choson period changed into ‘太林太黃’(d-g- d-c) and once more divided into ‘太林太黃’(d-g-d-c) and ‘太-太黃’(d-res t-d-c)’ at the colonial period.
      There was an existence of insertion tones without any basis of documents that ma kes impossible play as an ensemble. These insertion tones are always exactly in front of original tones and exactly higher than original tones’ pitch so make musical unnat ural and disharmony with no musical intention. It had arranged to possible that coul d play ensemble during the same era but one original melody divided into three mel odies by instrument groups and also insertion tones were never gone.
      Each tone had its own length and “Nagyangch'un” had its own rhythm during th e Choson period, yet changed to one-tone one-beat music while colonial era as well one beat composed with three small beats. The one beats were comprised of 1/3-2/3 and 2/3-1/3 beat forms by combined original-insertion tones or original tones themsel ves.
      In the Choson period, Hwanip 還入(re-entering, i.e. dal segno) was expressly mar ked but in the colonial era, it didn’t mark but hint and soon disappeared. Today, H wanip is marked correctly due to the results of some researches.
      In conclusion, current “Nagyangch'un” completed around 1936~1939 and there w asn’t altered of melody structure after this. The formation of the current version of “Nagyangch'un” is not transmission but distor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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