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서원은 1632년 창건 발의되어 2년 후 김장생을 제향하며 충청지역 西人系의 거점 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역사와 위상에 비해 소장 기록물은 많지 않은데, 특히 연혁과 관련한 기문류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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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연 ((재)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24
Korean
연산 ; 돈암서원 ; 정회당 ; 양성당 ; 김장생 ; 김집 ; 송시열 ; Donam Seowon ; Yeonsan-hyun ; Documents ; Song Si-ryeol (宋時烈) ; Seowon Management ; Noron party ; Kim Chang-saeng (金長生)
KCI등재
학술저널
209-239(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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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은 1632년 창건 발의되어 2년 후 김장생을 제향하며 충청지역 西人系의 거점 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역사와 위상에 비해 소장 기록물은 많지 않은데, 특히 연혁과 관련한 기문류의 경...
돈암서원은 1632년 창건 발의되어 2년 후 김장생을 제향하며 충청지역 西人系의 거점 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역사와 위상에 비해 소장 기록물은 많지 않은데, 특히 연혁과 관련한 기문류의 경우 1600년대 12건, 1800년대 13건 가량이 확인될 뿐이다. 1800년대 초 화재로 서적과 문서가 소실되면서 서원에서 멀리 떨어진 천호산 정회당에서 관리한 자료만 잔존한 것으로 보인다. 소장 기록물을 통해 1600년대 창건부터 송시열 추향까지의 상황과 1800년대 서원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 및 移建 이후의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돈암서원의 시작은 1500년대 중반 연산현 천호산에 세워진 靜會堂과 연산천변의 雅閑亭(養性堂) 이었다. 이곳에서 김장생과 김집 부자의 강학이 이루어지며 유안과 입의가 작성되었고, 훗날 돈암서원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 정회당과 양성당에서 양성된 이들이 돈암서원을 창건하게 되는데, 창건 과정을 기록한 <遯院舊蹟>과 추배때마다 작성된 유생안, 유안과 청금록은 서원의 영향력이 충청권에서 전라도 경상도 등 남부지방으로 확산되다가 1800년대에는 다시 범위가 좁혀지며 연산현 광산김씨와 은진송씨 위주의 운영 형태로 바뀌는 것을 보여준다. 돈암서원이 가진 서인-노론계 首院으로서의 위상이 송시열 사후 청주 華陽書院으로 옮겨갔던데다 서원 남설로 문중별 제향처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돈암서원은 천변에 위치해 매년 홍수피해를 수습하는데 큰 비용을 지출하다 결국 현 위치로 이건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소유재산을 조사 정리한 量案, 賭地記 등의 기록을 남겼다. 고종대 서원훼철령이 내려진 후 작성한 각종 절목과 장서록은 수령이 원장을 맡는 국가 관리 체제로 전환된 상황에서 서원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근현대 한시에 나타난 경주 관광 체험의 문학적 형상화 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