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tudy mainly examined the aspects of the war between Goguryeo(高句麗) and Sui(隋) in 612 from the viewpoint of military history by examining the Liezhuan(列傳), a memorial inscription, and archaeological data that contain the traces of indi...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A106844130
정동민 (한국외국어대학교)
2020
Korean
Goguryeo and Sui War(高句麗-隋 戰爭) ; Contact Zones ; Liaoxi(遼西) ; Emperor Yang of Sui(隋 煬帝) ; Linhaidun(臨海頓) ; Shouxiangshizhe(受降使者) ; Crossbow ; Detached Force ; 고구려-수 전쟁 ; 접경공간 ; 요서 ; 수 양제 ; 임해돈 ; 수항사자 ; 쇠뇌 ; 별동대
KCI등재
학술저널
87-132(46쪽)
0
0
상세조회0
다운로드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mainly examined the aspects of the war between Goguryeo(高句麗) and Sui(隋) in 612 from the viewpoint of military history by examining the Liezhuan(列傳), a memorial inscription, and archaeological data that contain the traces of indi...
This study mainly examined the aspects of the war between Goguryeo(高句麗) and Sui(隋) in 612 from the viewpoint of military history by examining the Liezhuan(列傳), a memorial inscription, and archaeological data that contain the traces of individual figures.
After influencing the eastern part of Liaoxi(遼西) and creating an advantageous phase, Sui made its expedition to Goguryeo with the troop of 1,133,800 people, by winning an intermittent battle with Goguryeo in eastern Liaoxi, which was a contact zones with between Sui and Goguryeo, while making parious preparations for the Goguryeo expedition.
The troops of Sui composed of 40 army troops and 1 navy troop arrived at the Liao River(遼河) in March after leaving Zhuojun(涿郡) in January through Linchuangguan(臨楡關), Luhezhen(瀘河鎭) or Huaiyuanzhen(懐遠鎭) to be supplied with military supplies. They faced strong resistance from the Goguryeo army and they could cross the river only in April.
Since the Sui crossed the river in April, a siege broke out between Goguryeo and Sui. At that time, the command of Sui troops had to report the situation to their Emperor Yang of Sui(隋 煬帝), who stayed in Linhaidun(臨海頓) from March till June. The Sui troops had a hard time because of lack of promptness in reporting and instructions between the commanding division and the Emperor himself, failure of the Emperor to understand the exact situation of the war because he was informed through an Shouxiangshizhe(受降使者), and because of the excellent castle defense capabilities of Goguryeo utilizing excellent distant shooting armors such as crossbow.
Accordingly, Emperor Yang of Sui tried to advance directly to Pyongyang Castle(平壤城), leaving the castles of Goguryeo that they could not defeat by organizing a detached force. The twelve army troops, that advanced to Goguryeo using different paths departing from Luhezhen or Huaiyuanzhen, suddenly received the assignment as a detached force tried to meet in the west of Amnoksu(鴨綠水) and advance to Pyongyang Castle together. However, as the soldiers who couldn't handle the weight of the war supplies abandoned the food for military, the detached force suffered from food shortage. The detached force that tried to advance to Pyongyang Castle regardless of such difficulties, Goguryeo forces managed to defend against them in Salsu(薩水) commanding scorched earth policy, retreat induction tactics and ambush tactics while they were maintaining castle defense system between Amnok River(鴨綠江) and Pyongyang. Goguryeo troops could win the war by defeating Sui troops in Pyongyang Castle through ambush tactics.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에서는 인물 개인의 행적이 담겨 있는 列傳이나 墓誌銘, 고고학적 자료를 주로 검토하면서 군사사적 관점에서 612년 高句麗-隋 전쟁의 전개 양상 일면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수는 고구려...
본고에서는 인물 개인의 행적이 담겨 있는 列傳이나 墓誌銘, 고고학적 자료를 주로 검토하면서 군사사적 관점에서 612년 高句麗-隋 전쟁의 전개 양상 일면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수는 고구려 원정을 위한 제반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와의 접경공간이었던 遼西 동부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이로써 요서 동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리한 국면을 조성한 수는 612년에 113만 38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육군 40개 군과 水軍 1개 군으로 편성된 수군은 1월에 涿郡을 출발하여 臨楡關을 지나 瀘河鎭 혹은 懷遠鎭에서 군수 물자를 보급 받고 3월에 遼水에 이르렀는데,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4월에 이르러서야 요수를 건널 수 있었다.
4월에 수군이 요수를 건넌 후부터는 성곽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수군 지휘부는 전투에 대한 모든 상황을 隋 煬帝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따라야만 했는데, 4월부터 6월까지 수 양제는 臨海頓에 머물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공간적 거리의 형성으로 야기된 전투 지휘부와 수 양제 간 보고・지시의 신속성 결여, 수 양제가 受降使者를 통해 전투 지휘부의 보고를 받음에 따른 정확한 전황 파악의 실패, 그리고 쇠뇌 등 우수한 원사무기를 활용한 고구려의 뛰어난 성곽 방어술 등으로 인해 수군은 遼東城을 포함한 성곽전에서 고전하게 된다.
이에 수 양제는 별동대를 편성하여 점령하지 못한 고구려 성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직접 平壤城으로 진군하고자 하였다. 노하진이나 회원진에서 출발하여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고구려로 진군하는 도중 갑작스럽게 별동대 임무를 부여 받은 12개 군은 鴨綠水 서쪽에서 만나 함께 평양성으로 진군하였다. 식량이 부족한 악조건 속에서 무리하게 평양성으로 진군하였던 수 별동대에 대해 고구려군은 압록강-평양 사이의 성 방어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야 전술, 후퇴유도 전술, 매복 전술 등을 구사하며 薩水에서 대파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으로 진입한 수 水軍에 대해서도 매복 전술을 펴며 격파함으로써, 고구려는 결국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Reference)
1 서울대학교박물관, "홍련봉 제2보루-1차 발굴조사보고서-" 2007
2 구의동보고서간행위원회, "한국유역의 고구려요새-구의동유적발굴조사종합보고서-" 도서출판 소화 1997
3 이종학, "한국군사사연구" 충남대학교 출판부 2010
4 임용한, "한국고대전쟁사 2" 혜안 2012
5 송계현, "한국고대의 갑옷과 투구" 국립김해박물관 2002
6 김길식, "한국 고대의 Global Pride-고구려" 고려대학교박물관 2005
7 이정빈, "특집논문:6세기 후반~7세기 초반 고구려의 서방 변경지대와 그 변화‒요서 지역 고구려의 라(邏)와 수의 진(鎭)·수(戍)를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82) : 97-132, 2011
8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편집부, "중국 소재 한국 고대 금석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5
9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 5" 1990
10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1 서울대학교박물관, "홍련봉 제2보루-1차 발굴조사보고서-" 2007
2 구의동보고서간행위원회, "한국유역의 고구려요새-구의동유적발굴조사종합보고서-" 도서출판 소화 1997
3 이종학, "한국군사사연구" 충남대학교 출판부 2010
4 임용한, "한국고대전쟁사 2" 혜안 2012
5 송계현, "한국고대의 갑옷과 투구" 국립김해박물관 2002
6 김길식, "한국 고대의 Global Pride-고구려" 고려대학교박물관 2005
7 이정빈, "특집논문:6세기 후반~7세기 초반 고구려의 서방 변경지대와 그 변화‒요서 지역 고구려의 라(邏)와 수의 진(鎭)·수(戍)를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82) : 97-132, 2011
8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편집부, "중국 소재 한국 고대 금석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5
9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 5" 1990
10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11 임용한, "전쟁과 역사~삼국편" 혜안 2001
12 서울대학교박물관, "용마산 제2보루-발굴조사 종합보고서-" 2009
13 김택민, "역주당육전(중)" 신서원 2005
14 서울대학교박물관, "아차산 제4보루" 2000
15 고려대학고고환경연구소, "아차산 제3보루-1차 발굴조사보고서-" 2007
16 서울대학교박물관, "아차산 시루봉보루-발굴조사 종합보고서-" 2002
17 篠田耕一, "무기와 방어구~중국편" 들녘 2006
18 서인한, "동북아의 왕자를 꿈꾸다" 플래닛미디어 2009
19 국사편찬위원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두산동아 2007
20 여호규,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동북아역사재단 2007
21 이정빈, "고구려-수 전쟁 : 변경 요서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大戰" 주류성 2018
22 김보람, "고구려 철촉 연구" 고려대학교 2013
23 김복순, "고구려 대・수당 항쟁전략 고찰" 12 : 1986
24 장경숙,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갑주" 6 : 2003
25 김택민, "麗ㆍ隋 力學關係와 戰爭의 樣相" 동양사학회 (127) : 229-268, 2014
26 이성제, "高句麗의 西部 國境線과 武厲邏" 대구사학회 113 : 1-28, 2013
27 이성제, "高句麗의 西方政策 硏究" 국학자료원 2005
28 이성제, "高句麗와 契丹의 關係" 5 : 2005
29 여호규, "高句麗城 2" 國防軍史硏究所 1999
30 정동민, "高句麗 重裝騎兵의 特徵과 運用形態의 變化-古墳壁畵資料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52) : 353-402, 2008
31 서인한, "高句麗 對隋・唐戰爭史" 국방부군사편찬위원회 1991
32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33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高句麗墓葬發掘簡報" 1983 (1983): 1983
34 吉林集安縣文管所, "集安萬寶汀墓區242號古墳淸理簡報" 1982 (1982): 1982
35 여호규, "集安地域 고구려 超大型積石墓의 전개과정과 被葬者 문제" 한국고대사학회 (41) : 85-134, 2006
36 이동준, "隋煬帝의 高句麗 원정과 군사전략" 30 : 2009
37 "隋書"
38 韓昇, "隋惕帝伐高麗之謎" 1996 (1996): 1996
39 寧志新, "隋唐使職制度硏究" 中華書局 2005
40 林汀水, "遼東灣海岸線的變遷" 1991 (1991): 1991
41 "資治通鑑"
42 "舊唐書"
43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石臺子山城 上" 文物出版社 2012
44 송계현, "桓仁과 集安의 고구려 갑주" 3 : 2005
45 張豔, "朝貢關系下隋唐對高句麗戰爭的原因分析" 2015 (2015): 2015
46 "日本書紀"
47 "新增東國輿地勝覽"
48 "新唐書"
49 "孫子兵法"
50 "太平寰宇記"
51 王綿厚, "唐“營州至安東”陸軍交通地理考實" 1986 (1986): 1986
52 "吳子兵法"
53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吉林集安高句麗墓葬報告集" 科學出版社 2009
54 吉林省博物館文物工作隊, "吉林集安兩座高句麗墓" 1977 (1977): 1977
55 "北史"
56 "冊府元龜"
57 "六韜"
58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五女山城-1996~1999, 2003年 桓仁五女山城調査發掘報告" 文物出版社 2004
59 孫煒冉, "乙支文德考" 2015 (2015): 2015
60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 5" 地圖出版社 1982
61 李東, "中國考古學年鑑-2009" 文物出版社 2010
62 "三國史記"
63 高鐵泰, "《豆盧實墓志》與北朝隋唐豆盧氏家族" 2015 (2015): 2015
64 임기환, "7세기 동북아 전쟁에 대한 연구동향과 과제-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을 중심으로" 신구문화사 8 : 2014
65 이정빈, "6~7세기 고구려의 쇠뇌 운용과 군사적 변화"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77) : 61-86, 2010
66 정동민, "613・614년 高句麗-隋 전쟁에 보이는 遼西 상황과 隋軍의 전략" 인문과학연구소 55 : 77-114, 2019
67 김영수, "612년 여.수 전쟁과 고구려의 전략에 관한 연구" 한국고전번역원 30 (30): 271-304, 2007
68 정동민, "612년 고구려 원정 隋軍의 군단 편성과 兵種 구성" 한국고대사학회 (82) : 233-269, 2016
69 정동민, "598년 高句麗-隋 전쟁의 배경과 충돌 양상 - 접경공간인 遼西地域을 중심으로 -" 역사문화연구소 (67) : 3-40, 2018
70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8-2009年遼寧桓仁縣高儉地高句麗山城發掘簡報" 2012 (2012): 2012
학술지 이력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8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
201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
201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1.18 | 1.18 | 1.0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96 | 0.97 | 2.484 | 0.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