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북방 지역이 경계 지역이자 방어의 요해처임을 인식하고 있었고 불안정한 요동 상황에 남하하던 여진인들을 포용하여 귀화를 수용하였다. 이후 여진인들의 귀화는 조선과 여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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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철 (강원대학교)
2023
Korean
northern management ; naturalization ; Jurchens ; meritorious subjects ; volunteers for the royal guard ; conciliatory measure ; 북방경영 ; 귀화 ; 여진인 ; 개국공신 ; 자원시위 ; 회유책
KCI등재
학술저널
221-26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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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북방 지역이 경계 지역이자 방어의 요해처임을 인식하고 있었고 불안정한 요동 상황에 남하하던 여진인들을 포용하여 귀화를 수용하였다. 이후 여진인들의 귀화는 조선과 여진세...
이성계는 북방 지역이 경계 지역이자 방어의 요해처임을 인식하고 있었고 불안정한 요동 상황에 남하하던 여진인들을 포용하여 귀화를 수용하였다. 이후 여진인들의 귀화는 조선과 여진세력간의 관계에 따라 증가하기도 감소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을 때 여진인 대소추장들은 가별초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연원이 오래되어 완전히 철폐하기에 어려웠고, 태종은 조사의의 난을 계기로 가별초 혁파를 시도하였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여진 귀화인을 조선에 편입하였다.
그러나 조선으로 귀화한 여진인들이 조선에 성심으로 귀화하였는지에 대한 여부가 명확하지 않았다. 이에 세종은 귀화인의 범위로 귀화인 본인과 그 친아들을 귀화인으로, 그 나머지 자손은 조선 사람으로 범위를 설정하였다.
조선 초기 여진 귀화인의 사례와 현황을 살펴보면, 태조~태종 시기에는 조선 건국에 기여하여 포상받은 과정 및 활동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세종 시기에 두드러진 사례는 자원시위의 사례로, 총 31명의 자원시위자 중 8명이 이 시기에 발생하였다. 자원시위의 여진인 종족별 분포에서도 알타리가 52%를 차지하고 있어 동맹가첩목아의 이동과 패망이 자원시위자 발생에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에서는 귀화한 여진인들에게 조선은 관직을 제수할 때에 품계를 넘어 주고자 하기도, 경제적으로도 지원하여 조세 감면, 토지ㆍ의복 지급, 취처 등 실시하였다. 이러한 여진 귀화인들은 대외적인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간첩과 통사, 여진 초무 등에서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 외에 일반 편호가 되어 조선의 내지에서 토지를 경작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례에서 여진 귀화인들은 북방 경영에도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Yi Seonggye recognized that the northern region was not only a boundary area but also a vital part for defense, so he admitted Jurchens who came to the south from the unstable Liaodong Area to be naturalized, by embracing them. Then, the naturalizatio...
Yi Seonggye recognized that the northern region was not only a boundary area but also a vital part for defense, so he admitted Jurchens who came to the south from the unstable Liaodong Area to be naturalized, by embracing them. Then, the naturalization of Jurchen was increased or decreased, depend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the Jurchen forces.
On the other hand, the major and minor chieftains of the Jurchen had command over gabyeolcho(private armies). It was difficult to completely abolish them, because it was long since they were originated. King Taejong tried to remove Gabyeolcho on the occasion of Jo Saui’s revolt. In the process, naturalized Jurchens were incorporated into Joseon.
However, it was not clear whether the Jurchens were sincerely naturalized into Joseon. King Sejong, therefore, categorized the naturalized Jurchens and their true sons as naturalized ones and other descendants as Joseon people.
This can be found from the process in which they were prized because they contributed to the foundation of Joseon in the period from King Taejo to King Taejong, and from the records of their activities, by comparing the cases and conditions of the naturalized Jurchens in the early Joseon. The most noticeable cases are volunteers for the royal guard. Out of the 31 volunteer royal guards, 8 of them occurred during this period. The distribution of Jurchen tribes who volunteered for the royal guard shows that 52% were of the Odoli tribe, proving the impact of Mengtemu’s migration and defeat on the occurrence of royal guard duty volunteers.
Joseon attempted to raise the rank of the naturalized Jurchens, by appointing them to government posts, and also gave economic supports to them, such as tax exemption, granting of lands/clothing, and marriage. They stood out in external activities. In particular, they had notable abilities in emissary, translation, conciliation of Jurchens, etc. They also might contribute to the northern management, in that they became general Pyeonho and cultivated lands in the inland of Joseon.
조선후기 서학 연구의 주제 확장에 대한 제언-번역, 척사파 연구와 서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한반도 북부 지역의 越境地 분포와 그 역사적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