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한용운과 백용성의 帶妻 인식에 관한 시대 배경과 관점 차이 = The Background and Perspective Difference in the Perception of Priest's Marriage between Han Yongwun and Baek Yongseong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5989246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March and September of 1910, Han Yongwun made two petitions to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o allow Joseon monks' marriage. In addition, in the journal of "Joseon Buddhist Renovation" published in December of the same year, he wrote a long column that the monk's marriage should be tolerated. This means that Han Yongwun made three claims for monk's marriage of Joseon Buddhism in 1910.
      In contrast, in May and September of 1926 or 16 years later, Baek Yongseong sent two petitions to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not to allow Joseon monks' marriage, In other words, he expressed the opposite position to Han Yongwun twice in the year as Han Yongwun had done.
      Han Yongwun and Baek Yongseong both strongly advocated the reform of Joseon Buddhism. However, the two had completely opposite views on the monk's marriage. For this reason, there have been studies that contrast two people's views or insisting that Han Yongwun left a flaw in modern Korean Buddhism.
      However, this paper points that there was the 16 year time gap between the two's claims. In that there should necessarily be a difference of perspective according to the temporal background, this paper tries to understand the difference of recognition between the two people. With this it can be confirmed that, while Han Yongwun suggested the monk's marriage as a solution to the internal contradictions of Joseon Buddhism, Baek Yongseong suggested it to oppose to the temple law revision of Japanese imperialism that the married monk could be the residential priest in the main temple. In other words, they were presenting the solutions based on the different necessities in different backgrounds.
      번역하기

      In March and September of 1910, Han Yongwun made two petitions to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o allow Joseon monks' marriage. In addition, in the journal of "Joseon Buddhist Renovation" published in December of the same year, he wrote a long col...

      In March and September of 1910, Han Yongwun made two petitions to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o allow Joseon monks' marriage. In addition, in the journal of "Joseon Buddhist Renovation" published in December of the same year, he wrote a long column that the monk's marriage should be tolerated. This means that Han Yongwun made three claims for monk's marriage of Joseon Buddhism in 1910.
      In contrast, in May and September of 1926 or 16 years later, Baek Yongseong sent two petitions to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not to allow Joseon monks' marriage, In other words, he expressed the opposite position to Han Yongwun twice in the year as Han Yongwun had done.
      Han Yongwun and Baek Yongseong both strongly advocated the reform of Joseon Buddhism. However, the two had completely opposite views on the monk's marriage. For this reason, there have been studies that contrast two people's views or insisting that Han Yongwun left a flaw in modern Korean Buddhism.
      However, this paper points that there was the 16 year time gap between the two's claims. In that there should necessarily be a difference of perspective according to the temporal background, this paper tries to understand the difference of recognition between the two people. With this it can be confirmed that, while Han Yongwun suggested the monk's marriage as a solution to the internal contradictions of Joseon Buddhism, Baek Yongseong suggested it to oppose to the temple law revision of Japanese imperialism that the married monk could be the residential priest in the main temple. In other words, they were presenting the solutions based on the different necessities in different backgrounds.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1910년 3월과 9월 한용운은 일제에 조선 승려들의 대처를 용인해달라는 두 차례의 건의문을 제출한다. 또 같은 해 12월에 탈고되는 『조선불교유신론』에는 승려의 결혼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항목이 장문으로 배치된다. 이는 1910년 한용운이 조선불교의 대처 주장을 3차례나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16년 후인 1926년 5월과 9월에 백용성은 일제에 조선불교의 대처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2건의 건의문 보낸다. 즉 한용운과는 정반대의 입장이 한용운처럼 같은 해에 2차례나 표명되고 있는 것이다.
      한용운과 백용성은 모두 조선불교의 개혁을 강도 높게 주창한 인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승려의 결혼과 관련해서는 전혀 상반된 관점에 처해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점을 대비시키거나, 현대적인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한용운이 오점을 남겼다는 연구 등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본고는 두 사람의 주장 사이에는 16년의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 또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시대 배경에 따른 관점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두 사람의 인식 차이를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은 한용운이 조선불교가 내부적인 모순구조를 보이는 시점에 승려의 결혼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반면, 백용성은 대처승이 본사 주지가 되는 일제의 사법개정에 대한 반대와 연관되어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 각기 다른 필연성에 입각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판단하는 것은 학문이 범할 수 있는 흔한 오류 중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다름에 기초한 인식과 판단은 보다 높은 연구의의를 확보한다.
      번역하기

      1910년 3월과 9월 한용운은 일제에 조선 승려들의 대처를 용인해달라는 두 차례의 건의문을 제출한다. 또 같은 해 12월에 탈고되는 『조선불교유신론』에는 승려의 결혼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

      1910년 3월과 9월 한용운은 일제에 조선 승려들의 대처를 용인해달라는 두 차례의 건의문을 제출한다. 또 같은 해 12월에 탈고되는 『조선불교유신론』에는 승려의 결혼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항목이 장문으로 배치된다. 이는 1910년 한용운이 조선불교의 대처 주장을 3차례나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16년 후인 1926년 5월과 9월에 백용성은 일제에 조선불교의 대처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2건의 건의문 보낸다. 즉 한용운과는 정반대의 입장이 한용운처럼 같은 해에 2차례나 표명되고 있는 것이다.
      한용운과 백용성은 모두 조선불교의 개혁을 강도 높게 주창한 인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승려의 결혼과 관련해서는 전혀 상반된 관점에 처해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점을 대비시키거나, 현대적인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한용운이 오점을 남겼다는 연구 등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본고는 두 사람의 주장 사이에는 16년의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 또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시대 배경에 따른 관점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두 사람의 인식 차이를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은 한용운이 조선불교가 내부적인 모순구조를 보이는 시점에 승려의 결혼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반면, 백용성은 대처승이 본사 주지가 되는 일제의 사법개정에 대한 반대와 연관되어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 각기 다른 필연성에 입각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판단하는 것은 학문이 범할 수 있는 흔한 오류 중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다름에 기초한 인식과 판단은 보다 높은 연구의의를 확보한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염중섭, "律의 改變 가능성과 <僧侶法>의 당위성 검토" 불교문화연구원 (61) : 375-415, 2012

      2 염중섭, "한국불교의 계율적인 특징과 현대사회 - 일제강점기와 조계종을 중심으로 -" 불교학연구회 35 : 211-249, 2013

      3 서재영, "한국근대 불교개혁론의 전개와 교단개혁 - 조선불교유신론을 중심으로 -" 한국선학회 (24) : 281-326, 2009

      4 조아담, "재일 조선불교유학생들의 활동" 불교문화연구원 (48) : 205-222, 2008

      5 고영섭, "일제강점기 재일 불교유학생들의 귀국 이후 동향 - 불교연구자를 중심으로 -" 한국불교학회 (73) : 291-339, 2015

      6 박재주, "유가윤리에서의 이성과 욕망의 관계가 가지는 도덕교육적 의의" 한국초등도덕교육학회 (23) : 5-30, 2007

      7 새문안교회역사편찬위원회, "새문안교회 100年史" 새문안교회 1995

      8 류승주,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朝鮮佛敎維新論』 - 한용운의 불교적 사회진화론 -" 원불교사상연구원 (41) : 249-279, 2009

      9 유승무, "사회진화론과 만해의 사회사상 ―?조선불교유신론?을 중심으로" 동양사회사상학회 8 : 133-160, 2003

      10 심재관, "근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 萬海思想實踐宣揚會 22 : 2005

      1 염중섭, "律의 改變 가능성과 <僧侶法>의 당위성 검토" 불교문화연구원 (61) : 375-415, 2012

      2 염중섭, "한국불교의 계율적인 특징과 현대사회 - 일제강점기와 조계종을 중심으로 -" 불교학연구회 35 : 211-249, 2013

      3 서재영, "한국근대 불교개혁론의 전개와 교단개혁 - 조선불교유신론을 중심으로 -" 한국선학회 (24) : 281-326, 2009

      4 조아담, "재일 조선불교유학생들의 활동" 불교문화연구원 (48) : 205-222, 2008

      5 고영섭, "일제강점기 재일 불교유학생들의 귀국 이후 동향 - 불교연구자를 중심으로 -" 한국불교학회 (73) : 291-339, 2015

      6 박재주, "유가윤리에서의 이성과 욕망의 관계가 가지는 도덕교육적 의의" 한국초등도덕교육학회 (23) : 5-30, 2007

      7 새문안교회역사편찬위원회, "새문안교회 100年史" 새문안교회 1995

      8 류승주,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朝鮮佛敎維新論』 - 한용운의 불교적 사회진화론 -" 원불교사상연구원 (41) : 249-279, 2009

      9 유승무, "사회진화론과 만해의 사회사상 ―?조선불교유신론?을 중심으로" 동양사회사상학회 8 : 133-160, 2003

      10 심재관, "근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 萬海思想實踐宣揚會 22 : 2005

      11 박재현, "근대 불교의 대처식육(帶妻食肉) 문제에관한 윤리적 고찰" 한국철학회 (93) : 47-70, 2007

      12 金光植, "龍城의 建白書와 帶妻食肉의 재인식" 韓國佛敎禪理硏究院 4 : 2008

      13 정연수, "韓龍雲의 『朝鮮佛敎維新論』에 관한 批評的 考察" 한국철학사연구회 (40) : 177-201, 2014

      14 고재석, "韓龍雲과 그의 時代" 亦樂 2015

      15 柳洪烈, "韓國宗敎" 圓光大學校宗敎問題硏究所 1973

      16 金敬執, "韓國佛敎近代史" 經書院 2000

      17 강준만, "韓國 近代史 散策2-改新敎 入國에서 乙未事變까지" 人物과 思想史 2007

      18 李能和, "譯註 朝鮮佛敎通史 6" 東國大學校出版部 2010

      19 白龍城, "覺海日輪" 佛光出版部 1997

      20 서경수, "萬海의 佛敎維新論" 萬海思想硏究會 2 : 1981

      21 伽倻衲子, "背恩忘德" 23 : 1926

      22 金昌淑[曉呑], "石顚映湖 大宗師의 生涯와 思想" 禪雲寺 2009

      23 金昌淑[曉呑], "石顚 朴漢永의 <戒學約詮>과 歷史的 性格" 韓國史硏究會 107 : 1999

      24 "每日新報"

      25 "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 T24"

      26 建學100周年記念事業本部, "東國大學校百年史 2" 東國大學校出版部 2007

      27 姜裕文, "東京朝鮮佛敎留學生沿革一瞥" 21 : 1933

      28 "東亞日報"

      29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30 津田賢, "朝鮮開敎50年誌" 大谷派本願寺朝鮮開敎監督部 1927

      31 靑柳南冥, "朝鮮宗敎史" 朝鮮硏究會 1911

      32 韓龍雲, "朝鮮佛敎維新論" 民族社 2015

      33 韓龍雲, "朝鮮佛敎一覽表" 朝鮮佛敎 中央敎務院 1928

      34 이태승, "日本 메이지시대 神道와 佛敎의 갈등" 韓國日本佛敎文化學會 12 : 2015

      35 崔柄憲, "日帝의 韓國侵掠과 宗敎" 2001

      36 이경순, "日帝時代 佛敎留學生의 動向" 大韓佛敎曹溪宗 敎育院 2 : 1998

      37 염중섭, "指空의 戒律意識과 無生戒에 대한 고찰" 한국불교학회 (70) : 249-278, 2014

      38 이혜경, "戴震의 氣一元的 倫理論" 서울大學校 哲學科 18 : 1990

      39 具萬化, "寺法均一件" 6 : 1912

      40 韓龍雲, "寺刹關係書類" 政府記錄保存所 1926

      41 韓龍雲, "宗敎ニスル雜件綴" 政府記錄保存所 1910

      42 "大唐西域記, T51"

      43 "四分律, T22"

      44 具萬化, "その罪三千大天世界に唾棄すゐ虛無し" 28 : 1926

      45 金光植, "1926년 佛敎界의 帶妻食肉論과 白龍城의 建白書" 獨立記念館 韓國獨立運動史硏究所 11 : 1997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12-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0-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5 0.55 0.4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 0.51 0.714 0.17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