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무라 토오코쿠의 死後, 100余年間 그의 家系에 관한 硏究는 그다지 行해지지 않았다. 이에 관한 硏究는 극히 最近에 와서야 히라오카 토시오(平岡敏夫)先生에 의해서 처음 行해지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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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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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005
KCI등재
학술저널
395-415(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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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무라 토오코쿠의 死後, 100余年間 그의 家系에 관한 硏究는 그다지 行해지지 않았다. 이에 관한 硏究는 극히 最近에 와서야 히라오카 토시오(平岡敏夫)先生에 의해서 처음 行해지게 되...
키타무라 토오코쿠의 死後, 100余年間 그의 家系에 관한 硏究는 그다지 行해지지 않았다. 이에 관한 硏究는 극히 最近에 와서야 히라오카 토시오(平岡敏夫)先生에 의해서 처음 行해지게 되었다. 先生은 토오코쿠(透谷)의 實弟 壇稻가 쓴 집안 來歷書 「過去帳」을 直接 찾아냈다. 그 序文에 透谷집안이 百濟 琳聖太子의 後孫이라는 事實이 記錄되어 있다. 先生의 硏究는 바로 이 「過去帳」을 分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硏究 方向은 透谷과 朝鮮의 關係보다는 明治國家下에 있어서 變貌해가는 透谷의 家系와 그 속에서 形成되어가는 作家 透谷의 內面世界에 그 比重을 두고 있다.
그러나 本人의 硏究는 平岡先生의 見解와는 달리 透谷와 朝鮮과의 關係에 焦點이 맞추어져 있다. 예컨대 百濟 琳聖太子, 그리고 山口縣에 있어서의 그의 後孫인 大內氏의 活躍上과 朝鮮觀, 그리고 그들의 後孫인 透谷이 왜 朝鮮系 渡來人의 마을인 小田原唐人町에서 태어났는가. 즉, 透谷의 家系에 얽힌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을 풀어 헤치면서, 그 속에서 透谷의 朝鮮觀이 그의 文學世界의 형성에 어떠한 影響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에 本稿의 主眼点을 두었다.
文獻學的 硏究란 言語의 解釋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考古學의 硏究처럼 우리 눈앞에 確實한 物證을 提示하는 그러한 迫力은 없다. 더구나 日本에 건너 간지 千余年이 지난 그 後孫들의 일들을 硏究 對象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臆說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마저 들곤 한다. 그 가장 큰 原因은 무엇보다도 그에 관한 記錄된 文獻들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逆說的으로 이야기하자면 文獻學 硏究의 盲點이라고도 볼 수 있다.
透谷의 先祖인 大內氏와 朝鮮과의 關係를 규명하는 記錄도 그리 많이 남아 있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注目해야 할 事項이 몇군데 있다. 즉, 百濟 琳聖太子가 渡日한지 千余年이 지난 후에도 그의 後孫인 大內氏는 자신의 先祖가 百濟의 王孫임을 自稱하면서, 朝鮮政府에 그 記錄을 要求하였다. 이 事實이 『朝鮮王朝實錄』의 定宗, 端宗, 成宗條에 실려져 있다.
이 大內氏는 朝鮮과의 貿易을 通하여 많은 富를 蓄積하였으며 이로서 勢力을 크게 擴張하였다. 또 한가지 注目할 것은 이 大內氏는 對馬島 近處의 倭寇가 朝鮮의 邊方을 侵入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을 알고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이를 制壓하였다. 그 結果 朝鮮百姓들의 生活이 安定을 되찾게 되었으며 朝鮮과 日本이 서로 通好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大內氏의 家風은 朝鮮에 대해서 상당히 友好的이며, 이것은 子孫代代로 이어져 가게 되었다. 古代以來 많은 朝鮮人들이 渡日하였으나 大內氏만큼 朝鮮에 대해서 親密感을 가지고 있는 家系도 아주 드물었다. 그만큼 大內氏는 자기 先祖가 百濟王孫이라는 점에서 높은 矜持를 가지게 되었다. 透삼도 이러한 自己 집안의 家風을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傳受받으면서 컸을 것이다. 이는 그의 朝鮮觀을 形成하는데 크게 作用하게 되었으며 그의 文學世界를 形成핸데 있어서도 적지 않은 餘韻을 남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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