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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순조대 近畿南人의 분화와 정치 명분 확립 = Establishment of Political Justification of Geunginamin(近畿南人) During the King Jeongjo~Sunjo’s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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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384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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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During the King Jeongjo(正祖)~Sunjo(純祖)’s reign, the Geunginamin(近畿南人) acted in the political world were based on their established political justification. Geunginamin of the King Jeongjo’s reign were divided into Chae Je-gong line(蔡濟恭系) and Mok Man-jung line(睦萬中系) according to their political interests. Chae Je-gong justified Namin’s political activities that Geunginamin of the King Jeongjo’s reign succeeded the Cheongnam(淸南), not Taknam(濁南) who involved in treason. But Chae Je-gong line tried to gather the Taknam to help reinstatement of Huh Jeok who was removed for treason.
      Mok Man-jung line was excluded from Chae Je-gong line’s list of supporters. Among them, Sacheon Mok’s family(四川睦氏) was further depressed. Because Mok Nae-sun was punished as a Myeonguijoiin(名義罪人). So Mok Man-jung wrote a 「Suonghaengrok(睡翁行錄)」 containing Mok Nae-sun’s achievements and a 「Gajeonggishil(家庭記實)」 containing his direct ancestor’s achievements. He justified his family through this.
      In the King Jeongjo’s reign, Seohak(西學) issue emerged as a political and social issue. Chae Je-gong line was closely connected Seohak. Thus Mok Man-jung line was trying to block the situation from being attacked that it is linked to Chae Je-gong line. When king Sunjo ascended to the throne, Byeokpa(僻派) ousted the Chae Je-gong line linked to Shipa(時派) through a Shinyubakhae(辛酉迫害). Due to this, Chae Je-gong line were removed on suspicion of Sahakjuiin(邪學罪人).
      Mok Man-jung line attempted to establish the justification that was unrelated to Seohak by promoting the work of clarifying Jeonghak(正學). For example, the Munmyojongsa(文廟從祀) movements of Jeong Gu and Jang Hyeon-gwang who scholars of represent Jeonghak, the posthumous conferment of honors of Namin Ahn Jeong-bok who take the lead exclusion of Seohak, the construction of a monument at Dosan Seowon where served Kwon Deuk-gi and Kwon Shi.
      Meanwhile Byeokpa collapsed and Chae Je-gong line promoted a movement to the amnesty movement of Chae Je-gong. But they ostracized Lee Ga-hwan, Lee Seung-hun, Kwon Cheol-shin, Hong Nak-min who were punished for suspicion of Sahakjuiin. As a result, Geunginamin was able to continue political activity based on their political justification established, even when they faced a political crisis again amid the Seohak oppression caused by the Gihaebakhae(己亥迫害) in the King Heonjong(憲宗)’s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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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ring the King Jeongjo(正祖)~Sunjo(純祖)’s reign, the Geunginamin(近畿南人) acted in the political world were based on their established political justification. Geunginamin of the King Jeongjo’s reign were divided into Chae Je-gong line(...

      During the King Jeongjo(正祖)~Sunjo(純祖)’s reign, the Geunginamin(近畿南人) acted in the political world were based on their established political justification. Geunginamin of the King Jeongjo’s reign were divided into Chae Je-gong line(蔡濟恭系) and Mok Man-jung line(睦萬中系) according to their political interests. Chae Je-gong justified Namin’s political activities that Geunginamin of the King Jeongjo’s reign succeeded the Cheongnam(淸南), not Taknam(濁南) who involved in treason. But Chae Je-gong line tried to gather the Taknam to help reinstatement of Huh Jeok who was removed for treason.
      Mok Man-jung line was excluded from Chae Je-gong line’s list of supporters. Among them, Sacheon Mok’s family(四川睦氏) was further depressed. Because Mok Nae-sun was punished as a Myeonguijoiin(名義罪人). So Mok Man-jung wrote a 「Suonghaengrok(睡翁行錄)」 containing Mok Nae-sun’s achievements and a 「Gajeonggishil(家庭記實)」 containing his direct ancestor’s achievements. He justified his family through this.
      In the King Jeongjo’s reign, Seohak(西學) issue emerged as a political and social issue. Chae Je-gong line was closely connected Seohak. Thus Mok Man-jung line was trying to block the situation from being attacked that it is linked to Chae Je-gong line. When king Sunjo ascended to the throne, Byeokpa(僻派) ousted the Chae Je-gong line linked to Shipa(時派) through a Shinyubakhae(辛酉迫害). Due to this, Chae Je-gong line were removed on suspicion of Sahakjuiin(邪學罪人).
      Mok Man-jung line attempted to establish the justification that was unrelated to Seohak by promoting the work of clarifying Jeonghak(正學). For example, the Munmyojongsa(文廟從祀) movements of Jeong Gu and Jang Hyeon-gwang who scholars of represent Jeonghak, the posthumous conferment of honors of Namin Ahn Jeong-bok who take the lead exclusion of Seohak, the construction of a monument at Dosan Seowon where served Kwon Deuk-gi and Kwon Shi.
      Meanwhile Byeokpa collapsed and Chae Je-gong line promoted a movement to the amnesty movement of Chae Je-gong. But they ostracized Lee Ga-hwan, Lee Seung-hun, Kwon Cheol-shin, Hong Nak-min who were punished for suspicion of Sahakjuiin. As a result, Geunginamin was able to continue political activity based on their political justification established, even when they faced a political crisis again amid the Seohak oppression caused by the Gihaebakhae(己亥迫害) in the King Heonjong(憲宗)’s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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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정조~순조대 근기남인은 그들이 확립한 정치 명분을 바탕으로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정조대 근기남인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蔡濟恭系와 睦萬中系로 분화되었다. 蔡濟恭은 정조대의 근기남인이 과거에 역적 혐의로 처벌된 濁南이 아닌 명분과 의리를 중시한 淸南을 계승하였다고 하며 남인의 정치적 활동을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채제공계는 許積과 같이 역적 혐의로 제거된 탁남계 인물의 복관을 도와 세력을 결집하기도 하였다.
      한편 泗川睦氏 가문은 睦來善의 名義罪人 혐의로 인해 더욱 침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睦萬中은 목내선의 행적을 수록한 「睡翁行錄」과 직계조상들의 행적을 수록한 「家庭記實」을 작성하여 목내선에 대한 혐의가 무함인 것을 증명하고 탁남으로 규정되어 있던 자신의 가문을 청남에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정조 후반, 채제공계는 西學을 가까이 하여 정치적 위기를 겪었는데, 순조 초의 僻派는 辛酉迫害를 통해 時派 및 채제공계 남인을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채제공의 관작이 추탈되고 채제공계는 邪學罪人 혐의를 받고 제거되었다. 목만중계는 正學을 대표하는 남인 학자인 정구․장현광 文廟從祀운동, 斥邪에 앞장선 남인 학자인 安鼎福 추숭, 權得己와 權諰를 배향한 道山書院의 사적비 건립 활동 등을 통해 정학을 밝히는 작업을 추진하여 서학과는 무관하다는 명분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벽파가 몰락한 뒤 채제공계는 채제공의 복관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사학죄인 혐의를 받고 처벌된 李家煥․李承薰․權哲身․洪樂敏 등에 대해서는 외면하였고, 목만중계 역시 그들을 외면하였다. 이가환 등을 옹호할 경우 사학죄인 혐의에 연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조~순조대에 근기남인은 서학과 무관하다는 정치 명분을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헌종대의 己亥迫害 속에서도 정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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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순조대 근기남인은 그들이 확립한 정치 명분을 바탕으로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정조대 근기남인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蔡濟恭系와 睦萬中系로 분화되었다. 蔡濟恭은 정조대의 근...

      정조~순조대 근기남인은 그들이 확립한 정치 명분을 바탕으로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정조대 근기남인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蔡濟恭系와 睦萬中系로 분화되었다. 蔡濟恭은 정조대의 근기남인이 과거에 역적 혐의로 처벌된 濁南이 아닌 명분과 의리를 중시한 淸南을 계승하였다고 하며 남인의 정치적 활동을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채제공계는 許積과 같이 역적 혐의로 제거된 탁남계 인물의 복관을 도와 세력을 결집하기도 하였다.
      한편 泗川睦氏 가문은 睦來善의 名義罪人 혐의로 인해 더욱 침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睦萬中은 목내선의 행적을 수록한 「睡翁行錄」과 직계조상들의 행적을 수록한 「家庭記實」을 작성하여 목내선에 대한 혐의가 무함인 것을 증명하고 탁남으로 규정되어 있던 자신의 가문을 청남에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정조 후반, 채제공계는 西學을 가까이 하여 정치적 위기를 겪었는데, 순조 초의 僻派는 辛酉迫害를 통해 時派 및 채제공계 남인을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채제공의 관작이 추탈되고 채제공계는 邪學罪人 혐의를 받고 제거되었다. 목만중계는 正學을 대표하는 남인 학자인 정구․장현광 文廟從祀운동, 斥邪에 앞장선 남인 학자인 安鼎福 추숭, 權得己와 權諰를 배향한 道山書院의 사적비 건립 활동 등을 통해 정학을 밝히는 작업을 추진하여 서학과는 무관하다는 명분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벽파가 몰락한 뒤 채제공계는 채제공의 복관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사학죄인 혐의를 받고 처벌된 李家煥․李承薰․權哲身․洪樂敏 등에 대해서는 외면하였고, 목만중계 역시 그들을 외면하였다. 이가환 등을 옹호할 경우 사학죄인 혐의에 연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조~순조대에 근기남인은 서학과 무관하다는 정치 명분을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헌종대의 己亥迫害 속에서도 정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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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茶山詩文集"

      2 崔奭祐,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李承薰의 교회 활동" 8 : 1992

      3 김정자, "특집 : 순조대 정국의 동향과 시전정책의 추이" 한국역사연구회 (94) : 285-319, 2014

      4 유봉학,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신구문화사 1998

      5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정치사 1800~1863 上․下" 청년사 1990

      6 차기진,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7 유봉학, "정조대왕의 꿈-개혁과 갈등의 시대" 신구문화사 2001

      8 허태용, "정조대 후반 탕평정국과 진산사건의 성격" 한국고전번역원 35 (35): 235-268, 2010

      9 최성환, "정조대 탕평정국의 군신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9

      10 김성우, "정조 대 영남 남인의 중앙 정계 진출과 좌절" 재단법인다산학술문화재단 (21) : 183-210, 2012

      1 "茶山詩文集"

      2 崔奭祐,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李承薰의 교회 활동" 8 : 1992

      3 김정자, "특집 : 순조대 정국의 동향과 시전정책의 추이" 한국역사연구회 (94) : 285-319, 2014

      4 유봉학,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신구문화사 1998

      5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정치사 1800~1863 上․下" 청년사 1990

      6 차기진,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7 유봉학, "정조대왕의 꿈-개혁과 갈등의 시대" 신구문화사 2001

      8 허태용, "정조대 후반 탕평정국과 진산사건의 성격" 한국고전번역원 35 (35): 235-268, 2010

      9 최성환, "정조대 탕평정국의 군신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9

      10 김성우, "정조 대 영남 남인의 중앙 정계 진출과 좌절" 재단법인다산학술문화재단 (21) : 183-210, 2012

      11 김진호, "정조 15년(1791) '장서사건'과 채제공" 서강대학교 대학원 2002

      12 신항수, "이익의 당대사 해석과 청남 개념의 정립" 역사실학회 (56) : 233-254, 2015

      13 한기범, "우암 송시열에 대한 후대인의 추숭과 평가" 한국사상문화학회 (42) : 121-171, 2008

      14 박광용, "영·정조대 탕평책의 추이와 성격 : 峻論蕩平으로의 이행과 南人淸論의 대두" 서울대학교 대학원 1983

      15 최성환, "순조대 전반기 정국 변동과 의리론의 추이" 한국사연구회 (180) : 113-154, 2018

      16 김정자, "순조 전반기 정국의 동향과 李審度 獄事의 전말- 親鞫日記 와 推案及鞫案 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회 (89) : 187-224, 2019

      17 "餘窩集"

      18 "闢衛編"

      19 趙 珖, "辛酉迫害의 性格" 13 : 1978

      20 鄭奭鍾, "純祖年間의 政局變化와 茶山解配運動" 47 : 1993

      21 임혜련, "純祖 初期 貞純王后의 垂簾聽政과 政局變化" 15 : 2000

      22 "立齋集"

      23 "海左集"

      24 薛錫圭, "正祖의 政治運營論" 1 : 1992

      25 박성순, "正祖의 宋時烈 顯彰과 王權 强化論" 한국사연구회 (141) : 197-218, 2008

      26 김정자, "正祖代 前半期의 政局動向과 政治勢力의 變化(Ⅱ) -頤齋亂藁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회 (78) : 125-170, 2016

      27 김정자, "正祖代 前半期의 政局動向과 政治勢力의 變化(Ⅰ)" 한국학연구소 37 : 293-324, 2012

      28 "樊巖集"

      29 백승호, "樊巖 蔡濟恭의 詩社 활동과 그 정치적 활용" 우리한문학회 26 : 101-127, 2012

      30 趙 珖, "樊巖 蔡濟恭의 西學觀 硏究" 17 : 1973

      31 백승호, "樊巖 蔡濟恭의 文字政治" 진단학회 (101) : 359-390, 2006

      32 申恒秀, "李瀷(1681-1763)의 經․史解釋과 現實認識" 고려대학교 2002

      33 하성래, "李家煥과 西學과의 관계" 35 : 2001

      34 "朝鮮王朝實錄"

      35 薛錫圭, "朝鮮時代 儒生의 文廟從祀 運動과 그 性格" 3 : 1994

      36 朴光用, "朝鮮後記 「蕩平」 硏究" 서울대학교 1994

      37 金成潤, "朝鮮後期 蕩平政治 硏究" 지식산업사 1997

      38 趙 珖,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8

      39 金玉姬, "曠菴 李蘗의 西學思想" 가톨릭출판사 1979

      40 "晉州姜氏通溪公派譜"

      41 "星湖全集"

      42 "日省錄"

      43 "承政院日記"

      44 "戰兢錄"

      45 "性齋集"

      46 李樹健,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一潮閣 1995

      47 "安東權氏參議公派譜"

      48 "南譜"

      49 차기진, "丁若鐘의 교회 활동과 신앙" 15 : 2000

      50 신채용, "『星湖全集』 墓道文字를 통해서 본 李瀷의 南人義理" 조선시대사학회 (80) : 205-255, 2017

      51 유봉학, "18세기 南人 분열과 畿湖南人 學統의 성립-『桐巢娩錄』을 중심으로-" 1 : 1983

      52 백승호, "18세기 南人 文壇의 詩會-蔡濟恭․睦萬中을 중심으로-" 29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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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1999-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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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7 0.87 0.9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98 2.253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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