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진경산수화는 1980년대 이래로 우리나라 실경산수화 연구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였다. 1990년대 들어 학계에서는 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조선 고유색(固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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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진경산수화는 1980년대 이래로 우리나라 실경산수화 연구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였다. 1990년대 들어 학계에서는 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조선 고유색(固有...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진경산수화는 1980년대 이래로 우리나라 실경산수화 연구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였다. 1990년대 들어 학계에서는 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조선 고유색(固有色)을 강조하였던 정선 회화의 연구 방법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며 일국주의(一國主義)를 넘어 보다 넓은 시야와 실증적인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의의 과정에서 조선에 유입된 명말(明末) 문예사조와 정선의 금강산도 사이의 관계가 본격적인 학술적 논제로서 주목받기시작하였다. 『해내기관(海內奇觀)』, 『명산도(名山圖)』, 『태평산수도(太平山水圖)』 등 중국의 산수판화는 정선의 진경산수화, 특히 금강산도를 이해하는 직접적인비교 대상으로서 제시되었다. 시각적 유사성을 근간으로 하는 산수판화론은 학계에서 상당한 동의를 얻었으며 중국에서 유입된 문예사조는 정선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고려 사항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밀하게 살펴보면 정선의 금강산도에반영된 산수판화의 흔적은 제한적이며 직접적인 관계를 실체화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간 산수판화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였던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정선 회화가 형성되는 또 하나의 원류로 거론되었던 것은 조선의 실경산수화 전통이다. 본 연구는 17세기로 소급하여 더욱 긴 역사적 시점으로 실경산수화의 역사 속에서 정선의 금강산도의 등장을 살펴보았다. 17세기 전반까지 실경산수화는 대체로 전도식(全圖式)의 화면 구성에 절파(浙派) 화풍을 근간으로 삼아제작되었다. 반면에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북관수창록》(1664년)과 《곡운구곡도》 (1682년)는 이전 시기와는 뚜렷하게 차별화된 화풍을 선보였다. 함경도의 명산인 칠보산 유람을 계기로 제작된 《북관수창록》은 산수판화의 하나인 『해내기관』이 보여주는 실경 묘사방식에 충실한 그림이다. 반면에 《곡운구곡도》는 산수를 거울에 비추듯이 그려 매우 높은 기록성을 보이는 그림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실경산수화법의 등장 이면에는 일단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부감법(俯瞰法)과 총도식(總 圖式) 실경산수화에 대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실경산수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상황이 있었다. 그들은 실제 산수의 변화무상한 면면을 포착하지 못하는 조선의 관성화된 실경산수화를 반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진부한 화풍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화가가 승경(勝景)을 유람하고 자신의 시각적 관찰에 의거하여 경관을 진실하게 묘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북관수창록》과 《곡운구곡도》 는 새로운 실경산수화를 모색하였던 일련의 회화 담론과 그 실천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17세기를 통과하며 진행된 회화적 모색은 18세기 초 진경산수화라는 독창적인 예술적 성취를 견인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선의 금강산도는 이전 시대 실경산수화의 단순한 답습이 아니었다. 그의 금강산도에는 전통에서 취사선택된다종다양한 회화적 표현법과 새로운 요소들이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다. 정선이 구사하는 표현의 다층적인 면모는 그의 금강산도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정선회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 자연의 조화에 감응하고 그 감동을 생생하게 표출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17세기를 관통하여 꾸준히 변화를 모색해온 조선의 실경산수화가 이르고자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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