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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천남생 묘지」에 보이는 將軍과 7세기 고구려의 군사 운용 = A Study on Janggun and Military Management of Goguryeo in the 7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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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15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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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purposes of this study were to investigate the meanings of Janggun(將軍) in "Cheonnamsaeng Epitaph(泉男生 墓誌)" and promote the understanding of Janggun and military management of Goguryeo in the 7th century. There are Janggun and Samgundaejanggun(三軍大將軍) in the Epitaph, and they were commanders of field army during wartime, in which the field army was organized based on the standing army by adding temporary requisition soldiers and was commissioned to exercise military authority from the king. Daejanggun(大模達) was Taedaehyeong(太大兄) or higher, and Janggun was Jouidudaehyeong(皂衣頭大兄) or higher in principle. Daemodal refers to military officers of Jouidudaehyeong or higher and was used to call a general during a war. Yoksal(褥薩) was a minister of the highest administrative unit and also served as the military officer of the highest rank in the military organization under the unit. Officers of Jouidudaehyeong or higher were appointed as Yoksal, which means that Yoksal was called Daemodal on the duties of military officer. It is estimated that Yoksals served as generals during a war in many cases. The findings indicate that the military management of Goguryeo in the 7th century tried to achieve the compatibility of wartime military mobilization based on the usual military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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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s of this study were to investigate the meanings of Janggun(將軍) in "Cheonnamsaeng Epitaph(泉男生 墓誌)" and promote the understanding of Janggun and military management of Goguryeo in the 7th century. There are Janggun and Samgunda...

      The purposes of this study were to investigate the meanings of Janggun(將軍) in "Cheonnamsaeng Epitaph(泉男生 墓誌)" and promote the understanding of Janggun and military management of Goguryeo in the 7th century. There are Janggun and Samgundaejanggun(三軍大將軍) in the Epitaph, and they were commanders of field army during wartime, in which the field army was organized based on the standing army by adding temporary requisition soldiers and was commissioned to exercise military authority from the king. Daejanggun(大模達) was Taedaehyeong(太大兄) or higher, and Janggun was Jouidudaehyeong(皂衣頭大兄) or higher in principle. Daemodal refers to military officers of Jouidudaehyeong or higher and was used to call a general during a war. Yoksal(褥薩) was a minister of the highest administrative unit and also served as the military officer of the highest rank in the military organization under the unit. Officers of Jouidudaehyeong or higher were appointed as Yoksal, which means that Yoksal was called Daemodal on the duties of military officer. It is estimated that Yoksals served as generals during a war in many cases. The findings indicate that the military management of Goguryeo in the 7th century tried to achieve the compatibility of wartime military mobilization based on the usual military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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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천남생 묘지」에 보이는 장군의 의미를 밝히고, 이를 중심으로 7세기 고구려의 군사 운용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천남생 묘지」에는 장군‧삼군대장군이 보이는데, 이는 전시의 야전군 사령관이었다. 전시의 야전군은 상비군을 바탕으로 임시적인 징발병을 더하여 편성하였는데, 장군은 국왕으로부터 그 군사권을 위임받았다. 대장군은 太大兄 이상, 장군은 皁衣頭大兄 이상의 관등소지자를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대장군이 총사령관으로 복수의 부대를 지휘한 경우 예하의 부대에 장군을 임명하였다. 大模達은 조의두대형 이상 무관에 대한 범칭이었다. 따라서 전시의 장군도 대모달이라고 칭하였다. 褥薩은 최상급 행정단위의 장관이었지만 예하 군사조직의 최고위 무관직을 겸하기도 하였고, 대모달과 마찬가지로 조의두대형 이상이 취임하였다. 그러므로 욕살도 무관의 임무를 수행할 때는 대모달을 칭하였고, 그들이 전시의 장군을 맡는 사례가 많았다. 이처럼 7세기 고구려에서는 평시의 군사조직을 바탕으로 전시에 동원된 군사를 통합하여 야전군을 편성하였는데, 그 사령관인 장군은 평시의 관등‧관직에 기초하여 운용되었고, 이로써 평시와 전시의 군사조직이 호환성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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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천남생 묘지」에 보이는 장군의 의미를 밝히고, 이를 중심으로 7세기 고구려의 군사 운용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천남생 묘지」에는 장군‧삼군대장군이 보이는데, 이는 전시...

      본고는 「천남생 묘지」에 보이는 장군의 의미를 밝히고, 이를 중심으로 7세기 고구려의 군사 운용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천남생 묘지」에는 장군‧삼군대장군이 보이는데, 이는 전시의 야전군 사령관이었다. 전시의 야전군은 상비군을 바탕으로 임시적인 징발병을 더하여 편성하였는데, 장군은 국왕으로부터 그 군사권을 위임받았다. 대장군은 太大兄 이상, 장군은 皁衣頭大兄 이상의 관등소지자를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대장군이 총사령관으로 복수의 부대를 지휘한 경우 예하의 부대에 장군을 임명하였다. 大模達은 조의두대형 이상 무관에 대한 범칭이었다. 따라서 전시의 장군도 대모달이라고 칭하였다. 褥薩은 최상급 행정단위의 장관이었지만 예하 군사조직의 최고위 무관직을 겸하기도 하였고, 대모달과 마찬가지로 조의두대형 이상이 취임하였다. 그러므로 욕살도 무관의 임무를 수행할 때는 대모달을 칭하였고, 그들이 전시의 장군을 맡는 사례가 많았다. 이처럼 7세기 고구려에서는 평시의 군사조직을 바탕으로 전시에 동원된 군사를 통합하여 야전군을 편성하였는데, 그 사령관인 장군은 평시의 관등‧관직에 기초하여 운용되었고, 이로써 평시와 전시의 군사조직이 호환성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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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 1" 풀빛 1995

      2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1-고대Ⅰ-" 육군본부 2012

      3 윤용구, "중국 출토의 한국고대 유민자료 몇 가지" 한국고대사학회 32 : 293-326, 2003

      4 임대희, "세미나 수당오대사" 서경 2005

      5 노태돈, "단군과 고조선사 연구" 사계절 2000

      6 국립중앙박물관, "금석문자료 1-삼국시대" 예맥 2010

      7 김현숙, "고구려의 영역 지배 방식 연구" 모시는 사람들 2005

      8 김종수, "고구려의 軍制와 그 承繼" 역사교육연구회 (96) : 95-127, 2005

      9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10 문병우, "고구려군사제도의 특징" (1) : 1988

      1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 1" 풀빛 1995

      2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1-고대Ⅰ-" 육군본부 2012

      3 윤용구, "중국 출토의 한국고대 유민자료 몇 가지" 한국고대사학회 32 : 293-326, 2003

      4 임대희, "세미나 수당오대사" 서경 2005

      5 노태돈, "단군과 고조선사 연구" 사계절 2000

      6 국립중앙박물관, "금석문자료 1-삼국시대" 예맥 2010

      7 김현숙, "고구려의 영역 지배 방식 연구" 모시는 사람들 2005

      8 김종수, "고구려의 軍制와 그 承繼" 역사교육연구회 (96) : 95-12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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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이문기, "고구려 중리제의 구조와 그 변화" 대구사학회 71 : 75-13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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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황병선, "고구려 무관직의 등급과 임무" (3)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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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末松保和, "高句麗と朝鮮古代史" 吉川弘文館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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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陳忠凱, "碑林集刊"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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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內藤虎次郞, "內藤湖南全集 7" 筑摩書房 1970

      30 이문기, "7세기 高句麗의 軍事編制와 運用" 고구려발해학회 27 : 161-18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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